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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0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산상강론에서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영적으로 가난한 자의 천국,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 것,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름을 얻는 것,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지는 것, 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자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 왕국을 창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에서 말씀한 복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너무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잘 인용하는데 보통은 이 말씀으로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소금과 빛으로 살기는커녕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이 아니라 ‘속음과 빚’으로 살았다. 진리가 아닌 것에 속았고 율법적인 행위를 하라는 가르침 때문에 교회에 많은 돈을 갖다 바쳤다. 특히 건축헌금을 할 때는 빚을 내서라도 무리하게 헌금을 함으로 빚으로 사는 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면 과연 본문이 그러한 내용을 말씀하는 것이 사실인가?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고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절)라고 팔복의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박해를 당하는 너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문맥을 통해 보자면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복에 합류된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왕국이 된 자들의 정체성을 말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너희”란 한마디로 팔복이 된 자들이다. 팔복이 된 자들이란 일차적으로 제자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사도들이 기초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다.
우리 성경에 “세상”이라고 번역한 말은 ‘그 세상’인데 헬라어로 ‘게’라는 말로 ‘땅, 흙, 세상, 육지, 지구’라는 뜻이다. 정관사를 붙여서 ‘그 땅’이란 구약을 전제한 표현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창조 언약 안에서 ‘그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다. 예레미야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는 시점에 선포한 말씀이다.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 4:22-23)
하나님은 그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구원의 계획을 가진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 창조 언약이다. 그렇다면 창조 언약에서 보여주신 그 땅은 이스라엘의 상태이고 또한 모든 죄인의 상태를 표현한 말씀이다. 즉 땅의 모든 존재가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상태를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땅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본문에서 “소금”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는 본문에서 부패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이해한 것은 소금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싶어 한 것뿐이다.
또한 최근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오래 공부하신 분이 예수님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땅의 소금’은 흙으로 만든 화덕이고 그 화덕은 동물의 변을 재료로 불을 피우기 때문에 바닥에 소금을 깔아야 불이 잘 붙는다고 하면서 일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소금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불쏘시개의 역할을 다한 소금은 맛을 잃었기에 내다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배경적인 설명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단지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이라는 사실만 강조한다. 여기서 소금의 역할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나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짜게 하는 맛을 내는 것’이다. 버려져 밟히는 이유는 부패 방지의 역할을 상실했거나 불쏘시개 역할을 다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짜게 하는 맛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관심은 짜다는 것으로서 ‘소금의 본질’이지 생선 등의 부패를 방지하거나 불쏘시개 역할에 대한 ‘소금의 용도’가 아니다.
“소금”은 헬라어로 ‘할라스’인데 70인역에서 ‘멜라흐’의 역어로 쓰였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소금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소금, 즉 히브리어 ‘멜라흐’가 가장 처음 나오는 본문은 창세기 14:3에서 “염해”라는 말에서 사용되었고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에서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라는 말씀이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자기 삶의 근거로 삼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롯의 아내를 통해 심판 가운데 언약의 기둥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출애굽한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소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확인해 보자.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36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성막에서 성소의 분향단에 쓰이는 향을 만들 때 소합향과 나감향, 풍자향에다 유향을 섞어 같은 분량으로 만드는데 거기에 반드시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을 쳐야만 그 향이 거룩하다고 하였다. 즉 소금은 성결하게 만드는 필수품이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향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소금을 치지 않으면 그 향은 거룩한 것이 될 수 없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소제물에 꿀과 누룩은 넣지 못하지만 소금은 빼지 말고 반드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제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소금이 뿌려지지 않으면 결코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정결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기 위한 필수품이 소금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변하지 않는 언약을 소금으로 표현하셨다.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은 영원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하신 것은 영원불변의 상징이다. 구약에서의 소금은 정결, 거룩의 필수품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언약이 결코 변할 수 없고 영원한 언약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금이 정결과 거룩한 언약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정결하여 거룩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성취하실 분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분은 정결하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그 땅의 너희’란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에 있는 너희가 소금이라는 말씀이고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3-6)
“전도할 문”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전도”는 헬라어로 ‘로고스’이다. 즉 말씀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바울 사도는 거기에 하나 되어 묶여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너희 말”은 속격으로 표현되어 ‘너희의 말씀’인데 곧 ‘너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드러내고 흘려주는 것을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이 하라는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죄인에게 화목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과 원수였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화목이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계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로서 화목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너희는 세상이 부패하여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소금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는 이 땅에 말씀의 맛을 내는 존재다’라는 선언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자가 팔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금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그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의 ‘모라이노’는 ‘어리석다, 어리석게 행동하다, 무미건조하다, 맛을 잃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한 상태는 어리석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일이다. “아무 쓸 데 없어”라는 말의 ‘우데이스 이스퀴오’는 ‘아무 능력이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씀이다. “밟힐 뿐이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파테오’인데 ‘짓밟다, 멸시하다’라는 뜻으로 수동태로 쓰였으니 멸시를 당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짐승과 대조된 표현으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들을 지칭한다. 즉 교회에서 버려진 자를 맛을 잃은 어리석은 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는 말씀은 소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존재는 그 말씀에 의해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며 곧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십자가의 길을 은혜로 가는 자들이다(202406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실시간 방송 중 오디오 문제가 있었네요
뒤늦은 제보에 의해 확인해 보니 듣기 어려운 상황이네요
다른 대안이 없어 죄송합니다.
교안을 참고해서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