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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6년 11월 1일(제44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전도서 3:10-13
제목 :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성도
혹시 선물을 받아보셨나요? 선물을 받을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혹시 선물을 주어보셨나요? 누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까? 선물이란 참 좋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는 물질적인 가치보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과 시간적 노력을 전달하는 중요한 소통 방식입니다. 선물은 상대방이 자신을 위해 고민하고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으며, 작은 선물이라도 의미가 중요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선물의 가격보다는 선물을 준 사람의 시간과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받은 선물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물을 할 때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가장 감사할 수 있으나, 상대방의 필요와 자신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므로 취향을 공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선물 외에도, 소중한 사람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깊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건국대 오창섭 교수가 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칼럼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 유행이다. 자신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자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특별히 기념하거나 축하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받을 때의 느낌과 환상 때문에 이 기묘한 행위를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선물이란 특별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고, 그 때문에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나에게 주는 선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나는 원인과 결과를 역전시킴으로써 결과로부터 원인을 상상적으로 구성해낸다. 그리하여 나는 선물을 받을 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만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물을 받는 나는 선물을 주는 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에게 주는 선물’은 ‘받는’이 아닌 ‘주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준다’는 행위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주는 선물’은 ‘주는’이라는 표현을 통해 선물을 주는 자신을 여유 있는 삶의 맥락 속에 상상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문화,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표현하는 문화는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울한 현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위로를 찾아 나서게 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에게 주는 선물’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자신을 그 표현 속의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상상적으로나마 위로와 격려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
‘나에게 주는 선물’은 사실 ‘내가 구입한 상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가 구입한 상품’이 평범한 일상을 암시한다면 ‘나에게 주는 선물’은 뭔가 특별한 축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 축제 속에서 나는 존중받고 대접받을 만한 존재가 되고, 내가 구입한 상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것이 된다. 환상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축제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개인들을 끊임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비정한 현실 속에서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은 비록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유혹일 것이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성도”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3절을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하므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변덕을 부릴 줄 모르시는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들 중에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는 사람들도 고난을 많이 당하던데 그러면 그 고난도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지내놓고 보면 나쁘거나 잘못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 고난을 당할 때는 좀 괴롭습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고난까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결과가 좋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율법도 좋은 것입니다. 사실 잘 몰라서 그렇지 율법주의가 나쁜 것이요,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믿음, 약속된 하늘나라 전부 우리들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좋은 것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이 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일까요?
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결혼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눈만 감으면 그 사람이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집니다. 여러 사람이 옆에서 이야기하며 떠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만 들립니다. 사모하니까 그 사람의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은 이 말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결혼 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일할 때는 혹시 일하느라고 잊고 있었다 할지라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아내는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가정은 참고 사는 결혼 생활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모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 바탕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데 대하여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땅에 뿌려지는 씨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아예 열매가 없습니다. 길가와 같은 완고한 마음에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더러는 씨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죽었습니다. 돌이 많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라게 하는 햇빛에 말랐습니다. 이 얕은 돌밭은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이것은 메마른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 떨어집니다. 씨가 떨어져서 싹이 나서 자랐지만 가시가 더 많이 자라서 기운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마음을 뜻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막힌 사람은 절대로 말씀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들어가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좋은 땅은 기름진 땅입니다.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흙으로서 물기도 적당합니다. 그런 밭에서는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 좋은 땅 같은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 순순한 마음, 기름진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면 반드시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지는 씨 비유’처럼 성도에게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바탕이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 혹은 누구를 사모하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내 마음에 없는 그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고 애인이 있다면 사모하는 까닭에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전화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라면 그 마음 바탕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0-11절을 보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입니다(11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는데 때가 되면 그것이 전부 아름답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라는 말은 천지창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창조하신 창조물들을 다스려 가시는 섭리까지 포함합니다.
