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3장 주석
세례 요한의 사역 (누가복음 3:1-14)
요한의 세려는 새로운 시대를 도입한다. 우리는 그 사건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야 된다. 요한에 대해서는 영광스런 것을 말했다. 그는 필경 하늘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자였고, 그것이 이 지상에도 놀라운 축복이라고 했다(1:15, 17).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사막(광야)에서 잃어버렸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 그대로 머물렀다(1:80). 이제 마침내 그 여명이 돌아왔다. 그 날을 기다리던 자들에게는 새벽을 기다리던 자들 이상으로 기쁜 날이 돌아온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하자.
Ⅰ. 요한의 세례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출현과 같은 시기이다. 그 시기가 여기에 특기되어 있는데, 이 점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묵과한 것이다. 그 때의 정확한 지시를 봐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1. 그 시기는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이방 정권의 연대를 빌어서 정해졌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피정복민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뜻이요, 따라서 메시야가 와서 영적 나라, 영원한 나라를 세우게 되고, 다윗과 유다의 온갖 현세적 권위와 통치권이 몰락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1) 로마 황제의 재위 연한으로 시기가 매겨졌다. 디베리우스 황제, 곧 12명의 가이사 중 세 번째 가이사요, 지극히 악독한 자요, 탐욕과 술 취함과 잔인성의 노예인 황제 재위 15년이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말을 빌면, 말하자면 그런 악독한 인간이 먼저 등장한 것은 언제나 사탄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잔악하고 가증스런 도성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긴긴 투쟁이 있은 후 유대 민족은 근래에 와서 로마 황제의 일 개 현이 되었고, 이 디베리우스 황제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한 때,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는 이렇게 이름을 떨쳤고 수많은 나라가 조공을 바쳐오던 그 나라가 이제는 로마의 보잘 것 없는 한 부속국이 되었고, 단순히 지배받을 뿐만 아니라 짓밟히고 있다.
─ En quo discordia cives Perduxit miseros ─
시정(市政)의 부조화는 얼마나 값비싼 결과를 초래하는가 !
율법수여자가 이제는 유다의 발 사이에서 떠났다(창 49:10 참조). 그리고 그 증거로서, 그들의 공적 활동은 로마 황제의 연한으로 날짜가 매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실로가 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2) 그 시기는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는 성지(聖地)의 상당한 부분을 다스리고 있던 그 총독들의 정부에 의해서 산정 되었다. 이것은 사실 그 땅의 노예성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총독들은 모두가 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민족의 슬픈 변화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민족의 "통치자들"은 "그들 자체"의 출신들이었었고(렘 30:21). 그것이 그들의 자랑이었었기 때문이다. "정금이 어찌 이리 빛을 잃었는고 !"
[1]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라고 했다. 즉 그가 대통령이나 행정장관이었다. 다른 학자들도 그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는데, 그는 사악한 인간이요, 양심도 없는 자라는 것이다. 그는 학정을 했다. 그러다가 수리아 총독 빌테리우스(Vitellius)에게 자리를 뺏기고, 로마로 호송되어 자기의 학정에 대한 답변을 해야 했다.
[2] 다른 세 기자들은 그들 "분봉왕"(tetrachs)이라고 칭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 의하면, 그들이 지휘한 지역을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분봉황 한 사람이 완전히 헤롯 대왕의 정부 밑에 들어 있는 그 나라의 "4분의 1"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어떤 자들은 그 정부의 명예로운 요직에 앉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본다. 분봉왕들은 그 나라의 "제 4"의 자리요, 또는 "제 4급"의 통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즉 황제가 "첫째요," "지방 총독"(proconsul)이 "둘째"요, "왕"이 "세째"이며, 이러한 "분봉왕"(tetrach)은 "네째"라는 것이다(라이트푸트).
2. 유대 나라 가운데 있는 유대 정부에 의해서 시기가 정해졌다. 이것은 유대인은 타락한 민족이요, 그러므로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개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2절).
안나스와 가야바는 대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은 한번에 대제사장 한명을 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대제사장이 둘이 있다. 그들은 순번을 지키지 않았거나 남의 때에 마구 집전한 자들이다. 한 대제사장 1년을 직무하면, 그 다음 해는 다른 대제사장이 집무하게 되어 있었다(흑자들의 말이다).
한 사람은 대제사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자"(Sagan) ─ 유대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 요, 대제사장이 유고시에 그를 대리해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할 수 있었다. 또 어떤 자의 말에 의하면, 하나는 대제사장이었고, 아론을 상징하는 자이며, 그가 곧 "가야바"(Caiaphas)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시"(nasi) 곧 산헤드린 공회의 두목이요, 모세를 상징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오직 한 분의 대제사장이 있으니, 모든 자들의 한 주님이 있으며, 모든 심판은 바로 그에게 위임되어 있다.
