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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제2장 정신분석과 가족주의 :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가족주의를 너무 과도하게 믿음으로서 신성 가족화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신성가족’이란 용어는 들뢰즈에서는 비아냥거림이다. 다음 제1절에서 외디푸스를 제국주의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40Q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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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도덕론은 내재의식(l’inconscient)과 연관이 있고, 윤리학과 종교론은 의식의 외적 관계들에서 다루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다. 들뢰즈가 1장에서 욕망하는 기계라고 하는 것은 내재의식의 충동(작동)을 다루고자, 의식(내재의식)의 실재성을 정태적이 아니라 동태적으로, 그리고 생산하는 기계로 다루었다.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점에서, 의식은 발산이며, 생성이며, 창조이다. 그 내재의식이 다양체이며 다발로 되어 있다. 그러면 2장에서 다양체의 발현을 다룰 것인가? 발산과 발현을 다루고하는데, 그것을 막는 것이 가족제도, 즉 가족제도를 신성시하며 신성가족으로 숨는 것이 프로이트가 아닌가?라는 비판의 주제른 내세운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프로이트가 내재의식의 생성, 발산인 점을 보았지만, 그 발산을 어떤 틀, 신화적 틀 또는 관습적 틀 속에 쟁여넣듯이 넣어서 이야기 주머니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가 라는 의심을 한다. 의심정도가 아니라, 병적으로 이야기 주머니 속에 넣어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이야기를 쓴 것을 정신분석학으로 여긴다. 그 정신분석학이 잘못 들어선 길을 비판하는 것이 제2장이다.
도덕론에서는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해 알아도 모른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하면서(아는 것이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반화된 덕목들 속에서 살아간다. 예전에 가끔은 멍석말이를 하면서 시골 고개 모퉁이에서 빗자루귀신이나 너구리귀신에 홀려서 가진 것 다 털렸다는 것도 인정되었다. 그게 실재성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서 겪어온 세대인 노인들은 안다. 윤리학 또는 종교론에 빠진 자들은 완전한 통일성을 먼저 믿고서, 수 틀리는[견해 다른] 자들에게 진리와 법칙을 들이대며 증거와 증명을 대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진실도 하위로 만들고 곤장과 철장의 신세를 지게 한다. 어쩌면 도덕론은 사실들의 현재와 삶의 방식 사이에 유비적 이야기로서 설득하고 또는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런데 윤리학은 완전한 체계 하에서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즉 증명과 증거의 부분들이 체계의 답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긴다. 이 부분들의 답은 전체를 답해주지 않기에 유비를 사용하기보다 알레고리를 사용한다. 알레고리의 (개인적)습관적이고 (사회적)관례적 진리는 전체의 진리와 또는 체계의 진리와 연관 없이도, 전체의 일부분이 전체와 알레고리상으로 접합(연결, 이접, 연접)되는 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분이 전체의 어느 하나라도 연결되는 경우이며, 이런 알레고리의 진리는 대응도 정합도 체계도 아니면서 상관관계에 어떤 연대가 있는 것으로 족할 때, 즉 상식(5관)의 통일이 있는 것처럼 여길 때 쓰인다. 알레고리의 이야기는 신화에서 남아있고 여섯 살 꼬마에게 이야기 해 줄 때 쓰인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그게 정신분석가에게 이야기해 줄때는 외디푸스 신화라고. (56ULHI)
1. 오이디푸스 제국주의 L'impérialisme d'Oedipe - 60, 83
[[외디푸스가 성립하는 것은 제국이 성립된 영역에서이다. 외디푸스 개념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사회와 국가가 형성된 영역에서 개인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곳에는 이미 가족제도의 엄격성이 적용된 것이며, 개인의 욕망은 애정관심과 마찬가지로 가족 형식 속에서 규제되고 억제되어 있다.(40MNA)]]
2.1.1. 그 양식들 Ses modes. 60-62. [외디푸스 양태들.]
