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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
1.프롤로그
밝은 달이 보인다.
이윽고 엷은 바람이 찰랑이면 하늘 위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달빛.
비로소 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임이 드러난다.
화면, 초조하게 흔들리는 달을 잠시 동안 바라보는데…….
순간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화면 안으로 확! 떨어져 들어오는 한 여인의 얼굴!
산산이 조각나 버린 달빛을 뒤로 한 채 서서히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여인.
작은 봇짐 하나를 품에 꼭 안고는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인의 창백한 얼굴…….
<FLASH BACK>
누군가에게 쫓겨 허억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의 힘을 다해 숲 속을 내달리는 여인.
사방을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온 몸을 긁어대지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필사의 힘을 다해 끝까지 내달리다가 한순간 우뚝, 제자리에 멈추어 서는 여인.
산의 가장 끝자락, 절벽에 당도해버린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을 감싸고 있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절망한 듯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여인.
탕!
한순간 울려 퍼지는 총성.
<다시 고요한 물 속>
여인의 곱고 하얀 얼굴 어디에선가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오기 시작하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여인을 지나 붉은 기운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부상하면…….
톡, 톡……. 수면에 떨어지고 있는 붉은 빗방울.
붉게 물들어버린 바다 위의 비.
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피와 붉은 비가 얽혀 서서히 글자가 되어간다.
혈(血)의 누(淚)
2.섬 내 포구
거대한 수송선이 정박해 있는 바닷가 포구.
수십 명의 선원들이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지물들을 분주히 나르고 있다.
힘을 북돋는 흥겨운 소리를 흥얼대며 가지런히 열 맞춰 배 안으로 짐을 옮기는 선원들.
포구에 면한 주막에서는 아낙네들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누군가 검은 돼지 한 마리를 몰고 내려오고 그 뒤를 아이들이 따른다.
아낙네들은 자기 자식을 불러 몰래 입 속에 음식을 넣어 주기도 한다.
힘차게 짐을 옮기고 있는 다른 선원들과 달리 낑낑대며 나무함을 나르고 있는 차 선원과 정 선원. 아이들이 주변에서 얼쩡대자 훠이훠이 내쫒으며 간신히 배 쪽으로 다가간다.
포구 한 쪽에 서서 간간히 뭐라 뭐라 외치며 선적을 통솔하고 있는 선부장(船夫長, 40대 초반).
전부터 휘청거리며 지물을 옮기던 차선원이 비틀거리다가 다른 선원과 부딪혀 물에 곤두박질친다.
선원들이 몰려들어 물에 빠진 차 선원을 끌어 올린다.
어느새 나타난 40대 초반의 객주 조달령이 다짜고짜 물에 빠졌던 차 선원을 때리기 시작한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매질을 가하다가 물로 차 넣어버린다.
그 무서운 기세에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한다.
조달령
네 놈들 몸뚱이보다 귀한 지물이야. 저 놈의 품삯을 압류하고 (선부장에게) 모자라면 네 놈이 갚아라.
그때, 조달령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귓속말로 뭔가를 아뢰는 조달령의 하인.
수건으로 손을 닦는 조달령. 주막에서는 돼지 잡는 소리가 들린다.
3.당산나무 언덕
주민들의 활기찬 움직임으로 분주한 당산나무 언덕 위.
기이한 모양의 당산나무 주변에는 차일과 장막이 쳐져있고,
당산나무 아래의 장막 안에서 만신의 축문 소리가 들린다.
만신(E)
두루 흠향하사옵고,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모든 손길들이 건강하고 복 들이게 하시며, 금일 제배한 이들은 춘하추동 절기를 평안으로 지내게 하시며, 모든 수액을 막아 주옵소서. 좋은 일 많이 나고 무병장수하게 도와주시고 농사꾼은 풍년들고 제지소도 번창하며 어민들은 풍어하여 낙줄 없기를 비나이다.
장막의 입구에 대기하던 하인이 조달령에게 종이옷을 건네고 입는 것을 거든다.
종이옷을 입던 조달령이 가위를 들고 종이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고 있는 두호(20대 중반)를
본다. 능숙하게 종이를 오려 지전을 만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표정 없는 얼굴로 조달령을 빤히 보는 두호.
못마땅한 얼굴이 된 조달령이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만신은 제단 앞에서 축문을 드리고
몇 명의 마을 대표들이 제단을 향해 엎드려 있다.
만신
특별히 제지품을 위해 기일을 잡아 올리는 만큼 풍파 광풍 일지 않아 비단바다로 배를 인도하여 섬을 평온케 하옵소서.
만신이 축문을 끝내고 절한 후에 일어나면 사람들이 따라 절하고 일어난다.
일어나는 사람들 중에는 깔끔한 외모에 귀티 나는 풍채의 인권이 있다.
만신이 술잔을 들어 사람들에게 돌리면 인권이 받아 음복하고 잔을 조달령에게 건넨다.
인권
(속삭이는) 사라진 선원은 찾았나?
조달령
그게……. 아직…….
인권
(눈길 주지 않고) 제지공법을 캐내려고 선원으로 위장해 들어온 자인지 모른다. 반드시 찾아내 무슨 목적으로 섬에 왔는지, 그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알아내야 할 것이다.
조달령
예.
조달령, 송구한 듯 더욱 머리를 조아리는데.
허 서방(E)
혈우가 내렸다!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당산나무에 걸린 지전들을 거칠게 쓸어버리는 허 서방(60대).
허 서방
이놈들아 이깟 것들 올린다구 니들이 피할 수 있을 거 같으냐!
허 서방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고 저지하는 허 씨(30대).
허 씨
아이고, 아버지. 왜 또 나와서 난리요! 제발 그만 좀 하시오!
허 서방
(실성한 듯) ..난 봤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두려운 듯 몸을 떤다) 하, 하늘에서 뻘건 피가 쏟아져 내렸다.
허 씨, 어떻게든 아비를 끌어내려 하지만 힘이 부친다.
장막 밖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차갑게 노려보는 조달령과 촌로들.
허 서방
... 천벌이... 천벌이 내릴 것이다! 객주께서 오신다.
달려가 허 서방을 끌어내는 사람들.
언덕 아래로 끌려가면서도 실성한 소리를 고래고래 외치는 허 서방.
허 서방의 소리를 덮어버리듯 악사들의 연주 소리는 커져가고.
4.주막 앞 포구 일각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마을 사람들의 굿 행렬이 장군 기를 앞세우고 마을을 지난다.
깃발이 지나면 악사들과 음식을 짊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가고 그 뒤로 만신과 주민들이 따른다.
포구 입구에서 멈춰서는 행렬.
집에서 상을 들고 나오는 주민들. 상 위에는 초, 쌀, 떡 등이 차려져 있다.
선적이 끝난 수송선과 작은 배들은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갖가지 기로 장식 되어있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오색기를 든 무당은 굿을 시작한다.
길가에 서있던 장학수가 굿을 보고 있던 독기에게 다가간다.
장학수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어떻게 사정 좀 더 봐주쇼.
독기
또 취했냐? (화를 삭이며) 대체 이게 몇 번째냐.
(주위를 살피며)우리가 평생 네 놈 입에 돈이나 처바르고 있을 줄 아느냐?
장학수
이거 왜 이러슈.
내, 요... 세치 혀에 형님들 목숨이 오락가락 한다는 거 잊으셨소? (다시 실실거리며) 간간히 엽전 몇 푼으로 막아주면 되는 걸 가지고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마슈.
독기
(잠시 장학수를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굿이 끝나면 포구로 나와라.
장학수
(헤헤거리며) 형님들 덕에 삽니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주막으로 가는 장학수.
장학수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독기. 행렬을 따르던 조달령이 그런 독기를 보고 있다.
5.섬 내 주막 안 (밤)
차일이 쳐지고 관솔불이 타고 있는 주막의 마당.
평상과 툇마루 등에 거하게 차려진 술과 음식들을 게걸스레 집어먹고 있는 선원들.
주모가 마당에 걸쳐 놓은 솥을 열어 김나는 고기를 꺼내 썬다.
발을 걷으며 선부장이 머리를 내민다.
선부장
(선원들에게) 이성식이 그 새끼 아직도 소식 없냐?
정 선원
언년하고 눈 맞아서 살림이라도 차린 모양이우.
선부장
이 새끼 나타나기만 해봐... 아주 곤죽을 내줄테니까...
(주모에게) 번서는 놈들한테 음식은 좀 가져다줬는가?
주모
(김나는 솥을 열어 삶아진 고기를 꺼내며) 지금 가요.
선부장
조공으로 가는 귀한 물건들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지키라 이르게!
(술 마시는 차 선원을 보고) 이 놈아! 네 놈 품삯은 내 어찌 해 볼 테니 그 인상 좀 펴라. 가뜩이나 뒤숭숭한 마당에…….
장학수, 마당에 앉은 선원들을 밀치고 마루로 성큼 올라선다.
선부장
(장학수를 보더니 짜증이 나서 버럭) 동트면 출항인데 작작 들 좀 마셔라.
장학수
벌써 판 걷었소? 좀 있다 돈 가져오기로 했으니 일단 패 돌리쇼.
선부장
(짜증스럽다) 자넨 굿 구경 안가나?
장학수
그동안 잃은 돈이 얼만데 그냥 가겠소? 내 돈 따고는 곱게 못 갈 테니 그리 아시오.
장학수에게 자리를 내주며 다 잃어서 돈도 없는 놈이 노름하러 왔다고 타박하는 선원들.
장학수는 자기 돈 따먹고 내일 곱게 출항 못한다고 으름장이다.
잃은 돈도 갚지 않고 되레 큰소리라고 받아치는 선원들,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탁주를 찔끔 마시더니 낮의 일로 기죽어 있는 차 선원에게 나지막이 얘기하는 정 선원.
정 선원
(궁시렁) 젠장, 하루 이틀 해본 짓인가…….
우리 몰래 굿 구경이나 갈까?
하는데 꽝! 거칠게 상 위에 접시를 내려놓는 주모.
주모
외지인은 얼씬도 못한다는 거 몰라! 부정이라도 타면 어쩌려고 그래?
(앙칼지게) 네 놈은 내가 밤새 지키고 섰을 테니 그리 알아!
횡- 하니 돌아서서 가버리는 주모를 빙긋이 바라보는 차 선원.
주모가 놓고 간 접시에는 다른 상 보다 훨씬 많은 고기가 담겨있다.
차 선원
(주모를 비릿하게 바라보며) 아서라. 경칠라.
조 객주 그 새끼한테 괜히 잘못 걸리면 아예 어육을 뜰 거다. 개새끼.
주모가 음식을 담은 소쿠리를 이고 술병을 들고 주막을 나선다.
다시 탁주를 한 잔 쭈욱- 들이키는 정 선원.
차 선원이 얼른 일어나 주모를 따라 나선다.
둥둥둥- 대동굿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온다.
6.당산나무 언덕 (밤)
횃불을 들고 장막이 둘러쳐진 언덕으로 오는 주민들의 행렬.
전통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몰려오는 주민들의 그림자가 기묘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인권, 조달령, 주민대표 등의 주요 인사들도 흰색 종이 두루마기를 입고 따라와 중앙에 좌정한다.
주민들 일순간 조용해지고 좌정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난다.
사람들 사이로 김 치성 대감(60대)이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다.
모두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인권
밤이라 하나 유월 염천 삼복중입니다.
대감
개의치 마라. (먼 산에 망연히 눈길을 던지며 담담하게) 저 신록을 눈에 담는 일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데……. (인권을 보며) 축문이라도 올려야지.
촌로
대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심신을 굳건히 하셔서 오래도록 저희들에게 선정을 베푸셔야지요.
대감
(낮지만 서슬 퍼렇게) 이 늙은이의 선정이라니! 이 섬에 춘궁기가 없는 것이 모두 주상전하의 성은임을 모르는가. 나를 주상을 능멸하는 대역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다시 그런 망발을 하다가는…….
촌로
(두려워하며) 소, 송구하옵니다. 대감.
하인 하나가 의자를 가져다 놓으면 힘겹게 앉는 대감.
그 양 옆으로 다시 자리를 잡고 좌정하는 사람들.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반대쪽 장막이 열리며, 젊은 여자 무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입술과 새하얀 얼굴에서 강하고 묘한 기운을 내뿜으며 제단으로 다가가는 무당.
이윽고 제단에 다다르자 주민들, 일순간 조용해진다.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걸쳐있어 기묘하게 보이는 제단에 술을 올리고 앉아
방울을 흔들며 읊조리기 시작하는 무당.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는데 여전히 앉아 있는 무당.
주민들, 고개를 들어 제단을 바라본다.
방울도 멈추고 읊조림도 멈춘 채로 여전히 앉아 있는 무당.
잠시 경건하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시간이 지나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웅크려만 있는 무당. 뭔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바라보는데, ‘으…….’ 뭔지 모를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는 무당.
불안한 기색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번져가고 악사들의 연주도 멈춘다.
인권이 근처에 앉아 있던 의원에게 눈짓을 하면,
잠시 머뭇대다가 무당에게로 다가가는 남 의원. 조심스레 무당의 상태를 살피는데…….
번쩍! 두 눈을 뜨는 무당.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오고 있다.
신음소리와 함께 서서히 분노로 전이되는 무당의 얼굴.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며 분노에 치를 떨더니
획! 고개를 돌리고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주민들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간다.
기겁하는 마을 사람들.
무당
(표독스레 노려보며) 내 몸이 갈가리 찢기는걸 보고도 편히 지내셨소!
몸을 벌벌 떨며 뒷걸음치는 사람들.
대감
(숨이 턱! 막히고) 강 객주!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며 창백하게 굳어버리는 대감의 얼굴.
무당, 한동안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더니 순간, 왈칵!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때, 어디선가 발하는 환한 빛에 얼굴이 노랗게 물드는 대감과 마을 사람들…….
7.주막 안 (밤)
주막 안으로 황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주모.
주모
(악을 쓰는) 큰일 났소!
고개를 돌려 주모를 바라보는 선원들.
귀찮은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고쟁이를 추스르며 내다보는 선부장.
8.포구
급하게 달려오는 선부장과 선원들.
거센 불길에 휩싸여 있는 수송선.
마을 사람들이 안간힘을 써가며 불을 진압하려 하지만,
수송선은 이미 전신이 거의 다 소실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불길 진압에 뛰어드는 선원들.
선부장은 털썩 무릎을 꿇고는 할말을 잃은 채 망연자실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닥치는 대로 물을 퍼붓는 선원들.
차 선원이 물을 퍼붓는데 물동이에서 뭔가 휙 날아간다.
발밑을 살피는 차 선원.
물 위에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죽어있는 물고기 떼!
9.군선 갑판 위 (오후)
원 안으로 보이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는 바다.
서서히 안개를 헤치며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어느 섬의 모습.
그 위로 떠오르는 자막.
< 第 一 日>
자신의 눈에서 천리경(현재의 망원경)을 떼는 관복 차림의 남자, 원규.
심하게 흔들리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군선 앞머리에 서서 총기 어린 눈으로 섬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40대 초반의 장 호방.
장 호방
보기에는 작은 섬에 불과하나 제지업이 번성해, 관내에선 가장 부유한 축에 속하는
곳입니다. 생산된 종이의 대부분은 뭍으로 옮겨져 판매되거나 중국으로 보내집니다만
일년에 두 번, 상공으로 조정에 상당량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불탄 것도 조공으로 올리려던 최상품들입니다. 우리 고을에 할당된 종이 공물은 거의 이 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규
종이를 대량으로 만드는 제지소가 외딴 섬에 세워진 까닭이 뭔가?
장 호방
오래 전부터 닥나무가 좋기로 유명하던 곳입니다.
물과 볕도 좋아 제지소 입지에는 그만이었던 데다가, 제지소를 처음 세운 객주 강승률이라는 자가 제지공법이 세어나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하는데)
우욱! 들려오는 심한 토악질 소리.
돌아보는 원규와 장 호방.
허옇게 뜬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채, 쓰러져 신음하는 최 차사 (40대 후반).
우욱- 바다를 향해 다시 토악질을 해댄다.
곁에서 차사의 등을 두드리는 홍사령.
여기저기 멀미로 나뒹구는 사령들.
다가오는 원규와 장 호방.
간신히 고개를 들고 천으로 입을 훔치는 차사.
장 호방
나으리. 섬에 가까이 왔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또 다시 바다 쪽으로 머리를 박는 차사.
걱정스런 얼굴로 차사와 바다를 바라보는 원규.
작은 섬을 돌아가자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의 모습이 비로소 안개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10.포구 (오후)
검게 탄 수송선의 잔재가 허하게 남아 있는 포구.
간혹 부는 바람이 하늘로 재를 날리며 더욱 스산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포구에 내려서면 조달령을 비롯한 몇 몇 마을 대표가 차사 일행을 영접한다.
조달령
원로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예를 취하는) 객주 조달령이라 합니다.
장 호방
(차사가 부축 받고 나오자) 불탄 조공을 조사하러 오신 차사 최호승 나리시고
원규
군관 이원규라고 하네. 섬에 포구가 또 있나?
