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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차 백두대간 산행
지리산 종주
성삼재-천왕봉 : 28.13km 천왕봉-중산리 접속구간 : 6.8km
산행시간: 14시간 20분
오! 지리산
산행이 늘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는것은 산과 나 사이에 걸음이 만들어 주는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산길이 흐른다. 어둠이 빠져나간다. 내 발목 아래에 소복이 떠다니던 아침 연무가 물처럼 흘러간다.
이 도저한 흐름의 세계를 관통하며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큰 부피의 설레임을 뉘라서 알까?
기록을 위해 산행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기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나를 이겨가면 잃을것이 더 많을 터인데.
몇년 전 을숙도 마라톤팀을 따라 지리산 종주를 해 본 경험이있다. 걸음이 늦은 나를 위해 특별히 페이스메이커를 한 분 붙여주었다.
그런데 어찌나 그분이 나를 다그치던지 종주는 할 수 있었지만 어찌나 마음 고생이 심했던지 그날 이후 절대 산을 타지 않겠다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심지어는 산을 닮은 유부초밥도 먹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 만큼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늘 점심으로 유부초밥을 준비했다. 나를 몰아 세우던 페이스메이커를 대신해 이해심 많은 우리 강철의 후미조가 내 앞 뒤를 맡았다.
즐거운 산행, 설레는 산행이다. 목표는 14시간. 완주를 위한 최선 외에 내가 준비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낭을 줄였을 뿐.
Good Luck Poll !!!
04:34
03시 14분 성삼재를 출발하여 노루목 가는 길에서 여명을 맞이했다.
삼도봉에서 일출을 맞고 싶었지만 타 산악회에서 온 산꾼들에 갇혀 시간에 맞추지는 못했다.
모처럼 걸음은 순탄했다. 땅멀미도 덜했고 맑은 날을 예고하는 하늘빛만큼 마음도 가벼웠다.
05:36
지리산의 장엄한 운해
삼도봉에서 오랜만에 회원님들 사진을 찍었다.
05:57
토끼봉 가는 길
지난번 산행 때 토끼봉 가는 길에 이미 힘이 고갈되어 애를 먹은 기억이 있는지라 토끼봉 가는 길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어라,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힘이 들지 않았다. 조금 더 가면 본격적으로 힘든 구간이 나타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길에대한 의구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억은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것만 기억되나보다. 아니면 그만큼 내 산행 실력이 늘어난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도 도와주는것 같다.
숲의 상처들
태풍 볼라벤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지리산. 곳곳에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이지만 이제 그 상처도 한낱 풍경일 뿐, 아픔이 아픔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용서와 체념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온통 상처 투성이일것이다 숲이 복원되듯 마음의 숲을 일구어야한다. 상처를 덮는 마음으로.
뽀얀 연무의 베일 너머로 수줍게 능선이 흘러간다. 느린 흐름의 산들이 아침 안개 사이로 이정표처럼 오롯이 떠오른다.
삶의 목표가 저 산들처럼 뚜렷한 것이라면 비교당할 일도 누구를 부러워 할 일도 없을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세상을 보는 시야로부터 욕심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일이다. 더 담백한,더 소박한 삶을 그리워하는것이다.
길을 걷는 내 마음 또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산을 걸을 때처럼 산을 내려가서도 한결같이.
연하천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지만 시장기를 느껴 길가던 중에 아침을 먹었다. 시장을 느낀다는것은 내 오장육부가 원활히 활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장기이다. 불현듯 연하천의 씨알굵은 똥파리들이 생각났다.
07:58
연하천에서 식수를 보충한다. 물은 한결같이 시원했다. 지리산 산행의 가장 큰 매릿은 물이 풍부하다는거다. 그래서 비상 식수외에는 물통을 무겁게 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게다가 오늘은 행동식만 간단히 지참한 관계로 배낭이 전례없이 가볍다. 이처럼 사소한것 하나하나가 장거리 산행에 많은 도움을 준다.
동의나물
오늘은 후미대장이 산행에 참가하지 않아 은수씨가 임시 후미대장이 되었다. 무전기를 찬 모습이 참 당당해 보였다.
후미대장답게 열심으로 후미 대원을 챙겨 오시느라 평소 걸음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것 같았다.
연하천에서 물을 보충하고 좀 기다리자 후미가 도착했다. 노란 동의나물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많은 야생화를 보고도 시간에 쫒겨 그냥 지나왔는데 모처럼 시간이 나 야생화를 담았다.
나도 옥잠화
대기가 안정되어 증기가 산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버린 탓에 멋진 지리산 운해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두터운 가스층으로 말미암아 시계가 좋지않은 법인데 오늘은 조망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세번째 종주길에 마침내 지리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것이다. 산이란 역시 푸념없이 기다리는 자의 편이다. 모름지기 좋은 산꾼은 산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한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산으로부터 사랑 받는 날. 모성을 느끼는 날.
