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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1902년 5월 9일 강의, - [시간관념: 서양철학사에서 1.]
벩송: 시간관념(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pp. 141-158(P.395).
인간은 스스로 자각하며 사유하여 지구상에서 실질적 삶에서 자주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인간이 자주를 이룰 수 있기 위한 노력은 사유에서라기보다 행동과 행위에서이다. 행동이 무매개적 운동이라면 행위는 언어를 통한 사회성 안에서 활동인 셈이다. 행동이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에서 자주와 자유를 찾으러 나간 계열을 척추동물문 포유류 쪽이고 인간 류이다. 류로서 인간이 행동을 한계 속에 가두지 않고, 사회 속에서 행위로 구성한 것은 아마도 다른 동물보다 생존 조건을 체화하는데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조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도구의 사용일 것이다. 이 도구제작의 전승은 눈의 관찰에 의해 점점 더 유전적으로 내적 연속성으로 후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유전의 외적 불연속과 내적 연속성은 자연 속에서 개체(개별종)의 자율성과 운동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 종이 도구제작과 지성을 같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종들 사이에 공감과 연대를 하는 본성(직관)도 함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터전의 이동에서, 또는 생명발달의 선들을 따라가면, 본성이 오랫동안 지성보다 역할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도구 사용에서 지성이 개입함에 따라 본성은 테두리 없는 공동체의 삶에 영향을 행사하는데 비해, 도구와 지성은 경계있는 질서 사회의 구축으로 나갔을 것이다. 여기서 형용사적이고 운동과 변화를 표현하는 경향을 본성 측면이라면, 명사적으로 정지와 불변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양자에서 소통의 기본은, 공동체든 위계사회든, 변화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일반화하는 경향일 것이다. 따라서 소통과 공감하는 입말은 움직이는 단위가 먼저이고, 문헌학적으로 그 움직이는 단위 또는 행위자에서 동사가 나온다고 한다. 입말(la langue)에서는 움직임의 표현이 먼저이며, 이런 이유로 입말은 언어(le langage)보다 먼저이다. 언어에 와서야 명사와 형용사의 구별이 생긴다.
사회의 형성의 필요성에서 언어가 필요했고, 그 언어가 명사와 형용사로 분화하면서 두 가지 기본 기능을 갖는다. 명사는 개인 인성에, 형용사는 집단 인성에 동화적이다. 언어의 일반화 경향에서, 형용사의 일반화는 집단에서 명사의 일반화는 개인에서 정립된다고 하는데, 형용사의 일반화가 구체화의 과정에서 인격적 성향(본능)처럼 나타나고, 명사의 일반에서는 조직에서 개별성의 확보처럼 조직화를 거쳐서 추상화에 이르러 비개인적 성향(지성)으로 나타난다. 결국 인간 개인이 자신의 자유 성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토대가 필요하지만, 그 공동체를 조직화하여 위계화로 가면 개체로서 완성도를 상실하기 때문에, 즉 자유와 자주를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격적 성향의 내재성을 심화시키는(강도의 심화, 내공의 심화) 방향을 잡을 것이다. 자주와 자유는 공동체의 필요보다 깊이 있게 자신의 심화를 위한 노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형용사와 주어의 분리라는 설명은 이중적 해석이다. 그런데 언어를 통한 판단에서 주어가 형용사와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주어는 성질사들 사이를 잇는 실과 같다고 한다. 그 중에서 잘려진 부분으로서 주어가 불가분성을 표현하면서 모든 형용사들과 분리되고, 주어[주체]가 자유로운 불가분성[이데아]을 갖는다. 이런 불가분성을 재현하는 것이 주어로서 독립적 관점이다. 말하자면 한편 주어는 성질사와 연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모든 성질사로부터 독립적이다. 지성의 과도한 사용은 주체가 독립적이며 자유롭다고 하면서, 성질사들을 포섭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있다. 그러나 문장이나 판단에서 성질사로서 속사가 실체사로서 주어보다 넓은 영역으로 되어 있다. 성질사를 영역에서 또한 강도와 이질성에서 넓고 깊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창안과 발명, 그리고 자주와 자유를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55V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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벩송은 18강의에서, 철학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플라톤이고, 다른 하나는 19강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의 길의 이해하는 데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의 인식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 선분의 비유와, 박홍규선생님이 말씀하였듯이 우주생성론으로서 티마이오스편의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아페이론의 3원인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철학사에서 새로이 구별해야 할 것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현존이라고 하였으며, 하늘과 땅은 현존에서 다시 정초하는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고, 이 현존의 분화 또는 현존의 이중 경향성에 따라 철학사를 달리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존의 이중성은 발생과정 상, 가지치기처럼 세분화로서 크게 보아 두 가지 길로 간다. 하나는 유용성에 따른 지식을 위한 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삶을 위한 덕성론이다. 박선생님 말씀대로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지로부터, 다른 하나는 벩송의 지속으로부터이다. 전자는 개념으로 후자는 지각으로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할 것이다. 벩송은 두 가지 길에서 도덕론이든 과학이든 닮고 비슷한 것을 찾는 일반화의 경향을 가지고 있고, 일반명사와 일반개념을 창안한다고 본다.
과학(인식론)에서는 실체사, 도덕론(형이심학)에서는 성질사라는 일반화의 단어를 창출한다. 후자의 도덕론 또는 형이심학에서 일반화의 양태는 예술론, 종교론과 나란히 갈 것이며, 나아가 공동체의 삶과도 함께 간다. 이에 비해 전자의 과학(인식론)은 사물을 다루는 방식이 더욱 정교하고 정합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방식의 발전이 인간의 삶 또는 생명체의 삶을 고양하거나 또는 즐겁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도구를 잘 사용하여 즐거운 것은 놀이와 전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착취와 수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공동체의 삶에서 놀이는, 헤라클레이토스도 니체도 말했던 놀이는 삶을 즐겁게 하면서 교감과 공감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 아마도 다음세대에서는 도구의 발달에 의한 국부와 성장으로 세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삶을 윤택하게 즐겁게 하면서 순환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장 없는 소통과 상부상조, 그리고 공감과 공명의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이런 공동체가 공산사회일 것이다. (55WKBF)
# 제18강 1902년 5월 9일 강의, 141-158
신사 여러분, 나는 우선 한 청중에 의해 제기된 반대에 대해, 또한 지난 강의에서 나의 설명들을 이해했던 자들의 정신에 제시되었던 유용하고 흥미있는 반대에 대해, 내가 충분히 명쾌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지적하는 반대에 대해, 대답해야 겠습니다.