조달령
이 곳 외에는 없습니다.
원규
(불탄 수송선을 보며) 방화일지도 모르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이 섬을 나가서는
안 된다. 철저히 통제해라.
홍사령
예!
조달령이 마을 대표들을 소개하는 사이 홍사령과 원규가 사령들을 점검하고 인원을 배치한다.
조달령
(호방을 보고 반갑게) 호방 어른. 그간 별고 없으시고 사또께서도 무고하신지요?
장 호방
(최 차사의 눈치를 살피며) 차사 나리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을 텐데 영접이 이게 뭔가? 자네 치도곤이라도 당하고 싶은가?
조달령
(머리를 조아리고는) 죽을죄를 졌습니다. 차사 나으리.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
11.당산나무 언덕 (오후)
대동 굿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당산나무 주변.
화려했던 굿 때와는 달리 찢겨지고 빛이 바랜 채 흙바닥 위를 나뒹굴고 있는 색지들.
당산나무 앞의 제단이 거적으로 덮여있다. 묶고 있는 새끼줄을 끊고 거적을 열면,
돼지가 통째로 걸쳐있던 자리에 나무에 꽂혀 걸쳐져 있는 끔찍한 주검!
시신의 몸을 뚫고 입으로 삐져나온 나무 끝에 아직도 달려있는 피 묻은 여린 잎이 보인다.
깜짝 놀라는 호방과 다시 구토가 올라오는지 고개를 돌려버리는 차사.
말에서 내려 시신 쪽으로 다가가는 원규.
조달령
(원규를 따라가며) 오늘 아침 초지공들이 발견했습니다.
죽은 자는 제지소에서 일하던 장학수라는 자입니다.
말에서 내려 차사 앞에 서서 공손히 예를 취하는 인권.
장 호방
김치성 영감의 자제분이십니다.
인권
김인권이라 하옵니다. 연이은 흉사에 영접이 바르지 못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최 차사
(말 위에서 간신히 인사를 받는다. 힘겹게 애써 반색하며) 영감께서는 강녕하시오?
인권
예.
최 차사
내 도성 금군 시절에 몇 번 뵌 적이 있소. 대쪽같은 분이시지…….
성상께서 다시 부르실 날이 있을 것이오.
인권
영감께서는 이곳에서 안빈낙도하시는 것을 성은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원규
(여전히 시신을 살피며) 찍힌 부위에서의 출혈이 그리 심하지 않고,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살해된 자를 나무에 꽂은 것으로 보입니다. 방법이 잔인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 같습니다.
원규를 돌아보는 인권.
12. 마을 우물가 (FLASH BACK)
불을 끄다 지친 선부장과 선원들이 몰려와 있는 마을의 우물.
등목을 하고, 물을 마시고, 기진맥진해 쓰러져 자는 선원들도 있다.
한쪽에서 넋 놓고 앉아있던 선부장이 술에 취해 다가오는 장학수를 보더니 달려든다.
선부장
네 놈이야! 네 놈이 배에 불을 지른 거지?
장학수
(켁켁 대며) 귀신 씨나락 까먹구 있네.
선부장
네 놈이 굿 하는 동안 배 근처에서 서성댔잖아! (안절부절 서있는 선원1을 보며) 맞지?
장학수
참외밭 지나가면 다 서리꾼이냐?
선부장
이 놈이 그래도!
하며 냅다 주먹을 날리는 선부장.
퍽, 나가떨어지는 장학수.
선부장과 선원 몇몇이 엎어져 있는 장학수에게 달려들려는데.
인권(E)
멈춰라!
일순간 행동을 멈추는 선부장과 선원들.
선원들, 인권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인권
자네가 보았나?
선부장
(여전히 씩씩대며) 예……?
인권
이 자가 불을 지르는 것을 봤냐는 말이다.
선부장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자가 자기 돈 따고는 곱게 출항하지 못할 거라고 협박을…….
인권
(말을 자르며) 조정에 올릴 금쪽같은 지물들이 배와 함께 모두 불타버렸다.
배의 책임자는 선부장이니, 네 놈 죄도 크지 않느냐.
선부장
(할 말이 없고)......
인권
자중하지 않고 또 다시 소란을 피운다면 그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선부장
(마지못해) 예, 나으리…….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인권.
분한 듯 장학수를 노려보는 선부장.
선부장
내 손으로 네 놈 숨구멍을 막아버릴 테니, 몸조심해라!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스윽 훔치더니 씩- 비웃듯 미소 짓는 장학수.
13.차사 처소 마당 (오후)
잔득 겁에 질린 눈으로 차사와 인권을 번갈아 바라보는 선부장.
선부장
(오열하는) 배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제가 사람을 죽였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요. 나으리!
차사, 멀미 때문에 앉아 있기도 힘든 듯 관심이 없는데.
원규
나으리.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될 것이 뻔한 상황인데 시신을 유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좀 더 수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선부장
맞습니다, 나으리! 제가 죽였다면, 왜 시체를 그냥 두었겠습니까!
원규
그리고 어쩌면 살인과 조공의 방화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피살자를 검시하겠습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인권.
14.당산나무 언덕 앞 (오후)
화면 가득 보이는 무원록의 시형도 몸의 각 부위를 표시해 놓은 인체 모형도.
시형도에는 앞면 쉰다섯 곳, 뒷면 스물 여섯 곳 등 모두 일흔 아홉 곳에 각 부분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
안경을 쓰고 무원록을 바라보는 원규,
상 위엔 김이 펄펄 오르는 조협수(소독제)가 사발에 담겨 있고,
망치, 물그릇, 소금, 식초, 밥, 술, 닭 등 응용법물(검시 도구)과 황종척(검험에 사용되는 자)이
놓여있다.
원규, 무원록을 덮는데 남 의원, 화첩을 손에 든 두호, 또 다른 두 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온다.
장 호방
의원 남 가 입니다.
그리고 제지소에서 염료 일을 하는 두호라 하온데, 검시화를 그릴 것입니다.
원규에게 예를 취하는 의원과 두호, 두 사람(오작, 항인).
남 의원
(오작과 항인을 가리키고) 이 자들이 시장을 작성할 것입니다.
원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럼 시작하게.
면을 조협수에 담갔다가 시체를 닦기 시작하는 오작.
항인은 황종척으로 시신의 죽창 찔린 부위 등을 재며 시장(검시기록)을 작성해 나간다.
두호는 종이에 시신의 상태를 세밀히 그리고
시형도를 토대로 시체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원규와 남 의원.
원규
피살자는 어떤 자였나?
장 호방(E)
장학수라는 자로 그 처가 병이 들어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오랜 병에 지극 정성으로
처를 구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하지만 그 처가 죽고 나서는 사람이
아주 달라져 하라는 일은 게을리 하면서 매일 투전판이나 기웃거리고 술에 취해 살아가던 자였습니다. 대동 굿을 하던 날도 선원들과 어울려 투전을 했다고 합니다.
오작과 항인이 항아리 속에 면을 넣어 술과 초로 적시더니 시신의 온 몸에 바른다.
시신의 몸 위에 천을 덮고는 다시 그 위에 면을 짜내 술과 초를 적시는 오작과 항인.
의원이 시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자, 원규가 탁자 위의 은비녀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종이를 뭉쳐 입 안으로 쑤셔 넣는 오작.
원규
피살자를 마지막으로 본 자가 누군지는 수소문해 보았나?
장 호방
예, 집에도 가지 않은 것 같고 선부장과 다툰 이후 만났다는 자가 없습니다.
잠시 후, 종이를 빼내고는 은비녀를 입에서 꺼내는 원규.
보면, 시커멓게 변해 있는 은비녀!
원규의 눈빛이 반짝인다.
15.차사 처소 마당 (오후)
무관심한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는 차사.
마당에는 선부장이 무릎이 꿇린 채 앉아있고, 그 곁으로 선원들이 서 있다.
다른 한 쪽에 하인과 자리하고 있는 인권.
그 뒤로 사령들과 남 의원, 오작, 항인, 두호가 보인다.
원규
(선부장에게) 어젯밤 뭘 했나?
선부장
심기가 불편해 선원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정말입니다, 나으리!
원규
(선원들에게) 사실인가?
차 선원
예! 나으리.
술자리를 파하고 선부장께서 잠이 든 시간이, 묘시는 족히 될 겁니다.
원규
시체의 시반과 경직상태로 보아 범인은 어제 밤 자시와 축시 사이에 장학수를 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하는 최 차사.
원규
시신에서는 나무에 꽂힌 자리 외엔 다른 상흔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비녀를 입에 넣어봤는데…….
최 차사
독살이란 말인가?
원규
그렇습니다. 조사해 보니 약방에서 쌍란국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남 의원
예. 신경통과 냉증에 효험이 있어 약재로 쓰고 있습니다. 3년 전 뭍에서 들여왔습니다.
원규
(차사를 바라보며) 쌍란국의 뿌리는 독성이 강해 독화살의 재료로도 쓰입니다.
(돌아보며) 어젯밤 자시 이후에 뭘 했나?
포승줄에 묶인 채 마당에 꿇어앉아 있는 독기.
씩씩대며 원규와 차사를 노려본다.
독기
집에서 잤소!
원규
며칠 전, 약방에서 쌍란국을 얻어갔다고 들었는데.
독기
신경통이 도져서 구했던 거요!
원규
달포는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던데……. 그럼 남은 약초는 어디 있나?
독기
그… 그건…….
원규
(말을 자르며) 약초가 남아있을 수가 없지. (단호하게) 너는 지난 밤 장학수를 독살했고
독기
(낭패라는 듯,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원규
사인을 속이기 위해 주검에 창을 꽂았다!
독기, 창에 꽂혔다는 말에 눈이 커다랗게 되는데.
최 차사
살인자는 감영으로 이송할 것이다. 선부장은 들어라!
네가 살인의 혐의는 벗었으되 조공을 잘못 관리한 책임은 면치 못할 것이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법에 따라 죄를 물을 것이니 이 섬을 한 발짝도 나가선 안 될 것이다.
선부장을 일으켜 세우는 선원들.
뭔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사령들에게 끌려 나가는 독기의 모습.
16. 차사 처소 안 (저녁)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원규와 최 차사 그리고 인권.
최 차사
영감께서 병중이시라니……. 허허, 이거 오랜만에 문안 좀 여쭐랬더니……. 그래 내 이름은 기억한다 하시던가?
인권
예. 차사께서 홍문관 박사로 있는 매제의 승품에 관한 일로 청을 넣으신 적이 있다며…….
최 차사
(당황해 헛기침하며) 허험... 청은 무슨... 어린 나이에 옥당 생활을 하는 매제를 영감께서 아비처럼 보살펴 주신다기에 고마워서... 허험... 아무튼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인권
차도가 있으시면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규에게) 여독도 풀리기 전에 사건을 해결하셨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분이 곁에 있으니
차사 나으리께서는 든든하시겠습니다.
원규
다 차사 나으리 덕입니다.
최 차사
공치사 할 거 없네. 그게 왜 내 덕인가.
(인권에게) 이 군관의 선친께서는 관직이 도총관에 이르신 이지상 대감일세.
과연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라 할만하지 않은가.
인권
(놀라는 듯) 아, 그렇습니까? 대감마님의 자제분을 뵙게 되다니……. 아마 이 고도에서조차 대감마님의 높으신 명성을 모르는 자가 없을 겁니다. 어떤 분이신지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원규
(빙긋 웃고) 제게는 참 엄하신 분이었습니다. 외지에 오래 계셔서 떨어져 지낸 날이 많았는데도 혼나지 않은 날이 없는 듯싶습니다. 그래서 오실 날만 되면 겁을 먹고 밖으로 슬슬 피해 다니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최 차사
(껄껄 웃다가) 자네 뭘 그리 잘못했길래 오랜만에 만난 어린자식에게 야단만 치셨단 말인가?
원규
그런 게 아니라 가끔씩 집에 오실 때마다 문제를 하나씩 내주시곤 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려운데 답이 틀려도 야단이고 설명을 못해도 벼락이 떨어지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밖에요.
인권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공부를 게을리 할 것을 경계하신 깊은 뜻이셨겠지요.
그런데 그 문제…… 제게도 한 번 내보시겠습니까?
원규
(잠시 생각하더니 빙긋 웃으며) 그럼 한번 풀어 보시겠습니까?
한번은 이런 문제를 주셨습니다.
지름이 60보인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 모양의 밭이 있습니다.
이 밭은 세 평방 보에서 수확되는 보리의 양이 30되인데,
아홉 명의 소작농이 1년 동안 일 해 나온 보리의 8할을 그 지주가 갖게 됩니다.
어느 해에 흉년이 져 이 밭의 3할에서만 수확이 되었다면,
지주가 가져 갈 보리는 몇 섬입니까?
최 차사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혀를 찬다) 복잡도 하군.
인권
(빙긋 웃으며) 서른 네 섬이 아닙니까?
원규
정현수와 분율을 이용해 셈을 하면 그리 답이 나오나,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아니었습니다.
최 차사
그럼, 자네는 답을 맞추었나?
원규
예.
인권
(고개를 갸웃하며) 저는 통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명석함으로 배에 불을 지른 자도 조속히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최 차사
(원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 차사)
17.당산나무 언덕 (오전)
멀리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당산나무 언덕 위.
그 위로 떠오르는 자막.
<第 二 日>
당산나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원규와 인권 그 뒤에 서 있는 호방.
두 사람은 어제 만남으로 인해 상당히 친숙해진 듯 하다.
홍사령은 이들 뒤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다.
원규
굿에는 참석하셨습니까?
인권
예. (원규를 보고 빙긋 웃는다)
원규
(손을 내저으며)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굿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 뿐입니다.
인권
(미소를 지으며) 아닙니다. 오해라니요. 당연히 물으셔야지요.
대동굿은 일년에 한 번 제지소의 번창을 빌고 초지공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축제입니다. 더구나 올해는 제가 주관했습니다.
원규
제지소의 주인은 영감이 아니십니까?
인권
해마다 영감께서 섬에 오시어 제지소의 운영을 살피고 제를 직접 주관 하셨지만 올해부터는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연치 높으신 데다 요즘 들어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하시어 제지소의
운영도 객주 조달령과 저에게 맡겨두고 계십니다.
원규
(잠시 돌무덤을 바라보더니) 그렇군요. 대동 굿을 할 때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인권
혼이 씌운 무당이 피를 토하고 실신을 했습니다.
원규
사람들이 많이 놀랐겠습니다.
인권
예. 거기다 조공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물고기까지 떼죽음을 했으니 많이들 동요하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원규.
원규
(호방에게) 포구로 내려가 보세.
그 날 포구에서 배를 지키고 있던 자들을 불러라.
홍사령
예.
인권
더 물으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원규
불탄 배를 보러 가는데 같이 안 가시겠습니까.
인권
제가 본다고 뭘 알겠습니까? (목례를 하고 급히 말을 타는 인권)
이상하다는 듯 인권을 바라보는 원규.
18.포구 (오전)
포구 주변에 끌어올려져 있는 수송선의 잔해 위에서 자세를 낮추고 이것저것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는 원규. 배 아래에는 호방과 선원들 몇 명이 서 있고 주모도 불려나와 있다.
원규
(잔해를 조사하며) 조 객주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그 원념(怨念)으로 불을 지른 것 아닌가.
떠보듯이 묻는 말에 차 선원은 혼비백산한다.
차 선원
아닙니다요. 나으리. 저는 주막에서…….
주모
이 자는 저희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요. 제가 꼼짝 못하게 지키고 있었는데요.
원규
(일어나 주모를 보며) 자넨 음식을 갖다 주러 나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주모
예. 제가 음식을 갖고 나왔고 그러니까…….
원규
자네가 이 자와 함께 있었다?
주모
예. (얼굴이 빨개져서)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팔꿈치로 차 선원을 툭툭 치는데 딴청을 피우는 차 선원)
원규
(알겠다는 듯 다른 선원을 보고) 굿이 열리고 있을 즈음,
장학수가 포구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선원1
예, 나으리. 술에 만취한 그 자가 포구 주위를 어슬렁댔었습니다요.
원규
처음 배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발화지점이 어디쯤인지는 보았는가?
주모
(배의 중앙을 가리키며) 여기쯤에서 불길이 솟는 것 같았습니다.
원규, 주모가 가리킨 배의 중앙으로 가서 살피는데, 잔해 속에서 무언가가 눈에 띈다.
청동 추 하나를 집어 들곤 찬찬히 살펴보는 원규.
원규
(청동 추를 살피며) 연기는 무슨 빛을 띠었는가?
선원1
푸른색이었습니다!
원규
푸른색?
차 선원
예. 어슴푸레하게…….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원규
(차 선원을 보며) 자네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면서?
차 선원
(횡설수설) 제가 술을 마시다가 주모랑 그러니까…….
19.제지소 앞
터널 같은 숲길을 오르던 원규, 뭔가를 보고 놀란 듯 잠시 멈춰 선다.
넓은 평지가 드러나는데 보기에도 위압감을 주는 웅장한 규모의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큰 건물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제지소는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
산으로,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들이 어울려 기묘하고 아름다운 인상을 준다.
