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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6편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함이라
(찬송 시편 136편 – 악보는 맨 뒷장에)
2023-3-20, 월
맥락과 의미
136편에는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함이라” 하는 후렴구가 스물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큰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회중이 후렴구로 화답하면서 찬송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의 반복은 자칫 단조롭게 보이지만, 점점 그 깊이는 더 깊어지고 그 의미가 더 풍성해집니다.
26절로 이루어진 136편은 매우 짜임새 있게 조직되어 있습니다. 1-22절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면서 그 근거로 창조와 구원을 듭니다. 마지막 네 절에서는 그 내용을 역순으로 다시 열거합니다. 23-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비천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이야기합니다. 25절에서는 모든 육체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이 부분은 창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26절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1-3절을 반복합니다.
이 모든 구조를 아우르는 것이 “그분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하는 후렴구입니다. 창조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감사의 이유로 말씀드립니다.
1. 하나님께 감사하라 (1-3절)
2. 창조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4-9절)
3.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 (10-22절)
4.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시는 하늘의 하나님 (23-26절)
1. 하나님께 감사하라(1-3절)
이 시의 서론인 1-3절에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용례들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 드리게 된 일을 감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함께 찬양합니다(시편 23:6, 역대하 7:3 등).
세상의 복잡한 현실에서 비천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성전에서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찬송합니다. 비록 백성들이 언약을 어겼지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송합니다.
2,3절에 시인은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시자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님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감사한다”는 말로 번역한 단어는 ‘찬송한다’는 의미도 있고, 특히 ‘고백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찬송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찬송은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바르고 철저하게 깨닫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136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바탕에 죄에 대한 고백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하나님”과 “모든 주들 위에 뛰어난 주님”이라는 말은 자기들의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비천한 데서 구원하신 주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랫말입니다. 주님의 신실한 사랑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입니다.
2. 창조와 하나님의 인자하심(4-9절)
4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대체로 4-9절은 창조의 일을 말하고 10-25절은 구원과 돌보심을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여러 이미지들이 서로 교차되며 창조와 구원을 긴밀히 연결시킵니다. 4절에 “큰 기적”은 창조뿐만 아니라 구원까지 모두 포괄합니다. “기적” 혹은 “기이한 일”은 주로 출애굽의 구원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됩니다(출 15:11; 34:10; 시 78:4, 11-12 등).
시인은 하늘과 땅(5-6절), 낮과 밤(7-9절)을 들어서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물 위에 펼쳐 놓으셨습니다. 큰 빛들을 만드시되 해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달과 별들이 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점은 창조의 일을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언약의 사랑인 “인자하심”(헤세드)와 연결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구속주이심을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여호와께서 바로 천지의 창조주이심도 알려 주셨습니다(창 2:4).
우리는 땅을 물 위에 펴신 주님께서 물로 표현된 혼돈의 세력을 모두 제압하시고 주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우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큰 빛들을 지어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이 경험하는 이 어두움도 모두 다스리시고 계심을 굳게 믿습니다. 아무도 해가 뜨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언약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것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3.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10-22절)
1) 출애굽과 광야 생활(10-16절)
10-12절에 시인은 먼저 애굽의 장자를 치신 사실을 노래합니다. 바로가 완고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장자를 치셨습니다(출 3:19; 6:1).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원수의 나라에 대하여 친히 전쟁을 수행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13-15절에 홍해를 둘로 가르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마치 홍해가 괴물인 것처럼 “홍해를 두 동강으로 나누셨다”고 노래합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그리로 지나가게 하셨지만 바로와 그의 군대는 홍해에서 몰살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일도 그 안에 포함하여서 찬송하였을 것입니다.
16절에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을 찬송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자마자 그 언약을 파기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진노 중에 모세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이렇게 자신을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이후로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시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 가나안 정복과 기업을 얻음(17-22절)
17-20절에서 아모리의 임금 시혼과 바산의 임금 옥을 죽인 일을 기록합니다. 요단 동편의 비옥한 고원 지대에서 다스리던 그들은 “존귀한 임금”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성읍에 높은 성벽이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신 3:5) 하는 강력한 나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진멸하였습니다(신 3:3, 6).
신명기 21장에서 시혼과 옥을 정복한 바로 앞부분을 보면, 백성들은 식물과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고 만나에 대하여서도 “이 박한 식물”이라고 하면서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지 않던 그 백성을 불뱀으로 심판하시고 놋뱀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두 왕을 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높이 찬송한 것입니다.
22절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은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 종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종으로 살도록 그 땅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 언약의 땅을 상속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언약도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높이 노래하였습니다.
4.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시는 하늘의 하나님(23-26절)
시인은 마지막 네 절에서 지금까지 다룬 내용을 역순으로 요약합니다. 23-24절에서는 비천한 데에서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 시편은 포로기 이후에 지어진 시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역사 배경에서 읽으면 “비천한 데”라는 말이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옛적에 출애굽의 구원을 베푸신 여호와께서 지금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바벨론 압제의 비천한 데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찬송하는 것이 됩니다.
25절에서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공중의 새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찬송합니다. 이제는 다른 우상을 찾아가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회개의 다짐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3절에서 세 번 반복된 찬송을 여기에서 네 번째로 하면서 시를 마무리합니다. 천지의 창조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바라면서 이 시를 마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창조와 구속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당시에 당하는 포로 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일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시편을 부르는 사람을 위한 일임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참된 인자하심이 밝히 드러났습니다(요 1:14).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일은 오늘날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성숙시키시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롬 8:28-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이 시편을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고백하는 것은 교리적인 진술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비천한 데에서 구원하시고 또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에서 믿음의 실질이 드러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의 건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고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해 주시길 기도합시다.
오늘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님 뜻을 이루는 하루를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요즘 나의 일상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 내 삶의 어려움과 필요를 간구합시다. 그분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먼저 감사 찬송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1,2,3,26절, “감사하다(야다)” = “죄 고백한다”
“감사한다(야다)”는 단순히 무엇을 받고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찬송한다”는 의미도 있고, 특히 “고백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용례들을 보면 죄를 고백하는 데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자복”한다고도 번역되었습니다.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레 5: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이 죄를 자복한다는 말과 같은 단어라는 점은 우리에게 진정한 찬송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찬송은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바르고 철저하게 깨닫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복이 없으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도 매우 피상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죄책감에 침울하거나 슬퍼하는 모습만 보여야 참된 찬송을 드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136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기저에 죄에 대한 고백이 깔려 있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참고>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창조와 구원의 밀접한 관계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창조 언약을 구원과 밀접히 연결시켜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5-16) 하는 새 언약을 전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그것을 낮과 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 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렘 33:25-26)
예레미야는 다윗과 세운 그 언약이 파기된다면 하나님께서 낮과 밤에 대하여 세우신 언약도 파기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달이 뜨는 것은 하나님께서 밤과 낮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기 때문이므로,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언약 또한 지키실 것을 그들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의 모범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이러한 순서가 암시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창조의 사실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어서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고백도 무의미함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 유튜브에서 “정영철 시편 136편”을 검색해서 들으며 연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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