당신들이 상기해보세요. 우리는, 변화하고 운동하는 연속성을 무매개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을, 이런 연속성을 우리가 분해한다는 것을, 확립하고자 시도했다. 연속적인 변화 대신에 우리는 단계들을 대체한다. 운동에 의해 거쳐 온 길에서 우리가 수많은 기준점들을 위치시킨다. 우리는 그 기준점들의 이름들을 부여하고, 이렇게 하여 언어가 형용사들 즉 속사들에 의해 표현하는 일련의 항들[페라스, 경계지움]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이때에 변화하는 연속성이 조각들로 잘려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런 연속성이 하나의 전체(un tout)를 형상한다고, 또 여러 색의 진주들을 관통하여 통과하는 실(un fil)이 있다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단위[통일성]을 ‘다른 본성의 한 단어’에 의해 표현한다. 이 한 단어는 명사일 것이고, 실사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한편으로 다곱성의 요소들을, 다곱성의 요소들을 표현하는 항들을 가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요소들의 통일성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하는 이전의 연속성을 표현하는 항을 가질 것이다. (141)
우리가 덧붙여서 두 종류의 요소들과 두 종류의 항들이 있다. 그 중의 첫째 항은 실사 또는 주어일 것이며, 실을 표현하는 불가분적 본질에 의해서, 단계들 즉 성질들의 연속을 연결하는 항상 ‘불가분적’[개체적]일 것이다. 둘째 항은 ‘일반적’[보편적]인 어떤 것일 것 이다: 속사 또는 형용사는 류를 표현하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대상들 속에 있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성질들을 따라 모아진 성질들을 표현한다. 경험이 이를 증거하듯이, 그 대상은 많은 다른 대상들 속에서도 발견되고, 또한 개별적 대상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대상들에 공통하는 것으로 발견된다. (141-142)
따라서, 한편으로 불가분적인 것(l’individuel)[일반명사]이고,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인 것(le général)[보편명사]이다. (142)
다른 한편,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말하는 경향성을 갖는다고 우리가 사회적 존재들이라는 것을 확립하기를 시도했다. 사회적 존재들은 자기들의 인상들과 관념들을 공통으로 만들기 위하여 말투를 만들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경우에, 모든 상황에서, 이분법의 필요에 따라 주체들이다. 이분법의 필요는 우리가 다른 날에 사용할 표현이며,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직관을 두 부분으로나누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전에 행했던 분할을, 주어와 속사로, 실사와 형용사로, 설명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분할을 경향성에 의해서 설명했다. 우리는 말했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실사 즉 주어는 사회적 관점을 표현하며, 형용서 즉 속사는 개별적[불가분적] 관점을 표현한다. 이 항들 중에 첫째 항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로는 사회에 복종하는 사회 훈육의 작동을 행하는 것이다. [한편] 주어는 어떤 것을 대신[재현, 표상]하는데, 그 대신하는 어떤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대리하는 규정된 속사작업이 아니다. [이에 비해 다른 한편] 속사는 각자가 자기의 믿음을 어느 정도로는 주어에게 기여하는 것을 재현[표상]한다. 속사는 우리들 각각에게 고유한 관점을 표상하고, 그리고 주어는 사회적 관점을 표상한다. (142)
반대는 이러하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 모순이 있는가? 만일 사람들은 첫째의 관점에 위치한다면, 주어는 개별적인 것[불가분적인 것]을 표상하고 속사는 일반적인 것을 표상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것들을 정의했다. 만일 사람들이 언어의 이분법적 기능을 가진 둘째 관점에 위치한다면, 불가분적인 것[개별적인 것]은 형용사이고, 형용사는 각각의 지참물(l‘apport)이며, 주어는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의 어떤 것이 된다. (142)
내가 믿기로, 나는 잘 못 표현해야 만 했다. 아마도 그런 생각자체에 의해, 그 생각은 이중 해석에 알맞을 것이다. 내가 주체[주어]는 불가분적인 것을 – 분가분적인 것이 각 개별적인 경우에 다양하고 운동하는 설질들을 사이에 연결하는 실이기 때문에 - 재현한다고 말할 때, 따라서 나는 주어가 불가분성을 지칭한다. 아마도, 모든 성질들로부터, 즉 불가분성을 규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 불가분성, 그것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불가분성이며, 그것은 그 무엇에 의해서건 규정되는 않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들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불가분성의 재현[표상]은 사람들이 스스로 위치하는 관점과는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142-143)
만일 내가 그태양이라 말한다면, 사물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다. 내가 무매개적으로 변하고 운동하고 등등으로 내가 그것을 지각하는 대로, 나는 태양을 표상[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태양을 문장의 주어로 만들 때, 내가 그것을 실상으로 만들 때, 나는 그것의 모든 규정작용들을 벗겨냄(박탈함)으로써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가능한 모든 속성들을 기다리는 빈 주어로 만든다. 그리고 정당하게 왜냐하면 주어가 비규정적이기 때문에, 주어는 당신에 의해서도 나에 의해서도 지각된 태양이 아니다. 태양은 나의 관점에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재현된 것이다. 태양은 규정되지 않는데, 태양은 뽈 삐에르 짜끄가 그 순간에 그런 측면에서 태양을 지각했던 것대로, 주어는 자기[주어]에게 온 이런 저런 규정작업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주어는, 주어가 태양의 불가분성을 지칭하더라도, 보편적 관점을 재현할 수 있고, 또한 태양의 모든 측면들 사이를 연결하는 실을 재현할 수 있다. (143)
만일 다른 한편 내가 그 태양을 덮여있다고 말하면, [구름으로] ‘덮혀있음’은 나의 개인적 기여(l‘apport, 지참물)을 표현하다. 이것은 내가 태양에 대해 지각했던 것이며, 내가 표현하는 나의 불가분적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만일 내가 그것[태양]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해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 만일 덮혀있음이 류를 – 즉 세상사람들이 이해했던 성질을 지칭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인칭[인격]적이라는 것, 그것은 표현된 생각[관념]이 아니고, 그것은 내가 그것을 가지고 행하는, 어떤 특별한 상태에, 적용이다.
내가 말하기를 하늘이 덮여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정보를 가져다주고[기여하고], 따라서 내가 주어가 불가분적이고 속사가 일반적이라고 말할 때이다.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주어는 사회적 관점을 재현하고, 속사는 불가분적 관점을 재현한다고 말할 때, 나는 개별적 관점의 집단적 생각[관념]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주어가 바로 불가분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주어는 자기의 규정작업들을 박탈되었다는 조건에서만 유용할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재연할 수 있다. (144)
반대로 속사가 불가분적 관점을 재현할 것이다. 그것은 속사를 류적 대리[표상]적인 형용사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속사는 류를 대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속사가 지성적[인식가능한 것]이고 이해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것을 각각의 특수한 경에 사용하는 적용은 불가분적 어떤 것이다. 속사는 나에 속하는 나의 관점을 표현한다. 거기에 표현하기에 충분히 어려운 어떤 점이 있다. 그러한 것은 단어 불가분성의 이중 의미에 기인한다.분명히 어떤 것의 불가분성을 재현하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진실한 방법은 어떤 것을, 속사의 풍부함 전부를 가지고, 그것의 운동하는 복잡성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리라. 그러한 것이 불가분성의 무매개적 인상이다. 내가 그것을, 즉 끊임없이 변하고 운동하는 그 어떤 것을 스스로 재현할 수 있다. (144) [그 어떤 것이 의식, 우주로서 Nous이다].