산에서 나와 중앙의 큰 건물을 관통하는 수로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넓은 마당엔 건조대에서 나풀대는 종이들이 햇빛에 빛난다.
20.제지소 안
제지소로 들어서는 원규와 호방.
벽과 천장에 촘촘히 박혀 있는 등불과 군데군데 열려있는 창문으로 내부를 밝히고 있는 제지소 안은, 날카로운 기계음과 솥이 끓는 소리, 대형 작두가 나무를 써는 소리와 천장에 달린 도르래, 톱니바퀴 소음이 한데 뒤섞여 혼이 나갈 지경이다.
조달령
오셨습니까. 나으리.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초지공들로 분주한 제지소 안을 조달령의 안내를 받아 둘러보는 원규.
100여명이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제지소는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곳곳엔 천장을 지탱하는 한 아름 두께의 기둥들이 박혀있고,
천장엔 원료와 종이를 운반하는데 쓰이는 도르래가 띄엄띄엄 걸려 있다.
내부를 관통하는 수로를 따라 수십 명의 초지공들이 늘어서 초지발로 종이를 뜨는 공정을 지나면,
마른 꽃과 염료 식물들이 가득한 염료 작업장이 보인다.
펄펄 끓는 솥에서 끓고 있는 염료를 긴 주걱으로 떠올려 색을 확인하는 두호의 모습도 보인다.
이층 난간을 따라 걸으며 원규에게 공정들을 설명하는 조달령.
천정이 낮은 이층의 통로는 키가 큰 원규에겐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다.
꾸부정하게 숙이며 걸어도 머리에 쓴 관이 자꾸 천정 들보에 걸린다.
원규
종이는 가장 중요한 공물 중 하나라 조정에서도 각별히 관리하고 있다는 걸 잘 알 것이네.
공납이 늦어지게 되면 공납의 책임자인 사또 나으리 뿐 아니라 이곳의 책임자인 자네도 엄하게 문책 당할 걸세.
조달령
(난처하다) 초지공들을 다그쳐 밤낮 없이 조공으로 보낼 지물을 다시 만들고는 있습니다만 빨라도 한 달은 걸릴 듯 합니다.
원규
조공의 소실로 가장 피해를 보는 이가 누구인가?
조달령
제지소의 주인이신 영감마님이실 겁니다. 조정의 문책도 피할 수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원규
죽은 장학수는 어땠나? 영감께 원한이라도 있었나?
조달령
가당치도 않습니다. 영감마님께서는 남에게 원성 한 번 산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원한이라면 오히려 학수 그 놈이 온 간 데서 받고 있었습죠.
모르긴 몰라도 모두 그 놈의 죽음을 반기고 있을 겁니다.
이윽고 원규, 원료를 쏟아 붓는 통 앞에 이른다.
장정 하나가 동아를 잡아당기자 통의 밑 부분이 열리며 원료가 아래층 큰 통으로 쏟아져 내린다.
건장한 청년들이 큰 통을 돌려 원료를 섞으면 원료는 수로를 따라 자동으로 초지공들에게 보내진다.
원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돌아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통로로도 활용되는 창문에 달린 큰 판자가 떨어지며 원규를 덮친다.
놀라며 몸을 비트는 원규, 순간 계단이 부러지면서 원규의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조달령과 제지공들 달려오고, 팔을 감싸며 미간을 찌푸리는 원규.
팔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조달령
(다급하게 몸을 낮추며)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팔의 상처를 보고) 어서 의원을 불러라. 어서!
원규
괜찮네...
두호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흰 광목 단을 풀어 원규의 상처를 동여매고
찌그러져버린 원규의 관을 주워준다.
원규
(망가진 관을 펴 보며) 고맙네...
두호, 고개를 꾸벅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조달령
송구합니다, 나리. 책임자를 엄히 문책하겠습니다.
원규
(두호를 보며)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괘념치 말게.
조달령
뭣들 하나. 빨리 일들 해.
그리곤 통과 부러진 계단을 보는 원규의 표정이 공격을 멈춘 괴물을 보는 듯 기괴하다.
21.원규 처소 안 (저녁)
상 위에 올려 있는 검게 그을린 물건들.
청동 추와 깨진 사기 조각, 가운데에 구멍이 뚫리고 넓적한 모양의 철 막대 등이 보인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는 선부장과 원규.
원규는 제대로 치료를 받았는지 새로 상처를 묶었다.
원규
배의 잔해에서 나온 것들 중 선원들이 그 출처를 알 수 없다고 진술한 물건들이네.
이 중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선부장
(물건들을 유심히 살피며) 글쎄요…… 배에서 사용되는 것들은 아닌데……
선원들의 소지품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왔는지…….
원규
최근에 선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나?
선부장
배에 불이나기 3일 전 쯤 이성식이라는 선원 하나가 사라졌습니다요.
원규
어떤 자였나?
선부장
평소 말이 없고 붙임성도 적어 일꾼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잡니다.
원규
그 자가 이 섬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선부장
아닙니다, 나으리. 3년 전부터인가……
대동 굿이 열릴 때 마다 일꾼으로 지원해 일 년에 한 번씩 이 섬에 들어왔습니다.
물건들을 바라보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원규.
22.차사 처소 안(저녁)
열린 사랑채 문 안에서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최 차사.
마당에 서서 차사를 바라보고 있는 원규.
차사, 뒷목이 뻣뻣한지 고개를 빙그르 돌린다.
원규
주민들은 모두들 장학수가 죽은 것을 반기는 눈치였습니다. 제지소에서도 지물을 빼돌린 것이 적발되어 객주로부터 여러 번 야단맞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 차사
(추리하는) 투전을 하다 선부장과 선원들에게 돈을 잃자 격분한 그 자가 평소 자신을
못마땅해 하던 객주와 선부장에 대한 앙심으로 배에다 불을 질렀다. 그리고 평소 원한이
있던 독기가 그 놈을 죽였다.
원규
그런데 그런 자를 진작 내치지 않고 여태 일을 시키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 차사
한 집 걸러 친척인 작은 섬인데 그런 일로 내치겠나?
(원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인자인 독기는 감영으로 호송하고 조공을 소홀히 관리한 객주와 선부장은 감사 영감의 명을 받아 추후 죄를 물을 것이다.
감영으로 돌아갈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라.
원규
하지만 장학수가 방화를 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다가, 독기도 어떤 원한이 있어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최 차사
(못마땅한) 그 자가 주민들이 다 모인다는 대동 굿에도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쓸데없이 시간 낭비 할 것 없다. 독기를 물고 내어 자백을 받아내면 그만이다.
원규
사람이 죽었습니다. 살인 사건은 법에 따라 초검, 복검 두 차례 조사를 실시하여 …….
최 차사
(버럭) 이 군관!
원규
…….
최 차사
왜 매사에 그런 식인가? 예, 알겠습니다, 그 한마디면 되는 일 아닌가!
원규
죄송합니다, 나으리. 하지만…….
최 차사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고) 내가 다 책임질 것이니 내일 아침에 돌아갈 준비나 하라.
그리고 출발 전에 의원에게 멀미를 가라앉힐 약제를 대령하라 일러라.
인상을 잔뜩 쓴 채 신경질적으로 사랑채 문을 닫아버리는 차사.
23.어느 창고 앞 (밤)
창고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두 명의 사령.
그들에게 다가가는 장 호방.
장 호방
열게.
24.창고 안 (밤)
어둠 속에서 구석에 난 작은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고 안.
소형 추(수갑)로 손이 뒤로 차여진 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독기.
수척한 모습이지만 그 눈빛만은 매섭다.
철컹! 출입문이 열리더니 안으로 들어오는 호방.
입구를 살짝 살피고는 독기에게 다가간다.
독기
호장 어른!
장 호방
(나지막이) 내, 좀 전에야 자세히 들었다.
그 일 때문에 학수 놈을 없앤 것이냐?
독기
그 놈 입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장 호방
그러게 어쩌자고 너희들끼리 일을 치룬 거야?
그리고 죽은 놈한테 죽창은 왜 꽂았냐?
독기
술에 독을 탄 것은 나지만
(답답한 듯 나직이 분을 삼키며) 내가 왜 그 딴 짓을 했겠소?
장 호방
(불안해지는) 네가 꽂은 게 아니라고?
독기
(목소리 바르르 떨리며) 대동 굿 때 만신의 목소리 그건 분명 강 객주의 목소리였소.
거기다가 혈우를 보았다는 소문까지…….
(호방을 바라보며 다급히) 어서 이 섬에서 나가게 해 주시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소.
장 호방
잘 들어! 어차피 내일이면 감영으로 호송될 거다.
내가 감영의 아전들에게 손을 써서 무슨 수를 마련해 볼 테니 입조심해라.
감영에서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나를 믿고 절대 입을 열어선 안 될 것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창고를 나가는 호방.
뭔가 궁리하는 듯 눈을 날카롭게 뜨고 이를 악무는 독기.
25.마을 거리 (밤)
장명등이 밝혀져 있는 마을 거리를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호방.
강한 바람이 불어와 호방의 갓을 날려버린다.
동시에 바람에 꺼져버리고 마는 장명등의 불빛.
일순간 어둠 속에 묻혀버리는 거리.
호방, 헛기침을 하며 떨어진 갓을 주워드는데…….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바람소리.
휘-익- 저만치 굴러가는 갓.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울려 퍼지는‘사각사각…….’종이가 부딪히는 소리.
불안한 표정이 되어 어두운 길을 바라보는 호방.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어둠.
호방, 갓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키는데…….
사각사각, 사각사각……. 더욱 빠르게 들려오는 종이의 마찰음!
순식간에 호방에게 다가가는 누군가의 시선.
악!
호방의 외마디 비명.
26.제지소 안 (밤)
화면 밝아지면,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호방의 얼굴.
그의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돼 있다.
장 호방
사…… 살려주시오!
쩌렁쩌렁 텅 빈 실내에 울리는 호방의 목소리.
카메라 멀리 물러나면 팔다리가 묶인 채 제지소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호방의 모습.
호방의 몸에 걸려 있는 쇠사슬은 천장 도르래에 연결돼 있다.
호방,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내려보면,
바로 아래에서 지옥의 용암 마냥 펄펄 끓고 있는 솥 속의 시뻘건 염료!
장 호방
(다급히 외치는) 제…… 제발 날 좀 살려 주시오!
호방의 울림만이 되돌아오는데 갑자기 여러 개의 도르래가 복잡하게 얽힌 밧줄을 따라 움직인다.
덜컹! 도르래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호방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호방, 절박한 심정으로 제지소 곳곳을 둘러보지만, 사람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장 호방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용서하시오. 제발…… 날…… 용서해주시오.
호방, 바들바들 떨며 도르래를 바라보는데
순간, 도르래의 줄이 확 풀리며 솥에 끓고 있는 시뻘건 염료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호방!
27.우물가 앞 (아침)
우물로 첨벙! 물방울을 튀며 떨어지는 두레박.
어린 몸종 하나가 둘둘둘, 두레박을 끌어올리더니 세숫대야에 물을 붓는다.
대야에 비친 물 위로 떠오르는 자막.
< 第 三 日 >
28.차사 처소 안 (오전)
소매를 걷고는 세수를 시작하는 차사.
차사, 몇 번인가 얼굴을 적시더니 갑자기 멈칫한다.
천천히 물을 퍼서 냄새를 맡아보고는 인상을 찡그리는 차사.
최 차사
(버럭 성질을 내며) 비린내가 나지 않느냐!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대야를 들고 나가는 몸종.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 무는 차사.
최 차사
떠날 채비는 다 끝났나?
원규
의원이 탕약을 준비해 뒀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드시면 멀미에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최 차사
관아에 들릴 것 없이 감영으로 바로 돌아간다. 자네는 감사 영감께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소실된 조공을 다시 만들어 올릴 계획을…….
하는데, 다급히 달려 들려오는 홍사령.
홍사령
나으리!
뭔가를 감지한 듯, 차사를 바라보는 원규.
29.제지소 안 (염료 솥 앞)
솥 안에서 살이 헤쳐진 채 발견된 호방의 시신.
기름과 살이 둥둥 떠다니고……. 그 사이에 호패가 보인다.
밧줄에 묶인 채, 솥 안을 보고는 두려움에 질린 채 털썩 주저앉아 몸을 떠는 독기.
원규
(감정을 누르며) 대역죄인을 벌한 것처럼 하나는 나무에 꿰어진 채 발견되었고,
또 하나는 육장의 모습으로 죽었다. (다그치는)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건가!
독기
(넋이 나간 듯 여전히 벌벌 떨 뿐이다) …….
원규
(눈이 번뜩인다) 어젯밤 호방이 들렀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
독기
(갑자기 원규에게 애원하듯) 날 이 섬에서 나가게 해 주시오.
원규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아야 널 내보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따귀를 올려붙인다)
정신이 드는지 떨리는 눈으로 잠시 고민을 하던 독기, 결심한 듯 원규를 바라보고.
독기
…… 황사영이란 자를 아시오?
원규
천주쟁이들을 구하기 위해 서양 군대를 파견하라는 백서를 보내려했던 대역죄인이 아닌가!
독기
황사영이 붙잡히고 3개월 뒤, 당시 객주였던 강승률이 신분을 알 수 없는 다섯 사람에 의해 고발됐소. 황사영에게 금전을 지원해 줬다는 발고였소.
객주가 천주쟁이임을 밝혀낸 토포사는 천하에 본을 삼는다 하여 하루에 한 사람씩 닷새
동안 다섯 가지 방법으로 그 일가를 죽였소.
원규
그게 무슨 말인가? 닷새 동안 다섯 가지라니?
독기
어린 아들은 죽창에 꽂고 그 딸은 삶아 죽였소. 객주의 처는 얼굴에 종이를 발라 죽였고
늙은 어미는 머리가 깨져 죽었소. 그리고 5일째 강 객주는 사지를 찢는 거열을 당해 죽었소.
원규
그렇다면 누군가 발고자인 장학수와 호방을 그 방법대로 죽였다는 건가?
신분이 밝혀지지 않았다면서 그걸 어찌 아는가?
독기
내가 어찌 알겠소?
원규
너도 발고자 중 하나인가?
독기
…….
원규
그럼 나머지 두 명이 누군지도 알겠군.
독기, 입을 꼭 다물고 원규를 노려보다가.
독기
(간절하게) 당장 날 내보내 주시오.
원규
(독기를 바라보며 차갑게) 나머지 두 명이 누구인가?
독기
날 안전하게 뭍으로 보내주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독기의 눈을 바라보는 원규.
원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는 독기.
원규
사건이 해결되어야 뭍으로 나갈 수 있다.
놈이 노리는 것을 알아야, 하루라도 빨리 섬을 나갈 수 있어!
독기
(답답하다) 귀신이 한 짓을 무슨 수로 해결한단 말이오!
원규
장학수를 죽인 건 네 놈이다.
독기
(흥분한 듯) 내가 독을 쓴 것은 사실이나, 창에 꽂지는 않았소!
원규
관아에 발고문이 보관돼 있을 거다. 끌고 가라.
사령들, 끌고 나간다.
독기
(발버둥치며) 나를, 나를 지켜주시오. 다음이 내 차례일지 모른단 말이요…….
염료 솥 앞에서 두호를 조사하고 있는 홍사령을 눈짓으로 부르는 원규.
원규
(속삭이는) 사령 하나를 세워 경계를 적당히 하라 하고 날렵한 사령들을 주위에 매복시키게. 저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은 반드시 저 자를 찾아올 거야.
홍사령
예.
이 모습을 바라보는 두호.
30.당산나무 언덕
웅성대며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
언문으로 써진‘7년 전 사건의 발고 자는 자진해서 관에 알리라’는 내용의 방을 붙이는 사령들.
수하들에게 뭔가 지시하고 방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인권.
원규(E)
객주 일가가 체포된 후, 누군가 토포사에게 그들의 무고를 밝히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증거가 명백하다 하여 토포사는 예정대로 형을 집행하였다 합니다.
31.제지소 별관 서고 안 (오후)
원규에게 다가와 몇 묶음의 장부를 건네는 홍사령.
장부를 들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살펴보며, 홍사령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는 원규의 모습 위로.
원규(E)
제지소 서고에 보관돼 있던 강 객주의 장부를 조사해보니 당시 마을 사람 대부분이
강 객주에게 빚이 있었습니다.
(잠시 손놀림을 멈추며 유심히 바라보고) 그런데 강 객주가 발고된 즈음인 신 유년 상강(霜降)에 빚을 모두 갚은 걸로 돼 있었습니다.
32.강 객주 폐가 안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강 객주의 폐가 안.
넓고 황량한 안채는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된 듯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폐가의 전경 위로.
원규(E)
강 객주가 죽은 후, 제지소는 2할을 소유하고 있던 김치성 영감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에 남아있는 서자 김인권에게 제지소와 소작 관리를 맡겨오고 있었습니다.
원규
(천장의 서까래를 가리키며) 저길 좀 보십시오.
바라보는 최 차사. 서까래 곳곳에 붙어있는 오래된 부적들이 보인다.
