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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을 읽다
《사서삼경》이 어떤 책인지는 대략 알고는 있지만, 그 내용까지는 잘 몰랐다. 올해 모두 36권의 책을 빌려서 읽었지만,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마지막으로 꼭 읽고 싶은 책이 《사서삼경》이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시대는 교과서라 할 만큼 사람들의 정신 속에 《사서삼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책이 어렵기도 하겠고 또 양도 많은 만큼 겉만 핥는 심정으로 더듬어 보고 음미해볼 작정을 해 본다.
『사서삼경을 읽다』는 이 책의 저자 김경일 교수는 어릴 때부터 한문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도 한문학을 전공한 뒤에 대만에서 갑골문을 연구하여 박사가 되었고, 워싱턴에서도 동양어문학을 공부했으며, 1999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유교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서를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저서로 〈중국문학사〉〈중국문화의 이해〉〈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등이 있고, 현재(2018년) 상명대 중어중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조선 시대 정신의 뿌리는 유교다. 『논어』『맹자』『주역』『중용』『대학』『시경』『서경』이 일곱 권의 책들은 유교의 기본 교과서들이다. 특히 조선 시대는 유교의 한 갈래인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신의 역사를 빚어왔다. 그러나 이 일곱 권의 책은 그 옛날의 교과서로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 역사의 관성이 파 놓은 정신의 골짜기를 따라 오늘날까지 밀려 내려와 있고 또 내일로 흘러가려 한다. 그런 면에서 《사서삼경》은 시대 저편에 서성이는 방관자가 아니라 여전히 문화적 당사자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들 문화적 뿌리들에 대해 지속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한자로 된 책의 번역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봐야한다”고 지적하면서 예를 들어 『논어』에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미련을 떨게 되고, 생각만 키운 채 배우지를 않으면 사고 치기 십상이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해석하면서 “사고 치기 십상이라는 해석은 사고 친 해석처럼 보인다. 이것을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풀어 쓴 점잖은 해석도 있다면서, 그 깊은 해석은 2500년 전 중원에서 마구 지껄이던 구어체를 알고 있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해골 알(歹)’과 ‘자기 이(台)’로 구성된 태(殆)는‘위태롭다’는 뜻이 아니라, ‘온몸이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뜻으로 당시의 유행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로, 이데올로기를 뺀 ‘옛날이야기’로 풀려고 했다고 한다.
시작도 아닌 머리말에서 부터 여간 어렵지 않다. 특히 한문과 한문을 번역한 것이기에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해 보기는 하지만, 제목에서 호감 가는 것들이 있어서 관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버지의 힘’‘공자에게 EQ를 배우다’‘집을 나서야 여행은 시작되는데’‘닭을 훔치면 안 되는 이유’‘길 떠나는 이유’‘수신제가치국평천하’‘신중현과 박정희 주자와 신혼부부’‘주나라에도 압구정동은 있었고’‘동양 최초의 법’‘술 한잔이 망친 나라’‘여자와 남자’‘팔팔 육십사’‘점(占)이 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같은 것 말이다.
공자, 아래는 짱구 공자
맹자, 주자
【논어】
사람들은 관념적으로 ‘공자라고 하면 인(仁)과 도덕을 중시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써먹을 인재를 가려내려는 집착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한다.’공자는 맨 처음에 배움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인간성 테스트까지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엘리트들을 길러내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마치 오늘날 헤드 헌트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들을 평가 분석했다. 어찌 보면 오늘날 대기업의 인사팀장처럼 면접 기술을 개발하려 다닌 인간성 탐험가였던 셈이다.
《논어》는 1만 2,700자로 된,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록이다. 유가 최고의 경전이자 중국 최초의 어록이기도 하다. 현존본은 「학이」에서 「요왈」까지 총 20편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문장의 두 글자씩을 딴 것일 뿐 ‘제목’의 의미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논어》가 전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285년 백제의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삼국시대 이전에 들어왔을 것이다.
《논어》에는 인(仁)자가 107번 등장하는데, 이것을 공자 사상의 핵심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어질다’는 해석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해석할수록 어질어지기는커녕 어지러워지는 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자의 말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치명적인 판가름을 담고 있다. 바로 흑백논리로서 동양사회를 관통해 흐르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이분법적 그것이 바로 공자의 발명품인 것이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은 잘되도록 돕지만,
못된 일을 돕지는 않는다. 물론 소인도 그 반대다”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좋은 말이긴 하지만, 사람의 인품을 이렇듯 사과 쪼개듯 반으로 쪼개는 것은 조금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의 몸은 야누스의 집이다. 선과 악이 다투는 모순의 주머니로, 공자는 이 갈등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 속에서 아우성치는 몸부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선만 행하고, 어떤 사람은 악만 행한다고 이해했다. 해서 소인은 어떻고 군자는 어떻고 하는 훈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킬박사와 하이드 사이를 오가고 있는 슬픔 존재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사람 공부를 더 했어야 했다. 날카로운 비판이다.
공자의 이분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군자라고 했다. 연주가 끝나면 졸다가도 박수를 쳐야 하는 것처럼... “나는 군자!”라고 한 공자 자신은 차라리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 게 나을 뻔했다. “나 공구야, 성은 공, 이름은 구, 변두리 작은 노나라 사람이야.”솔직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때 더 진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공자 군자론의 결론은 ‘군자는 옳은 것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것이다. 혈연 중심인 동양사회는 본질적으로 집단성이 강하다. 그 집단성이 일을 망치기 일쑤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구성되어 예정된 코스이기는 하지만,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소인배를 등장시켜 흑백논리로 인격을 판정한 것은 공자의 첫 번째 실수이고, 이익을 죄악시한 것은 두 번째 실수다. 또한 가난을 합리화한 것은 문화적 함정이다.
우리는 동서양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현대에 살고 있다. 이런 말 들으면 글로벌 시대 현란함과 자신의 문화적 현주소 사이에서 무언가 모를, 가슴 한구석에 깊숙이 파고드는 허전함을 느낄지 모른다. 그 허전함을 메워야 한다. 아무 쪽이나 함부로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 끝까지 침착하게, 지혜롭게 삶의 간극을 메워가야 한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일지도 모른다.