11절을 보면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노고 즉 고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고생과 고난까지도 주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주시기에 인생들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고생은 싫은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과 고통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고난까지라도 결과는 축복이 됩니다. 이런 믿음으로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 속에서, 즉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서도 그 고난자체를 보지 않고 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 자체만 보면 고난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면 얼마든지 그 고난을 이겨내게 되고 또 때가 되면 아름답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과 과정과 끝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시종, 즉 처음과 끝을 다 알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도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과, ②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과, ③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게 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종합해서 말하면 고난의 결과는 때가 되면 아름답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결과는 축복이 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중에 있을 때나, 아름답게 되었을 때나, 늘 변함없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한계가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보니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헤어져야 하니까 하루살이가 ‘메뚜기야 잘 가라, 다시는 못 보게 될거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그래, 내일 또 놀자’라고 인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내일? 내일이 뭔데?’라고 물었습니다. 하루만 살고 죽어 없어지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알겠습니까? 모르기에 내일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른다고 내일이 없을까요? 내일이 있는데 모르는 것뿐입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내일을 사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개구리가 메뚜기를 찾아와서 한 철을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는 철이 바뀌어 메뚜기와 개구리가 각기 제 갈 길을 가야할 시간이 왔습니다. 개구리와 메뚜기가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개구리야 잘 가라’ 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그래, 메뚜기야 내년에 또 다시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 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뭔데?’ 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지나면 메뚜기는 끝나기 때문에 내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메뚜기가 내년을 모른다고 내년이 없는 것일까요?
사람이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든, 한철을 사는 메뚜기 같은 인생이든, 몇 해를 사는 개구리 같은 인생이든지 간에 영원한 하늘의 세계를 모른다고 해서 영원한 하늘의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구리는 메뚜기나 하루살이보다는 오래 살지만 그래도 개구리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영원의 세계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원의 세계를 보장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뿐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 영원의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성도는 고난 속에서라도 영원을 사모하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실은 무시하고 살아도 될까요?’ 라고 묻는 성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실은 내가 죽으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현실은 잠깐이요, 그 다음부터는 끝도 없는 영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늘의 세계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사모하면서 사는 성도는 인생이 달라집니다. 땅의 것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그 인생의 삶이 천양지차입니다. 영원을 위하여 전력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도 ‘영원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값지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일까요?
2. 선행의 기쁨
12절을 보면 전도자는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먹고 마시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의 가르침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며 수고로 인해 낙을 누리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존재하며,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은 1:1절에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솔로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귀영화 생사화복으로 인생의 모든 경험을 한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 다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인생을 놓고 볼 때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선을 행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하는 것’(라아소트 토브) 은 단순히 착한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도의적 믿음적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고 할 때는 제 구실을 잘 하는 경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된 것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좋았더라’는 말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는 것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선하다’고 할 때 항상 제 시간에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볼 일을 보러갑니다. 그런 경우 성경은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는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 12절을 보면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의 오랜 생활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서 성도들에게 적용해 보면 섬김이나 봉사를 하되 기쁨으로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도 기쁨으로 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목사인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감사로 기쁨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설교하면 그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설교 준비하기가 힘들고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서 대충 준비한다면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선을 행한다’는 것은 남에게 무엇을 조금 베풀어 준다거나 혹은 적선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선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비워놓고 설악산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뒤따라 산을 오르던 중년 부인이 ‘찬송을 부르려면 교회에서 불러야지’ 하고 한마디하고 지나갑니다. 그 사람도 권사입니다. 주일에 성도에게 설악산은 제 자리가 아닙니다. 주일에 등산은 성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가 제 자리에 앉아서 제가 할 찬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경은 ‘보기에 좋았더라, 선을 행하였다’ 고 합니다.