원규
천주쟁이의 집안에 부적이 붙어있습니다.
발각된 천주쟁이에게는 처벌에 앞서 배교를 먼저 권하는 법인데, 강 객주에게는 그런 절차를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감영으로 호송하지도 않고 서둘러 이 섬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아마도 강 객주 일가는…….
최 차사
무고라도 당했다는 말인가?
원규
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은 발고자들도 두려울 겁니다. 그런데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무고임이 드러나면 발고자들은 그들이 무고한 자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최 차사
(말을 자르며) 이 군관!
원규
예?
최 차사
지금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군. 강 객주 일가가 모함이라도 당했다는 건데
그 말은 곧, 어명을 받드신 토포사가 공정치 못했다는 말 아닌가.
원규
(강경하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는 강 객주가 천주쟁이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걸 아는 누군가가 발고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데)
인권(E)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보는 원규와 최 차사.
어느 틈엔가 인권이 그의 수하들과 함께 폐가 안으로 들어와 있고.
인권
(차사에게 인사하고) 강 객주와 방화사건이 무슨 관계란 말입니까.
이 섬에 대역죄인을 추종하는 자들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원규
범인이 발고자들을 살해하고 있다면 아직도 셋이나 더 남았습니다.
결코 강 객주와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인권
그래서 방을 붙이신 겁니까?
발고자들을 찾는 방을 보고 오히려 주민들의 동요가 커졌습니다.
말 한마디에 인심이 바다 날씨처럼 오락가락하는 작은 섬입니다!
원규
범인을 잡으면 민심도 가라앉겠지요. (인권을 똑바로 바라보고) 영감을 만나야겠습니다.
당시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인권
강 객주로 인해 이 섬이 역당의 소굴로 오인 받고 저희 집안도 큰 화를 입을 뻔 했습니다.
(차사에게) 영감께서는 조공이 불탄 이후 그 충격으로 아직 거동조차 못하고 계십니다.
차도가 있을 때까지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연치까지 높으시어 걱정스럽습니다.
최 차사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럴 순 없네.
자리보전하고 계신다니 좀 기다려 보도록 하지.
그대로 돌아서서 폐가를 나서는 최 차사.
잠시 원규를 바라보던 인권도 수하들과 함께 폐가를 나서고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원규.
33.강 객주 폐가 앞
대문을 나서던 인권과 차사, 폐가로 들어오는 두호와 마주친다.
두호, 차사와 인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그런 두호를 슬쩍 보고는 그대로 가버리는 차사.
걸음을 멈추는 인권.
인권
아직도 이 곳에서 기거하는 이유가 뭐냐?
두호
(인권을 바라보고)......
인권
죽은 주인에 대한 충심이라는 건가?
(비웃듯) 그토록 주인을 섬기면서 넌 왜 살아 있느냐?
두호
…….
34.두호 처소 안
폐가 구석의 허름한 창고를 여는 원규. 두호가 화실로 쓰고 있는 곳이다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 여러 가지 그림 도구와 간단한 옷가지 등 사람의 흔적이 보이고.
화실 안을 천천히 걸으며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 원규.
인권(E)
(매서운) 주인이 죽었으면 따라 자결이라도 할 일이지
왜 버젓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냐는 말이다!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단 말이냐?
두호(E)
그렇지 않습니다, 나으리.
두호의 그림들이 모아진 화첩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 원규.
원규
호방이 죽은 솥이 염료 끓이는 솥이라던데 자네가 책임자인가?
두호
예. 나으리. 하오나 그날은 솥에 불을 넣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초지공들에게 물어…….
원규
(말을 자르고) 언제부터 강 객주를 모셨나?
두호
제가 예닐곱 살 때부터이옵니다. 섬에 들어오기 몇 해 전에 천애고아로 떠돌던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곁에서 예를 갖춘 채 조용히 서 있는 두호.
원규
객주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던데……. (두호를 보며) 글도 쓸 줄 아는가?
두호
간신히 읽는 정돕니다.
원규
(고개를 돌려 상 위를 바라보고) 실종된 이성식이라는 선원을 알고 있나?
두호
(잠시 말이 없다가) 잠시 왔다 가는 선원들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원규, 상에 놓여 있던 족자를 집어 들고 주르륵 펴 본다.
둘레를 고풍스런 무늬의 색지로 둘러놓은 족자에는 강직한 인상의 강 객주 초상이 담겨 있다.
다른 족자를 들고 펴 보는 원규.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은 듯한 객주의 딸 소연,
소연의 옷고름에 특이한 문양의 노리개가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림 속 어린 객주 딸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원규.
원규
강 객주인가?
두호
예.
원규
대역죄인의 초상을 그리거나 갖고 있는 것 또한 죄임을 모르는가?
두호
어찌 알면서 그랬겠습니까? 제게는 부모 같은 분들이라.
원규
이것은 압류하겠다.
원규, 족자를 집어 들고는 자리를 뜨려고 하다가 상처를 감았던 두호의 머리띠를 돌려준다.
공손하게 받아드는 두호.
원규
그런데 너도 강 객주가 죄인이라 생각하나?
두호
…….
원규
정말로 객주가 천주쟁이였는지 묻는 거다.
두호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자리를 뜨는 원규.
문 밖 까지 배웅하고, 원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변하는 두호의 눈빛.
35.바닷가 (회상)
소연이 갯바위에서 게나 소라를 가지고 놀고 있다.
두호는 멀리 떨어진 바위 뒤에서 화첩을 펴고 풍경을 그리고 있다.
풍경속의 여인은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옷의 색깔로 보아 소연인 것 같다.
그림을 그리다 소연을 돌아다보면, 소연은 없고 파도만 높다.
두호, 놀라서 미친 듯이 달려간다.
축 쳐진 소연을 안고 나와 자갈밭에 누이는 두호.
어느새 주위에 모닥불을 지펴놓은 채
허겁지겁 소연의 젖은 저고리를 벗기고는 체온을 불어넣으려는 듯
몸을 주무르고 쓸며 안간힘을 다한다.
이내, 소연의 손이 움찔하며 기운 차릴 조짐을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쓰러지듯 드러눕는 두호.
허 씨(E)
소연 아씨를 겨우 구한 두호는 닷새를 앓았다고 합니다.
강 객주께서 두호 놈을 예뻐하기도 했지만, 두호야말로 객주 일가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았을 놈이죠.
36.허씨 집 마당
원규가 허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청에서는 허씨의 처와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다.
원규
강 객주 일가가 처형될 때 두호는 어땠나?
허 씨
글쎄요. 두호는 도통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벙어리처럼 말이 없어지고 그저 강 객주가 살던 집을 지키며 살 뿐입니다.
방에서 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던 허씨의 처가 방 안으로 들어간다.
원규
(방을 보며) 걱정이 많겠네.
허 씨
멀쩡하던 노인네가 강 객주 죽은 뒤로 정신을 놔버렸습니다.
원규
강 객주가 죽은 후? 왜? 강 객주 사건과 무슨 관계라도 있었던 건가?
허 씨
(놀라 손을 내 저으며) 아닙니다요. 나으리.
원규
그리 겁낼 거 없네.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니까.
허 씨
(눈치를 살피며) 그런 게 아니옵니다. 소인의 아비가 객주 살아생전에 크게 덕을 입은 일이 있사온데 한을 품고 죽은 객주가 해코지 하는 거라고들 합니다.
허 서방
(문을 박차고 나오며) 야! 이놈들아! 혈우가 내렸어. 객주께서 오신다! 이런 천벌 받을 놈들아. (허공에 연신 절을 하며) 객주 어른 잘못했습니다. 객주 어른…….
허 씨
(벌떡 일어나며) 아이고 아버지. 왜 또 그러슈. 왜 또-
허 서방과 허 씨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가만히 일어나 마당을 나서는 원규
37.창고 앞 (밤)
창고 뒤쪽으로 대숲이 있다.
창고와 대숲이 보이는 일각에 몸을 숨긴 채 창고를 주시하고 있는 홍사령과 두 명의 사령들.
원규가 홍사령 뒤로 다가온다.
기척에 몸을 돌리지 않고 눈을 번뜩이며 날카롭게 칼을 빼려고 하는 홍사령.
원규
날세.
홍사령
(칼을 살며시 넣으며) 움직임이 없습니다.
원규
(창고를 주시하며) 신중한 놈이란 건 알고 있네.
홍사령
사령 하나만이 허술하게 지키고 있는 걸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원규
(여전히 창고를 주시하며) 알고 있네. 자네라면 어찌하겠는가?
홍사령
…….
원규
(홍사령을 보며) 범인은 우리가 독기를 섬 밖으로 데려가기 전에 해치워야겠지.
허나 허술한 경계 뒤에 반드시 매복이 있을 걸 짐작할거야.
홍사령
그럼……. 놈을 잡기는 그른 것 아닙니까.
원규
대신 독기는 안전하지 않겠는가?
홍사령
(보면)…….
원규
그게 우선이지. 어쩌면 놈이 무리수를 둘 수도 있어.
이때, 창고 앞을 지키던 사령이 하품을 하며 모로 돌아 사라진다.
오줌줄기가 풀밭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원규(E)
그리고 우린 독기를 통해서도 범인에 접근할 수 있으니까. 양수겸장일세.
38.창고 뒤 대숲
빽빽이 들어차서 자연 방책이 되어있는 어두운 대숲에서 번수가 오줌 누고 있다.
누군가의 시선이 번수에게 다가간다.
사각 사각 소리가 들리자 오줌 누던 번수가 돌아본다.
39.동 창고 안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이가 부딪히는 소리, 사각 사각 사각…….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몰라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독기.
이윽고 톡 톡 톡……. 누군가 창살을 두드린다.
독기, 극도의 두려움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슬쩍 일어나
조심스레 창으로 다가가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데.
그의 상투에 걸려 세차게 잡아채어지는 쇠갈고리!
창틀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는 독기.
뭔가 하얀 것이 화면을 확 덮어온다.
40.창고 앞 (밤)
여전히 창고 뒤 대숲에서 창고를 바라보는 홍사령.
오줌 소리가 끊긴지 한참이 지나도 번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보면 원규는 잠이 들었는지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다.
41.동 창고 안 (밤)
갈고리에 걸리고 창살에 끼어 꼼짝을 못하는 독기의 얼굴에 물 바른 한지가 발라져있다.
뒤로 채워진 추로 인해 손조차 움직일 수가 없는데…….
허공에 붕 떠서 버둥버둥 대는 독기의 다리.
다리로 벽을 밀며 갈고리에서 풀려나려고 버둥대는 독기.
우두둑 머리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지 얼굴의 한지에 피가 번진다.
숨이 막혀 가는 독기.
42.창고 뒤 대숲 (밤)
횃불을 든 사령들이 숲에서 번수를 발견한다.
넋이 나간 번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몸을 떨고 있다.
오줌지린 바지는 젖어있고 나무에 박힌 칼 하나가 뒤에서 번수의 목을 겨누고 있다.
43.동 창고 안 (시간경과)
얼굴 전체에 한지가 붙은 채 배가 볼록하게 솟아있는 모양으로 죽어있는 독기의 모습!
시신 주위에 모여 있는 차사, 남 의원, 사령들.
떨리는 손으로 독기의 얼굴에 붙어있는 한지를 떼어내는 남 의원.
눈알이 불거져 튀어나올 듯 하고 얼굴 전체에 검붉은 핏기가 올라와 있는 독기의 얼굴.
시신을 살피는 원규와 남 의원.
원규
(독기의 머리에서 갈고리를 빼내며) 범인은 이 갈고리로 머리를 잡아당긴 것 같습니다.
제지소에서 나뭇단을 나를 때 쓰는 갈고리 같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제지소 출입이 용이한 자들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남 의원
목을 맨 흔적이나 자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모지로 인한 질식사가 틀림없는 듯 합니다.
(두려워)가, 강 객주의 처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갇힌 자를…….
최 차사
그 입 닥치라.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고 잡아놓은 자마저 죽었어. 이러니 다들 귀신 타령 아닌가! (화를 내며) 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방비를 허술히 한 자들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원규
송구합니다, 나으리.
최 차사
셋이나 죽어나가는 동안 자넨 뭘 했나! 언제까지 범인에게 끌려만 다닐 셈인가!
원규
(머리를 조아린다)…….
최 차사
(원규를 빤히 보며 혀를 차다가)자네 대역죄인의 재산은 어떻게 되는지 아나?
원규
죄인의 재산은 압류되거나 발고한 이가 고스란히 가져갑니다.
최 차사
발고자들이 제 발로 나타나지 않으면 갑자기 재산이 늘어난 자들이라도 조사해 봐야할 것 아닌가.
원규
주민들의 재산 관계를 조사해 봤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증언은 없었습니다.
단지 처음 죽은 장학수는 객주가 죽은 이후 씀씀이가 헤퍼졌다고 합니다.
그 외에, 동업자였던 김치성 영감의 집안으로 제지소가 넘어갔고, 조달령이 객주를
맡았사오나 직함뿐인 객주이고 특별히 재산이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김치성 영감을 조사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으리의 말씀대로라면 영감이 발고자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최 차사
비록 초야에 묻혀 있다고는 하나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신 어르신을 증거도 없이 함부로 조사할 수는 없다.
원규
그렇다면 감영으로 사람을 보내 당시 토포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최 차사
(못마땅한) 꼭 토포사까지 들춰야 되겠나?
원규
적어도 토포사는 발고자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최 차사
(싸늘하게) 만일 토포사까지 들춰내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자네도 성치는 못할 것이야.
최 차사, 원규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자존심이 상해 일그러지는 원규.
44.제지소 앞 (이른 아침)
형틀 주위에서 몽둥이를 든 채 초지공들을 저지하고 있는 인권의 수하들과,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조달령.
멀찍이 떨어져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인권.
혼절해 있는 젊은 초지공을 끌어내는 수하들.
옆에는 살이 터져 피로 범벅이 돼 있는 몇몇의 초지공들이 쓰러져 있다.
조달령
(초지공들을 노려보며) 다음은 누구냐?
수하들, 50대 늙은 초지공 하나를 조달령 앞에 무릎 꿇린다.
조달령
네 놈도 제지소에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거냐?
초지공
(애걸하는) 객주 어른, 저 곳은 강 객주의 한이 서린 곳입니다.
객주의 혼이 노여움을 풀기 전에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조달령
(매몰차게) 쳐라.
초지공을 양쪽에서 잡아 누르는 수하들. 몽둥이를 번쩍 들어 초지공을 치려는데.
원규(E)
(외치는) 뭐 하는 짓인가?
조달령 돌아보면 다가오는 원규와 홍사령.
홍사령은 갈고리를 들고 있다.
조달령
(예를 취하며) 하루 빨리 조공을 다시 올려야 하는데 이 자들이 일하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원규
그렇다고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매질을 한단 말인가!
인권(E)
제가 명한 일입니다.
원규 돌아보면, 다가오는 인권, 손에는 접힌 부채를 들고 있다.
인권
(태연하다) 제지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서이니 관여치 마십시오.
(부채를 찌르듯 내밀며) 계속하라!
원규
(부채를 든 인권의 손목을 와락 잡으며) 그만 두십시오!
손을 빼내며 원규를 보는 인권,
팽팽한 긴장감.
45.인권 처소 방 안 (아침)
높이 솟은 전각 마루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원규와 인권.
‘경염정(景濂亭)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마다 주렴이 걸려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아늑하고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수박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은 소리도 청명하다.
< 第 四 日 >
다탁을 내려놓고는 다기와 다반을 정성스레 상 위에 올리는 계집 종.
낡았으나 정갈하고 품위 있는 물건들이다.
다기에 차를 따른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나가는 여종.
한쪽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잘 정리된 책들을 둘러보는 원규.
책장에 기대어있는 거문고가 인상적이다.
이윽고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원규.
원규
(찻잔을 들며) 경염정이라면 염계 주문숙을 말하는 겁니까?
연못 가득 연화를 심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인권
진흙 속에 나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은 꽃 중에 군자라고 할만하지요.
원규
염계 선생의 애련설 이군요. 그렇게 뜻이 깊고 사물에 대한 식견이 높은 분이 왜 뭍에 나가 관직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인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하나 서자의 몸으로 오를 수 있는 관직이 뭐겠습니까.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 탁류에 휩쓸리느니 여기 남아 섬을 돌보는 것이 낫지요.
섬 밖이라고 이 곳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말투는 공손하고 예의바르나 표정에는 묘한 적대심이 스치는 인권.
원규
그렇다면 당연히 주민들을 예로 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권
그것도 선친의 가르침입니까?
원규
…….
인권
나으리의 선친께서 내셨던 문제, 제가 그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주는 한 섬도 가져가서는 안 되겠지요.
원규
그렇습니다.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을 판일 테니 지주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인권
(비웃 듯 바라보다) 하지만 난. (순간 표정 매서워지고)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자비를 베푼다면 그 다음 흉년엔 곳간까지 열어달라고 할겁니다. 강한 자에겐 한 없이 비굴하고, 강한 자가 빈틈을 보이면 그 골수까지 파먹으려 드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지요.