제한된 외디푸스는 아빠-엄마-나의 삼각형의 모양을 가지고, 인물로 되어 있는 가족의 성좌(la constellation)를 이룬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외디푸스를 자기의 독단(son dogme)으로 삼을 때, 정신분석은 어린이에게는 이른바 이전(pré-)외디푸스, 정신병자에게는 외부(exo-)외디푸스, 다른 인민들에게는 대항(para-)외디푸스의 관계들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60)
정신분석 이론가가 일반화된 외디푸스의 개념화 작업으로 고양된다. ... 하나는 .. 계열의 외디푸스인데, 프로이트가 이것을 자아와 이드(1923)에서 제시하고 있으며, .... 다른 하나는 방계친족, 후손들, 조상들을 통합하는 집단의 외디푸스이다. .... 결국 상상적인 것(상상계)과 상징적인 것(상징계)의 구별이 입장들과 기능들의 체계로서 외디푸스 구조를 끌어낼 수 있다. (60)
구조의 외디푸스(3+1)는 삼각형과 혼동되지 않으나, 모든 가능한 삼각형화에 작용하며, 정해진 영역에서 욕망, 욕망의 대상, 법칙을 분배한다. (61)
앞선 두 가지 일반화의 양식이 구조적 해석에서만 그것들의 진정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다.(61)
예를 들어 라깡(Lacan, 1901-1981)의 배제(forclusion)란 개념은 본래 구조적으로 비어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어 있는 곳을 이용함으로써 정신분열자가 자연스럽게 외디푸스의 축에 다시 놓이게 되고, 외디푸스의 궤도에 다시 올려놓아진다. (61)
[들뢰즈] 욕망하는 생산은 욕망의 기계들인데, 이 기계들은 구조에도 인물에도 환원될 수 없는 것이요,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다 같이 넘어 또는 아래에서 실재계(le Reel)를 그 자체로 구축하는 것이다.(61)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1884-1942)는 사회형태에 따라 외디푸스 형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다시 해보려고 전혀 하지 않는다. (61)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정신분석이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골몰하고 있는 맹렬한 외디푸스화이다. 정신분석은 이미지와 구조가 결합된 자원들(ressources)을 가지고 이 일에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 라깡(Lacan)의 몇몇 제자들이 최근에 좋은 책들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라깡의 사유가 정말로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물을 것이다. 분열자마저 외디푸스화하는 것이 문제인가? 또는 이와 다른 것, 심지어 이에 반대되는 것이 문제인가? 정신분열증화하는 것, 즉 무의식의 영역을 또는 사회적 역사적 영역을 정신분열증화하는 것이 문제인가? (62)
왜냐하면 무의식 자체는 더 이상 구조적인 것도 인물에 관한 것도 아니요, 상징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으며, 형상을 그려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재의식[무의식]은 기계로서 작동하며(machiner), 기계적(machinique)이다. 그것은 상상적[상상계]도 상징적인 것[상징계]도 아니며, 그 자체적으로 실재계(Réel)이며, “불가능한 실재(réel impossible)”이며 또한 자기의 생산작업이다. (62)
2.1.2. 정신분석에서 오이디푸스적 전환점 Le tournant oedipien dans la psychanalyse. -
그러나 이 긴 역사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정신 분석학의 기간에서 단지 이 긴 역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 역사는 의심들, 우회로들, 후회들이 없지 않았다. 라쁠랑슈(Jean Laplanche, 1924-2012)와 뽕탈리스(Jean-Bertrand Lefèvre-Pontalis, 1924-2013)는 프로이트가 1897년에 자기 분석하는 중에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1923년에 자아와 이드(1923)에서 최초의 일반화된 이론을 내놓는 것, 또한 1897년에서 1923년 사이에서 외디푸스는 오히려 여분의 현존이었으며, 예를 들어 성욕에 관한 세 논문(Trois essais sur la théorie sexuelle, 1905) 속에 사춘기에서 대상 선택에 관하여, 또는 꿈의 해석(1900) 속에 전형적인 꿈들에 관해서, 따로 쓴 한 장(ch)에서 따로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주목하였다. . (62)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마치 “프로이트가 외디푸스와 어린이 애정관심(sexualité infantile) 을 서로 접속(articuler)시키는데 이르지 못한 것처럼” 일어났다. 어린이 애정관심은 발전과정의 생물학적 실재성에 귀착하고, 외디푸스는 환영의 심리적 실재성에 귀착한다. 외디푸스는 “생물학적 실재론을 덕분에(이용하여)” 상실될 뻔했던 것이다. (63)
2.1.3. 욕망하는 생산과 표상[재현] Production désirante et représentation. - 63
그러나 이러한 사정들을(실재성의 문제들) 제시하는 것이 정확한가? 외디푸스의 제국주의(impérialisme) 실재론은 생물학적 실재론을 포기하기만을 요구하는가? 또는 무한히 강력한 다른 어떤 것이 외디푸스 때문에 희생되지 않았던가? 왜냐하면 프로이트와 최초의 정신분석가들이 발견한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유로운 종합들의 영역, 즉 끝없는 연결들, 배타적이지 않은 이접들, 특수성이 없는 결합들, 부분적 대상들 및 흐름들이기 때문이다. (63)
욕망하는 기계[아페이론]들은 무의식의 깊이에서 으르렁거리고 부릉부릉거린다. 즉 이르마(Irma)의 주사[1900년 꿈의 해석 속에서], 늑대 인간의 틱-탁[1918년 발표], 안나의 기침하는 기계[1895년], 또한 프로이트에 의해 조립된 설명 장치들, 모든 욕망하는-신경생물학적 기계들이다. (63)