Ⅱ. 요한의 세례의 기원과 성향을 보자.
1. 그 기원은 "하늘로부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고 했다(2절).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충분한 사명과 지시를 받았다.
이 표현법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게 대해서 쓰여졌던 말과 같다(렘 1:2). 요한도 하나의 예언자이기 때문이요,(물론 예언자 이상이기도 하다) 또 그에게서 오랫동안 끊어졌던 예언이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즉 그의 아버지에게처럼 천사를 통해서인지,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서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해진 그 말씀은 그에게 만족을 주었으니, 우리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는 요한을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로 천사가 그의 아버지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게 하기 위함이다. 천사는 당시 사가랴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을 다짐해 주었었다.
주님의 말씀은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준비"한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가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감옥"에서도 "매이지" 않듯이, "빈들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가 되어 있던 에스겔에게까지 그 길을 찾아갔고, 밧모 섬에 가 있는 요한에게도 찾아갔다.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다. 이제 그의 나이 30에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성전의 관습에 따라서 성전 일을 맡아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물론 그는 30이 되기 전에 성전에서 미리 5년간 후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를 보다 더 영광스런 사역에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이 그를 호출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성전의 공문서에는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사가랴의 아들 요한은 집무를 시작하니라."
2. 요한의 세례이 범위와 목적은 자기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떠나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3절). 먼저 "그는 요단 부근 각 지방에 갔다." 그곳은 자기가 거주하던 인근이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처음으로 차지한 지방이다. 거기서 제일 처음으로 복음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요한은 그 나라의 가장 고적한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자기가 거주하던 사막을 떠나 주들이 사는 지역으로 갔다. 은거 생활을 "지극히 즐기던" 자들도 하나님이 군중 속으로 부르시면 또한 유쾌한 마음으로 은거 생활을 "바꾸고" 나와야 되는 법이다. "그는" 빈들에서 "나와" "각 지방으로" 들어갔다. 또 어떤 특징 되는 징표, 곧 새로운 "세례의 전파"를 가지고 갔다. 어떤 종파나 파당이 아니라 "신앙 고백" 곧 현저히 구별되는 뺏지를 달고 갔다.
그 표적 또는 의식은 그 자체로 보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늘상 사용되고 있던 "물로 씻음"이었다. 개종자들이나 어떤 위대한 스승에게 가려는 자들은 그런 의식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의 의미는 "죄를 떠나 회개"하는 것이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는 모든 자들은,
(1) "자기들의 죄를 회개해야"하며, 자기들의 잘못을 "슬퍼해야"하고, "또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할 의무를 지게 된다. 죄를 뉘우침으로써 그들은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정직"하려고 애써야 했고, 다시는 죄 짓지 않기로 "약속하고," 약속한 "선을 행하도록" 애써야 했다. 요한은 장로들의 전통이 부여했던 그런 의식 준수 자체로 사람들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촉구했고, 그들의 행실을 바꾸고 "그들의 모든 죄에서 떠나고" "새로운 심령을 가져" 새로운 삶을 살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이제 시작된 이 복음의 목적은, 사람들을 이전과는 달리 신앙이 있고 경건케 하며, 거룩하고 성스러우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명철하고 자비로우며, 의롭고 정직하며, 사랑하고 친절하며, 범사에 선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2) 그 세례를 통하여, 그들은 회개하면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이 준 세례는 그들에게 죄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는 의무를 주었듯이, 한편으로는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은혜롭게 설득해 주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여 너희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하여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 하리라"(겔 18:30). 구약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어진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일이다.
Ⅲ. 요한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을 보자.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이사야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사 40:3).
그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쓰여진 말씀이다." 즉 이사야가 하나님께 들었던 말씀이요,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한 바이며, 그의 말은 다가오는 후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 장차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있으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바로 그 음성이 요한이다. 아주 분명한 음성이요, 큰 음성이며, 알아듣기 쉬운 음성이다. 그는 외쳤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다닐)길을 평탄케 하라"고, 요한의 임무는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즉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기질을 조성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영접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누가는 마태나 마가가 인용한 것보다 더 긴 인용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도 요한의 사역에 적용시키고 있다. 즉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리라"는 말씀이다(5, 6절). 하몬드(Hamnond) 박사는, 이 구절은 유대 민족이 그 불충실성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황폐를 예고한 말씀으로 풀이한다. 즉 그 땅은 로마 군대들의 개척자들로 인하여 평평한 땅이 될 것이요, 그 군대들에 의해서 폐허로 변할 것이며 그 결과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과 회개치 않은 자들 안에 현저한 구별이 생기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요한의 사역의 성질과 ─ 그의 사역이 서론적 역할을 한 ─ 그리스도의 복음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1. 겸손한 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은총으로 "부요해질" 것이다. 즉 "낮은 데" 있고 "습한" 곳(겸손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상징-역주)에 있는 "모든 골짜기들은 가득 차게(메워)" 되리라는 것이다.