원규
인심은 위험한 것이라 과불급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동요하고 있을 때 몰아세운다면 민심을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인권
뭍의 방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지 마십시오. 조공이 늦어지면 문책을 당하는 건 제지소의
주인인 영감이십니다. (부적 뭉치를 꺼내 놓으며) 일을 못하겠다고 버티던 자들이 제지소에 붙이려던 겁니다. 귀신이 두려워 무당에게나 몰려다니는 무지한 것들을 예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원규
(지지 않으려는) 범인을 잡으면 주민들의 동요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인권
(비웃듯) 다섯 모두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원규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리고) …….
인권
(잠시 표정 누그러뜨리고 다시 예의를 깍듯이 갖춰) 제지소의 초지공들은 제 방법대로 다스릴 테니 나으리께서는 그만 범인을 찾는데 매진하시지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
46.만신당 앞
어느 절벽에 위치한 만신당 앞.
원규,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
땅에 크게 그려져 있는 사람의 형상과 그림 위에 꽂혀 있는 날카로운 낫과
작은 화단에 가득한 나팔꽃을 유심히 바라보는 원규.
47.만신당 안
만신과 대면하고 앉아 있는 원규.
아직 채 회복이 되지 않은 듯 핏기가 없는 만신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보인다.
만신
나으리는 믿지 않으시는군요.
원규
객주의 원혼 말인가?
귀신의 짓이라면 왜 7년이나 지난 지금 복수를 한단 말인가?
만신
온 섬에서 피 비린내가 나는데도 원혼을 믿지 않으십니까?
원규
대기나 수질에 이상이 생겨 악취가 날 때도 있는 법이네.
만신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귀취입니다.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은 수채냄새가 나고,
불에 타서 죽은 귀신은 노린내가 나며, 목을 매어 죽은 귀신은 지린내가 납니다.
그리고 사지가 찢겨 죽은 귀신에게선 지독한 피비린내가 나지요.
그 냄새가 심할수록 원한도 더욱 깊은 법입니다.
원규, 잠시 만신을 바라보다가.
원규
심허로라는 병을 아는가?
만신
…….
원규
특정한 장소나 상황에 두려움을 느껴 심장의 혈이 막히는 사람이 있네.
사람들이 흔히 귀신에 씌웠다 말하는 이들이지.
불을 두려워하는 자에겐 화귀(火鬼)가 씌웠다 하고 닫힌 공간에 들어서지 못하는 자에겐
가귀(家鬼)가 붙었다 하여 굿을 하기 일쑤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병일 뿐 귀신의 짓은 아니네.
만신
그렇다면 혈우와 물고기의 떼죽음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원규
고구려 보장왕 때 적설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지. 간혹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홍진을 머금고 있어 붉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법이네. 귀신에게 원인을 씌우는 일은 쉽지만 그것은 결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네.
(인권에게서 받은 부적을 꺼내 놓으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일은 이제 그만 두게!
만신
송구하옵니다만, 나으리. 이것이 효험이 있건 없건 죽은 자의 한을 풀고 산 자를 위로하는
것이 저의 일 입니다.
원규
다음번엔 이렇게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이네.
자리에서 일어서는 원규.
만신
나으리. 원혼이 된 자가 하나 더 있을 겁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어느 날 밤, 절벽 쪽에서 천둥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귀신의 울음소리가 떠나질 않았고 제게 신열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원규
천둥소리? 그 날이 언제였나?
만신
대동 굿 3일 전이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를 되짚으며 잠시 생각에 빠지는 원규에서.
48.산 위 언덕 (절벽 위)
산 능선을 따라 샅샅이 수색하고 있는 사령들의 모습.
사령들을 지켜보고 있는 최 차사와 원규.
최 차사
(마음에 안 드는 듯) 자네도 무당의 말을 믿는 건가?
원규
그런 것은 아니오나, 그 날은 선원 이성식이 사라진 날입니다. 그 날은 일기가 좋았던 밤이었습니다. 무당이 들었다는 천둥소리는 총성이었을지 모릅니다.
최 차사
범인이 다음 발고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터인데,
그깟 선원 하나 실종된 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건가?
원규
그 자가 사라진 후, 섬에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자가 사건의 단초를 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최 차사
(잠시 원규를 보다가) 섬의 치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오늘 안으로 수색을 마쳐라.
원규
예. 그리고 강 객주가 이 섬에서 어찌 살았는지 좀 알아봐주시겠습니까?
최 차사
아니……. 그런 걸 자네가 해야지, 나보고 하라고!
이미 홍사령 쪽으로 가고 있는 원규.
홍사령, 주위를 살피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몸을 숙인다.
절벽 끝자락에 피어있는 흰 꽃과 풀에 바짝 마른 검붉은 피가 뿌려있다.
홍사령, 고개를 들고 절벽 아래 바다를 바라보면…….
49.절벽 아래 해안 (오후)
군선과 작은 고깃배, 그리고 고기잡이 뗏목까지 동원해 해안선을 수색하는 사령들과 선원들.
해안 절벽 하나하나를 살펴 나간다.
한 선원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면 홍사령의 시선이 그쪽을 향한다.
해안가 한 쪽 동굴 위의 하늘을,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수많은 물새 떼!
50.바닷가 동굴 (오후)
사령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홍사령.
물새들이 마치 길을 비키듯 물러난다.
더욱 가까이 다가가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홍사령.
보면, 작은 봇짐을 옆에 놓은 채 꼭 안고 죽어 있는 한 여인의 시신!
시신을 훼손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보호라도 하듯 병풍처럼 주변을 두르고 있는 물새들!
51.포구 (오후)
거적에 쌓인 시체 한 구를 배에서 내리는 선원들.
원규와 최 차사, 선부장 등이 미리 와있던 포구 한쪽에 시신을 내려놓는다.
홍사령, 시신을 덮고 있던 거적을 걷으면 여인의 시신이다.
선부장
(놀라는) 아니, 사라진 자는 이성식인데……. 웬 처자의 시신이?
최 차사
(시신을 살피며) 무당의 말대로라면 이것은 벼락이 낸 상처겠군.
원규
그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화승총이 아닌 수발 총에 의한 살인입니다.
최 차사
(미간을 찌푸리며 되뇌는) 대동 굿 사흘 전에 죽었다면……. 죽은 지 벌써 열흘째인데…….이 더위에 어찌 살점 하나 썩어가지 않고 산 사람 같단 말인가.
남 의원
(홍사령에게) 동굴 안이 추웠습니까?
홍사령
그렇진 않았습니다.
모두들 그 말에 불안한 표정이 되는데,
사령1, 원규에게 여인이 품고 있던 봇짐을 올린다.
황급히 봇짐을 풀어보는 원규.
남자의 옷과 신발 그리고 가짜 상투와 수염 등이 보이고.
선부장
이 옷은 이성식의 것이 맞는데……. (상투를 보더니) 이성식이 여자였단 말인가?
뭔가를 싸고 있는 비단 보자기 하나가 보인다.
원규, 보자기를 열면 초로 봉인된 작은 호리병과 특이한 모양의 노리개가 보인다.
봉인된 뚜껑을 비틀어 열고는 내용물을 손바닥에 쏟는 원규.
작은 가루들이 손바닥 위로 떨어진다.
원규, 가루를 집어 입으로 맛을 보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뱉어낸다.
가루를 집어 손바닥 위에 놓고 냄새와 맛을 보는 의원.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원규가 가루가 놓인 손을 차사에게 내민다.
차사 두려운 듯, 원규와 의원을 번갈아보다가 새끼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찍어 맛을 본다.
그리고는 얼른 퉤퉤퉤-하다가 멈칫하는 차사.
최 차사
이건...!
일제히 차사를 보는 사람들.
최 차사
이건 마비산이야!
원규
예? 마비산이라 하셨습니까?
최 차사
내 한양에 있을 때 일패의 한량들이 십수 명의 여인을 연쇄 겁탈한 사건이 있었지.
여인들은 모두 이 약을 먹고 혼절했었어.
원래는 왜국의 한 의원이 큰 환부를 수술하기 전에 썼던 약인데…….
우리나라 한량들이 왜관을 통해서 매우 비싼 값으로 산다고 들었네.
(원규에게 호리병을 빼앗아 병 밑을 살피면 아주 작은 일본어로 약국이름이 표기되어있다)
역시...
원규
(무언가 짚이는 듯 골똘히) 병을 단단히 밀봉해놓은 걸 보면,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 한 건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에게 전달하려 한 겁니다.
차사는 그 사이 슬쩍 호리병을 도포 소매 속으로 넣어버리고는 시치미를 뚝 뗀다.
원규, 다시 봇짐에서 나온 노리개와 비단 보자기를 살핀다.
차사는 비단 보자기의 안쪽 면에 암호처럼 특이한 모양으로 글이 수 놓아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보자기이다.
최 차사
(보자기를 들고 살핀다) 이게 뭔가?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군.
원규
(비단보를 보고) 직금도(織錦圖) 입니다.
남편을 멀리 떠나보낸 아녀자들이 비단에 수를 놓아 편지 대신 보내던 것입니다.
최 차사
그럼 연서란 말인가?
원규
유래가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직금도는 읽는 순서와 방법에 따라 뜻이 달라지므로 미리
약속한 당사자가 아니면 그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남장을 하고 예까지 온 건 정체를 속이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일 겁니다.
최 차사
(선부장에게) 이 자가 누군가 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나?
선부장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자라…….
노리개를 살피던 원규가 시신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원규(E)
이 자는……. 강 객주의 딸 소연입니다.
최 차사
(놀라는) 객주의 딸은 7년 전 육장을 당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원규
얼굴의 모습은 좀 다른 듯하지만 이 노리개는 분명 두호의 그림에서 본 것입니다.
(의원에게) 자네는 못 알아보겠나?
남 의원
얼굴의 생김새는 좀 달라졌으나 나으리 말씀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7년 전에 소인이 시신을 수습 했사온데…….
원규
그 무렵에 죽은 자가 또 있었겠지.
남 의원
예. 그 해에 역병이 돌아 죽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원규
육장을 당하기 전 누군가가 구해낸 겁니다.
그 후 다른 시체를 끓는 물 속에 대신 넣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자신을 구해준 자를 만나기 위해 섬에 은밀히 들어왔는데,
발고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죽여 버린 겁니다.
결국 범인은…… 이 처자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최 차사
그 초상을 그린 두호라는 자가 옛 주인을 못 잊어 아직 그 집에 기거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군관! 자네는 두호를 추포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시신을 상엿집으로 옮기고, 수발총을 소유한 자가 누군지 알아내라!
홍사령
(원규를 보며) 나으리…….(원규의 왼팔을 본다)
원규, 홍사령의 시선을 보았다가 자신의 왼팔을 보면 관복 소매가 피로 붉게 물들어있다.
감고 있던 목면을 풀면 봉합되지 않은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린다...
홍사령
금창약을 바르고 이틀이면 아문다 하지 않았소.
남 의원
제가 드린 금창약은 하루만에도 살이 아뭅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적어도 이토록 더 심해지는 법은 없는데……. 한 번 더 발라드리지요.
원규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네. 서두르게!
52.조달령 집 방 안 (오후)
식은땀을 흘리며 농을 마구 뒤지고 있는 조달령.
옷가지 깊숙한 곳에서 나무 상자를 꺼내 든다.
뚜껑을 여는 조달령.
그러나 총이 있던 자리만이 선명히 남아 있을 뿐, 정작 총은 온데간데없다.
순간 당황하며 두려움에 떠는 조달령.
53.두호 처소 안 (오후)
확!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이닥치는 원규 일행.
그러나 두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황급히 도주라도 한 듯, 거처 안이 혼란스럽게 어지럽혀 있다.
낭패감이 스치는 원규.
54.포구로 가는 길
돌담에 몸을 숨긴 채, 포구로 가는 길목을 바라보고 있는 두호.
혼비백산해서는 포구를 향해 내빼고 있는 조달령의 모습이 보이고…….
차가운 눈빛으로 스윽- 몸을 일으키는 두호.
조달령에게 다가가려 하는데…….
조달령을 멈춰 세우는 사령들. 배를 타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조달령.
잽싸게 몸을 숨기는 두호.
조달령, 사령들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배에 오르려고 한다.
잠시 동안 조달령과 실랑이를 벌이며 저지하다가, 안 되겠는지 창대로 허벅지를 내려치는 사령.
털썩 주저앉는 조달령.
그 모습을 분한 듯 노려보는 두호.
55.강 객주 폐가 마당 (오후)
묶인 채 꿇어 앉아 원규에게 취조 받는 조달령.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있고 여기저기 터진 것이 고문이라도 당한 듯 보인다.
화가 난 원규 주위엔 사령 세 네 명이 몽둥이며 회초리를 들고 금방이라도 내려칠 기세다.
원규
다시 묻겠다. 수발총을 소유하고 있었다던데?
조달령
얼마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원규
객주 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증을 없애버린 것 아닌가!
조달령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원규
(머리끝까지 화가 난) 네 이 놈! 시신에서 수발총의 탄흔이 나왔는데도 계속 거짓을 고할
텐가! 객주 일가를 무고한 사실이 들어날까 두려워, 살아남은 그의 딸마저 죽인 것 아닌가!
(호통) 여봐라! 저놈이 바른말을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조달령
(후들후들 몸을 떨며 원규에게 매달린다.) 나으리!
제가 발고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딸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56. 조달령 집 방 안 (FLASH BACK)
조달령의 방 안. 밤.
독기, 장학수와 뭔가를 은밀히 얘기하고 있는 조달령.
조달령(E)
그 자들이 긴히 쓸 곳이 있어서 그런다며 제게 수발총을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래서 총을 빌려준 것뿐입니다.
조달령의 증언과 달리 당산나무언덕에 서있는 소연에게 다가가는 자들을 이끌고 있는 조달령.
수발총을 손에 들고 있다.
조달령(E)
(서서히 흐느끼며) 저는 정녕 이성식이 소연이인지도 알지 못했고…….
산 위 절벽. 궁지에 몰린 소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는 세 사람.
소연에게 수발총을 겨누고는 잔인하게 미소 짓는 조달령.
조달령(E)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도 까마득하게 몰랐습니다.
57.다시 강 객주 폐가 마당 (오후)
원규
남은 발고자는 누구냐?
조달령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쯤 정신이 나가서는 횡설수설 한다)
원규
(외치는) 남은 발고자를 알아야 범인을 잡을 수 있다! 누구야!
조달령
(기가 풀린 눈으로 천천히 원규를 바라보고) 그 자는…….
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쉬이익- 무언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
순간, 퍽! 피가 튀며 조달령의 뒤에서 날아온 쇠 화살이 그의 몸을 관통한다!
원규의 얼굴로 튀는 붉은 피!
보면 쇠 화살의 중앙에는 가는 동아줄이 묶여 있다!
조달령, 자신의 몸을 통과해 꿰어있는 동아줄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동아가 강하게 잡아 당겨지며 쇠 화살이 그의 몸에 걸린다.
강력한 힘으로 순식간에 끌려가는 조달령.
놀라서 동아줄을 당기고 있는 곳을 바라보는 원규.
동아줄은 돌담 쪽 석등을 지나 담 뒤로 넘어가 있다!
퍽! 석등에 부딪혀 박살나는 조달령의 머리! 석등 가득 번지는 핏방울!
원규와 사령들 망연해지는데…….
그때, 돌담 위의 기와들이 동아줄에 쓸려 날기 시작한다.
58.강객주 폐가 앞
달려 나오는 원규.
멀리 말을 타고 있는 범인의 모습이 보인다.
종이옷으로 변복하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범인이 안장에 묶여있는 동아를 칼로 끊는데,
그때, 말 위에 올라 탄 채 다른 말 한 필을 끌고 달려오는 홍사령.
뒤축으로 말을 세게 걷어차는 범인.
말 위로 잽싸게 오르는 원규.
범인의 말이 숲 속으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한다.
59.숲 길
범인을 추격하는 원규와 홍사령.
험한 산세 속에서도 능수능란하게 말을 달리는 범인.
원규의 뒤를 바짝 따르던 홍사령, 있는 힘을 다해 말을 몰더니 원규를 제치고 나간다.
빠르게 말을 달리는 홍사령, 범인의 말에 가깝게 따라 붙는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수발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범인.
탕!
총알이 홍사령의 어깨를 스치고... 홍사령,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만다.
홍사령을 뒤로 한 채 범인을 쫓아 달리는 원규.
뒤돌아보면, 멀리서 홍사령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다시 추격에 박차를 가하는 원규.
잡힐 듯 하다가는 이내 멀어지는 범인.
숲 속 다른 길.
다시 길을 가로질러 아슬아슬하게 범인의 뒷덜미를 잡는 원규.
하지만 범인의 종이옷이 찢어지며 원규는 중심을 잃는다.
이때 범인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원규는 방향을 놓치는데
갑자기 나타난 도랑을 피하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원규의 말.
나가떨어지는 원규.
정신을 잃어가는 원규의 시선에 멀리 사라져 가는 범인이 보인다.
60.우물 안
힘겹게 눈을 뜨는 원규. 사방이 꽉 막힌 이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어 벽을 더듬어본다.