지겨운 산길에는 음담만큼 좋은것이없다. 남자 셋이 걸으면 언제나 질펀한 이야기들이 끼어든다. 패설이 바닥난 산꾼들이 모처럼 신령스런 바위 아래에 자리 잡아 도를 닦는 흉네를 해 보인다. 영락없이 부처님과 협시보살이다.
지리산이 누워있다. 세잔의 정물처럼. 서둘것 없는 순종의 모습으로...
서둘것 없다는 생각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이미 내것이 된 그림을 보듯 산을 보게된다.
지리산 종주 세번째를 맞는 종주길이지만 지리산은 늘 두렵고 서글픈 존재다. 몇발을 걷다보면 어느듯 외롭고 작은 길 나는 늘 홀로 남겨진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다시 읽는 오래된 책처럼 모처럼 즐겁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 살을 비비고 사랑하는 사람의 긴장된 얼굴에 입술을 맞추는 설레임으로 그런 길을 걷고 싶다.
천왕봉과 중봉이 마주 보인다. 멀리서 보면 일직선 상의 능선길같아 보이지만 여기서 보면 능선이 역 S자를 그리며 크게 휘어짐을 알 수 있다.
천왕봉이 일직선 사에 놓일려면 아직도 먼 길을 가야한다. 그 먼길의 시작이 벽소령이다.
덕평봉 아래에 벽소령 대피소가 아가의 첫 아랫니 처럼 예쁘게 보인다, 내 첫 지리산 종주 산행 때는 그 벽소령 가는 길이 얼마나 멀게만 느껴졌던지. 지금도 벽소령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지금 벽소령 가는 길에는 함박나무꽃이 피어있을까? 누님이 생각난다.
내 누님은 물론 함박나무 꽃처럼 희거나 고상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누나가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누나들은 함박꽃처럼 희고 넉넉한 품성을 지녔을까. 외롭게 떨어진 꽃잎들. 멀리 헤어져 살아야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함박꽃 꽃잎마다 누님의 얼굴로 담겨있는 모양이다.
지리산이 좋아 수도 없이 지리산 계곡을 찾아 오르거나 지리산 종주를 몇번이나 하였다 해도 또 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것이다.
그 사람들 각자가 다 이유 하나쯤 지니고 있겠지만 한결같이 지리산에 미쳐봐야 그 뜻을 알게된다고 한다.
겨우 백두대간 마루금에 올라선 나를 보고서도 집에서는 산에 미쳤다고 말들 하는데 제법 산꾼이 된듯한 나도 느끼지 못하는 그 미침의 경지는 얼마나 높은 단계일까?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시인이 되어버린 시인을 나도 알고 있지만 한 때 지리산에 미쳐 산 적이 있다는 사람들을 근자에 만나보면 그 미침의 결과를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미치도록,사무치도록 지리산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다 이제 비로소 지리산을 빠져나온 그 사람의 삶 중에 지리산은 과연 어떤 의미로 자리 잡았을까?
산을 통한 삶의 변화, 그 미침의 기억이 마음 속 광기를 증폭시켜 혁명처럼 凡事 를 뒤바꾸는 일. 그것이 쉬운가?
쉽지 않다고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침이 아니다. 다만 허풍이요 허세일 뿐이다.
미침은 오로지 젖는것 그렇게 젖은 채 살아가야 진정 미친것이니까.
09:48
벽소령을 지나며
동의나물
벽소령을 지나자 오래된 기계의 기름때처럼 걸음에 권태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런 권태감이야 말로 산행의 활력을 저해하고 행복감을 갉아먹는 존재다.
행복이라! 행복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한다는것이 이리도 힘들까? 마치 보디빌더가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더운물 목욕도 삼가하는것처럼 늘 행복을 저해하는 대상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행복이라는것은 꽤 관리비가 많이드는 귀찮은 존재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들은 이토록 행복을 갈구하는걸까 행복은 아편인가?
행복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는 행복을 과연 무엇이라 표현했을까.
행복이라는 단어는 사실 수입품이다. 행복이 대중의 언어가 된것은 1789년 저 유명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공리주의자 벤담의 덕분이다.
오직 신으로부터 일방으로 공여받던 happiness가 민중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평범한 대상이 된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번역하면서 아시아에서는 1860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자 한성주보에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낱말이 실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강박적으로 사용하는 이 행복의 역사도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않는다.
Are you happy?