성도가 주일날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섬김입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도의 본분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내 본분, 내 사명, 내 자리에서 내 구실을 기쁨으로 잘 할 때 하나님은 선하다고 하십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고, 딸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면 그 가정은 아름답고 선한 가정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편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지겨워서 나 이제는 남편 그만두겠다’ 고 한다면 그 집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머니 역시 ‘나도 이제는 지겨워서 보기도 싫다’ 하면서 남편이 돌아와도 저녁상을 차려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꼴이 뭐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엄마나, 아빠나 전부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잘하며 살아갈 때 성경은 ‘선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아들 노릇, 딸 노릇, 부모 노릇도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으로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 또 다시 기쁨이 새로워지는 그 선행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기쁨으로 하다보면 선한 일을 더 크게 하고, 선한 일을 더 크게 하다보면 더 큰 기쁨이 됩니다. 기쁨과 선행은 항상 선순환적인 작용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선한 일을 기쁨으로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일까요?
3. 수고의 복락
본문서 13절을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노는 사람이 누워있으면 편안할까요? 지겹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하다가 누우면 어떨까요? 평안하다고 합니다. 수고한 끝에 느껴지는 평안함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야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13절을 보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수고의 복락입니다. 내가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해서 얻은 그것으로 내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수고하지 않고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도둑의 심보일 뿐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쉽게 얻은 것은 절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쉽게 얻어 그것을 누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락인 줄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내가 땀 흘려 수고하고 얻어지는 열매가 얼마나 귀합니까? 참으로 복되고 바람직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땀 흘려 수고한 자에게 응분의 축복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시편 128: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잘 섬기고) 믿음의 길을 걷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이 수고했으니 많이 먹고, 크게 수고했으니 크게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그런데 작게 수고했는데 많이 먹는다면 무엇인가 잘 못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부정이 있습니다. 크게 수고했는데 작게 먹는다면 이것은 실패입니다. 수고한 만큼 먹는다면 이것은 복입니다. 많이 수고했으니 많이 먹는 것입니다. 많이 수고했는데 적게 먹는다면 그것 역시 실패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복의 즐거움입니다. 복락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고 자체가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수고로 얻어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수고의 복락이 날마다 생활 속에서 체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자, 그런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 돌이 필요하니까 너희들이 각자 힘껏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큰 돌을 가지고 끙끙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각자가 적당한 돌을 들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항상 말썽인 가룟 유다가 땀을 흘리면서 큰 돌을 들고 올라가는 베드로에게 병신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여기서부터 가지고 가야만 돌인가’ 라고 불평합니다. 자기는 그냥 올라가면서, 쉽게 올라가면서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합니다. 올라가 보니 분명히 산꼭대기에도 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이 가지고 올라온 돌을 모두 앞에 내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자기 앞에 돌을 내놓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의 돌이 없는지라 산꼭대기에 있는 큰 돌을 빨리 가져다가 자기 앞에 놓았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돌을 다 내어놓자 예수님께서 ‘기도하자’ 하시더니 기도하십니다. 앞에 있던 돌이 전부 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가져온 돌은 떡이 되지 아니했습니다. 산 아래서 주님이 명령하실 때 그 곳에서 가지고 온 돌만 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꼭대기에서 주어다놓은 돌은 떡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배불리 먹고 남는데 가룟 유다는 얻어먹어야만 했습니다. 제 꾀에 제가 속았습니다.]
믿음생활에는 잔꾀가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할 뿐이지 제멋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제멋대로 했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전설이지만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수고한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놀고먹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이 말씀하듯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복입니까? 수고 없이 누리를 즐거움은 성도를 타락시킵니다. 이처럼 수고의 복락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많이 수고했는데 적게 먹는 실패가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적게 수고하고 많이 먹으려고 하는 좋지 못한 술수도 없기를 바랍니다. 수고한대로 먹는 것입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수고의 복락입니다. 이 수고의 복락을 내 것으로 만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 주시는 선물은 첫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이요, 영원한 세계가 성도에게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현실도 중요하지만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성도는 생활의 자세와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위해서 전력 투자를 하게 됩니다.
둘째 선행의 기쁨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제 구실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제 구실을 잘 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선행의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수고의 복락입니다. 성도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충성하는 일을 쉽게 되지 않습니다.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은 맡은 일에 부런히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에 따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수고함으로 누리게 되는 복락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