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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무릉`도원리, 지명의 근원에 대한 고찰
동양대학교 매장문화재발굴보존학과 4학년 김원식[2015년 졸업논문]
목차
1. 머리말
2. 영월군 지명에 대한 근본적 접근
3. 무릉․도원리와 관계된 유적
1) 무릉리(武陵里) 지명의 유래
2) 도원리(桃源里) 지명의 유래
3)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4) 요선암(邀仙岩)의 유래
5) 무릉리 마애여래석불좌상(磨崖如來石佛坐像)
6) 향리향약의 전통이 이어지는 무릉도원 요선계
4. 지명의 근원은 요선암(邀仙岩)에 새겨진 신선
5. 맺음말
1. 머리말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에는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마을이 있고, 도원리와 무릉리를 구분하는 중심에는 요선암이라는 큼직한 바위산이 있다. 이곳의 정상에는 커다란 둥글 바위가 있는데 마애여래석불좌상이 새겨져있다. 마애여래석불좌상과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지명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 시작하였다.
자연적인 지형을 보면, 횡성의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도원리와 요선암을 거쳐 무릉리를 지난 후 영월군 한반도면 선암리 한반도지형에서 평창강을 만나 서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이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는 사람의 길이 있고, 안으로 굽이돌아 흐르는 지형인 안도내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여름철 장마에는 상류에 있던 고운 흙과 모래를 데리고 내려와 안도내지형에 쌓아놓게 되는데, 토양의 풍부한 영양소가 많아 농사가 매우 잘되는 지형이다.
이와 같이 가만있어도 옥토를 만들어 주는 지형에 터를 잡은 옛날의 어른들이 계셨기에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지명이 얻어지게 되었는데 그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자문(自問)으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은 얻지 못하였다. 하여, 지금이라도 지명의 근원을 찾아내어 흐트러짐 없는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2. 영월군 지명에 대한 근본적 접근
지명은 선조들의 사고와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일정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지형, 기후 등의 자연환경과 인구, 역사, 산업 등의 인문환경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보통 위치는 위도와 경도로 지구 표면을 구분하여 표시하는 수리적 위치와 지표상의 자연, 인문, 주변 관계를 통해 규정하는 지리적 위치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지명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자연환경과 생태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문화와 역사가 융합되어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영월군은 여러 차례 편입과 이속, 승격 등을 거치면서 영월읍과 상동읍의 두 개 읍과 중동면, 김삿갓면, 북면, 남면, 한반도면, 주천면, 수주면 등의 7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릉`도원리 라는 마을의 지명이 있는 영월군 수주면은 고려 충렬왕때 주천현 또는 익흥현으로 원주부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강원감영 소재지인 원주의 동쪽에 자리 잡고 원주목의 6대창(大倉) 하나인 동창(東倉: 주천 소재)에 소속되어 있었다. 1905년 영월군에 귀속되면서 좌변면과 우변면으로 불리다가 1916년 좌변면과 우변면 일부 지역을 합하여 양변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에 다시 현재와 같이 주천면, 수주면으로 분할되었다.
오늘날 영월군의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된 수주면의 무릉리에 위치한 요선암(邀仙岩)을 중심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각각 무릉리와 도원리로 나누어져 있다.
무릉리와 도원리, 굳이 리별로 구분하지 않아도 무릉도원이라는 이름자체만으로도 살기 좋은 고장, 복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무릉도원은 중국의 호남성 동정호의 서남쪽 무릉산 기슭의 강변으로, 호남 무릉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를 올라가보니 바위굴 안에 풍요로운 논밭이 이어져 있으며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
이는 기존의 다른 낙원과 차별이 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걸어서 갈 수 있도록 일반적인 땅과 연결된 장소라는 것이다.*2)
자연의 본성과 가깝고,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며,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상향인 무릉도원이라는 지명이 역사적으로 사용된 4세기경 이후 우리나라에 전해져 영월에 무릉리와 도원리가 만들어진 근원은 자연과 순응하며 살아간 선조들의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여 고찰을 진행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지명의 근원을 찾아낸다는 것은 많은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비판보다는 “그랬을까? 그랬겠지! 그럴 수도 있어!” 라는, 깊이 있는 긍정의 고민을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본고는 영월군․정선군․평창군․태백시 등 4개 시․군이 연합하여 진행하고 있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받기 위한 하나의 자료이자 영월의 명소에 대한 자연환경`지질공원`문화관광해설을 위한 스토리텔링 자료이기도 하다.