여자와 아이는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던 고대, 아니 조선 시대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공자는 군군 신신(君君 臣臣), 부부 자자(父父 子子) 라고 하여, 임금은 임금 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 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 관계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동일함을 암시하는 의도적인 디자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정으로 얽힌 사랑의 덩어리가 아니라 언제나 냉랭한 긴장감이 감도는 정치적 관례로 보았다. 이것이 공자가 가진 부자관이자 인생관이었다. 정치적 인생관이라는 말이 참 딱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나는 공자에 대해 인자무적(仁者無敵)이니, 인자후덕(仁者厚德)이니 하는 말로 이해하고 그를 존경해 왔다. 지금부터는 관점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죽은 자식을 앞에 두고 정치적 위상과 체면을 저울질했던 남자, 정치적 잣대에 맞는다고 감옥에 있던 공야장(公冶長)이란 사내에게 딸을 내주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인생관을 답습한 후대의 문화, 사랑을 깨닫지도 설파하지도 못했던 아버지였던, 정치인이기에 앞서 마음이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논어》라는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다 헤질 정도로 읽어댄 그것이 오늘날 공자 같은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우리들인가? 아들, 딸을 사랑할 줄 몰랐던 아버지의 어록이 우리들의 삶을 너무도 깊이 흔들었던 것이다. 차갑기만 한 아버지, 비정한 아버지의 파괴력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면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저자인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논어를 풀어가면서 손뼉을 치기보다는 돌팔매질을 많이 했다. 독자들도 그럴듯하면 손뼉을 치기 바란다. 그러나 조금은 반인류적이고, 반민주적인 독들의 씨앗이 공자에 의해 뿌려진 것을 발견 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돌팔매를 던지자. 납작한 돌 하나 주워 권위와 위선의 물결 위로 사뿐하게 날리자. 경쾌한 물수제비를 뜨면서”라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70명 정도일 거라는 연구가 있기도 하고 맹자도 그렇게 말했다. 춘추전국시대는 백가쟁명(百家爭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실제로 189개 학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중에 한(漢)나라 시대 희대의 모사꾼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수직 윤리의 유교가 백성들을 틀어쥐는 도구로 부상했는데, 자유를 말한 도가나 엄격한 법가보다 충과 효를 강조한 유교가 훨씬 더 황제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논어》는 황제의 입맛에 맞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양인의 입맛에도 맞는다. 흔히 접하는 한마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첫 구절로 배움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무식한 한문 실력으로는 오해하기 십상이고 그 때문에 우리 사회는 배움에 대해 너무 많은 오해를 키워 왔다”고 지적한다. ‘때때로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가 아니라, “이론으로 배운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실습해 보는 일,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로 해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배움에 대해 강조했다. 탁상공론이 아닌 이론 공부로서의 학學과 직접 해 보는 습習을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습을 그저 ‘익히다’로 표현했지만, 배움의 실체는 글공부가 아닌 구체적인 행동규범인 예(禮)에 있다. ‘예를 이론으로 배우고 기회를 얻어서 직접 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뜻이다.
“유교는 공자를 지나치게 흠모한 나머지 공자의 실천 의지를 상당 부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죽어라고 글자에만 매달렸다. 학과 습이 어우러져야 진정한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이지만, 100% 다 믿기지는 않는다. 그동안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왜 그렇게 보지 않았는지? 못했는지?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더 공부해야겠지만, 사람이 성공하려면 ‘끝까지’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이해가 되고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공자는 배움에 대하여 ‘여일이관지(予一以貫之)’라고 했다. “나는 하나를 하면 끝까지 하는 사람이다”는 뜻이다.
‘끝까지’는 초지일관(初志一貫) 처럼 성공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동서고금의 경험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경직성은 치명적 약점이다. 생각의 유연성이 아름답게 평가되어야 하고, 또 그만큼 진지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끝까지는 위험한 부분이 많다. 물론 ‘끝까지 열심히’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끝까지와 비슷한 말로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원문은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 옛것을 통해 새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다”이다. 동양적 교육관의 대표적 표현이라 할 수 있을 이 말을 우리는 오해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된다. 일방적 경험의 전수나 경력의 힘이 함부로 창의성에 딴지를 걸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미래를 감지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수많은 반짝거림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선생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도 탈출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가?’하는 속담을 쓰기도 하는데, 인간은 감정의 동물로서 죄와 사람을 한데 묶어서 봐야 속이 후련하다. 공자가 사람에게 ‘인’이 있노라고 선언한 후 우리는 인仁 콤플렉스에 빠졌다. 인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공자에게 인은 만능인 것이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편견 없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惟仁者能好人 能惡人)”가 그것이다. 사람을 편견 없이 좋아하거나, 악한 인간의 잘못만을 미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늘 죄와 사람을 한데 묶어서 처단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원호야 아욕인 사인지의(仁遠乎也? 我慾仁 思仁至矣) - 인의 경지가 멀리 있다고?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바로 인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네”인은 참 쉬운 것 같다. 하고자 하면 이를 수 있다니 말이다. 인간은 밥을 잘 먹은 것보다 마음을 잘 먹어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밥을 굶듯이 하지만 마음을 잘 먹었다는데 있다고, 공자는 인의 경지가 이런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이 상황에서 제자인 안연(顏淵)이 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자, 공자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자신들의 욕망을 억제하고 예로 돌아간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인의 경지에 들게 될 것이다”즉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하였다.
여기서 또 꼬리를 무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러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논어》는 어쩌면 이런 말꼬리 물기인지 모르겠다. 인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존재의 인정이자 사랑이며 이해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욕망이란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마음, 입과 귀, 몸, 생식기를 통해 드러나는 모든 종류의 ‘하고 싶음’인 것이다. 하고 싶음을 조절해야 한다고 공자는 말했다. “비예물시 비예물청 비예물언 비예물동(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이 그것이다. 《논어》의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그것이 예인지, 아닌지 어찌 알 것인가? 다. 공자는 무엇이 예이고 무엇이 예가 아닌지 알려주겠다고 한다. 이런 우리 사회에 숨겨져 있는 일방적 지침은 가치독점에서 시작되고 있다. 가치를 알려줄 테니 배운 것 외에는 말하지 말고, 일러 준 것 외에는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는 공자의 말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창의적인 발상은 근본적으로 틀어막은 어리석음이 아닌가? 물론 우리는 아무리 우아함을 떨어도 눈으로, 입으로 생식기로 타인에게 아픔을 주는 존재다. 하지만 가치를 함부로 재단하고 강요하는 일은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아픔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웃과 친구를 버리고 연인도 버린다. 자신의 욕망, 이익, 자기합리화를 기꺼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仁의 경지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가야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 인이란 누구도 범접할 수조차 없는 추상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감정 조절인 것이다. 공자는 구체적으로 현명한 윗사람과 사리 판단이 밝고 상식적인 친구를 추천했다. 윗사람을 통한 사회 배우기, 아랫사람 다루기, 그리고 친구와의 감정교류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현명한 윗사람을 만나면 살면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아랫사람을 잘 만나면 많은 성취를 얻어낼 수 있다. 또 친구를 잘 만나야 인생이 좀 더 풍부해지고 따뜻해진다.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인간관계 속에 평가되고, 평가하게 된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도 독불장군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공자는 말했다. “인자불우(仁者不憂) -어진 사람은 걱정이 없다”고.
공자가 인仁만큼 강조한 것이 예禮인데 예란 무엇인가? 글자를 보면 시示와 풍豊으로 이루어져 있다. 示는 고대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제단의 모습으로 제단 위에 물건이 놓이고, 장식 끄나풀이 늘어진 모습의 상형문자가 示다. 보일 시 ‘보인다’는 풀이가 바로 ‘신의 계시가 보인다’는 의미다. 豊은 예라고 읽히기도 하는데 그릇(豆) 위에 옥 등으로 만든 제물이 놓인 모습이다. 그래서 예란 재물을 풍성하게 차리고 신에게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예라는 것이 유달리 조심스러움이 강조되고 인간적이지 못한 내면이 보이는 것은 이런 원시종교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왕은 하늘에 전전긍긍하며 예로서 제사를 올리고, 신하는 하늘이 내린 왕에게 전전긍긍하고, 여자는 하늘이 내린 남자에게 전전긍긍해야 하고, 아이는 하늘의 질서를 유지해가는 어른에게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 왕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남자가 계집질을 했든, 동네 어른의 행실이 개차반이든 어떻든 묵인해야만 한다. 예에는 대화가 없고, 평등도 없다. 단지 전전긍긍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현대의 공자 추종자들은 ‘예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껍데기만을 알고 있는 우리들의 무지가 더 큰 문제’라는 방패막이를 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공자 당시에도 입방아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누가 공자에게 “도대체 예의 본질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멋진 질문이군! 간단히 말하면 예는 번잡하기보다는 검박(儉朴 - 검소하고 소박)하고 간소해야 하는 것이오(大哉問! 禮與其奢也寧儉)”라고 대답하고는 덧붙여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진정한) 예를 행할 수 있겠는가?(人而不仁 如禮何?) 하고 되물었다.