고개를 들어보면, 좁은 우물 안이다.
물이 말라버렸는지 우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원규, 당황스런 표정으로 다시 위를 바라보는데,
동그란 원 안으로 보이는 한 사람의 실루엣.
순간 말랐던 우물 바닥에 피가 고이기 시작하며 우물 안에 차오른다.
원규의 하얀 도포자락을 타고 오르는 붉은 피!
위기감에 휩싸이는 원규, 우물 위를 바라보고 간절히 외치는.
원규
아버님!
우물 위의 사람은 서서히 우물을 덮는다.
61.만신당 안 (저녁)
‘헉!’식은땀을 흘리며 두 눈을 뜨는 원규.
원규의 시선으로 만신당 안의 기괴한 탱화들이 보인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원규.
홍사령
정신이 좀 드십니까?
원규가 보면 어깨에 붕대를 감은 홍사령이 곁에 앉아있다.
원규
어찌된 일인가?
홍사령
처소까지 모시기 어려워 일단 이 곳에 모셨습니다.
원규
범인은?
홍사령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달아난 후였습니다.
이제야 머리가 지끈대는지 말없이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원규.
만신이 물 사발을 들고 들어와 원규에게 인사를 올린다.
만신
(물을 건네며) 다행히 크게 상한 데는 없으신 듯 합니다.
목이 타는지 벌컥 벌컥 물을 마시다가 울컥 토하는 원규.
홍사령
이게 뭔가? (물그릇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며) 비린내가…….
만신
끓여놓은 물이온데 (두려움에 떠는) 비린내가 점점 심해져 이제는 물을 끓여도 귀취가
가시지 않습니다.
촌로(E)
만신 계신가?
원규, 만신당의 문을 열면 마당에 바글바글 몰려와 있는 주민들.
62.허 씨 집 밖 (밤)
횃불로 어둠을 밝힌 채, 허 씨의 집에서 소를 끌고 나오는 사령들.
그들을 막아서는 허 씨.
허 씨
뭣들 하는 거요! 소를 끌어가면 무엇으로 농사를 지으라고!
사령1
관무를 수행하는 것이니 저리 비켜라! 곧 돌려준다고 했잖아!
허 씨
이런다고 죽을 놈이 안 죽고, 객주의 노여움이 풀어질 것 같소.
허씨를 거칠게 밀치고는 소를 끌고 가는 사령들……. 그 위로
원규(E)
그 놈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피 맛을 본 짐승입니다.
놈은 객주 일가가 죽은 방식대로 하루에 한 명씩 발고자들을 죽여 왔습니다.
63.마을 전경
마을 곳곳에서 소와 말 등을 끌고 나오는 사령들.
이내 섬 내 어느 곳으로 마을의 모든 마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멀찍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원규(E)
내일이 닷새째고 남은 살해 방법은 강 객주가 받았던 형벌인 거열뿐이니
범인은 사지를 묶을 수 있는 네 마리의 우마가 필요할 것입니다.
최 차사(E)
자네가 이리 흥분하는 건 처음 보는군. 지금 우리는 온 섬을 뒤집어 놓고 있어.
64.섬 모처 솔밭 (밤)
소와 말을 빼앗긴 허씨와 주민들이 몰려와 있고 사령들이 그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모여드는 말과 소를 보며 서 있는 차사와 원규.
원규
사람을 물어 죽이는 미친개를 잡으려는데 어찌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최 차사
이 사람! 주민들이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다. 이왕에 벌인 일이라면 반드시 범인을 잡아 귀신의 짓이 아님을 밝혀내야 한다.
원규
강 객주에 대해서는 알아보셨습니까?
최 차사
의외야. 강 객주는 마을 주민들에게 굉장히 존경받던 인물이었더구먼.
마을 사람들에게 준 빚도 대부분 초기의 정착금이었고 그것도 저리로 빌려준 돈이었어.
세상이 달라져 신분보다는 능력으로 사람의 상하가 정해질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하네. 허 서방 같은 자는 원래 노비였으나 면천시켜 초지공으로 일하게 한데다 그 일가를 모아 같이 살게 해줬고, 두호 같은 천출에게 그림과 염료를 가르쳐 염료공정 책임자를 맡기기도 했을 정도였어.
원규
두호가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이런 복수극을 벌인 이유가 있군요.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베푼 강 객주 일가가 무고하게 죽어 나가는데 어찌 주민 모두가 외면했을까요?
최 차사
나서기 두려웠겠지. 자기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많든 적든 모두들 강 객주에게 빚이 있었으니 빚을 탕감 받으려는 욕심도 있었을 테고…….
원규
(사령들의 기세에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일가를 서둘러 처형한 토포사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시일이 지체되더라도 감영으로 호송하여 사실을 명확히 규명했어야 했습니다. 공적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면 분명 무슨 사적인 이익이 관여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최 차사
함부로 장담하지 말게! 장수의 명예는 목숨보다 중하단 걸 모르는가!
원규
(지지 않고) 놈이 이리 미친 짓을 벌이는 건 분명 그만한 과거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썩지 않고서야 악취가 시작될 리 없지요.
최 차사
(버럭) 말을 삼가라 하지 않는가!
토포사가 잔혹했던 것은 사실이나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일 중으로 감영으로 보낸 자가 돌아올 것이니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65.섬 모처 솔 밭 (아침)
수십 마리의 소와 말을 모아놓은 곳에 해가 뜬다.
전날 밤과 달리 사령들 몇 명이 남아 불침번을 서고 있다.
< 第 五 日 >
최 차사(E)
자네와 내가 할 일은 그때까지 마지막 살인을 막는 것뿐이다.
66.원규 처소 안(아침)
뜬 눈으로 밤을 지센 원규가 홍사령의 보고를 받고 있다.
서안에는 불탄 배의 잔해에서 나온 물건들이 놓여있다.
홍사령
지난밤엔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키고 있던 말과 소도 이상 없습니다.
원규
섬에 있는 마소를 다 모은 것이 확실한가?
홍사령
예. 김인권 나으리의 말 한 필과 차사 나으리의 말 한필만 남겨 두었고 그것조차 지키고 있습니다.
이때 피시식- 꺼지는 등잔불.
원규, 하얀 연기가 오르고 있는 심지를 바라보더니 무심코 등잔대 위에 놓인 사기 등을 집어 드는데.
문득 그 무게를 가늠해 보는 원규.
황급히 상 위의 청동 추를 집어 들어 역시 무게를 비교해 본다.
상 위의 물건들을 바라보는 원규.
깨진 사기 조각과 중앙에 구멍이 뚫린 철 막대가 보이고…….
67.포구 (FLASH BACK)
낑낑대며 나무함을 배 안으로 옮기고 있는 차 선원과 정 선원.
나무함을 지물 상자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카메라, 나무함 속으로 쑥 들어가면.
중심에 축이 박혀 있어 양팔 저울과 같은 형태로 부착돼 있는 철 막대.
한 쪽 끝에는 불이 붙어있는 사기등잔이 고정돼 있고, 다른 쪽엔 청동 추가 매달려 있다.
원규(E)
범인은 선적될 함에 미리 불이 붙은 등잔을 넣어두었는데
처음에는 등잔의 무게가 추의 무게보다 컸습니다.
위쪽으로 올라가 있는 청동 추……. 반대로, 아래쪽으로 내려앉아 있는 등잔.
원규(E)
하지만 심지가 타면서 점점 기름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저울이 점점 균형을 맞춰가며 등잔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고…….
원규(E)
가벼워진 등잔불은 결국
이제는 거의 위쪽으로 기울어져 함의 천장에 닿을 듯 한 불꽃…….
검은 화약에 닿아 순식간에 솟아오르는 화염에서!
원규(E)
함의 위쪽에 준비된 심지에 닿아 발화가 된 것입니다.
두호는 이 장치를 이용하여 굿에 참석하고 있으면서 불을 지를 수 있었던 겁니다.
68.다시 원규 처소 안 (아침)
원규
조공에 불을 지른 이유는 발고자 중 하나인 호방을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인 듯 합니다.
최 차사
이상하군. 관아로 직접 나가지 않고, 배에 불까지 질러가며 호방을 오게 만들었다?
원규
범인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불러 들여야겠지요. 객주의 딸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장까지 해가며 섬으로 들어온 것도 역시 범인이 섬을 나갈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비산까지 준비해온 걸 보면 놈은 틀림없이 어딘가 치명적인 병이 있을 겁니다.
최 차사
허면 지물 같은 중요한 조공에 손실이 생기면 감영에서 조사하러 나온다는 걸 몰랐단 말인가?
원규
알았을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강 객주 사건을 재 취감하게 하여 무고를 밝혀내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기가 벌이는 살육을 죽은 강 객주의 복수로 돌리려고 할 겁니다. 상엿집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놈이 주민들의 동요와 두려움을 원한다면 필시 객주 딸의 시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최 차사
오늘 아침 시신이 사라졌다. 김치성 영감이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발견했다.
한발 늦었다는 원규의 탄식.
69.어느 실내 (오전)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
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희고 고운 소연의 얼굴.
누군가의 손이 목면으로 그녀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다.
곱고 맑은 모습이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는 소연의 얼굴.
70. 김치성 집 마당 (오전)
안채 마당에 서서 김 치성의 방을 바라보며 있는 원규.
인권이 댓돌 위에 서서 원규를 가로막고 있다.
원규
(외치는) 영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영감마님!
인권
병중에 계신 어른께 이게 무슨 무롑니까?
원규
(아랑곳 하지 않고) 남은 발고자가 누굽니까?
김 치성 대감 집의 하인들과 안채의 여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다.
인권
그만 물러가십시오!
원규
(일부러 더 크게 소리치는) 강 객주가 죽어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영감이십니다.
김 치성(E)
그들이 단순히 재산을 노려 강 객주를 발고했다 생각하나?
71.김치성 대감 집 방 안
간신히 몸을 일으켜 원규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김 치성 대감.
원규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김 치성
(깊은 한숨을 내어 쉬더니) 이 섬의 제지업이 번성하게 된 데에는 강 객주와 연이 닿아 있던 조정의 정채수 대감 덕이 컸네. 그 분으로 인해 청국과의 교역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지.
원규
…….
김 치성
하지만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노론이 권세를 쥐자 남인이었던 정채수 대감은 서학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네. 조정에서는 정채수 대감의 뒤를 캐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나는 물론이고 이 섬의 생계까지도 위태로워졌지.
원규
(쏘아보며) 희생자가 필요했던 겁니까?
김 치성
조달령과 장 호방이 나를 찾아와 알려주었네. 이 섬이 다시 평화로워 질 수 있는 길을……. 나는 이 섬의 안위를 위해 발고를 묵인했을 뿐이네.
원규
그래서 섬이 평안해졌습니까? (발끈해) 조달령과 장학수, 그리고 독기라는 놈은 모두 제지소에서 게으르고 문제가 많은 자들이었고 호방 또한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었던 자입니다. 이런 놈들과 무슨 섬의 안위를 논하셨단 말입니까!
김 치성
(목소리가 커진다) 나는 그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지 못했다. 내 비록 향리에 묻혀 사는 처지지만 사대부의 몸으로 어찌 천한 모리배 놈들과 어울렸겠나.
원규
그것입니까? 천한 장사치가 큰 부를 쌓고 천민의 아이들에게도 존경받는 것이 그리도 못마땅했습니까? 그래서 강 객주와 죄 없는 그 일가를 죽이는데 동조하신 것입니까? 대감께서도 그런 강 객주와 제지소를 같이 운영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치성
(벼락같이) 근본을 알아 예를 지키고, 의로운 것을 알아 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군관이라는 자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더냐!
반상의 질서가 엄연하거늘, 종놈들과 겸상을 하고 천한 백정 놈에게 장부를 맡겨 그 질서를 어지럽히니 이것이 죄가 아니면 무엇이 죄란 말이냐!
조정에 바칠 종이를 만든다기에 제지소를 허락한 것뿐이다. 그런데 종이를 팔아 돈을 모으더니, 그 돈만 믿고 천한 것들에게 왕 노릇하며 위아래 없이 날뛰었다. 죄 없는 자라 했는가! 천주학쟁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늘을 거스르고 성상을 능멸한 놈이다.
원규
(놀란다. 김치성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거짓 발고를 하신 겁니까?
김 치성
(감정을 수습하려 하나 너무 많이 왔다) …….
원규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 희생시켜야 유지되는 것이 이 섬의 평안입니까?
(비튼다) 천수를 다 누리셔야지요.
김 치성
이노옴! 말을 삼가라. (노려보다가) 내가 발고자라면 내가 일궈온 섬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을 내 놓을 것이다. (단호한) 하지만 난 아니다. 그 일로 나 또한 신하된 자의 도리를 잃게 되었고 다시는 성상의 부름을 받지 못하게 되었어! 이제 물러가라!
원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놈을 잡아야 합니다. 어서 남은 발고자를 가르쳐 주십시오.
병색이 완연하지만, 한 치의 허점도 찾아볼 수가 없는 깊은 눈매의 대감.
단호한 김 대감의 침묵에 입술을 꾸욱 무는 원규.
72. 마을 우물가 (오전)
누군가 칼로 닭의 목을 친다.
사람들은 원규를 본체만체 하고 문설주에 닭 피를 바른다.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마을의 모습.
집집마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져 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원규.
원규, 입술을 질끈 물고 가려는데……. 팔이 아프다.
팔을 보면 다시 피가 배어나온다.
홍사령이, 얼른 단검으로 옷을 찢어 환부를 풀어보면…….
피고름과 더불어 아예 구더기까지 나오는 원규의 환부.
홍사령
(경악해) 나으리…….!
원규
(역시 놀라는 표정이다)…….!
홍사령, 물을 떠 원규의 환부에 쏟아 붓고는 금창약을 발라 깨끗한 광목으로 감는다.
원규
피가 돌지 않을 만큼 단단히 동여매게!
홍사령, 단단히 동여 묶고 이로 천을 끊으면.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원규.
사령 하나가 달려온다.
사령2
감영에 갔던 자가 율학청의 검률을 데리고 왔습니다.
73. 차사 처소 안
대청으로 올라서며 차사에게 예를 갖춘 원규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감영에서 온 검률이 일어나 원규에게 예를 갖춘다.
원규
(마음이 급하다) 관아의 서류들은 찾아보았나?
검률
송구 하옵니다. 전갈을 듣고 급히 찾아보았사오나 보관되어있던 발고문과 관련 서류들이 모두 사라졌사옵니다.
최 차사
호방이 발고자이니 남아 있을 수가 없지.
검률
의금부로 사람을 보내면 며칠 안에 발고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차사
조사가 다 끝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경솔한 짓 하지 말게.
원규
시간이 없네. 범인은 오늘을 넘기지 않을 거야.
최 차사
관찰사께는 아뢰었는가?
검률
예. 섬 주민을 모두 문초해서라도 방화범과 살인범을 조속히 잡아 대령하라 하셨습니다.
시일이 길어지면 문책을 피하기 어려우실 듯 합니다.
원규
(말을 끊으며) 토포사는? 당시 토포사 어른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검률
알아보았사오나. 당시 토포사는 이미 돌아가셨다 하옵니다.
원규
언제 돌아가셨다 하던가?
검률
5년 전이라 하옵니다.
최 차사
누구인가 그 토포사가?
검률
역도들을 처형한 공을 인정받아 도총관으로 제수 되셨사옵고 한양 자하문 사시는…….
뭔가 알아채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원규.
충격으로 핏기가 없어지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원규의 얼굴에서.
이지상(E)
급제라…….
74.이지상 집 방 안 (FLASH BACK)
병석에 누워있던 이지상이 힘겹게 일어난다. 얼굴에는 땀이 가득하다.
갓을 쓴 청년 원규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이지상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가 되었다면…….
이제 너도 세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겠구나.
원규, 수건을 내밀면 그를 받아 땀을 닦는 이지상.
원규
요즘도 흉몽을 꾸십니까?
이지상
괘념치 마라. 요즘은 외려 그 꿈이 오지 않으면 내 몸 같지가 않다.
원규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대체 무슨 꿈이시기에 그리 강건하시던 분이…….
이지상
니가 나눠질 짐이 아니라 하지 않더냐!
원규
아버지…….
이지상
만일 수레를 끄는데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쳐야겠느냐 소를 쳐야겠느냐?
원규
…….
이지상
무릇 무관의 길을 힘이나 쓰는 일로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많은 공부와 명석한 판단이 필요한 법이다. 부디 나를 닮지 말 일이다.
원규
제가 따르고자 하는 무관이 있다면 오직 제 앞에 계신 분, 한 분 뿐입니다.
아버지를 망연히 바라보는 원규
이지상(E)
그렇다면 장부에서 비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 뒀느냐?
75.창고 안 (회상. 7년 전)
곱고 맑은 소연의 눈이 겁에 질려있다.
머리채가 흐트러지고 옷이 여기저기 찢겨있는 소연이 불안하게 주위를 돌아본다.
끌려오다 다쳤는지 소연의 할머니는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그런 할머니를 살피고 있는 어머니 곁에 겨우 울음을 그친 어린 동생이 칭얼댄다.