*1)중국 진나라의 도연명이 지은 유기(遊記)인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무릉도원은 진인동(秦人洞)을 비롯한 실향민 부락의 전설이 담겨 있으며, 도연명이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그린 것이다. 이 무릉도원은 선경(仙境)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단어로 이용되며, 유토피아 사상으로 후세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2) 임보영, 「유토피아의 현대적 해석 및 표현 연구 : 나의 작품을 중심으로」, 동덕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12~13쪽.
3. 무릉․도원리와 관계된 유적
1) 무릉리(武陵里) 지명의 유래
이곳은 태기산과 백덕산에서 내리는 맑은 계곡이 요선암과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므로 마을 이름도 무릉리라 하였다. 무릉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으로 사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설구산 동쪽동네를 무릉리, 그 서쪽을 도원리라 부르고 있다.
2) 도원리(桃源里) 지명의 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안도내(內桃川), 서운리(西雲里) 우변면의 바깥도내(外桃川) 일부를 합한 후 '도원리'라 하였다. 특히, 도원리에는 핵솔(화약골)과 꽃바위 뒤에 있는 도원산성이 있다. 도원산성(桃源山城)은 법흥산성, 공기산성과 같이 평창방면에서 넘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형식으로 지금은 2km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근처에는 횟골(화약골), 병지내(兵陣川) 등 군인들의 주둔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891년 원주의 토호세력인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영월, 평창, 진부, 강릉을 공격했다고 한다.
3)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1423번지 일원 35,927.5㎡ 의 면적에 펼쳐져있는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에 대하여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4월11일 천연기념물 543호 지구과학기념물 지질지형으로 지정하였다. 요선암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문인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시절 이곳의 풍광을 즐기며 요선암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요선암에는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하식기원인 돌개구멍이 화강암반 하상 위에 폭넓게 발달되어 있어 하천의 윤회와 유수에 의한 하식작용 등을 밝힐 수 있는 학술 가치가 크며, 여러 개의 돌개구멍이 복합적으로 발달된 지형자체가 가지는 경관 가치도 우수하다.
돌개구멍(Pot Hole)은 ‘속이 깊고 둥근 항아리 구멍’이란 의미로 하천에 의해 운반되던 자갈 등이 오목한 하상의 기반암에 들어가 유수의 소용돌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기반암을 마모시켜 발달하는 지형이다. 보통 하천의 상류지역에서 빠른 유속과 큰 에너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와지에 자갈이나 모래와 같은 퇴적물질이 들어가, 와동류(회오리가 이는 듯한 물살)에 의해서 반복적인 회전운동을 통해 포트 홀 내벽을 침식, 점차 포트 홀이 성장하게 되며, 지속해서 내벽 및 하부침식이 일어나 커다란 항아리 모양으로 기반암을 파게 된다. 주로 사암이나 화강암과 같은 등질성(等質性)의 단단한 암석에서 잘 발달하며, 형태로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4) 요선암의 유래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조선 중기의 유명한 풍유가로 평창과 강릉부사를 지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경치에 반하여 선녀탕 위 바위에다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지금도 흐릿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다.
5) 무릉리 마애여래석불좌상(磨崖如來石佛坐像)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인 무릉리 마애여래석불좌상(磨崖如來石佛坐像)은, 타원형의 양감이 풍부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무릉계곡을 굽어보고 있다. 불대좌에서 머리까지의 높이는 3.5m, 마애불을 받치고 있는 밑의 자연암반부터의 높이는 7m이며, 결가부좌한 폭은 3.25m이다.