공자가 말한 언어가 아무리 소박하고 본질적으로 검박하다 해도 수직의 명령과 복종의 굴레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나 예의 성역이 존재하는 한 상대방은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그럴 듯이 포장해도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일방통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높은 사람 앞에서는 여전히 주눅 들어야 하고, 선생님 앞에서는 ‘그건 그렇지 않아요’라고 왜 할 수 없는가? 이제 수직의 선은 끊어야 한다. 공자가 주었던 권위의 면죄부 뒤에 숨겨진 추한 모습들은 드러나야 한다. 모두가 인격적으로 공평해야 하고, 누구도 능력 없는 권위만으로 명령해서는 안 된다. 공부 못하는 아이도, 땅 투기할 줄도 기회도 잡지 못한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은 인간이다. 모든 것이 투명해지고 수평되어야 한다. 능력 없는 권위는 제거되어야 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존경과 사랑이 자리 잡아야 한다.
‘공자에게 EQ를 배우다’라는 말은 ‘공자가 EQ가 무척 높았던 사람으로 동양인들은 그의 높은 감성지수를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누가 “친구가 죽었으나 가족이 없어 장례를 치를 수 없다(朋友死 無所歸)”고 하자, 공자는 선뜻 “내가 그 장례를 맞지(曰 於我殯)”라고 했다. 표정과 말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EQ지만, 여기 더해 행동까지 따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상대방을 친구로 만들 수 있고, 친구로 받아줄 수 있다. 한자의 동정(同情)은 감정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그 속에는 물질과 행동이 포함된다.
《논어》첫머리에 배움을 강조함과 동시에 ‘먼 데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다. 공자가 말한 즐거움이란 어떤 즐거움일까? 즐거움에는 술 마시는 즐거움, 여자를 희롱하는 즐거움, 음악을 듣는 즐거움, 오락을 하는 즐거움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 말 바로 전에 ‘공자는 다른 사람과 노래하다가 잘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앙코르를 청했고, 같이 따라 불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한 즐거움은 음악인 것이다. 음악도 여러 가지다. 클레식, 뽕작, 트로트, 팝, 민요... 그런데 아쉽게도 공자의 음악취향은 특정 장르에 치우쳤다는 점이다. 공자는 농민들이 일터에서 흥얼대는 ‘흙치기’따위 민요는 좋아하지 않았고, 귀족들이 즐기는 클레식을 좋아하고 즐겼던 것이다.
이것은 음악을 통해 희로애락을 폭넓게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점이 후대 동양문화가 사람들의 정서를 자연스레 반영하는 음악들을 배격하고 딱딱한 예의와 엄숙한 표정 속에 빠지게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 말마따나 ‘너무 도덕적인 유교는 동양인들의 딱딱한 표정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실제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중국 사람들과 막상막하로 한국인들의 얼굴은 무표정의 결정판이다. 딱딱한 표정은 경직된 사고와 감정에서 비롯된다. 경직된 감정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는다. 마음의 문이 닫히면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되면 친구를 사귈 수 없다. 친구는 감정의 문으로 들어오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사에 살고 제사에 죽던 사람이다’사람이 죽으면 혼백으로 변하고 그 혼백(魂魄)을 산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상제사는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제사 때의 몸가짐은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사람과 과거의 일에 신중하다 보니 현재는 언제나 어제를 기억하는 시간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재는 사실 내일을 위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동양문화를 죽은 사람에 대한 접대문화 속으로 빠뜨렸다. 미래 지향적보다 과거 지향적인 문화로 특정 짓게 된 것이다. 내일보다 어제에 더 관심 갖게 하는 ‘원인 제공자’가 바로 공자다.
이쯤에서 보면 공자는 그렇게 좋은 사람, 올바른 동양문화를 정착시킨 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를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공자를 운명론자로 보기도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거친 수수밥에 찬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우니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생긴 돈과 벼슬은 나에게는 그저 한갓 떠도는 구름일 뿐”(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이라고 한 것을 보면, 대선사 수준, 아니 해탈경지에 이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불교 창시자 석가모니(BC 563∼483)와 공자(BC 551∼479)는 비슷한 시기를 살기는 했으나, 석가모니가 불교를 설파하고 500년쯤 뒤에 중원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고 보면, 공자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측은 말이 안 된다. 오히려 공자가 석가모니보다 앞서 깨달은 소박한 원시불교의 씨앗이라고 해야 할까.
공자의 말 중에 아무리 뒤집어 봐도 비판하기 힘든 구절이 있기도 한데 그것은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말이다. “사람을 가르치는데 어떠한 차별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고 가르침은 경험의 전수이며, 숨어 있는 능력의 개발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요소는 ‘정보와 자본’이다.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자본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의 최대 약점은 빈부의 문제다. 이것 때문에 공산주의를 불러왔고, 이념은 아직도 불씨로 남아있다. 공산주의 실패가 빈부 문제까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물 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한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공자가 설정한 교육 항목들은 ‘문행충신(文行忠信)’이 네 가지였다. 문文은 경험의 기록, 즉 문서화된 정보를 말한다. 공자 당시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시경』『서경』『예기』『악경』등이 그것이다. 내용까지 살피기는 너무 길어서 줄인다. 행行은 사거리를 나타내는 상형문인데, 탁상공론이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다. 움직이지 않고서 입만 나불대지 말라는 말이다. 충忠은 마음에 중심이 위치한다는 것을 상징한 문자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인 인간이 자연의 이치를 절반만 따랐어도 살맛 나는 세상은 이미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한번 정하면 변치 않은 마음이 좋은 마음이긴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대상으로 마음을 정하고 변치 않을 것인가이다.
동양사회는 정치적 억지가 바로 이 충에서 비롯되었다. 윤모씨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그렇다면 무엇에 충성한다는 말인가? 개인과 사회적 자유는 충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해지기만 한다. 위정자를 비롯해 모든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충을 강요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지식, 정력 모두를 요구한다. 동양의 조직사회에서 유난히 과로사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충忠을 강요하는 충蟲 때문이다.
신信은 인人과 언言으로 된 글자다. 사람은 말로 판단한다. 유일하게 언어를 가진 존재, 그러나 언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준 것 중에 말에는 책임이라는 끈이 달렸다. 말에는 지켜야 하는 책임이 절대적이다. 말과 자신이 하나 된 사람이라야 믿을 수 있다. 교육부는 해마다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새 교과서를 만든다. 우리 사회 교육 현장에서 되찾아야 할 교과서는 눈으로 읽은 인쇄된 교과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주고받는 감동적인 교과서여야 할 것이다.