무의식의 모든 연쇄는 일대일 대응시키고, 선형화되고, 전제군주인 시니피앙(기표)에 매달린다. 모든 욕망하는 생산이 짓눌리고, 표상의 요구들에 굴복하고, 표상 속의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의 음침한 놀이들(les mornes jeux)에 굴복한다.(63) [감성의 다양성을 일반화하여 하나의 선형으로 만들면 이 선형은 표상이 되고 지도 관념이 되어 다양한 재료에 지도와 지배의 입장에 선다. 이 지도의 잣대가 억압적일 때 음침한 놀이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보다 더 그로덱크(Georg Groddeck, 1866-1943)가 인간과 자연의 공연성(coextension) 안에서 무의식의 자기생산에 더 충실하게 남아있었다. 프로이트는 .... 조금씩 조금씩.. 무의식 전체에다 가족적 삼각형을 가두려 한다. [이 경우에] 분열자는 적이다. 욕망하는 생산은 인물화되고 또는 오히려 인물론화되고 상상화되고 구조화된다. (64)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에서 외디푸스를 발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자기분석에서 인가? 또는 괴테(Goethe, 1749-1832)의 고전적 교양인가? 그는 자기 분석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는, 그래 이건 외디푸스를 닮았어!라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어떤 것을 그는 먼저 “가족 이야기”의 한 변형으로 본다. .. 무의식 전체에 가족 삼각형을 가두는 일흔 한다. 여기서 적은 분열증자(le schizo)이다. (64)
[들뢰즈의 비판] 정신분석가는 생산단위들을 조립하고, 생산과 반생산의 집단적 동인들과 싸우는 기사(技士)나 기술자가 되지 못하고, 사적인 극장의 연출가가 되고 만다.(64)
2.1.4. 욕망하는 기계들의 포기 L'abandon des machines désirantes. - 64
64 정신분석학은 마치 러시아혁명 같아서, 사람들은 그게(ça) 언제 악화로 돌아서기 시작할지 알지 못한다. 여전히 더 높이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미국사람들과 더불어? 제1인터네셔널과 더불어? 비밀위원회와 더불어? .. 외디푸스의 발견으로부터, 외디푸스, 그것은 관념론의 전향이다. 그럼에도 정신분석학이 욕망하는 생산을 무시하기 시작해다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의 경제학의 근본적인 용어들, 노동과 투자(investissement)는 그들의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64)
욕망의 생산의 무외디푸스적(anoedipienne) 본성은 여전히 현재하고 있지만, 외디푸스 좌표들 위에 포개진다[접힌다]. 이 좌표들은 욕망을 이전(près-)외디푸스적, 대항(para-)외디푸스적, 의사(quasi-)외디푸스적 등으로 번역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항상 거기에 있다. ... 기원적 환영이 모든 것을 외디푸스적 장면 위에 덮어버릴 때, 벽 뒤에 또는 무대 뒤에는 이 환영(le fantasme)이 욕망하는 기계들에게 양보하는 장소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여전히 지옥의 소란을 피우고 있다. (65)
어느날 우리가 녹음기(테이프 레코드)를 들고 분석가의 진료실로 들어간다. 멈춰, 욕망하는 기계의 침입, 그리고 모든 것은 뒤집어졌고, 우리는 계약을 깼다. 우리는 제3자 배제의 원칙[배중률]에 충실하지 못했다. 우리가 3자를, 인격인 욕망하는 기계를,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각 정신분석가는 외디푸스 밑에서, 외디푸스를 관통하여, 외디푸스 뒤에 그가 업무보는 것이 욕망하는 기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했을 것이다. (65-66)
처음부터 정신분석가들은 외디푸스를 도입하고, 무의식[내재의식] 전체 속에 외디푸스를 주입하는 데 매우 열심히 작업한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정신분석가는 외디푸스의 시녀, 욕망 속에 반생산의 큰 대리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맑스에 따르면, 또한 최초의 자본가들도 역시 .... 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66) [맑스가 막스 스티르너를 비판하는 경우에, 스티르너는 헤겔에 덧씌워져 있다고 보았다.] (40MNA)
(옮, 3:01, 56ULA)(5:01, 56ULA) (5:14, 56ULI)
# 인명록
1749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고전주의 성향 작가, 철학자, 과학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
1818 맑스(Karl Marx1, 1818-1883), 고타강령 비판(La Critique du programme de Gotha)(1875쓰고, 1891 출판)에서 이 문구를 대중적으로 사용했다. (« De chacun selon ses moyens, à chacun selon ses besoins »)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l'inconcient"(1915), in Métapsychologie,. 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 1923; Le Moi et le Ça), Cinq psychanalyses, fr. 1935(1. Dora, 1905; 2. Le petit Hans, 1909; 3. L'Homme aux rats, 1909;, Le Président Schreber, 1911; L'Homme aux loups, 1918).
1866 그로덱크(Georg Groddeck, 1866-1943), 독일 의사, 정신치료사. 정신분석가. 프로이트 초기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스스로 야생적 분석가(« Je suis un analyste sauvage »)라고 한다.
1884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Kasper Malinowski, 1884–1942), 폴란드 인류학자. 사회학자, 인종학자.
1901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1924 라쁠랑쉬(Jean Laplanche, 1924-2012), 프랑스 정신분석가. 뽕탈리스(Jean-Bertrand Pontalis)와 함께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1967
1924 뽕탈리스(Jean-Bertrand Lefèvre-Pontalis, 1924-2013)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가.
1935 아브라함스(Jean Jacques Abrahams, 1935-2015) 벨기에 법률가. [이 직업이 맞을까?] "L'Homme au magnétopique, dialogue psychanalytique," Temps moderne, n 274, avril 1969.
(5:25, 56ULG)(6:7, 56ULH) (6:14, 56U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