그러나, 불가분성이란 단어를 다루어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불가분적 개념들을 말할 때, 그리고 내가 태양을 말할 때, 내가 그것을 명제의 주어로 만들 때, 나는 불가분성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런 방식을 거부했고, 이런 방식으로 불가분적인 것을 파악하는 모든 인격적 방식을 거부했고,나는 사회적[제도적 위계적 사회] 방식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실천적이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만일 내가 이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 내가 지각한 모든 것을 태양으로부터 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이 지각한 모든 것을 태양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이라 - 그러면 나는 지각으로 복잡성과 풍부성을 만든 모든 것으로부터 불가분적 지각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형상[형식]만을, 빈 형상이면서 불가분성의 비-규정된 형식이다. 사람들이 나의 밖으로부터 [장차] 가져올 물질들에 의해 무한정하게 채울 수 있을 형식이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개념의 형식 하에서 불가분성의 새로운 재현[표상]을 갖는다. 이런 새로운 표상은 어느 정도 사회화 될 수 있는 표상이다. (144)
따라서 주어는 불가분적인 것을 표상하고 속사는 일발적인 것을 표상한다. 그것은 주어가 사회적 관점을 표상하는 것을 막지 못하며, 속사가 불가분적 관점을 표상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나는, 이 두 명제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에 난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는 그 난점을 알렸다. (144)
[18강의 시작]
나는 이제 이 강의와 다음 강의의 대상을 행할 것에 이르렀다. 나는 나머지 두 강의에서 한두 가지 일반적 결론들을 지적할 것이다. 이 결론들은 앞선 강의들과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가능한 한 다음 해의 강의를 준비하고 원합니다. (144-145)
이 다음 강의의 대상[목적]은 또한 ‘시간관념’일 것이고.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시간관념의 역사의 연구 일 것이다. 이 역사가 이야기된 것은, 이야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철학이 그리스인들에게서 그 기원이래로 어떤 점을 향해 연속적 운동으로 걸어온 길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다. 이 강의의 대상은 독단적일 것이고, 또한 형식은 필연적으로 독단의 역사일 것이다. (145)
따라서 마치 이 해의 강의와 다음해 강의 사이의 이행으로써 나는 매우 간단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이해와 지난해 나머지 것을 이미 실행했다. 그러나 보다 명시적으로 두 가지 커다란 의문들을 분간하고 지적할 것이며, 이 물음들 주위에서 우리의 탐구와 연구에 따르면 철학은 형이상학자들에게서 중력에 끌리듯이 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45)
이 두 의문들은 한편으로 시간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로 개념의 문제, 즉 개념적 사유의 문제이다. 근본적 문제로서, 출발점으로 사용된 물음은 시간의 물음이다. 형이상학에 충격을 준 것, 말하자면 형이상학의 탄생을 불러일으킨 것, 그것은 모순들이다. 이 모순들은 시간의 현존으로부터, 생성의 현존으로부터, 즉 우리가 구체적 지속이라 불렀던 것의 현존으로부터 생겨나는 것 같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뭣이 있다. (145)
다른 한편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여 연속적 노력이 있다. 이 노력은 운동 속에 어떤 것으로 있는 지속 대신에,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을 대체하려는 노력이다. 실재의 변질성 대신에 대체하는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은 개념이며, 지적 표상[재현]이다. 이는 논리적 작업에 알맞게 할 수 있는 재현이며, 다소 실체화된(hypostasié) 개념, 정신의 바깥에서 다소 투사된 개념이다. (145)
여기에 안정된 어떤 것,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이것은 철학이 항상 변화의 연속성 대신에 탐구했던 어떤 것이다. 따라서 철학사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형식들 하에서, 이런 발상(cette idée)을 찾을 것이다. 발상이란 개념이 우리가 정립하고자 시도했던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고, 개념이 무엇보다 행동의 도구, 실천의 어떤 것, 언어와 사회적 필요의 추진력 하에서 태어난 어떤 것이다. 그러나 개념은 무한히 상위적인 어떤 것이며, 신적인 기원, 오히려 초월적 기원의 어떤 것이다. 또한 개념은 마치 과학같은 어떤 것이다.즉 이미 객관적 개념들 속에 끌어 모으고 또한 우리에 의해 수집되기를 기다리는, 이미 만들어진 과학 같은 어떤 것이며, 우리가 채집할 수고만을 가질 잘 익은 열매 같은 어떤 것이며, 아몬드를 먹기 위해 껍질을 깨뜨려야만 아몬드 같은 어떤 것이다. (146)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과학과 같은 완전히 만들어진 것(du tout fait, 만들어진 전체)이 있다. [그런데] 변질하지 않는 개념들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서로 가까우면서, 위계적 질서로 분류되고, 우리가 이것들을 탐구하러 갔던 한에서 완전히 만들어진 의미를 재현하는 개념들이 있다. 사물들의 변질성과 생성, 이 모든 것은 단지 다소 완전하고 불충분한 방식으로 개념들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 개념들은 자신 안에 현존하며, 다소의 객관성을 가지며, 체계를 따라 그러나 결국에는 어느 정도로는 객관적이 되고, 내가 말할 것인데, 거의 초월적이 된다. 여기에 하나의 관념[이데아]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관념을 다소 약화되고 분명하고 구별된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철학적 전통을 통하여 이 관념을 재발견한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철학은, 고대인들에게서와 근대인들에게서, 마치 조금전에 내가 말했듯이, 두 가지 질문들 - 시간과 개념 - 주위에 중력에 끌리듯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들의 이론은, 시간과 지속의 문제들이 일으켰던 난점들을 제거하려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146) [그러나, 개념들의 이론은 초월적 또는 절대적 통일에 포획되거나 포로되거나 나아가 자발적 예속으로 나아갔다. 과학이 경제학이 그러하고 철학이 포획되고, 법률적 제도는 자발적 예속으로 갔다.]
이점에 대한 증명을 우리는 다음해에 정확하고 또한 완전한 방식으로, 체계들을 검토하고 연구하면서 시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체계를 덩어리로 연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시간의 질문에 관하여 그것의 본질을 회피하게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개별적인 관점에서 연구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연구에 관하여 예상하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두 강의에서 그것을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146)
그러나 우리가 이 연구를 위해 준비해야 할 또는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와 같다: 우리는 고대인에게서와 근대인에게서, 우리에게 다수 중요하게 보이는, 또한 다소 대표적이라고 여기는 한 철학자를 다룰 수 있다. 우리가 고발하고자 하는 두 주제를 검증할 이 철학자에 관해 다룰 수 있을 있다. (146-147)
게다가 우리는 선택하기 위해 크게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철학이 형이상학인 한에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에서, 플라톤주의에서, 그리고 근대인들에게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일치한다. 근대철학의 경향성들을 가장 잘 섞은 그 철학자, 그 경향성들을 아주 엄격한 비판에 복종시켰던 철학자, 칸트(Kant, 1724-1804)이다.