【맹자】
여기서 《맹자》는 사람 이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4,685자로 되어 있고, 「양혜왕」「등문공」「리루」「만장」「고자」「진심」등 총7편 260장의 죽간으로 된 책을 말한다. 구어체(口語體)와 문답체로 날카로운 논변과 정치적 진단, 역사와 지리, 인물들에 대한 비유까지 생동감 있게 그려낸 ‘동양적 논술서의 기원’이라고 불릴만한 책이다. 《논어》처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맹자(孟子, BC372∼289)의 고향은 공자와 같은 산동(山東) 노魯나라다. 이름은 가(軻). 공자 사상을 이어받았으나, 자신만의 기개와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논변으로 전국시대 최고의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인仁과 의(義), 성선설(性善說), 왕도정치 등으로 대표되는데, 당시에는 약육강식에 의한 부국강병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중심인물로 추앙받는지도 모른다. 공자와 맹자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데, 토론하듯이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공자에 비해 맹자는 직선적이고 단도직입적이면서, 고치고치 하기도 하다. 이것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도 있겠지만 시대적 요인에 기인하기도 한다.
맹자도 불교가 중원에 들어오기 전 인물이므로 불교를 ‘카피’하지는 않았을 텐데도 반불교도(半佛敎徒), 아니 석가 수준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찾으려 나설 줄 알면서, 마음을 잃었는데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마음을 잃어버리고도 태연하게 찾을 생각을 안 한다니 강심장일까? 멍청일까? 아니면 찾을 줄을 몰라서일까? 마음을 찾는 방법이 있는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마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양심 막선어과욕(養心 莫善於寡慾) - 소박한 마음(양심)을 기르는 방법은 욕심을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여기서 寡慾은 過慾과 다르다. ‘욕심을 부리다’는 過慾이지만, 寡慾은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욕심을 버리면 마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욕심을 버리면 양심을 찾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먹고자 하는 욕심(食慾), 이성을 찾고자 하는 욕심(性慾)두 가지 욕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프로이트’도 꼽았고, 맹자는 그것을 성性이라고 했다. 이것은 후천적이 아니고 본래적이고 선천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증명할 필요도, 증명할 수도 없는 본래적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조물주로부터 선사 받은 인간의 본래적인 느낌과 감각을 바로 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하고 선하다고 했다.
인간은 본래부터 선善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도덕성의 함양과 강조는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덕적인 것을 추구해 가는 데는 다음의 네 가지 기본 성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유시관지 무측은지심 비인야 무수오지심 비인야 무사양지심 비인야 무시비지심 비인야)”라고 했다. 해석하면 ‘이를(아이에 우물에 빠지는데 붙잡아 주는 현상)놓고 볼 때, 사람이 측은함을 갖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또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이다.
그러면서 인간에게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하는 네 가지 본질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측은지심’등 네 가지 성품을 제어하고 또 밀어주기도 한다고 했다. “측은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의 관계에 필요한 기본적 느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옳은 것을 아는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마음은 슬기로운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지만, 네 가지 본질을 확대해 가는 방편이기도 한 ‘인의예지’란 무엇일까? 의외로 단순하다. “인仁의 핵심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다. 의義의 핵심은 형을 따르는 것이다. 지智의 핵심은 이 두 가지를 알아서 여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예禮의 핵심은 두 가지를 법도와 조리에 맞게 실현하는 것이다. (仁之實 事親 是也 義之實 從兄 是也 智之實 知斯二者弗去 是也 禮之實 節文斯二者 是也)”라는 것이다.
맹자는 세상의 이상(理想)은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부모 형제가 중요했다. 사랑하고 보살필 수 있는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 감정을 다스리고 성품을 닦을 때 밖에서도, 타인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론이 옳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인간을 더 정확히 분석한 진단일 수 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화목과 사랑’을 강조 한데서 인정받고 사랑받은 것이다. 유교는 남녀에 대한 편견만 제거한다면 너무 좋은 ‘어드바이스(조언)’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 조금 딱딱한 이야기 같기도 한데, 쉬운 이야기를 하나 보자. 제나라 선왕이 화려하게 꾸민 자신의 설궁으로 맹자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옛날 통치자들도 이런 즐거움을 누렸겠지요?”이에 맹자가 “유有”라고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선왕이 다시 물었다. “옛날 주나라 초대왕 문왕은 개인 공원이 사방 70리였다는데 사실입니까?”맹자가 그런 기록이 있다고 대답했다. 다시 선왕이 “이것만 합니까?”라며 자신의 정원만 하냐고 물었다. 맹자가 “백성들은 그것이 작다고 생각했습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선왕이 다시 물었다. “내 개인 공원은 불과 사방 40리 정도인데도 백성들이 크다고 아우성이니 어쩐 일입니까?”맹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문왕의 개인 정원은 사방 70리이긴 했지만,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쓰셨으니 백성들이 작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처음 제나라에 들어올 때 제나라의 엄중한 국법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후에 들어왔습니다. 듣자니 왕궁 안에 사방 40리 되는 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사슴을 죽일 경우 살인죄로 다스린다면서요? 그렇다면 이건 사방 40리나 되는 함정을 나라 안에 파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즐거움이란 소유에 있지 않고, 함께 나누는 데 있다. 재벌들이 아무리 정원을 크게 만들고 높은 담으로 꽁꽁 묶어놔도 거기에서 모든 즐거움을 얻을 수 없듯이 모두가 바라보고 걸어 들어가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라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모른 선왕에게 맹자가 보낸 일침이었다. 이에 저자인 김 교수는 사족을 달았다. “대통령이 인기 있나 없나. 여론조사를 왜 생돈 들여가며 뮛하러 하는지? 괜히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지”라고.
맹자라 하면 그 ‘트레드 마크’가 왕도정치(王道政治)다. 왕도정치란 어떤 정치를 말하는 것일까? 정치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맹자는 요순시대 두 임금이 실행했던 방법을 왕도 또는 왕정(王政)이라고 했다. 왕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의미로 왕도라고 했고, 그 이상형으로 요순을 끌어온 것이었다. 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패도(覇道)를 부각시키기도 했는데, “무력으로 인仁의 이름을 빌려 통치하는 것을 패覇라고 한다(以力假仁者覇)”고 하여, 패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다. ‘왕도정치는 왕이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백성들을 보살피는 것이지만, 패도는 겉으로는 인과 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무력으로 통제하는 정치’를 말한다. 민주주의 덜된 나라에서 하는 정보정치를 패도정치라 할 수 있다.