2. 교만한 자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낮아지게 되리라. "자기 자신들의 기초" 위에 서 있는 "자신(自信)감에 넘치는" 자들과 "자기 자신들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스스로 기만당하는" 자들은 경멸을 자초하리라. "모든 산들과 작은 산들이 낮아지리라"고 했다. 그들이 회개하면, 티끌로 돌아간다. 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다.
3.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전향하게 되리라. "굽은 길"과 "굽은" 심령들이 "곧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아무도 곧게 할 수는" 없지만(전 7:13), 하나님은 스스로 은총을 통해서 죄인들이 굽게 한 것을 다시 곧게 하시기 때문이다.
4. 하늘 가는 길을 막고 방해하던 난관들이 사라지리라. "험한 길이 평탄해지리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큰 평화"를 가질 것이니, "아무 것도 그들을 범하지 못하니라." 그 복음은 하늘가는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찾기" 쉽고 "평탄케" 하여 "다니기" 쉽게 만든다.
5. 그 큰 구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완전히 드러난다. 그것에 대한 소식이 멀리까지 퍼진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했다(6절). 즉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보게 된다. "모든 자들이 그 구원을 본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 앞에 놓을 것이요, 그것은 그들에게 제공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사람들 중 다소가 그것을 "보고" 향유하리라. 그 특권을 누릴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만들고, 사람들을 평등케 하고 그리스도와 은총의 길을 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복음이 인간의 마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닦아지면,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을 영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Ⅳ. 요한이 자기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준 일반적인 경고와 권고를 보자(7-9절). 마태 복음에 의하면, 요한은 바로 이 말을 "그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 3:7-10). 그러나 여기서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말하고 있다(7절). 이것은 사실상 요한이 자기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준 설교의 요지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요지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던 설교와 똑같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중요한" 인물이라 하여 아첨하거나 "다수"라 하여 찬사를 보내며 아부하지 않았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했던 그대로, "무리"들에게 죄를 책망해 진노의 경고를 보냈다. 그들이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그처럼 나쁜짓들을 범했기 때문이다.
1. 인류를 부패시킨 그 죄책은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generation)"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독약에 피해를 받은 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독약이 되었다. 이 사실은, 지상에 인류를 존속시키며 "독사의 둥지"(지구:역주)를 파멸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크게 드러내어 준다. 하나님은 한 번 물로 그런 일을 행하신적이 있으며, 앞으로 불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2. 이 독사의 자식들은 다행스럽게도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데, 전에도 그러한 죄인들이었다면 진노가 그들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수효가 많아 "무리"라고 하는 사실이 그들의 안전을 조금도 보장해 주지 못하며, 그들을 모두 처단하라고 하여 하나님이 "치욕"을 겪거나 "손해"를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미리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이러한 진노에 대한 경고를 받을 것이요, 그것을 피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3.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는" 길은 "회개"하는 수밖에 없다. 회개의 세례를 받는 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다가오고 있는 진노를 피하라는 "경고를" 자기들이 받았고, 그래서 자기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장차 올 일을 두려워하여 소돔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4. 회개를 고백한 자들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려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8절).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회개의 고백은 했지만, 다가오는 진노를 피할 수 없느니라." 회개는 그 열매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인지 아닌지 판가름된다. 우리의 행실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변화를 입증해야만 한다.
5. 우리가 마음으로나 생활에 있어서 진정으로 성결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고백과 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고백은 아무 소용이 이러다.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지대한 의무인 회개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꾸미지 "말라." 우리 자신이 경건치 못한데 우리 조상이 경건했다는게 무슨 소용 있으며, 우리 자신이 계약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우리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6.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인 특권이나 외형적인 신앙 고백을 믿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지 않으며, 우리들이 없이도 하나님 자신의 영예와 이권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멸절되고 패망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를 높이 세우실 수 있다. -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되게 하실 수 있다.
7. 만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우리가 더 중대한 회개의 고백을 하면 그만큼 더,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도움과 격려가 크면 클수록 큰 만큼 더, 우리의 멸망은 가깝고 확실한 것이 된다.
이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있는데,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즉 악한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가 이전보다 더 무섭게 되었다. 반면에 이제 회개한 자들에게 대한 격려 또한 더욱 고무적이다. "이제 너희의 운명은 너희의 행실에 달려 있다. 자신을 살피라."