나는 오늘 플라톤에 대해 몇마디, 다음번에 칸트에 대해 몇마디 말하고 싶다. 그들의 학설에 관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이고 필연적으로 매우 외적인 방식을 검증하기 위해서, 두 주제를 내가 좀 전에 발언했는데, 즉 본질적 난점은 시간이다. 사람들이 가져온 해결책은 개념이다. (147)
플라톤 철학이 무엇이냐에 관해서, 증명을 실행하기 어렵지 않다. 플라톤 철학, 플라톤주의의 관념론은 분명하게 엘레아학자들의 관념론의 변형이었다.엘레아 학자들과 동시대 철학자들, 즉 그리스 초기의 철학자들의 거대한 난점은 변화였으며 생성이었다. 우리는 올해에 어떻게 생성이 일으킨 문제들, 구체적 지속에 매인 난제들이 매우 일찍이 철학자들의 정신에 소개[제출]되었는지를 제시했다. 공간적 운동으로부터 태어나는 난점들과 모순들을 분간하면서 어떻게 엘레아의 제논(Zenon, 전480[490]-420경)은 난제들을 완전히 정확하고 어느 정도 예리한 형식 하에, 공간 속의 운동의 형식 하에, 두었는지를 제시했다. 나는 이 검토에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에게 다음을 상기하게 하는데 그칠 것이다. 즉 모든 난점들, 즉 모순들은, 지속이 공간으로 항상 상징(부호)화 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또한 공간에 의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생겨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가 공간 위에 행한 추론들이 순수 지속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기를 시도 했다. (147)
이 공간은 지속에 대해 편리하고 실행적인 재현일 뿐이다. 공간은 게다가 언어와 가까운 친족이다. 공간에 의한 지속의 재현과 단어들에 의한 변화의 재현 사이에 밀접한 친족성이 있다. 이 두 상징[부호]들, 이 두 상징주의들은 가까운 친족이고 서로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147-148)
따라서 만일 우리가 상징[수학적 부호]위에서 추론한다면, 우리가 추론의 결과물을 상징 위에 옮겨 놓는다면, 우리가 거짓 길을 가게 하기 위한 많은 운수들(des chances)이 있다. 왜냐하면 상징화된[부호화된] 것과 상징들 사이에 평행론은 한 점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우리에게 실천에서 중요하며, 다른 점들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론으로부터 태어나는 모순들, 사람들이 지속 자체에 내속해 있다고 믿는 불조리들은 실재로 상징에 내속해 있는 것이고, 또는 오히려 상징과 상징화된 것 사이에 혼합(la confusion)이다. (148)
여기서 우리 비판이 정립하고자 원했던 것이 있다. 그러나 제논이 사물들을 이해했던 것과 같은 것은 그런 것은 아니다. 즉 마치 시간에 관한 그의 추론과 공간에서 운동에 관한 추론은 그를 부조리로 인도했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실재성은,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결론에 속하는 것이 아니어서, 실재성은 부조리한 것, 모순적인 것, 비합당한 어떤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로부터 변화는 없고 생성도 없고, 실재성은 변질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48)
그러한 것이 그리스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성의 고려가 우리를 부조리들로 인도하는 순간부터, 마치 실재성은 부조리일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처럼, 실재성은 비변질성(immuntabilité)이다. (148)
이제, 이런 비변질성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그것이 정의되고 표상[재현]되는가? 제논학파의 철학자들은 그것은 재현하지도 않았고, 규정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제기된 원리의 끝에까지 가는데 있는 그들의 학설에 따르면, 실재성[존재]은 규정될 수 없고, 존재의 모든 규정성은 존재를 박탈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에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은 존재가 있다이다. 존재자 있다, 비-존재는 없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존재의 불변질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재의 본성을 정의하지 않았고, 정의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변질적인 것의 과학을 구성하지도 못했고, 구성할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엘레아학자들과 더불어 형이상학의 진실한 창조자이다. (148)
그[플라톤]는 운동, 생성, 변화가 현존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조리와 모순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149)
그러나 이런 긍정작업(주장)과 이런 부정작업에 만족하는 대신에, 그는 불변하는 존재 그 자체를 연구하게 될 과학[기하학]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가 변화의 그 위에 위치하게 한 불변질성의 여러 측면을 규정했을 과학의 가능성을 믿었다. 이 불변질성이 실재성 자체이며, 그 나머지는 착각(illusion), 환영(fantôm), 공간과 시간에서 실재적인 것의 투사(projection)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어떤 생각이었다. (149)
플라톤은 어떻게 이런 생각으로 이끄는가. 어떻게 그는 이런 생각을 실현하는가? 나는 지난해 [이것을] 시도했다. 그리고 나는 플라톤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점에 관해서, 간략하게 되돌아가기만 할 것이다. 즉 만일 그의 시대에 구성된 하나의 과학이 없었더라면, 즉 변질하지 않은 모델들, 원형들(archétype) 안에서 변화하며 움직이는 사물들을 연구했던 하나의 과학이 없었더라면, 플라톤이 이런 생각에 아마도 뒤돌아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과학은 기하학이다. 기하학자들은 사람들이 물질적 경험 속에서 발견하는 모호하고 정의되지 않고 운동하는 관념들 대신에, 정확하고 정의되고 불변하는 모델들로 대체한다. 기하학자는 우리 경험 속에 생성과 변화에 종속하는 불완전한 원 대신에, 우리에 의해 구축된 이상적인 원을 대체한다.