창고 밖에서는 토포사 이지상이 강 객주를 취조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강 객주(E)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지상(E)
네, 이 놈! 그 돈을 황사영에게 건넨 것이 사실이구나!
이실직고 하지 않는다면, 내 저 악물의 사지를 찢으리라!
강 객주(E)
아닙니다! 나으리. 그 돈의 대부분은 이곳 주민들의 정착금으로 빌려줬고.......
이지상(E)
그렇다면 이 장부는 무엇이냐! 이 장부에는 그보다 곱절 많은 돈이 나간 걸로 적혀있다!
강 객주(E)
이, 이건 모함이오! 난 결코 이런 장부를 만든 적이 없소이다!
76. 토포사 처소 앞 (회상)
나장, 사령들과 관속들이 늘어서있는 처소의 마당.
대청에 높이 앉은 이지상이 꿇려있는 강 객주에게 호통을 친다.
이지상
임금을 부인하고, 혹세무민을 일삼던 서학역당의 입으로 감히 누굴 속이려 하는가!
여봐라! 저 놈의 늙은 어미와 피붙이들을 끌어다 대령하라.
끌려나오는 소연과 가족들.
관졸들, 객주의 가족들을 끌고 와 객주 뒤에 꿇어앉힌다.
겁에 질린 소연은 아버지 뒤에 바짝 붙어 숨고, 어린 아들은 객주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공포에 떨고 있는 가족들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다가 옆에 있던 군관의 칼을 뽑아드는 객주.
사령들 모두 대경실색하며 칼과 창을 겨눈다.
강 객주
발고한 자를 내 눈 앞에 데려오게 하시오. 그럼 진실을 알게 될 것이외다.
이지상
오냐! 하찮은 장사치가 야수를 믿고 섬에서 왕 노릇을 하더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강 객주
(눈이 뒤집힌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천주쟁이가 아닌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관졸들이 상자를 하나 들고 와 댓돌 아래로 쏟아 붓는다.
묵주 등의 성물과 천주실의가 쏟아져 나온다.
절망적으로 표정 일그러지는 강 객주.
이지상
서학에 빠져 역심을 품은 것만도 능지처참할 일이거늘
어찌 네 죄를 모르고 어명을 받든 토포사를 겁박하느냐!
몰래 강 객주의 등 뒤로 다가온 사령이 강 객주를 내리치려는데...
강 객주, 눈치 채고 몸을 돌려 사령을 찌른다.
고꾸라지는 사령……. 동시에 강 객주를 덮치는 수 명의 사령들...
욱- 소리를 내며 상체가 앞으로 꺾이는 강 객주.
더 이상 길이 없음을 깨달은 듯 표정이 굳어버리는 강 객주.
속수무책으로 결박당한다.
강 객주
(울부짖는) 어서 발고자들을 데려오란 말이야!
이지상
야차 같은 놈이다. 감영까지 갈 필요도 없다. 모두 참하라!
사령들에게 붙잡힌 채 아버지에게 가려고 발버둥치는 소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들.
객주에게 뭇매가 가해지고, 사령의 팔을 뿌리치는 소연에게도 발길질이 날아든다.
꼬꾸라져 일어나지 못하는 소연.
77.내륙 마을 거리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망연히 생각에 잠겨있는 원규, 고통스럽다.
팔에선 피고름이 흐르고 그 피가 피투성이 맨발에 떨어진다.
78.내륙 마을 거리 (회상)
피투성이 맨발로 관졸들에게 끌려가는 강 객주와 그의 일가.
고문을 당한 듯 여기저기 살이 찢기고 뼈가 드러났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늙은 어미는 짐승처럼 끌려가고
더 이상 울 수도 없는 어린 아들은 짐짝처럼 들렸다.
객주만이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곳곳에 모여 지켜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애타게 바라본다.
강 객주
누, 누가 말 좀 해주게!
내가 결백하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지 않나!
그러나 객주의 시선을 피하며 외면하고 마는 주민들.
그런 주민들을 보던 객주의 눈이 반가움에 번쩍 뜨인다.
강 객주
허 서방! 자네 허 서방 아닌가. 어서 말 좀 해주게. 자네는 알지 않나.
허 서방, 잠시 객주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그제야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 강 객주.
얼굴이 차갑게 굳더니 이내 깊은 배신감에 분노로 일그러져간다.
79. 제지소 앞마당 (회상, 원규의 환타지)
두루마리를 펼쳐 죄상을 읊어가는 관졸의 목소리 뒤로 정렬해 있는 나장들과 사령들.
깊게 눈을 감고 있는 강객주.
그의 사지는 사방을 향하고 있는 네 마리의 소에 연결된 동아로 묶여 있다!
높은 단에 앉아 표독스럽게 객주를 응시하고 있는 토포사.
그 옆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젊은 군관.
어디선가 둥- 형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흥분한 듯, 발길질을 시작하는 소들.
분노에 몸을 떨기 시작하는 객주.
이지상
형을 집행해라!
두려움과 긴장이 감도는 주민들의 얼굴.
둥-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린다.
강 객주
(빠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고) 그래……. 모두들 내가 죽는 모습을 똑똑히 봐라.
내 기필코 네 놈들 눈앞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기필코…….
둥- 마지막 북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군관이 손에 든 깃발을 치켜 올리자, 각각의 소에 채찍을 가하는 네 명의 관졸.
순간 사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소들.
강 객주
내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날……. 내가 너희들의 피를 말리고 뼈를 바를 것이다!!!
우두둑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나고 강 객주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진다.
소를 끄는 관졸들이 버티는 소의 고삐를 억지로 당기고 잠시 후…….
피가 솟구치며 객주의 사지가 툭 툭 찢겨져 나간다.
그런 객주를 바라보는 발고자들.
오열하며 강객주에게 달려들다 사령들에게 끌려 나가는 허서방.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과 끝났다는 안도감에 말이 없는 주민들.
허서방의 메아리치는 절규만이 그들을 휘감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 섞여있는 원규. 도저히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린다.
찢겨나간 강 객주의 얼굴이 아무렇게나 땅에 떨어져 있는데…….
스윽- 움직이는 객주의 눈동자.
죽어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다 원규와 눈이 마주친다.
주르륵- 객주의 두 눈에서 흐르는 붉은 피눈물.
80. 만신당 앞 길
아래로 넓은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걷는 원규.
열에 들떠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있고 다리가 풀려 휘청거린다.
나무에 기대어 왼팔 소매와 광목을 와락 잡아 뜯으면 피고름이 흐른다.
만신(E)
오셨습니까, 나으리
깜짝 놀라 돌아보면 어느새 만신당 앞까지 와있다.
81.만신당 안
전과 종이꽃이 방 안에 가득하다.
상체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원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원규,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다친 팔은 만신이 치료를 했는지 깨끗한 광목이 감겨있다.
뜨거운 차를 들고 오는 만신.
원규
(민망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굿할 채비를 하는 것인가?
만신
진혼굿을 하려고 합니다.
원규
강 객주 말인가?
만신
죽은 이의 극락천도를 기원하고 산 사람을 위로 하자는 것일 뿐입니다.
원규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며) 그렇다면 굿이 필요한 이가 한사람 더 있을지 모르겠군.
만신
선친 말씀이십니까? 나으리께서는 아직도 그 우물에서 나오지 못하셨군요.
원규
(놀라는) 자네가 어찌.......
만신
혼신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원규
혼신이라……. (씁쓸히) 아직도 그 소리군.
만신
나리시야말로 팔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일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시면서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조금 전만 해도 나으리는 혼과 몸이 꼬여 사경을 헤매셨습니다.
원규
(흠칫 본다)……!
만신
불길을 바위로 누른다 하여 꺼지겠습니까?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마냥 칼로만 덮어두신다고 편안하시겠습니까?
(차를 따르며) 나팔꽃 씨앗으로 만든 차입니다. 나으리께 도움이 될 겁니다.
원규
(자세를 바로 잡으며) 견우자는 환각을 일으키지.
만신
숨어있던 내심이지요.
원규
내가 업혀 왔을 때 이 차를 마시게 했던가. 가르쳐 줬다는 혼신이 이 차란 말인가.
요사스런 부적으로 어리석은 주민들을 동요하게 하더니 이제 내게도 그런단 말인가!
만신
(달래듯) 나으리. 남을 해하는 부적은 없습니다. 좋은 것을 증가시켜 성취하게 하거나 액을 막는 것 뿐 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써준 부적은 객주의 원혼을 봉인하는 부적입니다.
원규
그렇다면 발고자들도 부적을 얻어 갔겠군.
만신
원혼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얻어갔겠지만 너무 많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묘하게 웃으며) 아마 객주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발고자인가 봅니다.
원규
(한숨을 내쉬며)발고자를 찾아 범인을 잡는다 한들 내가 어찌 내 아비의 일을 공명하게 처리할 수 있겠나. 더 이상 이번 사건에 간여할 수가 없어…….
만신
나으리. 잊으셨습니까?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심허로 말입니다. 그 우물에서 나오지 못하시면 나으리 또한 평생 마음의 병에 시달릴지 모릅니다.
나으리께서는 우물에서 나오는 길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원규
내가 알고 있다?
만신
선친께서 이미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82.인권 처소 부근 (오후)
두호가 인권의 집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권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두호.
83.인권 처소 방 안 (오후)
두호의 시선으로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잠입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인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두호,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는데…….
뒤쪽에서 두호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인권!
단검을 놓쳐버리고는 인권에게 달려들어 함께 얽혀 쓰러지는 두호!
살과 살이 부딪히는 거센 격투가 벌어지고……피가 튄다.
두호의 발길질이 인권의 가슴을 걷어찬다.
84.동 방 안 (오후)
열려있는 문으로 황급히 들이닥치는 최 차사와 홍사령.
방 안에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고, 바닥의 핏자국과 어지럽혀진 사물들만이 둘의
격렬한 격투를 증언하고 있다.
최 차사
(홍사령에게) 모든 자들을 동원하여 우마를 지키는 인원을 보충하고 섬을 샅샅이 수색하라. 그리고 너는 이 군관을 호위해라. 이 군관의 부친이 당시 토포사였다면 놈이 이 군관도 노릴지 모른다.
홍사령, 급하게 뛰어나간다.
85.강 객주 폐가 앞 (오후)
객주의 폐가 안팎으로 바글바글 몰려있는 주민들. 남의원도 보인다.
대청마루에 있는 사람들은 위패를 세우고 상을 차리며 굿을 준비하고 있다.
원규, 멀찍이 떨어져 폐가를 살피는데
자해를 했는지 온 몸에 피 칠을 한 허 서방이 다가온다.
허 서방
히히……. 이놈들 아무도 피해가지 못해, 아무도…….
강 객주 어른의 피가……. 우리의 피를 말리고, 우리의 뼈를 바른다고 했어…….
주민들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허씨만 놀라 아버지에게 달려가는데,
허씨의 눈엔 달려오는 아들이 객주로 보인다.
잘못했다고 빌고, 소리 지르며 바위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는 허 서방.
허 서방에게 몰려드는 몇 명의 주민들과 허 씨.
남 의원 벌써 동공을 살피고 나더니 혀를 차며 일어난다.
원규가 달려와 허 서방의 목 혈관에 손을 대고 맥을 살핀다.
원규
(앉은 채 노려보며) 아직 죽지 않았어! 어서 안으로 옮기게.
남 의원
이미 틀렸습니다. 살지 못 합니다
원규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 의원이라는 자가 손도 써보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 놈도 강 객주에게 큰 빚이라도 지었나? 그래도 이자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는 자다. (벌떡 일어나 남의원의 멱살을 쥐며) 너 같은 의원 놈들이 왜 먹고 사는 줄 아느냐? 그건 네 놈들의 잘난 재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질기기 때문이야! 어서! 어서 옮기란 말이야! (멱살 쥔 손을 푼다)
남 의원
(주위에) 옮기게..
허씨가 아버지를 들쳐 업으면 남의원이 허둥지둥 뒤를 따라 폐가 안으로 들어간다.
주민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굿 당으로 몰려든다.
원규, 흥분이 가시지 않아 씩씩거리다 강 객주의 폐가를 다시 보는데 촌로가 다가온다.
촌로
나으리. 이제 그만 가던 길을 가시지요.
원규
비켜서라! (촌로를 밀치고 발길을 돌려 서너 걸음 가던 원규, 멈칫 선다)
촌로
(따라 붙으며) 그렇게 모르시겠소? 며칠째 맑은 물을 마시지 못해 어린 것들이 앓아눕고, 물고기가 떼죽음하여 그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소. 놈들이 객주의 딸을 죽여 그 원혼이 진노한 게요!
고개를 돌려 대문을 유심히 바라본다.
대문에 누군가 먹으로 대충 그린 객주의 초상이 걸려 있고
그림의 한 구석에는 적문(赤文)이 적힌 부적이 붙어있다.
순간 낯빛이 변하는 원규.
86.원규의 처소 안 (오후)
급히 뛰어 들어와 두호가 그린 객주의 초상화를 찾아 펼쳐 보는 원규.
그림을 세심히 바라보다가 족자 테두리에 나 있는 붉은 선에 눈길이 멈춘다.
족자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던 분홍 색지를 뜯어내는 원규.
그림의 한 구석에 적혀 있는 폐가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의 적문(赤文)!
원규(E)
두호는 객주의 원혼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범인이 아니라 마지막 발고자입니다.
소연의 그림도 살피다가 그림 속의 노리개를 보고는 직금도와 노리개를 꺼내 들고 살핀다.
원규(E)
소연의 연서를 푸는 열쇠는 이 노리개의 문양 이었습니다.
87.제지소 앞 (오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소연의 시신이 누군가의 말에 실려 제지소로 향한다.
종이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말의 고삐를 잡아 잠시 서서 소연의 시신을 추스른다.
소연과 자신을 묶은 끈을 푼 남자는 시신이 떨어지지 않게 지탱하며 말에서 내린다.
소연(E)
꿈속에 님 보고 홀로 깨니, 희미한 달빛에
대나무 성긴 그늘만 임이 주신 정표 가득 얼룩집니다.
휑한 모습의 제지소를 바라보는 남자.
88.제지소 안 (FLASH BACK)
어둠 속에서 촛불이 세어나가지 않게 막으로 가린 제사상이 있다.
상 위엔 위패와 음식대신 음식의 이름을 쓴 종이들이 차려져있다.
종이 두루마기를 입은 두 사내가 절하고 일어나자
그 중 한 사내가 소매에서 향을 꺼내 초에 붙이려고 한다.
초로 향하는 다른 사내의 손을 잡는 사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
소연(E)
비갠 산 빛 연못에 짙게 어리던 날, 거문고 켜시던 님의 환한 모습
연화의 봄날은 다시올 수 없겠지만 거문고 소리는 아직 귓가에 맴돕니다.
하늘은 응당 알고 있을 진데, 어찌하여 막다른 길을 가시려 하십니까.
아버지의 한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임마저 잃을까봐 가슴이 저립니다.
안타까운 듯 바라보다가 포옹을 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상투가 엇갈리고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입을 맞추는 두 사내.
사내가 몸을 트는 순간 상투가 풀어지며 긴 머리가 출렁인다.
사내는 소연이다.
소연이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자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는 사내는…….
인권이다.
인권
이제 더 이상 제를 모시러 올 필요 없다.
소연
제가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이윱니다.
인권
이곳에 평장한 객주님과 가족들의 유골을 모두 습골 해 놓았다.
(보에 싼 작은 목곽을 내민다) 네가 올 때마다 놈들이 널 알아볼까 두려워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너마저 잘못 된다면…….
소연
(놀라 인권을 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목곽을 부여안고 또다시 서글피 운다)…….
인권
(울고 있는 소연을 보며) 놈들을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죽을 곳은…… 내 무덤은…… 너다. 소연아…….
흐느껴 우는 소연.
소연(E)
이름도 없이 보낸 타지의 고된 삶에도 모진 목숨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님의 무덤이 되었듯 님 또한 저의 무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89.차사 처소 안
섬의 지도가 펼쳐져 있는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원규와 차사.
소연, 원규(E)
바다에 대한 님의 흉통이 우릴 갈라놓았지만
풍악소리 그치고 붉은 비 내리는 날 바다 건너 님께로 가겠나이다.
원규
(읽기를 마치고 직금도를 노리개와 함께 차사에게 건네며) 바다에 대한 심허로가 있는 자는 배를 탈수도 없고 심한 경우 바다를 볼 수조차 없습니다.
소연의 짐에서 마비산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풍악소리가 그친다는 것은 대동 굿 끝난 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날 밤 함께 떠나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사흘 전 이 편지와 약을 전하려고 하다가 소연은 발고자들에게 들켜 죽은 겁니다.
최 차사
범인이 바다에 대한 심허로라는 건 알겠네만 …….
원규
(담담하게) 편지속의 대나무 성긴 그늘과 거문고는 모두 인권의 거처인 <경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연이란 이름이 흰 연꽃을 뜻한다면 경염정의 뜻과 편진 속에 연화의 봄날 역시 소연을 의미하겠지요.