8. 열매 없는 나무는 마침내 불에 던져진다. 불이 그런 나무를 위한 최적의 장소이다. 열매, 곧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모든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서 열매 있는 봉사를 못한다면, 그 나무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연료로 쓰여져야 한다.
Ⅴ. 요한은 자기에게 의무를 물어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자세한 지시를 주고 있다. 즉 "무리"(people)와 "세리"와 "군병들"에게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몇몇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하고 물은 것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요한이 자기들에게 일러 줄 만뿐 아니라 자기들이 할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자기들이 기뻐하는 것 혹은 요한이 말해 준 모든 것을 행하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와 "세리"와 "군병"은 자기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자들이요, 그래서 더 잘해야만 되는 자들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매우 소홀히 여겼고, 거기에 무식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구체적인 지시를 요구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음 사실을 명심하라.
1. "세례를 받은" 자들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자들은 기회 닿는 대로 그들을 가르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마 28:19, 20).
2. 일반적인 말로 회개와 새 결심을 한 자들은, 자기들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서, 구체적인 개혁의 실례를 보여 주어야 한다.
3.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알려고 하고 물어야 한다.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한 첫 마디의 훌륭한 말은,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나이까?"(행 9:6 -개역 성경에는 없음)라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이 사람이 뭘 할 것인가?"하고 묻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맺어야"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에 요한은 각자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대답해 주었다.
(1) 그는 "무리"에게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즉 자선을 베풀라고 했다. "옷 두 벌 가진 자", 그래서 한 벌의 여유가 있는 자들은 그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한 벌도 없는 자에게 주라." 최소한 "빌려 주라." 아마 요한이 자기의 청중 중에는 지나치게 잘입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누더기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려하게 입은 자들은 궁핍한 자들을 구제해 주라고 한 것이다. 복음이 원하는 것은 "자비"이다. 희생제사가 아니다. 복음의 뜻은 우리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넉넉하게 "음식"을 가진 자는, 옷을 영물론 있게 가진 자들처럼, "일용할 양식"이 없이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의 청지기일 뿐이요, 우리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자들이다.
(2) 요한은 "세리들"에게도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 그들은 로마황제의 세금 수납원들이다. 그들에게는 "너희에게 지정된 것 이상을 받지 말라"고 했다(13절). 그들은 정부와 상인들 중간에서 정의를 시행해야 하며, 세금을 사람들에게 과도히 메기거나, 법이 정한 것 이상으로 무거운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책이 백성들이 군주를 속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인 만큼, 자기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하찮은 권력 부스러기라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악용하기 쉽다. "그런 일은 안 된다. 정한대로 지키라.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를 위해 거두어들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 취하여 자신들을 부유케 하지 말라." 공적 세원은 공공 사업에 투자되어야 한다. 사리사욕에 이용하지 말라.
요한이 세리들에게 그 직위를 사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더 이상 세무서에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 직임 자체는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공정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라.
(3) 그는 "군병들"에게도 그들의 의무를 일러주었다(14절). 어떤 이들은, 이 군병들은 유대 민족 출신이며 유대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로마 군인들이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에 봉사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로마인들도 유대인들이 유대를 지키는 것은 신임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한 초기의 사례가 된다. 흔히 군인들은 신앙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세례 요한의 엄격한 신앙고백까지 따르려 했다. 그들은 그가 한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기들의 생명을 자기들의 손에 쥐고 있으며, 종종 죽으며, "평화 속에 발견되기" 위해서 자기들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관심 있게 묻는 자들이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요한은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하지 않았으며, 군복무를 이탈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군인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죄악에서 보존하는" 것이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은 자기들에게 할당된 "사람들('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사람들을 압제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도 폭력을 쓰지 말라(강제로 빼앗지 말라). 너희들의 임무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을 막는 것이니라. 누구에게는 폭력을 쓰지 말라. 아무 사람이든 흔들지 말라(원문의 뜻은 그런 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겁주지 말라. 정의의 칼 뿐 아니라 전쟁의 칼은 오직 악행자들에게만 공포가 되고, 선행자들에게는 보호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 주둔 지역에서 무례히 행치 말라. 그들에게 공갈로 돈을 탈취하지 말라. 평화시에 전쟁의 피를 흘리지 말라. 남자나 여자에게든 비정한 짓을 하지 말라. 군인들이 종종 그렇듯이 마음을 황폐케 하지 말라." 또 아무도 "거짓으로" 정부에 "고발하지"말라.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뇌물을 취하는 일이 없게 하라.