둥글고 큰 원형의 화강암재 전면에 조각된 마애불로 얼굴은 양각(陽刻)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선각(線刻)으로 음각한 좌상이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머리는 소발로 육계가 있다. 상체는 길고 원만하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하체를 상체에 비하여 크게 표현함으로써 조금은 균형을 잃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하였는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이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였으며, 그 중 두광은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하였고, 신광은 두줄로 선각해 놓았다. 밑에 연꽃문양의 대좌가 있고,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불상 머리 위에는 점판암(粘板巖)의 판석을 모자처럼 씌웠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다고 하겠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지방 장인이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에는 암벽 면을 깎아 만든 마애상의 유래가 드물어 존재적 가치가 크다 하겠다.
6) 향리향약의 전통이 이어지는 무릉도원 요선계 *3)
요선계는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중방동, 도곡동, 두릉동, 하동, 도천동 등 5개 마을의 지역민이 대상이 되어 조선 중기에 이곳에 세거(世居)하고 있던 원주 이씨, 원주 원씨, 청주 곽씨 등 3성의 대표들이 모여서 조직한 계이다. 현재 계의 명칭이 ‘요선계’이며, 이는 무릉리에 있는 요선암과 요선정을 중심으로 계의 고사(庫舍)가 있었으며, 매년 강신회(講信會)도 이곳에서 개최하였기에 ‘요선계’라 칭한 것이다. 일명 3성이 조직한 계라 하여 ‘삼성계(三姓稧)’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지역민 전체의 계는 아니지만 계가 형성되었을 초기에는 3성을 중심으로 한 사족사회원들의 상계(上稧)와 일반 지역민과 서얼이나 집안의 노비들의 계인 하계(下契)가 연계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지역민 전체가 참여한 대동계(大同契)의 성격을 지녔었다고 할 수 있다. 요선계가 최초로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계의 입약문(규약)에 의하면 “1695年(康熙 乙亥之春) 봄 화재로 인하여 계의 문서와 창고가 전소(全燒)되었으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길례(吉禮)와 상례(喪禮)에 쓰는 기구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 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이미 계가 조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95년에 화재를 당한 후에도 다시 요선계의 구성원들은 활발히 활동하여 다시 전과 같이 계를 운영하였으나 47년이 지난 1743년(乾隆 癸亥之冬)에 다시 화재를 만나 문적(文籍)과 조약(條約)들이 소실되었다. 다음해인 1744년에 요선계 입약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선계는 사족 또는 양반을 주축으로 하는 상계(上契)와 평민을 중심으로 하는 하계(下契)가 결국 한 지역을 표방하고 그 위에 혈연적인 규제가 가해지고, 상민이나 노비 등도 다 같은 계원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조화롭게 융합되어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지역단위의 공동체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때까지 있어 왔던 하계를 흡수하려는 노력이 거세어졌다. 결국 요선계의 향약(鄕約)과 일맥상통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상 ․ 하계가 통합되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좌목(座目), 영모록(永慕錄`僊錄), 유사전장기(有司專掌記), 입약문(立約文)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좌목(座目)은, 생존하고 있는 요선계원의 명첩(名帖)이 첨부된 일종의 계원 명부이다. 좌목에 명첩이 첨부되는 요건은 일단 상계원(上契員)인 경우는 한 가구주인 호주가 사망했을 시 사망한 상계원의 명첩을 떼어 영모록(永慕錄`僊錄)으로 옮기고 그의 장자의 명첩을 새로 만들어 붙임으로서 부친이 갖고 있던 계원으로서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승계 받았다. 하계원(下契員)인 경우 새로 계원이 될 것을 희망할 때 봄`가을 강신일(講信日)에 상`하 계원 전체 모임에서 허락을 받고 입회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하계원의 경우 동내에 거주하면 의무적으로 계원이 되었으며 좌목에 첨부된 명첩에는 성명, 출생년, 자명(字名)을 기록하고 있다.
영모록(永慕錄`僊錄)은, 요선계 상계원으로서 좌목에 명첩이 붙어 있다가 사망하면 좌목에서 떼어내어 옮겨 붙이는 부책(簿冊)이다. ‘영모록’ 또는 ‘선록’이라고 부르는 의미는 계원이 사망하면 신선(神仙)이 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옮겨 붙이기 전에 명첩 아래 부분에 사망한 년도(干支)를 기재하여 영모록 끝에 붙이게 하였는데 사망 연대순으로 게첨(揭添)하고 있다.