기하학자는 이[이상적] 원을 일종의 초월적 모델로서 간주한다. 이 원 위에 불가분적 원들이 규제된다. 기하학자는 이 원 위에서 추론한다. 이 원의 정의로부터 기하학자는 귀결들, 추론들, 정의들의 귀결들을 끌어낸다. 그는 이 귀결들을 실재적 원들에 적용하고, 그가 내려한 물질적 원들에 적용한다. (149)
따라서 기하학이 플라톤 시대에 구성되었던 것처럼, 기하학은 불변의 과학이며 부동의 과학이다. 이 과학은 모델 또는 원형을 연구하기 위해, 경험으로부터 변화하는 사물들 그 위로 고양되었다. 그 모델들 위에 경험이 규제된다. 이어서 기하학은 모델들의 고려에 의해 얻어진 결과물들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일상경험의 사물들에 적용한다.그러한 것이 기하학의 인위성(l’artifice)이다. (149)
왜 우리는 일종의 보편적 기하학을 구성할 수 없었을까? 왜? 왜냐하면 사물을 생성의 영속적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고, 우리 과학은 생성을 파악할 수 없고, 모순의 출현에서 막다른 골목들 안에 곧바로 있기 때문이다. (149-150)
왜 [철학자는] 기하학자들이 도형들을 위해서 행하는 것을, 사물들 전체성을 위해 행하지 않는가? 특히 왜 우리는 보편기하학과 같은 과학을 구성하지 못할 것인가? 보편적 기하학은, - 우리는 지성적 세계 속에 옮겨 놓고서 – 우리 눈앞에서 변화하는 대상들에 대해 지성적 모델들, 즉 원형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갖는 관계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변화하는 대상들] 사이에서 어떤 안정된 연관도, 어떠한 정의된 관계도 확립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어떤 플라톤주의의 생각, 플라톤의 문제가 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수단들이 있다. 두 가지 길들은 열려있었다. 첫째 수단은 기하학을 확장하고 완전하게 하는데 있다. 기하학에게 보다 더 큰 일반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기하학으로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수학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도형들의 과학이지 말고, 그것은 크기들(grandeurs)의 - 양들 일반, 따라서 양들을 매개로 하는 - 과학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질들(qualités)을 싸안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수학적 자연학[물리학]을 구성하려 했을 것이고, 물체들의 성질들 다음에(après), 물리적 성질들(qualités)을 구성하려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물학적 특성들(propriétés)에 도달하고자 시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충만하고 또는 사물들로부터 고양된 특성들을 수학적 틀 속에 들어가게 하고자 시도했을 것이다.간단히 사람들은 수학적 부호들, 보편 수학을 가지고, 진실로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150) [이 사람들의 네 단계를 거쳐서 수학적 증명의 길로 가는 것은 그리스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점은 벩송과 들뢰즈가 같은 길이다.]
이길(cette voie)[과학의 길]은 근대철학이 참여했던 길이다. 갈릴레이(Galilei, 1564-1642) 이래로 근대철학은 실현할 수 없는 꿈에 의해, 즉 내가 믿기로는 보편 수학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었다. 그 수학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거대한 수학이다.이것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생각이었으며 라이프니츠(Gottfrid Leibniz, 1646-1716)의 생각이었다.심지어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칸트가 비판했던 과학은 칸트가 순수 근거 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재판1787)에서 이론을 만들었던 과학이며 이러한 것이다: 그 과학은 보편 수학일 것이다.따라서 이 길은 근대철학이 참여한 길이며, 다른 곳보다 앞에서 일찍거나 늦거나 간에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나는 수학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며, 경험이 한 세기 이래로 이 견해를 제시했다 - 믿지 않는다. (150)
실재성이 슬그머니 빠져난 순간이 도래한다. 실재성은 수학적 틀들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르네상스의 수학적이고 물리학적 발견물들은 보편적 수학에 대해 희망을 같게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철학이 항상 과학의 철학이었다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주 짧은[간략한] 철학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항상 어떤 것의 철학이며, 정확한 인식의 철학이다. 또한 철학이 이런 과학의 철학이었다는 것도 당연하다. (151)
따라서 이 길이 가장 자연적인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리학과 수학의 위대한 발견물들의 연속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발견물들을 20세기 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따라서 이것은 플라톤이 탐구할 수 있었던 측면에서부터가 아니다. (151) [운동의 직관은 다른 측면이다]
다른 길이 있었다. 이 길은 스승에 의해서 플라톤에게 열려져 있었다. 그는 스승을 통해서 옳건 그르건 자기 철학의 전체가 빚지고 있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이다.
당신들이 상기해보시라,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자연학자들의 전통과 단절하면서, 철학의 목표로서 전적으로 실천적 목표를 할당했었다. 그가 말했듯이, 자연적인 사물들을 전념할 일이 없다. 우선 사람들은 [그 사물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자연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탐구들은 사람들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철학들 수만큼, 그 만큼이나 의결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 업무[과업]이 아니다. 자연을 주제하는 것은 신들의 것이다. 자연에 전념이나 자연의 구성작업은 신들에 속한다. 인간의 업무는 삶에 대한 것들[사물들]이며 그 귀결로서 우리가 구성하는 과학은 실천의 과학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충실한 소크라테스는 실천적 삶을, 특히 행동의 운동성들을 정의하는 데 전념했다. 소크라테스는 유용한 것을, 알맞은 것을, 선한 것을 탐구했다. 이런 모든 항들은 그에게 있어서 동의어이다. 귀결로서 그가 탐구했던 것, 그것은 인간들의 행실과 인간들의 행동들로부터 몇몇 일반적 정식을 분간하는 것이었다. 이 정식들은 행실의 규칙들이 될 수 있고, 행동에 대해 절대적으로 정의되고 정확한 운동성들(des mobiles)dl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오늘날 개념이라는 부르는 것에로, 즉 정의된 관념에로, 아주 똑바로 나아갔다. 이 관념은 정신에 의해 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151)
그가 탐구했던 것, 그것은 인간행동들로부터 행동의 방향을 잡는 개념들을 추출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여러 다른 덕목들의 개념을 추출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덕이 무엇인가? 용기가 무엇인가? (151-152)
당신들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따라갔던 방법을 상기해보시라. 그는 일반적인 정의를 목표로 했고, 개념의 정의를 목표로 했다. 그는 귀납법에 의해 거기에 도달했다. 그 귀납법은 오늘날 우리에 속하는 귀납법이 전혀 아니다.소크라테스의 귀납법은 인간들 사이의 견해들을 규정된 관점 위에서 비교하려는 절차(un procédé)였으며, 서로서로를 교정하려는 절차이며, 불완전하고 충만되지 못한 견해들로부터 어떤 정식을 추출하려는 절차이다. 그 정식은 견해들 모두를 동의하게하며, 또한 모순들 그 위에서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planer, 조망하는) 관념(une idée)이다. 그 정식은 또한 행위들과 인간적 견해들의 운동성보다 상위인 개념(un concept)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이러한 것인데, 즉 개념의 탐구이다. (152) [성질사의 탐구이다]
게다가 이런 탐구를 소크라테스는 인간들의 행위들에게만 적용했다. 플라톤의 혁신과 발명은 이런 방법을 일반화하는 것이었고, 개념들의 보편적 적용을 행하는 것이었다. 개념의 보편적 적용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하게도 철학적 작업의 도구를 보았다. (152)
플라톤은 어떻게 이런 적용을 행했고, 어떻게 그는 자신이 분명하게 제시했고 또는 이런 형식 하에서 제기해야만 했던 개념 속에서 문제의 해결을 발견 했는가? [답은] 기하학을 확대[적용]하는 것, 과학을 얻는 것인데, 마치 기하학이 실재적 도형에 속하는 것을 설명하듯이, 과학도 경험적으로 얻어진 운동하는 모든 사물들에 속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152) - [고대철학의 기하학의 과학화, 근대철학의 대수학과 미적분의 과학화, 현대철학에 함수관계의 과학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은 물질 또는 사물에 대한 양화의 길일뿐이다. 성질사에 관해서는 측정가능한 부분만큼만 설명하는 것인데, 이 측정가능한 양이 확률적일 수 밖에 없고, 그 확률도 어느 경계 부분과 어느 시점에서 측정된 임시적 단위에 의해 설명할 뿐이다. (55VMJ)]