[2] 군인들은 "동료 군인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도 안 된다. 혹자는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라"(개역은 "속여 빼앗지 말라"-역주)라는 경고는 특히 동료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다. "서로 상관에게 고자질하지 말라. 너희가 악감을 품고 있거나 무시해 버린 상급자들, 또는 자리를 빼앗긴 자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무도 압제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풀이를 한다. 그것은 칠십인역의 구약성서 구절 인용에서 취한 해석이다.
[3] 군인들은 폭동에 가담하거나 봉급에 불만을 품고 지휘자들과 다투어서는 안 된다.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 너희가 동의한 금액을 받는다면, 그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말라." 사람들을 억압하고 피해를 주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에 대한 불만이다. 자기들이 가진 것에 결코 족한 줄 모르는 자들은 남의 것을 탈취해서라도 자기의 소유를 늘이는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자기들의 봉급에 족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종들에게 대한 법칙이다. 불만에 빠져 있는 자들은 스스로 많은 유혹에 걸려들고, 현재 있는 것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투옥 (누가복음 3:15-20)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가 공개 석상에 등장하는 장면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색별이 보이면 멀지않아 태양이 떠오른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Ⅰ. 무리들은 요한이 사역과 세례로 인하여 메시야와 그분이 이제 오셔서 문밖에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된다. 이리하여 주의 길은 "예비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인간의 기대가 고조되었을 때는, 그 기대하던 것이 오면 배로 더 잘 받아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세례 요한이 전파한 우수한 교훈, 그 위에 놀라운 신적 권능이 동반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계획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메시야가 출현할 시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홀이 유다를 떠났다. 그들에게는 로마의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율법 수여자마저 유다의 발 사이에서 떠나버렸다. 왜냐하면 헤롯이 최근에 산헤드린 회원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의 70 주(週)는 이제 다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나라가 막 도래할 것 같은 정황을 보았다(눅 19:11). 유대인들의 부패상이 이 때처럼 개혁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곤경이 이 때처럼 구원을 절실히 바란 때도 없었다.
2. 그들의 다음 생각은 "이 사람이 와야 할 그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모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심중으로" 요한에 대하여 "그가 혹 그리스도신가? 하고 의론했다." 또는 추론했다. 그는 실상 그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던 메시야의 외형적인 위세나 장대함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거룩하고 엄격했고, 그의 설교는 힘과 권위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이며, 멀지않아 그의 가면을 벗고 보다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생각이 잘못이겠는가?"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추리한 것이 이런 방식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자.
Ⅱ.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라는 영예를 지닐 존재는 전혀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참으로 메시야이신 분에 대한 기대를 확고히 갖게 해 주었다(16, 17절). 외치는 자 또는 전령으로서의 요한의 직책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들이 해야 할 바를 물어 왔을 4 그들이 할 바를 말해 주면서("너희는 이것을, 너희는 저것을 해야 한다"), 그는 그들이 해야 할 보다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즉 멀리 않아 출현할 메시야를 기대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이 그들의 "이론"과 요한에 대한 추측에 대한 "답변"이 되었다. 그가 그들의 생각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 선언을 함으로써 그들에게 "대답했다."
1. 요한은 자기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성령"께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또 "그것"을 임하게 하든가, "그것"에 기초해서 역사할 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회개하라"는 권면을 할 수 있었고, 회개하면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고만 했다. 즉 그는 그들에게 회개를 하도록 작용하거나 그들에게 속죄를 선언해 줄 수는 없었다.
2. 요한은, 말하자면, 그들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로 송부했다. 요한은 그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파송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사람들에게서 얻는 모든 관심을 그분께 양도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더 이상 자기가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논의"를 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참으로 메시야이신 분을 기다리도록 하고자 했다.
(1) 요한은 메시야가 실상 자기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자인했으며, 나아가서 모든 점에서 자기보다는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야말로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자격없는)자"라고 했다. 즉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의 신 끈을 풀어 드리는 제일 비천한 종노릇을 할 자격도 없다고 했다.
요한은 "예언자"이다. 또 "예언자 이상"이다. 어떤 구약의 예언자 보다 위대한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요한보다 위대한 예언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언자들과 또한 요한이 의존하여 예언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1:10, 11).
이것이 바로 요한이 설교한 대(大)진리이다. 그러나 그의 말의 표현법을 보면, 그것은 요한의 겸손을 말해 준다. 요한은 그 설교를 통해서 주 예수를 위해 "정의를 실행할" 분만 아니라, 역시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있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감히 다가설 수도 없는 자요, 나는 그의 종노릇도 못할 자이니라."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비천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요한은 메시야가 자기보다 큰 "힘"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했다.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그분은 한다. 즉 신실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나, 위선자들과 형식을 꾸미는 자들에게 공포를 줌에 있어서도 능력이 많으시다."
