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여행
고환에서 만들어진 정자는 남자의 성적 흥분에 의해 정관과 정낭과 요도를 지나 정액의 파도와 함께 여자의 난소를 향해 항해한다
2-3억 마리의 정자는 질 속의 산성비를 맞으며 전쟁터의 병사처럼 죽어간다
죽은 정자들이 산성 지대를 알칼리로 만드는 참호작업에 의해 조금씩 길이 나고 정자들은 고지를 향해 가는 병사처럼 전진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백여 마리의 정자가 난관卵管에 안착한 난자를 향해 간다
난자에게 유도된 한 마리의 정자만이 수정을 하고 나머지는 죽는다
생명의 도약을 향한 정자의 꿈은 수정을 통해 시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다
껍질을 벗는 뱀처럼 새 몸으로 태어나기 위해
유전자는 회귀한다
생명은 십만 팔천 리 길을 지나 제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우로보스’처럼
영원회귀를 한다
여수에서 다대포 앞바다에서 혹한의 겨울을 난 흑기러기는 번식을 위해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로 날아간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거리 약 10배에 해당하는 1만km를 날아가는 흑기러기는 편대비행을 해서 고공의 세찬바람과 기압을 헤쳐 간다
해와 달의 위치와 지구자기장의 신호로 뇌 속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흑기러기
생명력이 흑기러기의 전신갑주全身甲冑이다
북극의 바닷가 절벽에 내려앉은 흑기러기는 알을 낳고 부화한 새끼들의 날개는 부푼다
시간의 바람이 불고 생명의 불꽃은 다시 나는 연습을 시작한다
시네마천국
목숨들은 수수께끼에 도달하기 위해 먼 길을 가는 순례자이며 유전자 디자이너는 생명의 퍼즐을 즐기는 표현주의자입니다
유전자에는 생명 이야기가 무지개 뱀처럼 꼬아져 있습니다
나는 천일야화의 한 페이지를 넘겨 인간의 스토리를 읽는 남자
유전자사슬에는 삼십억 년의 생명시나리오가 강물처럼 흐릅니다
고사리가 되거나 은행나무로 자라거나 수국으로 피거나, 금붕어가 되거나 독수리가 되거나 코끼리가 된 아려야식阿黎耶識은 새 시나리오를 쓰고 몸은 새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에로와 스릴러 영화 수억 편을 본 내 몸이 지금 생에 출연했습니다
지구는 목숨의 양초 불로 도배를 한 장엄미사가 한창인 사원, 캠브리아기에는 삼 억종의 양초가 불을 밝혔다고 전합니다
삼엽충 뼈와 고사리 잎맥들의 불꽃 목숨이 얼어붙은 화석을 보고 나는 영생환상에 중독됩니다
종이책처럼 낡지도 않고 청동거울처럼 녹슬지도 않는 유전자지도는 타임캡슐을 탄 황금 책입니다
천일야화의 대하스토리를 읽는 나는 세하라자드의 이야기에 취한 남자, 문명의 도끼자루가 썩어도 생명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카오스
내 몸을 이룬 원자들의 나이는 50억 년
가스분자였다가
대양의 소금물과 하늘의 대기였다가
마그마의 용암과 화강암이었다가
박테리아였다가 고생대의 고사리였다가
중생대의 은행나무와 익룡이었다가
빙하시대의 맘모스였다가 삼나무 열매였다가
시체를 뜯어먹는 굼벵이였다가
호모 일렉투스였다가
50억 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수억 겹의 인연으로
지금 내 몸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네
나는 숨은 질서 속에서 펼쳐지는 에너지의 기문둔갑과 천변만화의 고해가 만드는 인연의 파도와 유희를 상상하네
나는 사물의 기표 아래서 미끄러지는 실재의 얼굴이 인드라망처럼 펼쳐졌다가 접히는 ‘초끈’과 ‘양자도약’의 마야세계를 상상하네
파계한 수도승처럼 전생의 공부와 청빈을 잊어버렸더니 오장육부에 스며든 삼독은 바다보다 깊어있네
나는 삼천대천세계의 은하세계를 비춘 연화장 에너지가 내 몸의 과녁을 지나 불생불멸의 자리로 가는 화엄세계를 상상하네
연화꽃밭
어머니의 자궁에서 난자가 수정한 순간, 아뢰야식에 기록된 기억은 나방처럼 생명의 불꽃에 이끌려 육체를 얻으면서 인간나비가 되었다
어머니의 산도를 지나 배꼽에 탯줄을 달고 나왔으나 빛과 소리가 사방에서 칼끝처럼 일어서는 도산刀山지옥이었으니 때는 녹음방초의 세상이었다
검은 혼돈의 육체에서 색성촉미향色聲觸味香의 아홉 구멍이 터지면서 외부의 감각이 들어왔다
인간나비의 의식은 거북이 껍질처럼 단단해져서 반들반들한 거울이 되었다
