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수필가 회고
『수필의 길을 가다』 저자 사인 쪽에 적어 보낸 글. 당시 구로문인협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라서 내게 그리 호칭한 듯.
그렇게 무심히도 세월이 막 흘러가더이다
김 익 하
청암蜻岩 선배님.
속성이 그러듯 머물잖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빠르기도 하지만 요란스럽기도 합니다. 지금 이승에서는 생전에 듣고 갔을 그 코로나바이러스감염균이 여태 창궐하고 있습니다. 통금 격리시대에 사는 영어의 몸이라 발과 말이 무엇에 쓰이는지 용처를 잃었습니다. 시인 정호승의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라는 그 기본 명제에 다가간 듯싶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하는 짓이 시간에 구애 없이 읽고 쓰는 터라 오늘은 제 빈한한 서가, 선배님 자리에 꽂힌 수필집이 눈에 뜨입니다. 맨 앞자리에 1997년 발간된 처녀 수필집 『아버지의 땅』인데, 맨 끝자리 수필집인 『마음의 울림』에 눈길이 가는 순간 낯선 방문객 얼굴이 어른거립니다. 아직도 우리 집에선 낯선 손님일 수밖에 없지요. 한번은 선배님 아들 결혼식장에서 여흥이 덜 풀어져 내친김에 고 이출남 수필가와 선배님댁을 방문한 적은 있으나 초대하지 않은 제집을 방문한 적은 여태 없었으니까요. <교음사>에서 2018년 시월 초하룻날에 발행된 책이니 제 서가에 자리 잡은 지 이태가 되어가는 책입니다. 이 수필집은 제게로 전해진 선배님 마지막 글 보따리인 셈입니다. 일생 천착해 왔던 인간과 환경문제를 마지막 수필까지 집요하게 관심을 강조한 이 수필집에서 선배님을 연상시키는 한 문장이 제 마음을 바다 자갈처럼 쓸어 가더군요.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살았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물밑에서 접시처럼 엎디어 살았다.’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돋은 눈두덩이에 길고 짙은 눈썹에 덮인 선배님 순한 눈이 보이더군요. 그 눈빛이 사람 덩어리 자체를 온화하게 만드는 요술을 부렸지요. 무한한 깊이를 가진 흡인력. 그리고 이내 연상되는 소란스럽지 않게 웃는 눈웃음. 정작 작정하고 청룡언월도를 뽑아들고 적토마를 몰아 달려들어 본들 겨릅대 같이 꺾이고 황덕불 위 나뭇재처럼 흩어지겠지요.
오늘로써 이백 일 남짓 됩니다. 먼저 가신 그 날부터 말입니다. 올 삼월 초여드렛날 여든에 세상을 하직하신 뒤 제게서 그렇게 무심히도 세월이 막 흘러가더이다. 그리고 우리가 몌별을 예견했듯 깊이 안긴 2019년 유월 스무이렛날, 늦은 다섯 시쯤 삼척문화예술회관 제1전시실 복도에서였지요. 두타문학 50주년 행사장 입구였을 겁니다. 산문 장르라는 까닭으로 동병상련하는 처지, 삼우회에서 만난 뒤 오래여서 연인처럼 그리 깊이 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풍담 후유증인 구안와사口眼喎斜로 많은 말을 소통하자면 그 방도밖엔 없었지요. 그나저나 선배님도 저도 소통에는 부족함이 없었지요. 초대면 소통은 언어지만 구면은 눈빛이기에 미진함이 없었고 가둔 물을 수문마저 활짝 열어 뺀 듯 마음 바닥까지 비운 듯했습니다.
우리 만남은 1968년쯤이니 산천이 너덧 번 오락가락했습니다. 소설공부 한다고 들었던 기억 때문에 여느 문청들 보다 서로에 관심이 많았던 듯합니다. 그때 당시 제 기억에 화인처럼 박힌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해 정연휘 시인과 삼척에서 최초 2인 시화전을 태백다방에서 하던 때였지요. 선배님은 동양시멘트 삼척공장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정 시인과 저, 둘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주머니가 없고 찢어진 천 구멍만 있었습니다. 주머니란 돈을 간수 하는 곳인데 그게 없으니 주머니라 부르긴 그저 민망했습니다. 팸플릿에 상표 딱지를 붙이고 광고비 대용으로 받은 됫병 화학주로 뱃속 허기를 쫓아내고 있을 만큼 궁핍했지요. 그런 우리에게 선배님은 퇴근 곧바로 달려왔지요. 선배님은 우리를 휘몰아 길 건너 중국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비를 기다리던 아이에게 항용 그러듯 짜장면을 배불리 먹였지요. 그때 그 짜장면 맛은 제겐 언어 착란을 일으켰습니다. 산진해착, 고량진미, 용미봉탕 그런 따위 말이 무색할 만큼 백 배 만 배 맛있었으니까요. 들붙은 위를 불뚝 일으켜 세워준 생리적 충만감도 고마웠지만, 궁핍한 문청의 무너지는 절망을 잡아 의지를 부여해 준 배려로 여태 소설의 끈을 잡게 한 일은 잊을 수 없는 힘입니다.