이 해결은 충분히 지적되었다. 우리는 이전에 변화성과 변화의 직관이 주어지면, 직관의 열망(l’aspiration) 같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언어의 이분법적 기능이라 부른 것의 덕분에, 또한 다른 어떤 경향성 덕분에 또한 두 부분으로 스스로 나누어지는 이런 직관의 열망과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비결정적인 주어이고 다른 한편으로 속사들이다. [전자에서는] 사람들은 비결정적인 주어에 대해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주어에게 모든 결정작업들에게 기여하기를 기다리게 될 것이 사회적 출발점이고 비결정적인 주체이라고 말했다. [후자에서는] 속사들은 여러 다른 결정작업들을, 가능한 한 계속적인 결정작업들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색깔을 변화하는 대상, 즉 스펙스럼의 모든 계속적인 뉘앙스들을 관통하는 대상이 있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눈앞에서 변화하는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 나는 언어의 추진(la poussée) 자체 하에서, 언어의 압박 하에서 연속성을 해체한다; 나는 [속사들의 대상화에서] 연속성을 두 부분으로 해체한다. (152)
1) [하나는] 내가 대상 또는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고, 이 대상의 불가분성이지만 빈 불가분성을 표상[재현]할 어떤 것이다. [2)] 그리고 다른 한편 나는 얼마간의 표시점들, 즉 결정화의 점들을 구분하며, 당신들이 원한다면 스펙트럼의 표시할만한 얼마간의 수를 구별해낸다. 나는 이들 전체를 이름[명사]으로 부른다. [빨노파남보]. 나는 이것들 대상의 그 만큼 수의 속성들처럼 생각한다. 만일 내가 언어의 관점에서 형용사들, 성질사들의 위치에 있다면, 나는 이렇게 계속적인 속성들을 갖는다. 그러나 내가 전적으로 안정되고 또한 일반적인 재현들 하게 될 때는 이런 점에서 인데, 재현들은 나의 눈앞에 있는 대상에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다른 대상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53)
그리고 내가 고려하건데, 이러한 것이 플라톤의 방법, 생성의 단계들중의 각 단계이다. 내가 결정작용들의 각각을 자체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것처럼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계속적인 변화들, 변화의 연속성은 대상 속에서 계속일 것이고, 내가 막 구별했던 안정된 여러 성질들일 것이다. 그 대상은 모든 성질들의 만남일 것이고, 대상은 내가 이미 사용했던 표현일 - 마치 마술 램프로 비춘 도형들(figures, 그림들, 형상들)이 차례차례로 지나가는 화면(un écran) 위에서처럼 – 것이다. 관념들의 각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은 이 도형들을 관념들이라 불렀는데,이 각각 관념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은 어떤 것이지만, 그 각각은, 당신들이 원한다면, 시간과 공간 속에 그림자 자체를 투영한다. 이 모든 그림자들은 그 대상 속에 지나가고, 그림자들을 기다리는 빈 대상 속에서 지나간다. 이것은 생성의 인상을 부여하는 연속이다. (153) [벩송의 생성 설명은 저술에서보다 강의에서 돋보인다. - 주지주의에 대한 반대 방향 또는 다른 방향이다. 들뢰즈의 ‘방향’의 논리가 성립할 것이다.]
따라서 생성(le devenir)은 비운동성으로 해소된다. 그래서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계속적인 투사작용을 – 변화의 연속성을, 생성의 연속성을 - 지각하게 하는, 변질하지 않는, 모델들이 있다. 그것은 생성의 혼동[혼융]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생성은 생성되지 않은 항들로, 비운동성의 항들로 해소된다. 이 비운동성 항들이 정확하게 개념들이다. [그런데] 달리 표현해 보자면, 개념들은 언어의 충력과 압력 하에서 창조되었으며, 개념들은 전체에서 전체를 위하여 현존하며, 우리가 개념들을 창조하기를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경우에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153)
개념, 이것은 탁월하게도 철학자의 작업 도구일 것이다. 개념이 어떤 대상에 연관있는 것과 같이 기하학적 도형은 실재적 도형과 연관이 있다. 게다가 기하학적 도형은 이미 개념이다. (153-154)
따라서 플라톤의 방법은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일종의 거대한 기하학을 구성하는 데 있다. 그 방법은 관계를 확립하면서 개념일반과 기하학적 도형들의 개념 사이에 있는 닮음[유사]를 확립한다. 특히 기하학적 도형의 개념은, 어떤 것의 개념, 즉 변하는 대상의 변질하지 않는 개념이다. (154)
그리고 개념 일반은 다른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열과 냉의 개념, 그것은 변질하지 않은 모델처럼 변화하는 어떤 것[성질사]이다. 그 변화하는 어떤 것에서 열과 냉의 운동하는 다양성이 규제되며, 실재적인 열과 냉은 혼재된 방식으로 또한 이것들의 모든 운동성 안에서 ‘열’과 ‘냉’을 표현하는데, 즉 변질하지 않은 모델들을, 원형들, 고등상식(supra sensé, 감각적 상위)을 표현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플라톤주의는, 당신들이 보듯이, 어떤 개념과 기하학적 개념으로부터 이데아의 추정(la conjoction, [추측])이다. [그리고] 개념들 일반은 철학자들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이는 마치 기하학적 개념이 수학자들에 의해 이용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154)
이것이 바로, 내가 지난해 확립하고자 시도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증명의 세부에 들어감이 없이 주제를 상기하는 것으로 그치자. (154)
만일 우리가 원리를, 즉 철학적 문제 해결의 중요 관념을, 추출하고자 애쓴다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나는 우선 플라톤주의를 이해하는 이런 방법이 매우 옛것이라는 것을 주목한다. 또한 내가 막 행한 일종의 분석과 해명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것이다. 그는 그 분석을 형이상학 제1권에서 행한 것이고, 거기서 그는 우리에게 플라톤주의의 발생(la genèse)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플라톤이 자기 학설이 이오니아학자들의 철학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데, 그가 아마도 엘레아학파들의 철학을 보다 정당하게 말하는 것일 것이다. (154)
그의 말투는 이러하다. 이오니아인들과 더불어 그는 흐르는 것에 대한 가능한 과학은 없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생성에 대해, 지속에 대해 ‥… 톤 레온토(ton reonto), 흐르는 사물들에 대해 말한다. 거기서부터 그는 출발했다.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는 보편적인 것을, 토 코토몬(to cotomon), 개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덧붙여 말하기를, 사실상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만, 테리(teri), 이런 방법을 응용했다. 그는 윤리적 사물들에만 전념했다. (154)
그러나 플라톤은 이런 방법을 사물들 일반으로 옮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런 방법이 피타고라스의 방법을 모방일 뿐이라고, 또한 플라톤이 이데아들과 사물들 사이에서 확립한 연관은 피타고라스가 수들과 사물들 사이에 확립했던 연관이라고 덧붙인다. 이 연관은 거의 이렇게 표현된다. 플라톤은 단지 단어들을 변하게 하였을 뿐이다. 피타고라스는 모방(une imitation, mimesis)를 말했고, 플라톤은 참여(분유, une participation, methexis)를 말했다. (155)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플라톤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은 확실하게 진실한 해석이다. 즉 플라톤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관념들과 더불어 피타고라스학파들의 수학적 관념들의 추정에 의해 형성되었다. 소크라테스에서 순수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의 유용작업은 플라톤에게서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인 의미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플라톤의 발생(la genèse, 생성)이다. 그 발생론이란, 언어 속에 이미 만들어진 개념들을 다루는 것이며, 이미 만들어진 언어 속에서 우리가 만날 것인 일반 관념들을 다루는 것이며, 이 관념들(이데아들)을 비변질하는 모델로 세우는 것이다. 그 모델들에 근거하여 사물들의 변질성들이 규제된다(규칙화된다). (155)
그런데, 만일 이런 학설의 토대를, 플라톤주의의 속셈(arrière-pensée)을 발견해야 한다면, 이런 생각이 그 깊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는 어느 정도로는 실재성으로부터 이미 만들어진 과학을 우리에게 기여하는 것이고, 그리고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 구별들은 우리들의 편리성에, 또 우리의 실천적 유용성에, 관계하는 구별들이 아니며 게다가 사물들에 관한 우리의 행위에 관계하는 구별들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 구별들이, 과학적 구별들, 형이상학적 구별들이다. (155) [플라톤은 개념작업을 실용적 구별을 한 것이 아니라, 순수 이론적 구별을 한 것이다.]