천왕봉 7.2km
칠선봉
칠선봉의 일곱 봉우리는 명확해 보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냥 육지 거북한마리가 더운 여름날 머리를 고추세우고 지나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설마 저 봉우리를 넘지는 않겠지?" 산길을 걷다보면 좋지 않은 예상은 대게 적중하기 마련이다. 저 봉우리를 넘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저 멋대가리 없는 봉우리 하나 비껴 간다고 대간길을 걷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넘을테면 넘자는 각오로 봉우리 향해 나아간다.
칠선봉에서 바라 본 반야봉쪽 풍경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잔하며 한가롭게 음악을 듣고 있는 기분 그대로이다.
감미롭고 경쾌한 음악이라면 좋겠다. 생활에 적당한 자극이되고 모처럼의 휴식에 의미와 충전을 가져다 줄 음악.
바이올린의 신이라는 사라사테의 '로만자 안달루차' 라면 어떨까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 로망스가 묻어나는 이 매혹적인 춤곡을 흥얼거리며 산길을 걷는 기분을 상승시켜본다.
12:00
칠선봉 오르는 계단 길
오늘 우리의 상남자 남양씨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어제 먹은 삼계탕이 문제가 있어서인지 벌써 세번이나 설사를 하였다.
산행을 힘들게 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 설사병이다. 가벼운 감기야 몸살이 아닌 다음에는 산행 자체로도 얼마든지 치유된다.
하지만 설사를 통해 수분과 전해질을 소모하고 나면 근육에 힘이 없어지고 갈증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게된다. 특히 계단을 줄기차게 오를 때 더 그렇다.
오늘 내 페이서 메이커를 자임한 남양씨지만 이 계단길만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럴 땐 무조건 쉬면서 몸을 추서리는 편이 제일이다. 계단을 오르던 중 내가 먼저 널부러졌다. 시원한 물을 나누어 마셨다.
멀리 톱니를 닮은 촛대봉이 보인다. 도저히 촛대란 이름이 어울릴것 같지 않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그리 보이는 모양이다.
세석의 넓은 터에는 덧없는 봄날이 무르익었다. 춘궁을 비웃던 그 도도한 봄볕도 그냥 물러나기 싫었던지 철쭉을 희게 보내어 세월을 배웅하고있다. 뙤약볕에 목덜미가 까맣게 타오른다. 좀 쉬어야 할까 보다.
멀리 천왕봉이 사춘기 아이들의 첫 성징처럼 겸연쩍게 솟아오른다.
천왕봉을 사실화로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늘 구름에 갇혔거나 흔듯 흔듯 가려진채 쳐다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천왕봉 본 모습 그대로의 봉우리다. 너무나 멋지고 우람한 보습이다.
지리산을 남성적이니 여성적이니 하는 빌미를 사라지게 하는 모습이다. 위풍당당한 모습. 남자인 나라도 안기고 싶은 부인할 수 없는 건강한 남성상이다.
12:27
세석 봄빛 속으로 나아간다. 물이 충분해 세석 산장에는 들러지 않기로 했다.
시간 단축을 위해 그러기로 했지만 막상 점심을 먹기 위한 해가림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겨우 자리를 잡고 은수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아 미숫가루에 인절미 몇개를 먹고 길을 나섰다.
세석 습지의 야생화
왜갓냉이풀과 동의나물
사랑의 긴장이 사라진 오후처럼 세석평전에 화사한 웨딩드레스의 흰꽃이 무리져 피어있다.
이름도 어려운 왜갓냉이풀이란다. 가까이 가서 볼려했으나 온통 금지 투성이다. 멀리서 사진 한장 찍는다.
가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봄빛이 공연히 날파리처럼 몸에 붙어 마음을 시들게 하는데 詩를 닮은 꽃 하나가 내게 떨림을 주고 간다.
얼키고 설킨 사람들의 길섶에서 쉽게 내밀지 못한 마음 한쪽을 부끄럽게 내민다.
13:14
촛대봉 정상의 촛불들.
저기 앉아 산을 보고 하늘을 보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 법 칠선봉 너머 남아있는 잉여의 봄빛을 뒤로 우리는 떠나간다. 이제 언제 이곳을 새삼 들리리. 청춘의 지리산이여.
촛대봉 지나 소로를 빠져 나오자 삼신봉과 연하봉을 등에 엎은 천왕봉이 딱 오촌 당숙의 거리로 앉아있었다. 산이 혈연의 친숙함으로 정겹다.
보이는 산은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대간이 가르쳐 준 지혜다. 하지만 어떻게 오를것인가가 문제다.
서두르지 말자. 두번 다시 오지 않겠다는 절대 신념으로 산을 오를것이다. 내 피붙이처럼 산을 대할것이다. 시간에 쫓겨 산을 훑어가는 바보가 되지 않을것이다. 한번 걸은 발자국이 영원한 화석이 되어버린 고성 상족암의 공룡 발자국처럼 그런 진중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것이다.