그들은 요한이 놀라운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가 지니고 있는 권능과 비교하면 그 권능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1] 요한은 "물론 세례를 주는"일 이상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이 징표를 통해서 자신을 정결케 씻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심령으로 세례를 베푸실"수 있으며, 또 그러하실 것이다. 즉 그는 심령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성령을 줄 수 있다. 밖에 붙어 있는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로"만이 아니라, 속에 있는 "불순물"까지 정화시키는 "불로도" 씻는다. 불은 금속을 "녹여" "새로운 형"을 만든다.
[2] 요한은 "구별하는" 교리만을 전파할 수 있다. 즉 말씀과 표적으로 "진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별하는"교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그의 손에 키"(부태)를 들고 있어서, 그것으로 밀과 쭉정이를 완전히 갈라놓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타작 마당은 "그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것을 "정화시킬"것이다. 그리고는 불신적이고 회개치 않는 유대인들을 그의 교회 밖으로 내던질 것이며, 자기를 추종하는 신실한 모든 자들은 그의 교회 안에 굳게 지킬 것이다.
[3] 요한은 복음을 수용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말할"수는 있다.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처럼 "의인들에게," "의인들은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위로를 줄"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실제로 그렇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알곡을 자기의 곳간에 모아들일"것이다. 그는 이제 선하고, 진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자들을 모아 지상에 있는 자기의 교회로 들이실 것이다. 그의 지상 교회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는 하늘에 있을 자기의 교회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기서 영원히 안식할 것이다.
[4] 요한은 단지 위선자들에게 "경고하고,"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경고를 시행할 수 있다. "겨"와 같은 자들, 경솔하고 헛되고 무익한 자들을, "그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실 것이다."
본문 중에 보면, 요한은 말라기 3장 18절, 4장 1, 2절을 언급하고 있다. "타작 마당이 정하게 되는" "그 때에," "너희는 돌이키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마솥같이 불탈 그날이 오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요한의 설교에 대해서 "기타 등등" 하는 식의 말(18절)을 하고서 끝맺는다. 즉 "그는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면하여 전파했다"고 그런데 그런 것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다.
첫째, 요한은 "열정적" 설교자였다. 그는parakalw/n ─ 권면하였다. 즉 간절히 청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고 친근감을 지닐 수 있게 말했다.
둘째, 그는 "실천적인"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권면"이었다. 즉 그들의 의무를 촉구하고, 실행하게끔 지도하는 것이었지, 아름다운 사변을 즐기도록 한 것이 아니었다.
셋째, 그는 "대중적인" 설교자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자기들의 사역에 임하고 있는 자들이며, 사두개인들은 "자유로운 사상"을 하는 자들로 자처하는 자들이었지만, 요한은 직접 "그 무리들에게",pro.j to,n lao,n ─일반 민중들에게 말을 했으며, 그들의 역량에 자신을 맞출 수가 있었다. 즉 그는 실상 그들에게 대해 대성공을 자신할 수 있었다.
넷째, 그는 "복음전도적인" 설교자였다. 왜냐하면 본문에 사용된 단어euvhggeli,zeto는 "그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권면"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그분"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고 고무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의무를 이야기해 줄 때는 그들의 의(義)와 또한 힘으로써 역사해 주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다섯째, 그는 "말에 능한" 설교자였다. "그는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전파했다."pollav me.n kai. e[tera ─ 많은 것, 그리고 다른 것들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그는 많이 전파했다. 하나님이 모든 뜻을 선포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또 그는 설교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했다. 그래서 한가지 진리를 이해하고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은 다른 진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Ⅲ. 요한의 설교는 완전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그가 한창 일할 수 있을 때,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에, 헤롯의 악의에 의해서 투옥되었다(19, 20절). "헤롯 분봉왕이 그(요한)에 의해 책망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와 정을 통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헤롯이" 그 밖의 많은 "악한 일을 범했기" 때문이었다(한가지 점에서 사악한 자들은 흔히 다른 많은 일에도 악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롯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요한을 죽일 음모를 계획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사악성에 한 가지 악을 "더하게"된 것이다. 이 죄악은 실로 다른 "모든 죄 위에" 있는 큰 죄였다.. 즉 그는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그 찬연히 빛나는 등불을 등경 밑에다 숨긴 것이다. 그가 요한의 책망을 참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과 조언을 받는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다가가는 자들이 있더라도 별로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나라 전역을 다닐 자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헤롯의 이러한 행위를 들으면, 지극한 동정과 비애를 품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일을 허락해 주신,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빈들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었던 자는 이제 침묵을 지켜야만 되는가? 성전 뜰에 자리를 잡았어야 할 그런 설교자가 감옥에 갇혀야만 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서 요한의 제자들의 신앙에는 시련이 왔다. 요한을 거부한 자들의 불신앙은 이렇게 처벌을 받아야 했다. 요한은 이렇게 하여서 설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수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선도자란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이제 그리스도를 위한 예비가 큰 일년 반 가량 이루어졌으니, 그는 그리스도에게 길을 양보해야 했다. 태양이 떠오르면, 물론 새벽 별은 사라져야 한다.