유사전장기(有司專掌記)는, 계 운영을 위한 직임(職任), 기물(器物)의 인계인수, 각종 사안과 금전 지출을 기록하는 장부이다.
입약문(立約文)은, 계원으로 가입하는 자와 계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규정)인데 31개조에 이르는 규정들을 요약하면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도리와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부상조를 강조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에 합당하는 벌칙들로 구성되어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집안과 백성을 위하는 근본은 오륜사상(五倫思想)이며, 이것을 잘 지켜서 국가를 융성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가정을 안락하게 하여야 한다.
(2).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부는 화목하며, 동기간에 우애가 두터운 가정은 서로 이웃에게 알려 상을 주도록 하며, 그렇지 못한 가정은 벌을 주어야 한다.
(3). 상과 벌은 공정히 하며, 큰 상과 벌은 관청에 알려 관청에서 시행토록 하며, 작은 상과 벌은 마을의 계원들이 모여서 처리하되 일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다스린다.
(4). 마을에서 상을 받은 사람은 계원들이 모여서 축하해 주며, 마을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존경하고 추앙한다. 마을에서 벌을 받은 사람은 계원들이 모인 가운데 책임자가 당사자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본인이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한다. 이에 불복(不服)할 때에는 마을에서 손도(損徒)하고 그래도 자기의 죄를 깨우치지 못할 때에는 계의 좌목(계원 명부)밑에 그 사유를 적어 제명(除名)하고 영출(永黜)한다.
(5). 마을에서 시행하는 벌은 경우에 따라 처리하되,
면책(面責) :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꾸짖어 반성(反省)하도록 함.
손도(損徒) : 따돌려서 서로 상종치 못하게 하고 농기구의 이용이나 두레 조직에서 배제되며, 혼상구(婚喪具)의 이용권이 박탈된다.
태벌(笞罰) : 주로 하계원의 징계에 해당되며, 규칙을 위반 했을 시에 매를 쳐서 다스리되 태벌은 경중에 따라 장15-20대에 처한다.
영출(永黜) : 동계 명부인 좌목에서 그 이름 밑에 죄명을 적고 명첩을 떼어 낸 후 동계에서 추방한다.
(6).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면책 받고자 할 때에는 상황에 따라 술과 안주, 또는 쌀을 강신일에 납부하면 면책 받을 수 있으나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제진면책(齊進面責) : 청주 1동이, 탁주 1동이, 대행상(大行果 : 큰 주안상) 1좌(坐).
손도(損徒) : 청주 2동이, 탁주 2동이, 대행과 2좌
영출(永黜) : 청주 3동이, 탁주 3동이, 대행과 3좌 이상의 물품을 강신일에 납부하고 계원에게 사죄하면 용서해 준다. 이때 받은 물품 중 청주는 상계원, 탁주는 하계원용이다.
(7).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멸시하며, 다수가 소수를 능멸하며, 가진 자가 못가진자를 업신여기며, 어른이 어린이를 학대하고, 젊은이가 늙은이를 능멸하거나, 서얼이 적자를 능멸하고, 천한 자가 귀한 신분을 멸시하는 등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그 행위의 경중에 따라서 동계에서 처벌하되 그 죄가 무거우면 관청에 알려서 관청에서 다스리도록 한다.
(8). 종족(宗族)은 서로 화목하고, 이웃 간에는 서로 화합하며, 길흉사에는 서로 돕고, 질병 시에는 서로 문병하며, 수망(守望 : 마을을 지키는 일)에는 서로 합심하여 도와야 하는바, 그렇지 못 할 때에는 그 경중에 따라 마을이나 관에서 처벌하도록 한다.