만남이 오십여 년을 넘다 보니 사람 감정이 늘 시의에 따라 영향을 받는지라 서로 오해로 틀어지기도 해서 한때 표면 상처를 입긴 했지요. 그러나 근본은 흔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외람되이 먼저 소설가로 등단했을 때 누구보다 반겼지요. 선배님이 등단할 때 제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늦은 선배님 문단 활동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활발했고 성과 또한 컸습니다. 노년엔 고향 이웃 도시로 돌아가 후학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쉽잖은 일입니다. 그러면서 강릉에서 서울 삼우회에 참석하는 열의도 보이곤 했지요. 그러니 아직 모습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수필집에서 ‘아토피’ 앓듯 문학을 앓아온 사람이라 고백했더군요. 그것이 아토피처럼 전신을 돌며 ‘스트레스’를 준다고 했지요? 그 문학병이란 게 어떤 것이냐고 묻고 싶던 차에 그에 답하듯 능청스럽게 썼더군요. ‘이놈이 사타구니의 쭈그렁이 새알 주머니로 침투하여 불을 지를 때는 시쳇말로 환장하게 된다.’고 김삿갓 시구를 연상할 만큼 익살을 떨었더군요. 문학이 아토피란 비유에 저는 제꺽 무릎을 쳤습니다. 그것은 짜증스럽게 아프기도 하지만 짜증스럽고 미치게 가렵기도 하니까요.
선배님은 문학 행위를 그리 말씀했더군요. ‘사람에게 두 개의 공간이 있다. 하나는 물질을 채우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을 채우는 공간이다. 그 정신 공간에다 문학을 채우고 싶다.’ 고요. 제 글 쓰는 일도 그 유형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을 채우는 공간이 노예 사냥꾼 외투처럼 겹겹이 끼어 입으면 입을수록 사람은 본연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인면수심으로 변질하지만, 정신 공간을 채우면 채울수록 정화기능이 서로 작동하여 깊고 맑아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선배님은 정신적 공간을 쉼 없이 채우다가 돌아간 셈입니다.
내처 인성의 품격에 관해서도 한 마디 예리하게 찔렀더군요. ‘황소가 분노해도 힘이 없어 참는 게 아니라 본분 때문에 뿔 있는 황소가 참는 까닭이라.’ 정리했더군요. 소의 본분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야생 소가 인간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과 합의한 묵계일 테지요. 풀을 다투고 외적을 막으려고 뿔을 소유했을 테지만, 이제부터 사람이 먹이를 주고 외적을 막아줄 테니 농사일을 해달라. 그게 너 본분이다. 그리 변경된 임무 때문에 뿔을 사용해선 안 되지요. 이제 성큼 인간에게로 눈길이 돌려집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키자면 인忍자를 태산만큼 쌓아두어야 할 듯싶기도 합니다.
또한, 선배님은 글 쓰는 일을 뱀의 동면과 탈각脫殼에 비견한 수필을 쓰신 적이 있으시죠. 제가 그 도막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뱀이 동면에서 벗어나 허물을 벗을 때마다 몸피가 굵어가듯 작가도 올해 쓴 글이 작년보다 달라 보일 만큼 새로워져야 한다는 도막에선 제가 이미 써낸 글이 부끄러운 곳이 많음을 알았습니다.
한국 수필 문학에도 걱정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채 주변 신변잡기 글쓰기에 아연실색한다고 했더군요. 그러면서 돛 방향을 예시했습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서구 에세이 형식의 이식’이 뭐보다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이론의 동조자는 아직 지상에 남아 추억의 글을 누에 입속 실처럼 뽑아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도 슬슬 고치 짓기를 시작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일생 거둔 게 빈약하기만 한 저로선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한창 코로나바이러스감염균 탓으로 지척인 여의도 성모병원 장례예식장 6호실에서 전송 못한 일, 또한, 아직도 찝찝합니다. 후일 일산 푸른 솔 추모공원에서 짐을 내려놓겠습니다. 그 날이 선배님의 수필처럼 ‘앞동산의 진달래가 산불을 놓는다. 불꽃은 삽시에 활활 타오르며 이산 저산 옮겨붙는다.’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