산학에 능한 김인권이라면 마소 없이도 충분히 거열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최 차사
발고를 묵인한 대가로 제지소를 차지한 제 아버지의 치부가 드러날 것이 뻔한데 김인권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원규
저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도 토포사의 아들인 저로 하여금 제 선친의 치부를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김인권이 저에게 보내는 신호 입니다.
홍사령(E)
나으리, 말 대령 했사옵니다.
최 차사
(일어서려는 원규를 잡으며) 잠깐만. 그걸 알면서도 그자의 뜻대로 하겠다는 건가?
원규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제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 손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 자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최 차사
(장총을 건네며) 김인권의 입을 막게. 이 일은 여기서 조용히 끝내세.
(원규가 총을 받지 않자) 김치성 영감의 자제인 김인권과 천출인 두호는 신분이 달라.
김인권의 증언은 큰 풍파를 일으킬 거야.
원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김인권 뿐입니다.
최 차사
그 해에 많은 사람들이 서학자로 몰려 죽었네. 이 섬에서 강 객주 일가가 무고하게 죽은 것은 작은 부분일 뿐이네. 하지만 그 작은 일이 밝혀지면 자신들의 지난 과오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어.
원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린다) 송구 하옵니다. 항명한 죄는 따로 벌을 청하겠습니다.
최 차사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그 분들에겐 젊은 군관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명심하게.
원규
이제야 아버님을 그렇게 괴롭혔던 흉몽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듯 싶습니다.
(결연하게) 저는 소 대신 수레를 치는 아버님의 과오를 되풀이 하진 않을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원규
90. 숲 속 (FLASH BACK)(밤)
달 밝은 숲 속의 개울가.
소연이 개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쪽진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어디선가 들리는 낮은 인기척 소리에 놀란 소연.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다 보퉁이를 들고 숲 속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소연이 떠난 자리에 들어서는 세 남자. 조달령과 발고자들.
91.차사 처소 앞
원규가 차사의 처소에서 나오면 홍사령이 말 두 마리를 끌고 기다리고 있다.
원규가 말에 올라 출발하고, 홍사령이 막 말을 타려는데 차사가 따라 나와 부른다.
차사에게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는 홍사령.
차사는 홍사령에게 장총을 건네며 은밀하게 뭔가 지시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홍사령.
속도를 붙여 달리기 시작하는 원규.
뒤따라 달리는 홍사령.
92.당산나무 언덕 (FLASH BACK)
당산나무 뒤에 숨어 숨을 고르는 소연.
초조하게 뒤를 살피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당산나무 언덕으로 향하는 인권.
상기된 표정으로 당산나무로 다가가는데.
소연, 인권을 보는 듯싶더니 다른 쪽을 바라본 후, 갑자기 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순간 당황하는 인권.
이내, 세 명의 남자가 소연을 뒤쫓는 모습이 보인다.
황급히 그 뒤를 따라 숲으로 달리는 인권.
93.강 객주 폐가 마당
천둥이 요란하게 울고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
요란한 징 소리, 몰려드는 주민들로 발 디딜 틈 없는 폐가에서 진혼굿은 절정에 와있다.
넓게 펴진 수왕천 위에 배, 돈 등이 놓여있고 무당이 그 천을 가른다.
그 앞을 급히 달려가는 원규. 잠시 후 홍사령이 원규를 따라 달린다.
무당을 향해 정성을 올리는 사람들 사이로 허씨가 나와 원규와 홍사령이 간 길을 바라본다.
94.절벽 위 (FLASH BACK)
숨을 헐떡이며 숲을 빠져 나오는 인권.
저 멀리 절벽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순간, 가슴을 부여잡으며 인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데.
소연도 절벽 끝에 닿아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95.제지소 가는 길 (오후)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숲 속을 달리는 원규와 장총을 메고 뒤따르는 홍사령.
원규의 표정은 더욱 결연해지고.
96.절벽 위 (FLASH BACK)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일어나는 인권.
가슴을 부여잡고 한발 한발 소연에게 가는데
절망한 소연은 털썩 무릎을 꺾는다.
비틀 비틀 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재촉하는 인권의 시선에
소연에게 다가가는 조달령과 장학수와 독기의 모습이 보이고,
탕! 울리는 한 발의 총성!
털썩 무릎을 꿇고 마는 인권.
그들이 떠난 절벽까지 기어간 인권 가슴을 쥐어뜯으며 짐승의 소리로 절규한다.
97.제지소 안
마치 아버지에게 딸을 돌려보내듯, 이제 다 끝났다고 다독이듯
소연의 얼굴이며 머리를 쓸어내리는 인권.
모든 창과 문이 닫혀 있어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는 어두운 제지소 안.
횃불 하나만이 희미하게 제지소를 비춰주고 있다.
두호의 팔과 다리를 묶어 거열을 준비하는 인권.
두호, 정신이 드는지 눈을 뜬다.
인권
여인에 대한 금수의 욕정이 은인을 물어 죽일 만큼 큰 것이었더냐!
두호
은인? 그래 은인은 은인이지. 나 같은 미친개를 만들어 주었으니...
98. 바닷가 (회상)
두호가 물에 빠진 소연을 건져내어 옷을 벗기고 주무른다.
달려오다 그 광경을 보고 굳는 강 객주.
주무르던 두호가 소연의 숨이 돌아오자 지친 듯 그 옆에 드러눕는다.
객주가 오자 힘겹게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는 두호.
갑자기 뺨을 치는 강 객주.
놀란 두호 앞에 소연을 그린 그림을 툭 던지는 강 객주.
강객주
(너무도 차갑게) 네 놈 또한 사내임을 내 미처 생각 못했구나.
아무 변명도 못하고 놀란 눈으로 객주와 소연을 바라보는 두호의 얼굴에서
99. 바닷가 (회상)
소연이 잠겼던 그 물 속에서 머리를 간신히 내밀고 있는 두호. 두호의 손은 뒤로 결박 당해있다.
파도가 지나가면 머리가 잠겨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수면 위로 머리가 올라왔다 잠겼다 하는 두호.
죽음에 대한 공포로 하얗게 질린다.
두호
연심을 품었건 아니건 그런 것은 어차피 상관도 없었다.
100. 제지소 안 (오후)
제지소에 큰 대자로 누워 매달려 있는 두호.
두호(E)
누구든 신분의 구애 없이 능력에 따라 잘 살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허나 결국 나는 자기 딸을 살려낸 것조차 죄가 되는 천한 놈일 뿐이었다. 어차피 그럴 것을 왜 희망을 갖고 증오를 품게 해 그런 개죽음을 당하느냐 말이다.
인권
면천시켜준 객주의 은혜를 금수가 되어 배신으로 갚는 구나
두호
결국 너도 욕정에 눈이 먼 살인귀일 뿐이다.
너를 죽이고 나도 죽어 이 살육 극을 멈추려 했다. 너에겐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용서는 죽어 객주께 빌 것이다. 어서 죽여라.
무표정한 얼굴로 두호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인권.
두호의 사지는 각각 동아줄에 묶여 있고,
그 동아줄들은 네 개의 제지소 기둥에 고정되어 있는 네 개의 도르래에 이어져 있다.
도르래를 지나 줄을 따라가면, 다시 하나의 굵은 줄로 합쳐져서는 제지소 중앙 천장의 도르래를 통과하여 수백 근의 추에 연결돼 있다.
추에 나있는 구멍에는 줄이 걸려 있고, 물레에 감긴 그 동아 역시 천정의 도르래와 연결돼 있어,
동아를 잡아당겨 풀면 추가 떨어지며 두호의 사지에 매인 줄이 사지를 찢을 것이다.
물레를 감아 줄을 당겨 두호를 높이 끌어 올리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
벽에 걸려있던 횃불을 뽑아 수로에 던져 꺼버리는 인권.
101.제지소 앞 (오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원규와 장총을 들고 있는 홍사령.
바람이 불어와 제지소의 문을 거칠게 닫아버린다.
102.제지소 안
칠흑 같이 어두운 제지소 안.
두호의 신음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칼을 뽑아드는 원규. 거총을 하는 홍사령.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신음이 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이동하는 원규와 홍사령.
그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종이옷의 마찰음, 사각사각…….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원규.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원규와 홍사령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사각사각 또 다시 들려오는 종이옷 소리.
원규,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그만 날카로운 작두에 어깨를 베인다.
원규, 어깨를 부여잡으며 칼을 떨어뜨린다.
다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사각사각…….
그 쪽을 향해 불을 뿜는 홍사령의 총!
뭔가 낌새를 느낀 원규가 급히 돌아서는데 전에 원규를 공격했던 창에 달린 판자가 덮쳐온다.
몸을 날려 엎드리면 코앞에서 멈추는 판자.
간신히 빠져나와 일어나는 원규에게 다른 판자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몸을 날려 원규를 밀어내고는 판자에 맞아 쓰러지는 홍사령.
제지소의 창들이 차례로 원규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하고 창에 달린 줄들이 원규를 향해 날아온다.
떨어지는 창을 피하고 날아오는 줄을 피해 뛰는 원규.
간신히 난간을 잡았으나 난간이 부러지며 아래층으로 떨어져버리는 원규.
창으로 들어온 여린 빛으로 드디어 제지소의 전경이 시야에 드러나고.
사지가 묶여 높이 매달린 두호의 모습이 기괴해 보인다.
원규가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두호를 죽이기 위해 줄을 풀러 가는 인권.
원규(E)
멈추시오!
제자리에 멈춰 서서 원규를 바라보는 인권.
인권을 향해 수발총을 겨누고 있는 원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원규를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서서 동아줄로 걸어가는 인권.
탕! 인권의 바로 옆 기둥에 맞는 탄환!
원규
강 객주 일가가 무고당한 것을 내가 알았으니 사사로운 복수는 이제 멈추시오. 다시 조사하여 죄가 있는 자는 죄 값을 치루고 억울하게 죽은 자는 복권할 것입니다.
인권
(비웃는) 아비가 저지른 일을 자식이 스스로 들춰내겠다?
왜 하필 당신이 섬에 오게 됐는지 생각해 봤나. 모든 것이 객주 어른의 뜻이다.
원규
그건 우연일 뿐이요. 사사로운 복수를 원혼의 탓으로 돌리지 마시요.
만일 계속 하려고 한다면…….
인권
(버럭) 공적에만 눈이 먼 토포사가 무고한 일가의 피를 뿌리더니
이제 그 자식 놈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쏴라! 네 손에 내 피를 묻혀라.
그러면 네 애비가 그랬듯이 앞으로 그 손에 더 많은 자의 피가 묻을 것이다.
묶여있는 두호의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간다.
뒤돌아 동아줄에 다가서는 인권.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는 원규.
인권을 겨누고 있는 방아쇠 위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차마 쏘지 못하고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있는 원규.
인권, 줄을 잡으려 하는데…….
원규(E)
(속삭이듯) 아버지의 한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임마저 잃을까 가슴이 저립니다.
인권, 돌아보면 소연의 직금도를 들고 있는 원규.
원규
제가 님의 무덤이 되었듯 님 또한 저의 무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직금도를 내밀며) 소중한 이가 죽는 걸 봤으니 저라도 살의를 품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객주와 소연을 생각해서라도 나와 같이 이 섬을 나갑시다. 나가서 7년 전
일을 밝히시오. 내가 돕겠소. 진정 강 객주의 원혼이 나를 부른 것이라면 바로 이 때문이오.
원규, 계속 인권을 설득하며 인권이 잡으려던 줄을 살핀다.
인권이 눈치 채지 못하게 복잡하게 얽혀있는 줄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원규의 시선.
인권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이 놈은 살아서 이 섬을 나가지 못해.
철커덕! 장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울린다.
원규
(황급히) 그 총 치우라!
천천히 다가오며 인권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홍사령 원규의 말을 듣고 총을 내리다 인권을 본다.
원규, 급히 돌아보면 인권은 줄을 잡으려 한다.
움찔 놀라서 총을 겨냥하는 홍사령.
인권, 줄을 잡고 돌아선다.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엔 묘하게 편안한 웃음이 스치는 듯 하고…….
줄을 당긴다.
원규
(절규하듯) 쏘지 마!
그와 동시에 발사되는 홍사령의 총.
물레의 줄이 풀리기 시작하고 두호의 몸이 출렁 솟구친다.
인권이 심장에서 피를 쏟아내며 소연의 곁으로 쓰러진다.
몸을 날려 물레의 줄을 끊는 원규.
묶여있던 두호가 툭 떨어져 내린다.
인권에게 가는 원규, 목에 손을 대 맥박을 확인하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애상 어린 뜨거운 눈으로 인권의 죽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103.제지소 앞
검은 구름 탓에 칠흑같이 어두워진 제지소 앞.
사령들, 목 뒤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홍사령을 업고 나온다.
그 뒤를 이어, 두호를 부축해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령들.
눈물을 흘리듯 제지소 벽의 나무 결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원규가 제지소 밖으로 걸어 나가자,
제지소를 빙- 둘러싼 채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마을 사람들.
손에는 낫이나 칼 등의 흉기가 들려 있다!
위기감을 느끼고 칼을 빼어드는 사령들, 사람들을 막아서는데,
자리에 멈춰 서서 두호를 주시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원규
(무섭게 외치는) 뭣들 하는 짓인가! 물러서라!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두호가 죽어야 객주의 원혼이 분노를 가라앉힐 겁니다.
원규
(얼굴 무섭게 일그러지고) 이 자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용서될 거라 생각하나?
너희들도 이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분노하는) 정작 객주가 모함을 받았을 때는 돈 몇 푼 때문에 외면했던 자들이 이제
다른 이의 피로 용서를 구하려 드는구나.
어서 길을 터라!
수발총을 그들에게 겨누는 원규.
흉기를 손에 쥔 채 살기 띈 눈빛으로 다가오는 주민들.
분노한 얼굴로 무리를 겨누고 있는 원규의 총 끝이 가늘게 떨려오고…….
그런 원규의 얼굴 위로 인권의 소리가 들린다.
인권(E)
쏴라! 네 손에 내 피를 묻혀라.
그러면 네 애비가 그랬듯이 앞으로 그 손에 더 많은 자의 피가 묻을 것이다.
촌로
나으리……. 두호를 저희에게 내 주시오.
원규가 망설이는 사이 사령들에게 쌓여있던 두호가 서서히 고개를 든다.
사령들을 밀어내고 주민들 앞으로 나서는 두호.
두호를 끌어내리는 사람들.
사령들이 막아 보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광기에 쌓인 주민들에게 밀려나기만 한다.
쑥- 두호의 몸에 칼을 꽂는 허씨.
이내 사방에서 두호에게 달려드는 주민들.
낫과…… 죽창과…… 칼과…… 온갖 흉기들을 닥치는 대로 꽂아댄다.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힌다.
온 몸이 피로 범벅이 되어서는 계속 두호를 난자하는 사람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하는 두호.
두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았다가 비처럼 쏟아진다.
톡, 원규의 옷자락에 떨어지는 붉은 피.
툭 툭, 사람들의 얼굴 위로.
툭 툭 툭, 사령들의 옷자락에도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원규, 놀란 눈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붉은 피!
마치 화폭에 붉은 물감이 뿌려지듯 서서히 붉게 채색돼 가는 사람들의 모습.
넋이 나가서 서 있는 원규와 광기와 공포에 빠져 있는 사람들…….
더 이상 볼 수 없는 듯, 고개를 돌리는 원규.
104.김 치성 대감 집 마루
김치성의 방 안.
천장에서 톡톡 흘러내리는 핏물.
핏물을 따라 내려오면 들보에 목을 매 죽어있다.
105.강 객주 폐가 마당
굿을 마무리 하는 만신.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하늘에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106.제지소 안 (원규의 환상)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서는 제지소 안을 천천히 바라보는 원규.
인권과 소연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가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리고 없는 인권과 소연의 시신.
이제 다 끝났다는 듯……. 편안해진 얼굴로 그들의 빈 자리를 묵묵히 바라보는 원규.
복잡하게 얽혀있는 밧줄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밧줄을 하나 잡아당긴다.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듯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퉁, 퉁, 퉁 어디선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굉음을 내며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기계들 사이로 땀에 젖은 초지공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원규,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면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들과 땀 흘려 일하는 초지공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강 객주가 보인다.
어디선가 나타난 인권이 강 객주에게 다가가 공손히 목례를 올린다.
강 객주,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보면
열린 문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서 있는 소연의 모습이 보인다.
107.바다 위 (환타지)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작은 쪽배 하나가 바람이 이끄는 데로 여행을 한다.
배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인권과 소연.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평안함과…… 나른함과…… 자유로움…….
저 멀리 아련해지는 두 사람의 배.
108.바다 군선 위
감영으로 돌아가는 군선 위.
배의 이물로 나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원규.
심한 토악질 소리에 돌아보면 차사가 난간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다.
여기 저기 게워내며 나뒹구는 사령들.
난간에 기대앉은 원규 관복 소매를 걷고 상처 부위의 붕대를 벗겨낸다.
아물어 가는 상처.
하지만 크고 깊어서 흉터가 크게 남을 것 같다.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보는 원규.
FIN.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