패도정치로 한 몫 본 인물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 진晉나라 문공, 진秦나라 목공, 송宋나라 양공, 초楚나라 장왕 등인데, 이들은 싸우기도 지쳤는지 한때 정치 한번 잘해보자며 맹약을 맺기도 했는데(5맹약)“첫째, 불효자는 죽이고 태자를 바꾸지 말아야 하고, 첩을 본처로 삼지 말아야 한다. 둘째, 지혜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덕망 받는 사람을 표창해야 한다. 셋째,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손님과 여행자들은 염려하고 배려해야 한다. 넷째, 귀족은 관직을 세습하지 말아야 하고, 관리를 채용하는 데는 반드시 책임자를 골라야 하며 멋대로 대부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제방을 삐뚤게 쌓지 말아야 하며 이웃 나라에서 양곡을 수입해 가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한다. 또 영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면서도 맹주에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춘추시대 오패는 당연히 이런 맹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 후 맹자시대 제후들도 물론 지키지 않았다. 왕도정치는 삶의 질을 높이고 보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만 실행되지 못했고, 패도는 오늘날 우리가 미워하고 지겨워하는 정치형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교육의 중요성을 알아챈 맹자는 서민들에 대한 보편적인 교육을 역설했다. 공자도 배움을 언급했지만 공자는 주로 지배층인 군자에 대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면, 맹자는 서민 모두에 대한 문맹 탈출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또 나의 ‘좌우명’이기도 한 ‘불괴어천(不愧於天)’은 맹자의 교육에 관한 모티브에서 유래한다.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천하를 다스리며 왕노릇하는 것에 있지 않고, 1) 부모가 생존해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 사고가 없는 것이다. 2)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내려다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며, 3) 천하의 뛰어난 영재를 얻어 그를 교육하는 것이다. 군자에게는 이런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를 다스리며 왕노릇 하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君子有三樂以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仁 二樂也 得天下英才 以敎育之 三樂也 君子有三樂 以王天下不與存焉)는 것이 그것이다.
【중용】
《중용》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지만 2019년에 「중용, 어울림의 길」이라는 책을 통해서 겉핥기 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대략만을 살피기로 한다. 중용은 《예기》49편 중의 31편으로, 송대 주자에 의해 《논어》《맹자》《대학》과 함께 사대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공자 손자인 자사(子思 BC 492∼431)가 지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지만, 청대 이후에 자사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라, 후대 유학자들이 살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중용》에는 사람의 ‘마음을 자연과의 근거로 풀어내기’때문에 송나라 사람인 정이천은 ‘심법(心法)’즉 ‘마음을 다루는 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용》에서 중中은 치우침 없는 가운데라는 의미로 읽지만, 갑골문에의하면 막대기(ㅣ)와 태양을 뜻하는 구口로 된 글자다. 바람과 그림자를 이용해 방향을 판단하는 계측기로 쓰인 것이다. 바람과 태양 빛의 변화를 측량하는 계측기, 변화무상하다는 의미가 중자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이다. ‘변화 속의 중中, 예측 불허의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다. 또 용(庸)은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뜻이다. 시대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이익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변함없는 가치, 이른바 천하의 이치라는 것이다. 인간이 체득할 수 있는 고도의 민감함이며 조절 능력이다. 조절 능력을 갖추고 삶의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지난 2002년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4강으로 그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꿈은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한다. 성공하고 싶다면 성공을 가능케 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용》에는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아홉 가지 덕목을 성공비결로 제시하고 있는데, “스스로 갈고 닦음. 능력 있고 상식 있는 사람을 존경함. 친족을 가까이하고 사랑함. 원로 공신들을 공경함. 아래 사람들을 몸소 살핌.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함. 기술자를 모이게 함. 먼 나라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함. 제후들을 포용함.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侯也)이 그것이다.
말은 아홉 가지이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로 축약된다.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공하려면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믿을 때 자신감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 걸음씩 실천에 옮겨야 한다. 실천할 때는 ‘몸을 깨끗이 닦아 말끔하게 하고, 복장을 정숙하게 하고 예의 바르지 않은 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예의’를 유교의 수직 윤리로 보기도 하지만 새 옷을 입거나 목욕탕을 나설 때 혹은 싹싹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신선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호감을 사는 지름길이고 성공의 첫 단추일지 모른다.
《중용》을 비롯한 『사서삼경』은 선인들의 말씀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러나 《중용》에는 “현재에 태어났음에도 옛길로만 돌아가려는 사람(生乎今之世 反古之道)”을 경계하고 있다. 현재를 살도록 충고하고 있다는 말이다. 무모하게 옛길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필요한 가치라면 보존해야 하고 ‘요즘 것들은 도덕교육이 전혀 안 돼 있어!’라는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고 이해도 해야 한다. 못났다고 잘난 사람 미워할 필요가 없고, 없다고 있는 사람 질투할 필요도 없다. 단지 각자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던져야 한다. 선천적인 차이와 관계없이 누구든지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 때 그 결과와 만족감은 동일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을 《중용》에서는 성誠이라 부른다. 성은 말(言)과 이룬(成) 것의 결과물이다. 말이란 ‘목표이자 의지로서 목표와 의지로 끝까지 이룰 수 있는 태도 그것이 바로 성이다.’성은 진실이고 성실이고 끈기다. 인생이란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성실함과 끈기’그것이 바로‘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대학】
《대학》은 秦나라 이후, 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는 다음 세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1) 학교라는 의미, 8세 때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5세가 되면 엘리트 코스로 대학에 들어간다. 2) 책 이름, 《대학》은 본래 《예기》속에 있었으나, 송나라 주자(朱熹, 1130∼1200)에 의해 단행본으로 분류되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지었다고 하기도 하나 확실치 않다. (3) 학문의 범주. 엘리트들의 학문하는 자세로 세상을 읽는 기본 방법을 담고 있어서 ‘커다란 학문의 세계’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구별된 것을 경으로 받아들이면서 널리 세상에 퍼졌다. 지금 우리는 (1)의 범주로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대학을 이해하고 있지만, 《대학》은 깊고 설득력과 엘리트들이 갖추어야 할 인간관, 사회관, 정치관, 국가관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익히고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다.
학습장애를 가진 많은 아동들의 특성은 머리는 좋으나 산만하다는 데 있다. 마음의 질서와 순서를 찾아 그것을 따라가는 능력이 학습장애를 해결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키포인트이다. 《대학》은 이 마음을 잡는 방법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 있다. 또 끝과 시작이 있다. 따라서 일을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알아서 처리하게 된다면 도를 터득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의 순서를 통해 일의 순서를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도’를 터득한 경지라고 하였다. 한 번쯤 시도해 봄직하다 싶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속담처럼 편안한 이 말의 원전이 《대학》이다. 목표는 천하를 평화롭고, 안정되게 하는 것이지만 출발은 스스로를 닦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바로 일의 순서를 터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원문은 거꾸로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 수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천하 모든 사람에게 양심의 불을 밝혀주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려 할 경우는 먼저 자신의 씨족집단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 자신의 씨족집단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할 경우는 먼저 자신의 인격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치적·역사적 소명 의식에 불탄다. 그러나 커다란 다스림을 펴고자 한다면 작은 마음의 보살핌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이 점층적인 논리 전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행위와 생각을 맑고 깨끗하게 닦은 뒤에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수양을 강조한 《대학》은 자기 수양에는 천자나 서민이나 가리지 않고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옛날 어른들은 모두가 성인군자라며 자기기만과 착각에 빠져 일방적으로 훈계만을 하려 들었다. 옛날에도 강도 강간, 사기꾼도 있었고, 제비족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서로가 노력하자’고 해야 하는데도, 공자 맹자 들먹이며 일방적으로 훈계하려 해서는 안 된다. 통치자라면, 지도자를 자처한다면 근본인 자기 수양을 제쳐두고 ‘평천하’에만 뜻을 두어서는 안 된다. 세상만사는 순서가 있고 또 근본이 있다. “근본이 엉망인데 결과가 올바르게 나올 리 없다(其本亂而末治者 否矣)”마음속이 어지러움에 빠져 있다면 근본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시경】
《시경》은 기원전 1122∼599년경, 주나라 초부터 전국시대까지 민간과 왕실 등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모은 「노래집」으로, 풍(風)·아(雅)·송(頌)으로 구분되는데, 풍은 민간가요, 아는 왕궁잔치에 쓰이던 음악, 송은 왕실의 조상을 미화하거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작품으로 대부분 신화를 담고 있다. 모두 305수의 시(가사)가 총 39,124글자로 되어 있으며, 6편은 제목만 전한다. 그전에는 그냥 시(詩)였으나, 전국시대 이후에 경(經)으로 불렸다.