만화경萬花鏡에 비친 세상의 모든 파문과 그림자가 홀로그램이었다
희로애락의 고해를 건너가는 일엽고주一葉孤舟처럼 인간나비는 시간의 숲속을 날아가야 했다
판도라행성의 새 영웅이 되어 부귀공명을 누리는 프로그램을 인간나비가 꿈꾸었다
신들이 선물했다는 판도라행성은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가 가득한 지구였다
희망만이 밤바다의 등대처럼 빛나는 상징의 숲
그러나 꿈 해몽가의 밝은 눈으로 보면 판도라행성은 인간 마음아래 자리한 아수라와 아귀의 다른 표현이었다
땅과 하늘의 마야 인연들이 모여 칠색무지개를 이룬 엘도라도가 연화꽃밭처럼 펼쳐졌다
세포 도시
고해상도 현미경으로 찍은 세포를 들여다보면 세포는 하나의 도시국가입니다
3만개의 단백질 교환센터가 에너지와 물질을 풀어 고도질서의 세포 도시를 운영합니다
중앙에 세포핵이 성전처럼 있고 핵산에는 생명체의 시원인 DNA가 이스라엘의 성궤처럼 모셔져 있군요
질소염기 AGCT의 알파벳으로 쓰여진 유전암호는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염색체 23쌍은 500쪽 4000권의 장서로 채워진 도서관과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100조의 세포도시가 모여 복잡계의 질서를 이룬 은하성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생태계는 약 3천만 종으로 분류된 생명연합의 다중우주이군요
그러나 이 모두는 세포라는 문법으로 쓴 생명의 책들
플라타너스의 잎맥과 당신의 정맥은 수액과 혈액을 운반하는 상동相同기관입니다
이중나선 모양의 DNA의 총길이는 약 2000억km
야곱의 사다리처럼 지상에서 하늘까지 늘어선 생명의 나무입니다
5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 생명의 폭발이 일어나 생명의 에덴동산이 지구에 펼쳐졌습니다
1만 년 전 인간의 의식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문명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21세기는 지식이 매 2년마다 배증하는 정보 폭발의 시대
뇌 안의 가상세계가 현실의 시공간을 지나 풍선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뇌세포도 DNA가 쓴 문법이므로 인간의 의식이란 생명장生命場 스스로의 생각일까요
식물들의 오라와 페로몬도 식물들의 의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의 답을 품고 있는 생명은 번식의 춤을 추느라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해바라기는 태양 아래 꽃을 피우고 공작새는 채색 무늬의 꼬리 깃을 부채처럼 펼쳤습니다
당신은 연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인간은 눈을 뜨고 검은 세상의 현실을 보았다
이 세상 너머 태초의 시간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어두운 에너지의 홍수가 흘러 들어왔다
눈을 태우는 태양 속에 검은 태양이 뜨고 천개의 눈을 가진 괴물처럼 은하수가 지상을 내려다보는 현실 속에 인간은 있었다
인간이 발 디딘 지구는 검푸른 세월의 바다를 건너가는 배
초목금수들이 만달라 문양으로 목숨을 수놓고 있는 정원이었다
인간은 이끼와 낙엽처럼 마르는 운명을 벗어나고자 사막에 피라미드를 세우고 시간을 건너가는 문명의 배를 띄웠으나
문명은 노아의 방주인 지구 안에 세운 또 하나의 노아의 방주였고
목숨들은 최종 기착지를 모르는 채 수수께끼의 항해를 계속했다
신생대의 캄브리아기에 삼천만종으로 분화된 생명들이 가이아의 몸속에서 기생충과 바이러스처럼 생태계를 이루고 살았다
가이아는 인간들이 개미떼처럼 불어나 하늘을 익룡처럼 날아다니고 심해바다를 고래처럼 돌아다니는 기계의 꿈을 시간의 잠 속에서 보았다
가이아는 마음을 괴롭히는 인간벌레들의 번식에 관한 악몽을 지우기 위해 천지개벽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늘에 별들이 모두 일직선으로 모여드는 그 때
마야력 제 5 태양의 시간이 끝나 지축이 뒤집어지는 그 때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가이아의 잠재의식이 삼십 억년 동안 꿈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 환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