예수의 수세(受)와 족보 (누가복음 3:21-38)
복음서 기자 누가는 그리스도가 세례 받은 지 근 일년 후에 요한이 투옥되었지만 투옥 사건을 예수의 수세 사건 전에다 기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요한의 직무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고 나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Ⅰ. 그리스도가 세례 받은 간단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러 갔고, 그렇게 했다(21, 22절).
1. 본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그때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그 때는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그들 중 제일 나중에 세례를 받으시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겸손했고, 지극히 미천한 자들처럼, 스스로 명성을 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세례를 통해서 무리들이 자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 것을 보았다. 그러자 등장했다.
2.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세례 받을" 때에 "기도"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는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세례 받으시면서 기도하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죄를 고백하지 않으셨다. 고백할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기 아버지(하나님)와의 교제를 지속시키고자 하셨을 것이다.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적인 성례전의 내적이고 영적인 은총은 기도에 의해서 일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러므로 성례 전에는 항상 기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때 하나님의 은혜의 표적이 자기에게 나타나 주기를 기도했을 것이고, 그러자 즉시 그 은혜가 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은혜가 자기에게 드러나기를 기도했고, 성령의 임재를 기도했다. 그리스도에게 약속되어 있던 것을 그는 기도로 얻었다.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주리라........"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기도를 존귀하게 하시려 했으며, 우리에게 기도의 의무를 주시고, 기도하도록 고무시키고자 하셨다.
3. 그가 기도하자, "하늘이 열렸다." 권능으로 물을 갈라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던 그분이 이제 자기의 권능으로 또 하나의 유동체인 공기를 갈라서 거룩한 가나안과의 교통을 개통하셨다. 그리하여 그 가나안이 그리스도에게 공개되었고, 그에 의해서 우리에게도 공개되었으니, "그것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다. 죄가 하늘을 닫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 하늘을 다시 여셨다. 기도란 "하늘을 여는" 규례이다. "두드리라. 그리하면 네게 열릴 것이다."
4.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분 위에 임했다." 우리 주 예수는 이제 이전보다 더 충만한 성령을 받으시고, 예언자적 직능을 위한 자격을 갖추셨다(사 61:1). 그가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주의 영이 그 위에 임했다."
이제 그의 일을 격려하는 뜻에서, 가시적 증거가 나타났다. 그것은 또한 세례 요한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요한은 이 표적이 있게 되면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는 통지를 미리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성령이 형체(形體:a bodily shape)로 임했고, 따라서 성령이 하나의 인격적 실체(substance)라는 것이 계시된 셈이요, 단순히 신성(神性)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의 시작때 부터, 삼위일체가 완벽하고 명확히, 가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세례에 가장 적합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는 뱃지로서의 세례식문을 만든 자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했다.
5.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었다. 즉 하늘 아버지, "탁월한 영광(벧후 1:17 의 문자적 의미는 그렇다)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 받는 아들이니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본문과 마태복음에서는 그 말이 그리스도에게 들려진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리스도를 두고 "이는 내 사랑 받는 아들이다"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이는 내 사랑 받는 아들이다"라고 하는 표현은 요한에게 통고해 주는 뜻으로는 아주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너는........" 하는 표현이 역시 적합하기 때문이다.
메시야에 대해서는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 하는 예언이 미리 있었다. 또 "내가 그를 나의 장자로 삼으리라"(시 89:27)고로 했다. 또한 그는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택을 기뻐하는 자"가 되리라는 예언도 있다(사 42:1).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렇게 선포된 것이다. "너는 내 사랑 받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Ⅱ.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한 긴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더 간략히 되어 있다.
1. 그의 나이가 나와 있다. "그가 시작할 때는 30세쯤 되니라"고 했다. 옛날에 요셉도 30세에 바로 왕 앞에 섰다(창 41:46). 다윗도 그때에 통치하기 시작했다. 또 이 나이에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완전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민 4:3).