(9). 앞에서는 옳다하고, 돌아서서는 비방하며, 남의 잘한 일을 감추고, 과실만을 들추어 비방하며, 작은 일에도 논쟁을 벌여서 남을 중상모략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10). 백성으로서 국가에 대하여는 의무를 다할 것이며,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불평 불만하는 자가 있거나 계의 규약을 준수하지 않거나 계의 총회에 불참하는 자는 그 경중에 따라 처벌하되, 다만 계에 불참한 경우에 한해서 사전에 그 사유를 서면으로 제출하면 면책하여 준다.
(11). 관혼상제(冠婚喪祭)에 필요한 장비와 기물을 준비하여 두고 일이 있을 때 이를 사용하게 하며, 계원이 아니거나 다른 마을에서 사용을 희망할 때에는 세를 미리 받고 대여한다. 이때에는 유사가 책임지고 세를 받으며, 기물의 출납을 감독하고 그 책임을 진다.
(12). 관청의 명이 있을 때는 정성껏 봉행하고 관의 명을 어기거나 범하지 말고 납부할 세금이나 부역(賦役)은 때맞춰 지킬 것이며, 관장을 비방하거나 망언을 해서는 안 되며, 그 행위에 따라 처벌하되 그 죄가 크면 관청에 알려 처벌하도록 한다.
(13). 계원이 억울하게 모함(謀陷)을 받으면 계원 전체가 발문(發文)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준다.
(14). 계원이 수재, 화재, 기타 질병 등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계원 전체가 전곡(錢穀)과 부역(賦役)으로 도와준다.
(15). 계는 매년 봄 3월과 가을 9월에 정기강신(定期講信) 모임을 갖되 발문(發文)하여 모이고 연장자순으로 앉아서 계의 규약을 소리 높여 읽은 다음 규약에 위반한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죄에 따라 처벌을 논하고 다스리되 다만 한 가지 사유에 대하여 두 번 벌하지는 않는다.
(16). 강신회의(講信會議) 시에 여러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혼자만 고집을 부리며, 언사가 공손하지 못하거나 술에 취해 큰 소리를 지르며, 규약을 어긴 자는 그 죄가 무거운즉 손도에 처하고 가벼우면 부백면책(浮白面責)하며, 하계원인즉 태벌로 다스린다.
(17). 통문을 전하지 않거나 무단으로 강신회에 불참할 때는 상계원은 제진면책(齊進面責)하며, 하계원이면 태벌 15대로 다스린다. 단 정당한 사유를 갖추어 서면으로 제출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
(18). 계소유의 전곡은 계의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자산임으로 지체없이 납부하되 고질적으로 미납하는 자는 양곡(糧穀) 1말이나 또는 돈 1전을 미납할 때에 상계원이면 그 종에게 매를 쳐서 징구(徵求)할 것이며, 하계원이면 당사자에게 매를 쳐서 징구한다.
(19). 길례시(吉禮時)에 남자일 때는 장복(章服), 관대(冠帶), 함화(函靴), 사모(紗帽) 등을 지급하며, 여자일 경우에는 혼례복(婚禮服), 대대(大帶), 교배석(交拜席), 자장(資粧 :화장품) 등을 지급한다.
(20). 남녀의 장복(章服)은 계원과 직계 가족에 한하고(竝居者 不許) 혹 비계원이나 타동리 사람이 대여 받고자 할 때에는 길례용구 임대료는 남녀 각각 세전 1량 5전씩이다.
(21). 흉례시(凶禮時) 친부모, 처부모, 본인과 처의 상(喪)에 한해서 무상 대여한다.
(22). 친부모와 처부모의 상을 당할 시는 부미(賻米) 5두를 지급하고, 초상시에 공석(空石) 1장씩을 가져와 제례청을 꾸미고 장례식 날에는 조묘꾼(造墓軍)을 보내 하루씩 도와줄 것이며, 조묘가 모두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23). 친부모와 처부모가 모두 없는 계원은 동기간이나 숙질간의 상을 당했을 때에 위의 례에 준하여 지급한다.
(24). 농사철을 맞아 역질을 앓아 일을 할 수 없을 때에는 각자 점심을 지참하고 가서 봄철이면 파종을 하고 가을철이면 추수를 도와야한다.