《시경》은 얼핏 보면 한자로 되어 있어서 어려워 보이지만, 풀어보면 여인네들의 한이 서린 노래, 사랑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000년 전 노래에서 마음이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흔들리기도 한다. 한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렵고 근엄한 것으로 지레짐작해 버릴 것이 아니라 시속에 담긴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또 더럽고 비열한 인간의 모습까지 찾을 수 있다. 《시경》에는 우리 동양인의 유아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말에만 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자에도, 영어에도 욕이 있다. ‘씨, 시발, 씹’이런 것이 욕이다. 한자 식(式)은‘으이그 씨’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로, 조금 세게 발음하면 욕이 나온다. 씨는 잇발 사이로 빠져나오면서 만들어지는 음으로 많은 문화권에서 거친 감정처리를 위해 사용하는 소리다.
〈씨∼ 나라는 다 망하게 생겼는데(式微)〉라는 시가 있다.
“씨, 나라는 하루하루가 기울어 가는데 임금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도대체 왜 우리가 이토록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거야
씨, 나라는 하루하루 기울어 가는데 임금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어야 하는 거야”
(式微 式微 胡不歸? 微君之故 胡爲乎中露?
式微 式微 胡不歸? 微君之躬 胡爲乎泥中?)
서울에 청담동과 압구정동이 있는데, 그곳은 뉴욕의 어느 뒷골목 거리 같고 로스엔젤레스나 시애틀의 어느 모퉁이와 비슷하다. ‘카피’된 도시라는 말이다. 중국도 그렇다. 상하이 쉬쟈헤이는 세계 부자들도 놀랄 ‘패션거리’다. 주나라 때도 낙양에 그런 패션과 낭만의 거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멋쟁이(君子陽陽)〉
“멋쟁이 군자들 왼손에 피리 들고
오른손으로 살살 나를 부르네
멋쟁이 군자들 왼손에 새털 들고
오른손으로 살살 나를 부르네”
(君子陽陽 左執簧 右招我由房 其樂只且 *피리簧
君子陶陶 左執翿 右招我由敖 其樂只且) *깃일산翿
어디로 부르는 것일까? 내방(房)으로, 아니면 놀러(敖)오라고
【서경】
《시경》도 그렇지만 《서경》은 더 생소하다. 1899년 중국 베이징의 어느 약재상에서 뼛조각을 약으로 달이려던 것을 본 관리가 뼈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갑골문이 새겨진 것으로 이는 기원전 1384∼1111년간의 은나라 왕실에서 새긴 〈왕조실록〉이었다. 은나라가 상대인 하나라와 상나라 왕실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그것을 공자가 100편으로 추려 묶었다고 하고 기록이란 의미로 서書라고 부르다가, 오래된 기록이라 상서(尙書)라고도 부르다가 《서경》이 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라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한나라 때 복생이라는 인물에 의해 전해진 29편만 진짜로 판명되었으나, 고어로 되어 있어서 《주역》과 더불어 가장 난해한 책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치와 행정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사대부들의 필독서였다. 《서경》은 내용에 따라 ·전체(典體) 통치행위, ·모체(謨體) 회의록, ·훈체(訓體) 신하의 조언, ·고체(誥體) 임금이 신하에게, ·서체(誓體) 백성에 대한 격려문, 명체(命體) 임금의 당부 등으로 구분된다.
《서경》을 읽다 보면 중국인들 참 꼼꼼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유달리 책이 많고 그중에서도 역사서가 많은 민족이 중국 민족이다. 그들의 메모중독증 때문에 수천 년 전 문화와 실록을 알 수 있으며 왕과 신하 그리고 주변 나라들과의 신경전에 관한 표현들은 투박하지만 매우 상세히 기록돼있다. 사서삼경에 대하여 “시경은 사람의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서경은 사리를 밝히어 알게 한다. 또 멀리 내다보게 한다”고 평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그 어려운 《서경》, 그것도 남의 조상 이야기자 남의 왕실 이야기를 왜 우리 조상들은 청춘을 바쳐가면서 공부해야 했고,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아쉽다. ‘지피지기(知彼知己)’때문이었을까.
우리가 단군을 실존했던 인물로 복제하고 싶은 욕망처럼, 중국인들도 신화 속의 3황 5제를 실존 인물로 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화적 ‘쥐라기 공원’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3황은 복희씨, 신농씨, 수인씨를 말하고 5제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을 말하는데 《서경》에는 이 여덟 종류의 씨족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요임금 다음이 순임금인데, 순임금의 신하들이 요임금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옛 요임금을 살펴보자. 업적이 무한하다. 구체적으로는 침착하고, 사리에 밝으며, 품위가 있고 생각이 깊었다. 따라서 그의 통치 지역은 항상 평온했다. 다른 부족을 인정했고 또 사양할 줄도 알았다. 때문에 그의 빛나는 영향력은 사방으로 확대되었다.”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이런 기록이 신빙성이 있을까 싶지만 계속되는 찬사를 보자. “커다란 덕을 발휘해 아홉 종족들을 화합시켰고 그로 인해 아홉 종족이 화합했다.”요임금이 힘과 꾀로 사방을 통합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현대에까지 중국이 ‘통일국가’라는 기원에 대한 인센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 뜻대로 안 되면 ‘법대로 하자’거나 ‘법대로 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법法이란 글자를 보면 물(氵)가 변에 갈거(去)로 되어 있다. 갈거가 ‘간다’라는 의미와는 관계없이 ‘검은 양’모양의 상형문으로 法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의미한다. 중국 고대에는 시비가 붙을 경우 두 당사자를 물가에 앉히고, 검은 양을 두 사람 뒤에 세운 후에 아무나 들이받게 하였는데 그게 판결이었다. 재판관인 무당은 양이 들이받은 자를 자루에 넣어 물속에 처넣었다. 그래서 法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래 갈리 없었던 ‘물가와 양’문화 대신에 좀 더 객관적인 기준이 바로 《서경》에 보이는 〈홍범〉이라는 법이다.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의 왕이 된 무왕이 은나라 출신 기자(箕子)에게 물어서 만든 동양 최초의 법전이다.
