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히4:16)
2017.8.20,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전에 커넬 샌더스(Colonel H. Sanders)라는 사람이 있었다. 샌더스는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며 어렵게 성장했다. 학교는 10살 때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고, 어머니마저도 12살 때 재혼해 버렸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어렵게 이일 저일 어렵게 전전했지만, 대부분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아들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 버렸고, 신경과 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5세 이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렇고 그런 시골 노인의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샌더스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방황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동네의 작은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샌더스는 노랫소리를 따라 교회에 가까이 갔다. 어느 한 여인이 교회 안에서 평화롭게 찬양하는 소리였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그는 이 찬송을 듣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는 울면서 기도하면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에서 보조받은 불과 105달러(약 115,500원)의 사회보장금(일종의 노령연금)으로 이용하여 11가지 양념을 조합해서 치킨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납품하기 위해서 낡은 트럭을 타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수많은 치킨 집을 찾아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무려 1008번을 거절당했다. 그러다 1009번째에 마침내 어느 치킨 집에서 샘플로 납품되었다.
그 후 치킨의 독특한 맛으로 인해 샌더스의 치킨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업이 점점 번창하더니, 후에는 마침내 전 세계적으로 3만개 이상의 체인점을 가진 프랜차이징 업계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이 회사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KFC(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다. KFC의 창업자 센더스는 65세에 창업하여 90세까지 세계82개국에서 1만1천여 개 이상의 점포를 운영했다. 그래서 지금도 KFC매장 입구에 샌더스할아버지 인형이 있다. 그 후 샌더스는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많이 하면서 인생의 이모작을 성공적으로 살았다.
* KFC 샌더스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gPG0lDsPzw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평탄한 때도 있지만, 또 어떤 때는 샌더스 할아버지나 욥이 경험했던 것처럼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때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때로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고,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듯한 충격과 분노와 배신감과 눈물과 고통으로 정신까지 혼미해질 때가 있다. 하나님이 대체 나에게 왜 그러시는지 섭섭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절대 의심하지 말고 굳게 붙잡아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샌더스의 심금을 울렸던 찬송의 가사처럼 그것은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이다(“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그래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4장 16절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faithful God)이시다. 주님은 결코 우리들이 감당치 못할 어려움 때문에 고통 중에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렇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사각형의 깊은 구덩이 속에 한 사람이 빠져있는데, 그 위에서 양복을 입은듯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서 빠진 사람을 구해보려 하는데 손이 닿지 않는 일러스트 사진이 있다. 언젠가도 설교시간에 보여드린 적이 있는 사진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구덩이 위에 있는 사람의 곁에는 사다리가 있다. 결국 양복을 입은 듯한 사람은 손을 내밀며 안타까운 시늉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주님을 향해 간구하는 손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나의 배우자와 부모와 형제들까지 나를 외면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심지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이사야 49장 15-16절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간절한 절규의 말씀을 보라.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심지어 로마서 8장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셨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하였다. 도우시되 ‘적당히’, ‘대충’ 또는 ‘간신히’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능히” 도우신다고 했다. 주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들을 다 당해 보셨기 때문에, 지금 고통당하는 우리들의 처절한 심정과 내 몸의 건강 상태와 엉킨 실타래 같은 내 삶의 문제들까지 다 아시고, 능히 도우신다. 이것이 바로 저와 우리 모두를 향하신 미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굳게 믿어야 한다.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자 성도들이 특송 할 때, 한 아기가 무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왜 그 아기가 무대 위에 기어 올라갔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아빠가 무대 위에서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기는 다른 것은 보지 않았다. 오직 아빠만 보았다. 바로 이것이 이 시간 우리들이 은혜의 보좌 앞에, 예배의 자리에 선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바라보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주민 여러분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담대히 주님의 손을 붙잡으라. 그래서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것으로 취하라. 부족하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병들었으면 병든 모습 그대로,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초라한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 감사하는 모습 그대로, 어떤 모습이든 지금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언제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완벽한 행위(perfect action)가 아니라, 나(me) 자신이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와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손을 붙잡자. 다시는 주님의 손을 놓치지 말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 만약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아(딸아) 내가 너에게 크고 비밀한 은혜를 주고 싶은데, 내 손을 붙잡지 않겠니?”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굳게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간 다 같이 기도함으로 주님의 손을 붙잡자. 그리고 더 강렬하게 주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