(25). 혹 어떤 이가 모함을 당하여 스스로 풀 능력이 없을 때에는 동계에서 모두 들고 일어나 발문하여 억울한 일을 풀어 주어야 한다.
(26). 수재나 화재를 당하면 서로 문안하고 그 경중에 따라 적당하게 힘을 보태 주어야 한다.
(27). 도둑질을 하거나 범인을 숨겨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되며, 특히 남이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훔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28). 계원 가운데 각각 조상을 위해 산소와 산을 가꾸고 있으나 미련하고 포악한 사람(頑悍之類 완한지류)은 몰래 들어가 나무를 베고 불을 놓아 산을 태우는 일이 있으니 발견되면 그 경중에 따라 치송(稚松)은 10그루당 1전을, 큰 소나무는 1그루당 1전을 벌로 과해야 한다.
(29). 7-8월에는 계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전부 나와서 길가의 풀을 베고, 9-10월에는 강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위반자는 벌전미 1두를 내고, 이것마저 이행치 않으면 태벌 20대로 다스린다.
(30). 뿌리 없이 타관으로 흘러 다니는 자는 병역기피자(軍保 군보)이거나 번전(番錢)을 내지 않은 사람이니 동내 상하 간 굳은 약속으로 절대 접촉치 말 것이며, 만약 숨겨주는 자가 있을 시는 두 사람 모두 무거운 벌로 다스려야 한다.
(31). 계의 책임자가 교체될 때에는 전곡 등 계의 재산과 물품 목록을 정확히 작성하여 인수인계를 철저히 할 것이며, 서류와 함께 정해진 궤에 넣어서 창고에 보관하여야 한다.
*3)이상국, 「요선계(邀僊稧) 관련 자료의 유형 및 의의」, 영월문화원, 2005.
4. 지명의 근원은 요선암(邀仙岩)에 새겨진 신선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는 요선암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74호인 마애여래석불좌상이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즉, 둥그런 바위의 벼랑을 갈고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앉아 있는 불상이다 는 뜻이다.
하지만 불상이 새겨지기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토르(tor)’ 4) 라는 학명(學名)의 바위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 바위 토르라는 것은 두부모처럼 층층이 쌓여있는 방상절리(方狀節理)이다. 즉, 용암이 굳어져서 화강암이 되었고, 세월의 변화에 따라 땅 속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은 강물의 흐름에 따라 화강암을 덮고 있던 흙이 쓸려 내려가 지표면이 낮아지면서 화강암은 노출되게 된다. 위에서 내리 누르는 땅덩이의 힘·압력이 사라지게 되어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이던 화강암은 두부모처럼 여러 층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맨 위에 있는 바위는 햇빛과 비와 바람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모서리부터 다듬어지기 시작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둥글 바위 토르가 된다.
이러한 세월의 과정을 거친 자연환경의 역사에 사람의 역사가 더해지게 되었다. 즉, 산과 강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씨족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을이라는 개념의 자연부락이 나타났다.