은나라 왕실의 스승이었던 기자는 조선과도 관련이 있다면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로서 은나라가 망한 후 주나라 시조인 무왕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겸손한 무왕의 대접을 받은 후, 아홉 가지 원칙과 육십 가지 세부 실천 사항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홍범〉이다. 거기에는 ‘첫째는 오행, 둘째는 5가지 삼갈 바, 셋째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8가지 정책, 넷째는 협력에 필요한 5가지 기강, 다섯째는 5가지 법도, 여섯째는 3가지 덕목, 일곱째는 점치는 법, 여덟째는 8가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 아홉째는 5福과 6禍를 피하는 법’이 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는데 단군의 ‘8禁法’에 비하면 소상하고 세밀한 것으로 이게 신석기 시대에 만든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행은 ‘수화목금토’로 동양철학의 순환과 변환의 법칙으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여기에는 방향과 성질, 맛까지 포함하고 있다. 계절의 순환을 읽어야 농사가 잘된다는 말은 지금도 유용하고,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개인에게는 다섯 가지 복이 따라야 한다고 한다. 즉 “오복은 장수, 부, 건강, 선행, 행복한 임종이다. (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또 여섯 가지 피해야 할 일은 “재난을 만나 죽는 것, 질병, 근심, 가난함, 악한 태도, 허약함(六極 一曰凶短折 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惡 六曰弱)”이다.
우리 역사에서 기자는 미스트리 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한민족 자체가 미스트리 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단일민족인가? 두만강과 압록강은 건너온 것이 맞을까? 서해로, 남해로 해류에 밀려온 것은 아닐까?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 이름은 무슨 뜻일까? 한자의 의미로는 풀 수 없는 그 뜻이 도대체 무엇일까? 민족의 기원을 알아낸다는 것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그렇지만 《서경》에 작은 단서가 있는데, 그것은 중국인들이 즐겨 언급하는 ‘기자조선’의 정체다.
은나라 마지막 주왕에게는 미자(微子)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다. 미자는 주정뱅이이자 폭군인 형의 학정을 보다못해 당시 지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던 스승인 기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나라가 망할 생각을 하니 미칠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합니까? 아니면 장차 황량해질 이곳에서 늙어야겠습니까?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아무도 나에게 상황을 말해주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我其發出狂? 吾家髦 遜于荒 今爾無指告子 顚際 若之何其?)”상황을 듣고 나서 기자는 사태를 진단하고 미자에게 말했다. “왕자! 하늘의 독이 재앙이 되어 은나라에 쏟아졌소. 동시에 모두들 술과 탐닉에 깊이 빠져 있소.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험 많은 원로들의 말을 어기고 있소. 오늘날 은나라 백성들은 제사 음식들을 마음대로 훔쳐다가 먹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있소. 왕실은 백성을 쥐어짜며 무거운 세금으로 다루고 있어 백성들은 왕실을 원수처럼 대하고 있소, 이렇듯 죄가 뭉쳐 있으니 어디다 고할 데가 없소”기자가 진단한 은나라 패망 원인은 술과 기성세대 무시, 제사 폐지, 세금이었다. 이 중에서 기성세대 무시와 제사 폐지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나머지 둘은 지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기자는 미자에게 목숨을 보존하여 은나라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고 충고했고, 이에 미자는 주나라로 달아났다. 그는 은나라 상황을 주나라 무왕에게 상세히 알렸고, 결국 은나라는 273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주나라에게 황하문명을 넘겼다. 그 후에 죽기를 각오했던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그가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에 책봉된 것이 사실이라면 3100년 전의 조선은 한반도 북쪽에 있던 그 조선이 맞을까? 아니면 아직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수수께끼처럼 다른 지역이었을까? 어쨌든 기자라고 하는 인물은 미스터리로 가득한 인물이다.
【주역】
《주역》은 경이 아닌데도 어떻게 경에 포함된 것인가? 《주역》은 점술서다. 아니다. 우주의 원리를 담은 철학서다. 논란이 많지만 《주역》은 스스로 어떤 책으로 불려지기를 원했을까? 《주역》에 〈계사〉라고 하여 괘를 풀어 논 것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주역》은 주나라 문왕, 혹은 공자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모두 전설일 뿐이다. 전국시대 이후에 첨가된 것인 〈계사〉는 《주역》의 괘가 만들어진 이후에 《주역》은 이런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역》의 출발은 소박한 우주론에 있었지만 〈계사〉가 첨가되면서 철학적으로 포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역》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이에 따라 건괘와 곤괘의 순서가 정해진다.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까지 여섯 개의 효(爻)가 배열되고 귀함과 천함의 순서가 자리잡힌다. 움직임과 고요함의 법칙이 있어 굳셈과 부드러움으로 대표되는 사물의 모든 성질이 결정된다.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주역》은 주나라 때 만들어진 역술서이며 주나라 이전 하나라 때는 『연산역』, 은나라 때는 『귀장역』이라는 역술서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한나라 때 정현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역의 세 가지 의미는 1) 우주 만물의 이치를 간단히 풀 수 있는 공식 2) 우주 만물이 항상 변하고 바뀌는 상황을 포착함 3) 우주 만물이 내부적으로는 늘 변하지만, 하늘과 땅이 움직이지 않듯이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법칙을 담고 있음”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고정불변이란 이치도 맞지 않다.
《주역》이 패러다임을 잃은 데는 ‘생각의 틀’, 주변 환경을 해석하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8괘의 패러다임은 원시시대 농경사회에서는 그럴듯한 설득력을 지녔던 공식이었으나, 현대사회를 8괘가 커버하기에는 너무 넓어져 버렸다. 지구가 팽팽하지 않다는 것도 콜럼버스에 의해 증명되어 버렸듯이. 과거 원시시대 통용된 점술서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현재는 그것을 점술서로 볼 가치는 없다. 하지만 지금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으니 《주역》을 가지고 ‘너의 문제, 너의 운명을 바꾸어 주겠다’는 억지가 아니라면 윈도우10시대에 386으로 홈페이지를 만들겠다는 고집을 굳이 꺾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한다.
《주역》이 추구했던 것은 인간도 하늘, 땅과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변화와 조화를 살펴서 그 흐름을 타고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우주 만물의 리듬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삶의 발걸음이 엇박자가 되어 근심과 걱정이 생긴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과 천지는 서로 닮았기 때문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자체는 만물에 두루 미치고 구체적인 변화는 천하를 골고루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빗나가는 일이 없다. 역은 두루 행하지만 빗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우주와 자연의 법칙에 잘 순응하며, 주어진 상황에도 잘 조화한다. 그러니 당연히 근심하지 않는다. 편안히 거처하고 순한 마음 가득하니 사람들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이것이 낙천지명(樂天知命)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신비하고 알 수 없는 ‘블랙홀’같은 것이 많으며, 또 그것을 숭배하는 사상은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신기하고, 무섭고, 겁나면, 숭배하고 우러러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의식이 ‘애니미즘*’이다.
*animism 해, 달, 별, 강과 같은 자연계의 모든 사물 불, 바람, 벼락, 폭풍우 등과 같은 무생물적 자연현상이나 생물, 무생물 모두에게 생명이 있다고 보고, 그것의 영혼을 인정해 인간처럼 의식, 욕구, 느낌 등이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관 또는 원시 신앙.
