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청년 노동자 송학선, 총독 사이토를 찌르다
그는 안중근을 흠모한 청년 노동자였다
1926년 4월 28일, 11시께부터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서편의 금호문 부근을 한 청년이 서성이고 있었다. 창덕궁은 이틀 전 세상을 떠난 순종 황제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금호문이 빈소의 출입문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제는 순종의 붕어로 3․1운동 때와 같은 거사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4월 27일부터 서울 시내의 경찰병력을 증강했다. 돈화문 앞에 임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은 물론 기마 순사와 헌병까지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청년은 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평상화를 신고 있었지만 품에는 흰 뼈로 된 손잡이의 칼날이 4촌 5푼가량 되는 고급 과도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이틀 전부터 창덕궁 부근을 서성이면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오께 일본인 세 명이 탄 무개차 한 대가 창덕궁으로 들어갔다가 조문을 마치고 나왔는데 청년은 중앙에 앉은 자가 신문이나 책 등에서 보고 새겨둔 총독 사이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사이토 총독’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그는 자신이 그동안 준비해 온 거사를 실행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사이토를 뒤따르던 청년은, 인파에 막혀 방향을 바꾸어 다시 돈화문 쪽으로 올라오던 무개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비호같이 자동차 왼쪽 승강대로 뛰어올랐다.
그는 왼손으로 차창을 잡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 뒷자리 중앙의 살찐 자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자 왼쪽 앞자리에 있던 자가 급히 손을 들며 일어나 저지하는 순간, 그는 그자를 먼저 쓰러뜨리고 사이토라고 생각한 자의 가슴과 복부를 찔러 쓰러뜨렸다. 거사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청년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려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갑작스런 사건에 부근에 있던 기마 순사가 경적을 불며 그 뒤를 추격하였고, 조선인 순사 한 명이 달려들었다. 청년은 순사를 찔러 쓰러뜨리고 다시 달아났다. 뒤이어 몰려온 수십 명의 일경들에 쫓기며 접전을 벌이던 청년은 결국 머리에 상처를 입고 체포되었다.
금호문 의거, 그는 스스로 결단하고 결행했다
청년은 거사의 성공을 믿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이토로 여기고 처단한 자는 사이토와 체격과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佐藤)였다. 사토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차에서 맨 처음 그의 칼을 맞은 국수회(國粹會) 부회장 타카야마(高山)와 조선인 순사는 사망했다.
사이토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 새로 부임할 때 신한촌노인단의 독립운동가 강우규의 폭탄 공격에 이어 두 번째 공격을 당했지만 이번에도 죽음은 그를 피해 갔다.
청년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어떤 단체나 조직의 성원도 아니었다. 그는 금호문 의거라 불리게 되는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오직 스스로 결단하고 결행했다.
이 스물아홉 살 청년의 이름은 송학선(宋學善, 1897~1927). 송학선은 서대문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우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공부를 중단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했다. 그는 인쇄소 직공, 시골 정미소에 발동기를 판매하는 일본인의 농기구 회사의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발동기 운전과 수선기술을 배웠던 노동자였다.
어릴 적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서부터 안 의사를 흠모하게 된 송학선은 일본인 회사에서 차별을 겪으면서 반일의식을 길렀다. 자신의 반일의식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그가 선택한 것은 조선총독의 제거였다.
이토를 처단하여 세계에 일제의 야욕을 알린 안중근 의사처럼 그는 자신의 거사를 통해 일제에 대한 투쟁과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1926년 3월 수리 중이던 경성사진관의 부엌에서 양식칼을 발견하고 “내가 사이토를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는데 오늘 이 칼을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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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의거를 보도한 당시의 사건보도 기사. <동아일보>(왼쪽)와 <시대일보>(오른쪽) |
송학선이 금호문 의거를 계획하게 된 것은 그가 장충단에서 열리는 자전거대회에서 밀감과 얼음 장사를 하려고 준비하다가 순종의 붕어 소식을 듣고서였다. 장춘단에 나갔다가 장사 물품을 팽개치고 돌아온 그는 창덕궁 주변을 지키면서 사이토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 선고, 그리고 순국
송학선은 체포될 때까지 자신이 처단한 자가 조선 총독이라고 믿었으므로 취조 과정에서도 당당하게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뒤에 자신이 처단한 자가 사이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크게 실망했다.
놀라기는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청년의 거사가 단순 사건이 아니라 총독을 겨냥한 것이라는 걸 알고 보도를 통제했지만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이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일제는 송학선을 ‘살인 및 상해죄’로 기소하여 예심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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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의 사형집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6․10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고,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7월에 첫 공판이 열렸는데 법정에는 몰려든 방청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법정에는 견학을 빙자하여 몰려온 경성법학전문학교, 법정학교 학생들로 가득 찼다.
송학선은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희석시키려는 재판장의 심리에 맞서 일관되게 ‘총독의 처단이 목적’이라는 걸 밝혔다. 그와 재판장의 문답에서 드러나듯 그의 거사는 당시의 의열 투쟁처럼 어떤 특정한 주의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송학선은 1926년 7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할 뜻이 없었으나 가족의 뜻에 따라 항소하였고 11월 10일 경성복심법원은 다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가족들은 다시 상고하였지만 고등법원은 이 상고를 기각하였다.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경성복심법원 검사의 입회 아래 비밀리에 송학선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다음 날 일제는 가족들에게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지를 보냈다. 부친과 아우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해 장례를 치렀다. 향년 서른 살.
그는 여느 의열 투쟁과는 달리 거사를 단독으로 계획하고 집행했다. 순수한 민족적 의분에서 비롯된 그의 의거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순종 서거 후 동요하고 있던 학생층과 일반 대중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송학선은 일경에 체포될 무렵 부근에 있던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고 몇 차례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의 의거는 신문에 보도되면서 학생들의 민족적 의분을 높였다. 그래서 그의 공판정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금호문 의거는 사이토 총독 처단에는 실패하였으나 당시 조직적인 무력 항쟁의 길이 막혀 있던 국내외 상황을 급변시켰다. 송학선의 의열 투쟁은 가라앉고 있던 민족운동을 고무하여 6·10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송학선의 공훈을 기렸다. 해방 후 17년 만이었고, 그의 사후 35년 만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는 다시 잊혀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출처: ppss.kr http://ppss.kr/archives/117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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