마을은 지리적 위치나 생활환경에 따라 60~70가구정도로 자연부락을 이루어 정착생활을 하였다. *5)
오랫동안 유사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며, 약간은 부조화스럽지만 정신과 건축이 서로 연계하여 마을이라는 공간구성이 이루어졌다. *6)
이와 같은 마을은 구체적으로
1)지리적 환경 및 경제적인 조건을 공유하는 지연체(地緣體),
2) 생활문화 공간으로서의 동네,
3) 행정편제상의 리(里)․동(洞)․촌(村)의 중층구조,
4) 혈연과 신분적인 구성체로서의 성격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것이었다.*7)
이처럼 요선암의 둥글 바위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마을은 지리적 환경과 생활문화 공간으로서 자리하게 되었는데 요선암과 마을의 이름인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지명의 근원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인 요선암(邀仙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옛날 옛날에 아주 옛날에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 있었고 가뭄이 들지 않는 강변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세월이 흐를수록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식구는 자꾸 늘어나는데 비례하여 농사짓는 땅에서 생산되는 농작물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웃과 이웃,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잦은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강변길을 걷다가 건너편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큼직한 바위가 두부모처럼 층층이 쌓여 있고(방상절리), 맨 위쪽에는 하얀 꽃망울과도 같은 둥그런 바위가 보였다(화강암). “저것이 무엇일까? 저렇게도 요상한 바위는 무엇일까?” 하여 올라가 살펴보았더니, 주변의 산은 온통 바위산인데 둥그런 바위 하나가 턱하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신령스럽게 느껴졌다. 둥글 바위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가 평안하게 잘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8)
하루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 백 일째 되는 날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를 치면서 밝은 빛 오색무지개 다리가 놓이더니 스르르 소리를 내면서 신선이 내려와 둥그런 바위 앞에 턱하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하시는 말씀이 “마을의 이름을 무릉도원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느니라” 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바라고 원하던 바를 가르쳐준 신선이 너무도 고마워 모두가 그 자리에서 감사의 절을 올리기 시작하였는데 세 번째 절을 하고 고개를 들었더니 금방까지도 앞에 계시던 신선은 아니 보이고 둥그런 바위만 보였다.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앉아서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오랜 날을 기도하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잠이 들면서 꿈을 꾸게 되었고 꿈속에서 신선을 만났던 것이다. 꿈에서 만난 신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그림으로 그려놓게 되었고, 그려진 그대로 둥글 바위에다 섬세하게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신선이 알려준 그대로 아랫마을은 무릉리, 윗마을은 도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무릉도원! 무릉도원! 마을 주민들의 염원이 담긴 외침을 하늘도 들었던지 그 해 여름 큰 홍수가 나면서 상류에 있던 고운 모래와 흙을 모두 데리고 내려와 무릉리에 한덩이, 도원리에 한덩이 쌓아 놓는 것이었다. 넓은 땅이 생긴 주민들은 신선이 도와준 덕분이라면서 모두가 기뻐하게 되었다. 강물이 데리고 온 퇴적물이었기 때문에 기름진 옥토에 심은 곡식은 풍년이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잘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꿈에서 만난 신선이 도와준 덕분이기에 수확한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9월 9일 구구절에 감사의 제례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맞이할 요(邀)자에 신선 선(仙)자에 바위 암(岩)를 따서 요선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9)
무릉리와 도원리에는 원주 원씨(觀瀾派, 護軍公派), 원주 이씨(坡州公派), 청주 곽씨(密直公派) 등의 집성촌이다.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와 예절 그리고 규칙이 필요했던 3성의 대표들은 향촌사회의 지역조직이자 향리향약인 요선계(邀僊契)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매년 요선계(邀僊契)의 총회를 개최하면서 1년 동안의 살림살이와 마을 대소사에 대한 논의와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결정에 따라서 마을의 주민들은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하게 실천을 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320년 전인 1695년 이전의 기록은 잦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였으니 그 옛날부터 결성된 요선계(邀僊契)는 2015년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기록이 중요하기에,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수서문(重修序文). 좌목(座目). 영모록(永慕錄 ). 유사전장기(有司專掌記). 입약문(立約文)을 요선정으로 이송하여 한 해 동안의 내력을 마무리한 후 반납하게 된다.