나는 고의로 사물들을 과장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는 두 개의 과학 사이에 구별을 해야만 했다고 플라톤 자신이 선언했다는 것을 매우 잘 고려하고 있다. 하나는 언어가 우리에게 기여하는 과학이며 이것은 간단히 견해[pistis-eikasia]일 뿐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이 구성한 과학[noēsis(νόησις)-dianoia] 이다.그래요. 그러나 두 과학 사이에 차이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차이를 나게 하는 것은] 철학적 구축, 즉 변증법이며, 이는 개혁(une réforme)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상용하는 언어, 즉 일반 언어의 교정과 같다. 플라톤의 생각은 전체의 과학(la science du tout)이 있고, 우리가 말하는 언어 속에 모아져 있다. 과학[이데아]을 탐구해야 했고, 언어[피스티스]를 교정해야 했다. 그것은 다시 만들고 해체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말하는 언어, 그것은 신적 언어이지 변형된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언어의 사투리(le patois, 방언)이다. (155-156) [신적 언어는 자연적 언어로 쓰였다.]
자연적 언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철학이며, 철학은 하나의 언어이며, 그 나머지는 항들 자체이다. 플라톤이 사용했던 단어들은 잘 의미화작업된 것이다. 이런 탁월한 방법이 변증법이다. 그리스어로 디아렉타(dialecta)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한편으로 분류화 작업, 선별(triage)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 대화, 대담을 의미한다. 철학은 대화와 대담에 의해, 언어 속에서 표현된 몇몇 의견들의 충격(le choc)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충격을 각도들[날카로운 모난 귀퉁이들]을 둥글게 한며, 불안전함은 보상 받고, 결함들은 중성화되며,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양한견해들과 모순들 위를 조망하는(planer) 의견들[일반관념들]을 얻는다. (156)
따라서, 이런 이론 속에서 언어에 대한 일종의 신성함이 있고, 개념이 언어에 의해 형성된 것처럼, 개념이 완전한 언어에 의해 형성될 것이라는 것처럼, 개념에 대한 신성함의 관념이 있다. 과학[학문]이 있는 것은 언어 속에서 이다. 그리고 언어를 의미있게 하는 것은 특히 그리스 관념, 그리스어로 로고스(logos, λόγος)이다. 말투는 설명을 의미하며 과학이다. 과학은 말투이며 언어이다. 그리스 철학의 본질은 거기에, 개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언어에 충력 하에 형성된, 있는 그대로의 재현[표상]에 있다. 개념은 존재의 과학[학문]이며, 과학은 우리에게 절대자 자체를 부여한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토대[깊이]이다. (156)
우리가 다음 강의에서 확립하고자 시도할 것은 또한 근대과학의 토대이며, 겉보기로 다룰지라도 칸트까지이다. 고대인들의 관점, 근대인들의 개념작업, [] 근대인들의 형이상학적 개념작업은 고대인들의 개념작업을 이어간다. [그런데] 형식도 다르고, 끌어내는 귀결도 다르며, 적용도 다르다 그러나 중요 관념은 동일하다. (156)
우리가 매우 간략하게 다음번에 제시하고자 시도할 것은, 근대철학의 지도[방향] 이념[관념]이 이런 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기되는 문제를 우리는 다음 해에 연구하기를 시도할 것이며, 항상 다음과 같다. (156)
지속의 연구가 일으킨 난점들과 모순들을 걷어내기 위하여, 실재적인 것의 과학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완전히 만들어진 개념에 만족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물들 속에 있는 그리고 찾아가야만 하는, 완전히 만들어진 과학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 도달했던 극복할 수 없는 난점들 앞에서, 칸트이래로 철학적 노력이 마비되었던 난점들 앞에서, 과학이 – 과학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현상을 넘어서야 하는 한에서 또 과학이 실재성에 접근하는 한에서 - 다른 것일 수 없는지 또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156-157)
[그렇지 않으면] 생성의 운동성 대신에 개념으로 대체하면서, 생성이 그자체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또한 지속이 그자체로 모순적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생각이 아주 단순하게 저 오랜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지속과 생성을 상징적 재현들과 – 그 재현 위에서 추론이 실행되고 그 재현으로부터 추론은 일종의 난점들과 모순들을 끌어내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실재성 자체에 되돌아가길 바란다면 재현에서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 혼동했던 사실에 유래하는 것이 아닌지[를 탐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상징을 멀리하면서 또한 너울을 벗기면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발견하는 지를 탐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내가 보기에 이러한 것[지속과 생성]은 그 자체로 완전하게 가지적인(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고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157)
올해 강의와 다음해 강의 사이의 이행에 쓰일 다음 강의(19강)의 목적은 매우 간단한 연구에 의해, 칸트의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 철학의 출발점으로 쓰인 관념들을 확립하려는 것이리라[미래]. 그것은 근대에 있어서 형이상학이 이런 관념으로부터, – 과학일 수 있다는 관념과 사물들로부터 완전히 만들어진 과학이 있다는 관념으로부터 – 즉 플라톤의 관념[이데아]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정립하는 것이리라. 플라톤이 지성적일 수 있는[가지적] 세계를 – 그 세계에서는 관념들이 자신들의 위계질서 속에서 배열되는데 -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우리 눈앞에 있는 대상들이, 그 자체들과 그것들의 현상에 내속해 있으면서, 분간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일종의 형이상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157)
우리가 제시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 이런 관념이, 정확하게 형이상학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과 같은, 과학의 개념작업으로 인도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이리하여 과학을 더 잘 기초 지운다는 구실로, 과학이 모든 것을 싸안을 수 있게 한다는 구실 하에,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인식의 심연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상대적인 어떤 것이라고 과학을 단죄 못하게 하는 것인가?그렇지 않으면 과학을 철학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과학을 점점 더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것은, 순수하게 수학적이 되지 않을, 비결정론에게, 우연에게. 자유에게,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과학의 관념을 솔직하게 수용하면서 [가능하다]이다. 결국에는 과학의 관념은, 이미 만들어진 체계도 아니고, 실재성을 분간하는 데만 있으면서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어느 정도로는, 개념들의 기계적 체계도 아니지만, 오히려 요청하는 과학의 관념이다. 이 과학은 끊임없이 발명과 창조의 노력을, 변화하고 움직이는 실재성과 다시 접촉하기 위한 노력을, 결국에는 우리가 지속이라 불렀던 것과 다시 접촉하기 위한 노력을, 요구[요청]해야 한다.