라이트푸트 박사는 그 표현법을 봐서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는 이제 만 29세가 되었고, 티스리(Tisri) 달(月)을 맞아, 30세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후로 예수는 3년 반을 살았고, 32세 반(6개월)이 되는 때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서는 "3년 반"이란 그리스도 사역의 기간은 잘 알려진 기간이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반" 동안 하늘이 닫혀 있었다(눅 4:25; 약 5:17). 또 그 기간은 메시야가 계약을 확충해야 할 반(半) 주간(週間)이다(단 9:27).
이 기간을 예언 문서에서는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식으로 표현했다(단 12:7; 계 12:14). 또는 42개월 또는 1천 2백 60일로도 표현했다(계 11:2, 3 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겸비한 모습으로 전파하신 기간과 일치하여, 증인들이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도록 정해진 시간이다.
2. 그의 족보가 있다(23절 이하). 마태도 그런 족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 이상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가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내는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점을 말하고자 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가 다윗의 위(位)를 물려받을 상속자라는 점을 밝히려 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가(家)의 남계(男系) 상속자인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게 족보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누가는 그리스도가 "여인의 자손"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다. 여인의 자손은 뱀의 머리를 깨뜨려야 할 자이다. 그래서 누가는 족보를 위로 아담에게까지 높이 끌고 올라갔다. 한편 그는 요셉의 아버지가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의 아버지인 엘리 또는 헬리에게서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성경(KJV)이 모두 "which"(한글에는 생각하고, '그 이상은'으로 함-역주)라는 말을 삽입해 넣은 것은 올바른 변역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which로 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었다라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예수", 그는 "요셉의, 엘리니 맛탓의........아들"이다 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는 셋의, 아담의,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8절 우리 성경은 '그 이상은'하고 올라갔으므로 역시 예수가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으로 읽어지지가 않는다 - 역주).
예수의 족보를 쓴 두 복음서 기자의 차이는 말에 흠을 잡으려는 믿음 없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나 오늘날 시대에 있어서나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제거되고 만 걸림돌이다. 마태는 솔로몬에게서 족보를 끌어냈는데, 솔로몬의 자연 혈통은 여고니아에게서 끝나고 말며, 그 법적 권리는 스알디엘에게 이양되었으니, 그는 나단 곧 다윗의 다른 한 아들의 집안 출신이었다. 누가는 바로 그 혈통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유다의 다른 모든 왕들을 일축해 버렸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 모든 난해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 때문에 복음서의 신성한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왜냐하면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들의 지식으로 이 족보를 편찬했거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받아 쓴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있던 족보책의 신빙성 있는 기록을 보고 베껴 써야 했다. 따라서 기자들은 그 기록 문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기록문들 속에서 그들을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가계를 발견했고, 그것을 그대로 마태가 옮겨 적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23절)이란 말의 의미이다. 그것은 본래 요셉만을 가리키는 "소문난 대로"의 뜻이 아니라, 뜻이 아니라, uti sancitum est lege - 책에 들어 있는 대로라는 뜻이다. 마치 기록 문서에서 찾아 본 대로라는 뜻이다. 예수가 아버지 쪽으로나 어머니 쪽으로나 다 같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족보는 다윗 족속 자체의 기록에서 발췌되었다는 점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발췌문은 원 족보와 비교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럴 필요를 못 느낀 것이다. 나아가 기자들은 원 족보를 변경했더라도 자기들의 이득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란 사실은, 이 족보가 진정한 사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케 해 준다. 유대인들은 족보 문서가 3, 40년간 기록된 다음에 가서야, 이러한 발췌문을 만들었고 ─ 이 점에 있어서는 복음서 기자들도 충분히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 그 때에는 이미 원본은 나라와 민족과 함께 다 분실되었거나 파손된 뒤라는 사실을 주목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노아 사이에 한 가지 난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를 다소간 곤란하게 하는 문제이다(35, 36절). "살라"를 "가이난의 아들"이라고 했고 가이난은 "아밧삿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살라가 이박삿의 아들이다(창 10:24; 11:12 - 우리 성경 창세기에는 "아르박삿"이라 했다 - 역주). 창세기에는 가이난이란 사람을 찾을 길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구주의 시대 이전에 구약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 번역자들이 자기들 자신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가이난이란 이름을 넣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좋다. 그리고 "헬레주의적 유대인"들에게 쓰고 있는 성 누가는 그 번역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이난이란 이름을 우리가 여기서 대하게 된 것이다.
이 족보는 "……는 아담의 아들이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1) 어떤 자는 그 말이 아담에게 해당하는 걸로 본다. 그는 특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의 후손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2) 또 어떤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면, 이 족보의 마지막 어귀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자손(Son)"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Son)"이다. 따라서 그는 실로 하나님과 아담의 자손들을 중재하는 중재자가 되기에 적합하며, 자기 자신을 통해서 아담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에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