둥글 바위 토르,
요선암에 새겨진 신선에 대하여 오늘날에는 유형문화재로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보인다.” 고 하였지만,
시대의 잣대를 대기 이전인 옛날 옛날에는 이러한 마을만의 내력이 있었다.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 신선은 둥글 바위에 새겨져 기다리고 있기에 신선은 그 누구도 아닌,
무릉`도원리를 찾아오는 분이 바로 신선인 것이다!】
즉, 무릉`도원리라는 지명의 근원은 자연환경의 역사로서 수만 년 전부터 둥글 바위 토르가 이 자리에 있었고, 사람의 역사로서 수천 여 년 전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1천여 년 전에 꿈속에서 만난 신선을 둥글 바위에 새겨놓고는 아랫마을은 무릉리, 윗마을은 도원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신선이 새겨진 둥글 바위를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모두가 풍요롭고 복된 삶이 이어지게 된 것은 신선이 도와준 덕분이기에 그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뜻을 모아 요선계를 결성하여 오늘날까지 전례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4)토르(tor) : 차별적인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그 지역의 기반암과 연결되어 지표에 노출되어 형성된 독립성이 강한 암괴미지형을 말한다. 형태적으로는 ‘똑바로 서 있는 석탑’이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본래 영국의 다트무어(Dartmoor) 지방의 화강암괴를 지칭하는 지방어(켈트어)였다가 현재는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토르의 성인으로는 1단계 발달이론과 2단계 발달이론으로 분류된다. 1단계 이론은 주빙하작용, 솔루션 팬(solution pan)에 의한 수직붕괴작용, 페디플라네이션(pediplanation) 작용에 의해서 발달한다는 이론인데, 이와 같은 작용들은 모두 지상에서의 풍화작용을 동반하는 과정에서 토르의
발달을 가져온다는 이론이다. 이는 주로 온대기후 지역에서 토르의 성인을 밝히는 이론이다. 2단계 발달이론은 심층풍화에 의해 지하에 형성된 핵석이 지표에 노출되는 과정에서 토어의 발달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주로 열대기후지역의 토르의 성인을 밝히는 이론이다. (자연지리학사전, 2006.5.25, 한울아카데미)
*5)조성기, 『한국의민가』, 한울, 2006. 51쪽.
*6)김홍식, 「마을 공간구성 방법에 대한 한국 전통 건축사상 연구-충북 괴산면 청안면 운곡1리, 괴실마을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지 제 19권 64호』, 1997, 45쪽.
*7)이해준,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민족문화사, 1996, 44쪽.
*8)마을에 존재하는 동굴바위는 마을신으로 보았고, 동민을 보살펴 주는 존재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밖에서 들어오는 잡귀, 액살, 재앙을 막아 마을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준다고 믿었다. 당시 영월은 농촌이기 때문에 풍년기원과 재해방지를 주목적으로 동제를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9)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의 무릉리와 도원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무릉리는 태기산과 백덕산에서 내리는 맑은 계곡이 요선암과 어루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보이며 설구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도원리는 땅이 기름지고 논이 많은 농촌으로 설구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무릉리과 도원리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무릉리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강원도 정선군 남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강원도(북한) 이천군 동부,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등이 있다.
도원리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등에 있다.
이 중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도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처럼 무릉리와 도원리가 위치한 지역으로 자연마을로 처음에는 한 마을이였다가 지금은 행정마을로 분류되어 나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국은 무릉리와 도원리는 대부분 무릉도원의 전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5. 맺음말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마을 이름의 근원은 요선암에 새겨진 신선(마애여래석불좌상)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새롭게 가설을 정립했다.
전국의 많은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지만 이들 마을이 한 곳에 위치한 곳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과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밖에 없다. 무릉리와 도원리가 두 곳 모두 원래부터 한 곳 이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갈라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원에 대한 이해와 가설을 통해 무릉리와 도원리라는 지명의 근원은 이러했다고 제시하면서, 또 다른 생각을 고찰하고 연구한 결과를 풍설보다는 기록으로 발표하는 분이 많이 계셨으면 한다.
참고문헌
김홍식, 「마을 공간구성 방법에 대한 한국 전통 건축사상 연구-충북 괴산면
청안면 운곡1리, 괴실마을을 중심으로」,『대한건축학회지 제 19권 64호』, 1997.
이해준,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민족문화사, 1996.
이상국, 「요선계(邀僊稧) 관련 자료의 유형 및 의의」, 영월문화원, 2005.
임보영, 「유토피아의 현대적 해석 및 표현 연구 : 나의 작품을 중심으로」,
동덕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조성기, 『한국의민가』, 한울, 2006.
광물자원용어사전, 2010.12, 한국광물자원공사
자연지리학사전, 2006.5.25, 한울아카데미
본문 발표
1.강원도 문화원연합회 주최, 2014년 강원도내 시군별 향토사발굴발표회 영월군 향토사발굴발표
2.동양대학교 매장문화재발굴보존학과 2015년 졸업논문 제출. 문학사 학위
3. 영월 주천강문학회 2016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