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법첩을 손에 잡는다. 이리저리 훑고 이것도 모자라 고문 진보 속 문장을 샅샅이 살핀다. '묵장보감 ' 책장이 넘겨질때마다 메모지에 담기는 단어 개수가 늘어난다. 해마다 이맘때 겪는 나만의 전투다. 이십 여 년째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맨다. 그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투덜거리는 소리가 현관을 넘어 문밖으로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라 문구 준비를 한다. 예전에는 해가 바뀌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례행사 중의 하나였다. 이제는 어쩌다 행하는 일이라 낯설기까지 하다.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면 몰라도 웬만한 경우는 존재 자체도 멀어진 일이다. 화선지가 문구 규격에 맞추어 준비되고, 정성스럽게 벼루에 원을 그리며 먹을 간다. 값이 나가는 먹일수록 그 자체의 향이 특별하다. 묵향이 이렇게 새롭게 다가올 수가 있을까. 작은 벼루는 먹물이 튈까 봐 조심스럽다. 예부터 먹은 힘을 빼고 갈아야 하기에 ‘병약한 사람이 갈아도 된다’했던가. 조급하면 벼루 근처가 온통 까만색으로 칠이 된다. 준비하는 과정이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먹물을 가까이하면 가까이할수록 검게 될 수 밖에 없다. 평범한 진리에 닿아 있다. 본래의 뜻과는 거리를 둘지언정 다른 방책이 있기나 할까. 선택한 문구는 여러 서체로 조형미를 견주어 본다. 예서와 행서가 으뜸이다. 간혹 전서와 초서가 선택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글씨는 예서나 행서이지만 멋은 행초가 어울린다. 삼십년 이상 서예에 빠져 먹과 붓으로 화선지 빈 면을 수없이 채워 나왔다. 낙관 문구가 자리 잡고 두인과 아호를 눌러 음양각으로 드러나면 완성이다. 많이 만들때면 일이백 장은 기본이다. 몇 날이 걸린다. 봉투와 우표 값도 제법 든다. 몇 차례 나누어 우체국으로 달려가 단체 발송을 하기도 했다. 새해에 맞추어 상대방이 받아볼 수 있는 여유를 두고 보낸다. 나의 두 번째 일이 기다린다. 우편물을 받은 이들이 문구의 설명을 요청한다.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알려달라는 부탁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설명서를 함께 넣어줄 것을 당부한다. 가끔은 우스개 말로 그래야 통화도 하고 아는 채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냐며 농으로 받아친다. 종이에 옮긴 문구는 우편으로 보내기 전 사진으로 담아 나의 카페에 흔적을 남긴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스로 붓글씨를 쓰기 시작한 초기 것과 지금의 글은 기교에 차이가 많음을 비교한다. 성장하고 다듬어졌음을 체감한다. 문구는 매년마다 다르게 정한다. 이왕이면 의미가 긍정적인 한해를 시작하는 내용이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반복하여 화선지에 먹물을 채워 나간다. 차츰 게을러져 쓰는 장 수가 줄어든다. 유행에 뒤질세라 한 두 장만 만들어 사진으로 사회 관계망으로 전파시킨다. 출강하는 곳의 몇 사람에게 한 획 한 획 다듬은 문구를 적어 직접 전달을 한다. 어떤 사람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라며 목소리가 높아지고 서체와 뜻을 묻는다. 서예가 관심의 대상이다. 또 어떤 이는 필체가 대단하다며 감사의 인사를 거듭 보낸다. 고마움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서예를 시작한 즐거움이 높아지는 때다. 글 쓰는 일 보다 문구 정하는 것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온전히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고전이나 관련되는 책에서 추려내어야 한다. 번거로운 작업이다. 이 또한 애정이 담긴 과정이다. 나의 카페 사진첩에 올려진 새해 인사장 문구를 찾아 의미를 되새김 한다. 새해에 연하장을 받아 보거나 써 본 적이 있는가. 한 획이 그어질때마다 내 글을 받고 의미와 예술성에 빠져있을 상대방을 떠올린다. 상업적으로 인쇄된 용지에 몇 글자 적는 것도 이제는 흔적을 감추고 사회 관계망이 자리하였다. 쉽고 편한 것이 퍼져나가 상대방의 혼이 담긴 결정체는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짧은 시간 속에 우리 사회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추구하는 가치와 별개로 사라져 가는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어쩌면 달라지는 세상만큼 없어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현상들은 사회 전체를 보여준다. 예술적인 감상은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성은 그 사람의 밑바탕을 채워 안정적인 조직으로 이루어 나가는 주춧돌이다. 내가 혼을 불어넣어 완성하는 결정체가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정을 불러오게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 아닌 타인에게 즐거움과 환호를 자아내게 만들어보자. 내가 가진 취미 생활이 남들이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날을 넘어 또 하나의 연하장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