애니미즘에는 ‘음과 양’이라는 두 대칭성이 있으며 그것의 결합으로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원리에서 《주역》은 출발했다. 하늘은 강하고 동적이고 남자는 활달한 존재, 땅은 고요하고 만물을 뿜어내며, 여자는 조용하지만 아이를 생산하는 존재, 우주 만물은 이런 두 속성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 해서 만들어 낸 것이 음과 양. 이 둘을 일일이 글자로 쓰는 게 불편해서 만든 코드(부호)가 양(―)과 음(--)이며, 이런 둘을 묶어서 효(爻)라고 불렀고, 이 효를 세 개씩 묶어서 괘(卦)라고 했다.
《주역》에는 자연이란 없다. ‘스스로 그런 모습’이라는 자연이란 단어는 도가의 전용물로 거기서는 현재의 현상만 묘사한다. 《주역》도 ‘스스로’본래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으므로 자연이란 말 대신에 천天과 지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둘은 서로 얽히고설켜서 만물을 만들어 낸다고 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감응하고 합해져서 만물이 만들어지고 번성한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정기가 합하여 모든 생명이 시작되는 것처럼(天地絪溫 萬物化醇 男女構精 萬物化生)”하늘과 땅의 결합은 바로 남녀의 결합 또는 동물의 짝짓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결국 《주역》의 발상은 짝짓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늘을 나타내는 건괘(乾卦)와 땅을 의미하는 곤괘(坤卦)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둘이 낳은 여섯 아이들을 합쳐 8괘가 되었다. 하늘과 땅, 남과 여의 이치가 동일하다는 것이 《주역》의 논리다. 남과 여가 만나 합치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이 간단한 논리가 수천 년의 인류 문화를 이어오는 숨은 비밀이 되었다. 하지만 남과 여의 결합이 수학공식처럼 대입해서 척척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 변칙이 있다.
팔팔 육십사, 이것은 《주역》이 양과 음 그리고 태양과 태음, 소양과 소음으로 나뉘고 사계절과도 연결된다. 이것을 다시 2개씩 분화해 8개의 괘를 낳는다. 계산상 단순한 분화인 것 같지만 8이 바로 원시 우주론인 것이다. 우주는 여덟 가지 요소가 변화하면서 유지·발전된다고 믿은 것이다. 8괘란 하늘, 땅, 바람, 번개, 산, 연못, 물, 불로 우주와 삶을 8개로 축약해 놓았던 것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 이에 따라 건과 곤의 순서가 정해진다.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까지 여섯 개의 효가 배열되어 귀함과 천함의 순서가 자리 잡히고, 움직임과 고요함이란 안정된 법칙이 있어서 굳셈과 부드러움으로 대표할 수 있는 사물의 모든 성질이 결정된다.”라고 본 것이다.
처음에는 해, 달처럼 물질만 상정하던 8괘가 점차 물질이 갖는 성격을 대표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사람으로, 방향으로, 신체 등으로 확대되고 연결되었다. 번개와 천둥소리, 태풍, 신비로운 분위기를 낳는 높은 산과 고요한 연못, 봄이 되면 죽었던 식물을 토해내는 대지, 이들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고 왜 그렇게 변화할까? 하는 의문으로 조물주에 대한 비밀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오랜 탐구 끝에 자연계는 일정한 성질과 어떤 법칙이 있음을 터득했다. 또 그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드러내거나 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덟 가지 사물은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단순한 농경사회에서는‘일기예보’수준이었던 그 예측이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서 늘어난 것이 64괘다. 이것이 양과 음, 양과 양, 음과 음 등으로 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숫자로도 표시하는데, 양인 건은 숫자 9로, 음인 곤은 숫자 6으로 나타낸다.
종합하면 《주역》의 원리는 남녀라는 신비로운 존재와 사계절이라는 대자연의 변화, 그리고 사계절 안에서 순환하고 변화하는 여덟 가지 자연 물질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64괘는, 8괘의 단순성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성의 개념이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과 인간의 길흉화복은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64개의 경우에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 《주역》을 연구한 독일학자 빌헬름은 64괘를 일컬어 중국인들의 ‘총체적 우주관’또는 ‘삶과 세상에 대한 상징체계’라고 했지만, 조금 과장된 면이 있고 만물의 이치를 64개의 괘로 보았다는 것은 더이상 상상하지 않겠다는 ‘포기각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의 미래를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작은 불씨 하나가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상황변화와 결과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미묘한 상황에도 무작위로 뽑아낸 ‘산가지’에 적힌 괘 하나로 세상사를 풀이한다는 것이 맞는 일인가. 프로이트는 말했다. “과거나 현재 운명의 어떤 부분을 알아맞히고 미래를 예언하는 등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열등한 사람이다”라고. 《주역》이 나름 매력적인 부분은 우주의 변환과 인간 삶의 변형을 예측하고자 했던 시도다. 나름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예에서 보듯이 그 공식이 지나치게 원시적이고 거칠어서 복잡다단한 인간사 문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이 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우주 자연의 이치를 완전히 꿰뚫는 책이라면 만고불변의 이론과 논리가 정연하여 반론이 비벼질 틈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주역》의 괘 풀이는 예측 이론이 아닌 유교의 도덕이론 중에서 실천이 필요한 지침들의 짧은 멘트로 안배되어 있는 고단수의 교육프로그램이다. 대놓고 ‘하라, 하지마라’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을 읽으며 웃고 즐기다 보면 어느 새 학습이 된다는 뜻인지 모른다. 지은이조차 복희씨 혹은 공자 등 불분명하고 대부분 후대의 유교 신봉자들이 지어낸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주역》에 대해 마지막 덧붙이고 싶은 말은 음양오행을 믿고 행하는 돌팔이 한의사 “남자는 씨앗이고 여자는 밭”이라고 하여 여자는 아이 낳는 기계로 생각하는 일, 남자가 여자와 잠자리 하는 것은 장수를 위한 유격훈련장으로 생각하는 일 등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 한가지는 새 대통령을 뽑으려는 마당에, 적어도 《주역》은 무조건 성인을 뽑으라고 하였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싶다. 유교의 정치 논리는 천자의 절대권력에 있었으나 천자가 잘못되었다면 혁명을 인정했다. 다만 그 혁명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그 원칙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혁명해야 할지 그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주역에서 말하는 혁명 원칙〉
첫째, 혁명은 구성원들 간에 신의가 황소 가죽으로 묶은 듯이 견고해야 한다. (鞏用黃牛之革)
둘째, 여건이 이미 충분하다면 타이밍을 맞춰 혁명을 단행하라. 성공할 수 있다. (已日乃革之 征 吉 无咎)
셋째, 함부로 나서면 실패한다. 옳은 일이지만 위험이 따른다. 혁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가득할 때에 나서라. 순조롭다. (征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
넷째, 후회는 없다. 확신과 함께 혁명을 단행하라. 길하다. (悔无 有孚改命 吉)
다섯째, 지도자는 강한 호랑이처럼 변모해야 한다. 점을 칠 필요도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大人虎變 未占有孚)
여섯째, 성공한 지도자는 표범 같은 카리스마를 갖추어야 한다. 백성들은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지도자를 따른다. 그러나 격한 개혁은 실패한다. 좋은 것은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 길하다. (君子豹變 小人革面 征凶 居貞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