그러한 것이 다음번에 우리가 제시할 질문이다. (159) (55W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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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피타고라스(Pythagore, Πυθαγόρας, 전570-전495) 이오니아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피타고라스학파라 불린 종교 단체의 교주. 이 후배들은 시실리에 정착했다.
480? 제논(Zenon, Ζήνων, 기원전480[490]-420경) 귀류법/변증법(상대부정을 통한 자기긍정)의 발명자 [소크라테스보다 10살[20살]많다. 소씨가 한 수 배웠을 확률이 있다]
46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450-386)가 소씨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불렀다.
전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기원전 427-347)(80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Aristoteles, 384-322 av. J.-C.)(62살) 플라톤의 제자, 마케도니아 출신 철학자. 사물의 탐구를 위한 네 가지 방식을 형상인, 목적인, 효과인, 질료인으로 구분한다.
O
1564 갈릴레이(Galilée, en it. 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 수학자, 기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Le Dialogue sur les deux grands systèmes du monde (en italien :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1632)(1624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요청에 의해 쓰여졌다). 1632년 10월 1일 카톨릭 교리성에서 갈릴레이 소환, 1633년 6월 22일 단죄.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철학의 원리들(Principia philosophiae, 1644: Les Principes de la philosophie),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Règles pour la direction de l'esprit,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1684),
1646 라이프니쯔(Gottfrid Leibniz, 1646-1716) 이 다재다능한 철학자는 프랑스에 거주한 시간이 많아서 많은 작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리고 그는 뉴턴과 서로 따로 미적분을 발명하였다. 새로운 논리계산(명제계산)을 발명하고자 했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관념론자. 삼 비판서로 유명하다. 순수 근거 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재판1787) Critique de la raison pratique, 1788, Critique de la faculté de juger, 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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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K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1986], 벩송 강의록, 시간관념(L’idée de temps) 편집 노르망디 깡 대학에서(2016-2019) 연구 – 그의 지도교수 올리보(Gilles Olivo, [1965?]) 1989년 교수자격, 2000박사학위, 깡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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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벩송에서 삶의 분열의 성향, 그리고 공동체의 삶에서 이분법적 경향
전자의 분열 성향은 삶의 계속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며, 의식의 발산의 성향이 있고, 더하여 발산만큼이나 개체에서 수렴을 해야 강도(내공)의 심화를 가져오기에 통일적 단위를 만든다. 언어학 계보 상으로, 통일적 단위의 기초로서 입말의 ‘뭣’은 변화하고 운동하는 단위(질료이든 영혼이든)일 것이다.
후자에서 이분법적 경향은 삶에서 인성(인격성)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인성을 완수하기 위해 공동체의 필요를 알아챘고, 공동체가 위계사회로 가면서 언어의 분화는 발전하여 주어와 성질사의 이분법이다. 위계사회의 고착화는 인격을 고착화시키기에 다른 방향으로 성질사의 일반화와 어휘화가 발달하게 될 것이다.
역설(le paradoxe, 逆說)은 언뜻 보면 일리가 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모순되어 있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거나 하는 논증이나 사고 실험 등을 일컫는다. 역리(逆理) 또는 배리(背理)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전칭명제는 파라독스이다]
양도논법(兩刀論法, le dilemme)은 논리학에서 대전제가 두 개의 가언적 명제의 연언(連言) 명제로 되어 있고, 소전제가 대전제의 두 전건을 긍정하든가 혹은 두 후건을 부정하는 선언적 명제의 형태로 되어 있는 삼단논법이다. 고대로부터 딜레마를 얻어내기 위한 형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율배반(une antinomie, 二律背反)은 논리적으로도 사실적으로도 동등한 근거가 성립하면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명제의 관계를 뜻한다.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시초가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정된 것이다.' '세계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이다.' 이것은 칸트가 내세운 유명한 이율배반의 하나이다. [명제에서 규정성과 비규정성의 적용, 즉 조건과 비조건에 따라, 명제의 범위가 유한하거나 무한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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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구즉착(開口卽錯)과 동념즉괴(動念卽乖)
개구즉착이 전칭명제를 꺼내는 순간 파라독스에 빠진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전칭명제와 같이 파라독스이다.
동념즉괴는 이율배반처럼 논리의 전개가 경계를 갖는 방식으로(즉괴 卽乖), 한정하면 닫히고 비한정적이면 열린다. 그러나 사유는 이 둘을 넘어서(괴리 乖離) 열린다고 해서 하나 또는 둘로 가지 치는 것이 아니라, 빛살처럼 곱태성으로 퍼져나가며 전개 발전한다. - 벩송의 곱태성은 리만 비유크리트 사유라기보다, 수학에서 대수 특히 지수에서 비한정성(무한성)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 요즘 ‘입벌구’라는 말이 있다. '입만 벌리면 구라를 친다'라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착오(錯誤) - 동념즉괴(動念卽乖)
- 동념즉괴(動念卽乖) - 괴리(乖離) [파라독스]: 1. 서로 등지어 떨어짐, 2. (두 가지 사물(事物) 현상(現象)이) 서로 조화(調和)나 일치(一致)를 이루지 못하고 어긋나 동떨어진 상태(狀態)가 되는 것. [“가라리 넷”이어라에서 괴는 ‘가라리’ 일 것이다.] (55VME)
(18:39, 55WKB) (19:11, 55W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