행복한가?
신과 결별한 인간은 고독해졌다. 고독한 인간은 약물처럼 행복을 남용했다. 만인 평등의 민주주의를 맞은 인간이 손에 쥔것은 신의 영광이 아니라 고독한 행복이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것은 민주주의가 만든 착각일 뿐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행복의 열망과 불행한 현실의 괴리를 메워 줄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행복을 찾아가는 자
왜 우리는 이런 고생을 통해 행복을 찾아갈까? 이 고통의 끝에 과연 행복이 존재하는가?
오늘 우리가 이룬 완주의 업적이나 성취가 곧 행복은 아닐것이다. 그럴수록 행복은 더 힘든것이 된다. 이런 행복은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 어떻게 행복을 느끼기 위해 매번 더 힘든 길을 나서겠는가?
행복은 불행과 묶음 처방이다. 불행은 행복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행복의 그림자를 몸소 지울 때 불행의 두려움도 사라지는것이다.
행복을 찾으려 애쓰지 마라. 행복이 없다면 불행도 없다.
사촌의 거리로 다가온 천왕봉
먹이를 주지않아도 되는 물고기처럼, 이미 습관이된 아내에 대한 사랑처럼 지리산은 이미 내게 묵은 장맛과 같은 산이다.
끓어오르는 풋사랑이 아닌 그 오래된 익숙함으로 곁에두고 싶은 산이다.
마치 서가에 빼곡 꽂힌 책을 보듯 천천히 산길을 즐기는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하다.
지나 온 그 많은 산, 그 많은 의미들이 지금 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지리산은 이미 읽은 책이다.
길이,나무가,바위가,봉우리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수많은 단어가 되었듯 이제 그 의미로 점철된 글들을 다시 모아 새로운 의미로 삶을 재해석하고 싶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연하봉
잘 꾸며진 정원을 걷는 기분이 든다. 듣기 좋은 거짓말보다 더 달콤한 풍경. 그 풍경을 여과없이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연하봉을 가리는 은근한 구름도 어색하기만한 잿빛의 그늘도 없는 민낯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다.
장식이 필요없는 아름다움, 천왕봉의 장엄함과 숭고함을 협시하는듯한 묘한 여성성이야말로 연하봉의 매력이 아닐까.
작위적이지는 않지만 작위이기에 더 아름다운것이 있다.
소설이 그렇고 예술이 그렇다.
저 자연스러운 작위의 소로. 한줄기의 허락. 갈증. 카텐자. 아! 그 모든것.....
산을 겨우 넘는 길위에 죽은 나무가 눈엣가시처럼 서있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그대로다. 죽어 부처가된 등신불처럼 언제나 고사목인 지리산 죽은 나무들
길이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길가에는 이제야 비로소 핀 봄꽃이 가득하다.
나는 죽은 나무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봄꽃인가
산은 가장 깊고 가장 거친 곳에서 나오는 고통의 신음소리.
홀로 길을 이겨내는 일이 어쩌면 이토록 외롭고 힘겨운가
오늘 산행이 어떻하였는지 사람들은 드러내려하겠지만 나는 숨기고 싶다.
하지만 숨기고 감춘다고 다 능사가 아니다. 세상에 드러 낸 강한 자신이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는 강해고 싶지 않다.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자신을 파멸하는 무기요 폭력일 뿐이다. 더 강해지고 더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초라한 마음의 그림자다.
14:24
장터목
장터목에 앉아 마지막 전열을 정비한다. 은수씨 일행을 기다릴겸 아예 퍼져 앉기로 했다.
옆에서 마시는 콜라가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유혹에 못 이겨 콜라 한잔 사 마시려 했으나 불행히 지갑이 배낭 속에 있었다.
그걸 꺼내기 싫어 누가 콜라 사 줄 사람 없는 지 물었다. 상철씨는 돈은 있으나 그 쪽도 나와 마찬가지로 꼼짝도 하기 싫다고 했다.
이때 명기씨가 선뜻 나서 콜라를 사주었다. 늙어 받는 대접이기는 하지만 미안하기 짝이없었다. 감사의 눈물을 대신해 콜라를 마셨다.
노고단 코재보다 더 급한 비탈길을 올라 제석봉 가는 길에는 천상의 정원이 걷다 지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길은 반드시 천천히 걸어야한다. 산티아고의 길처럼 그렇게 걸어라고 있는 길이니 마땅히 천천히 걸어야한다.
이 길이 편하다고 빨리 걸어버리는 자는 힘만 세고 머리는 비어있는 깡통이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를 모르기에 같은 실수를 무한 반복하게된다.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길 가슴을 통해야만 비로소 이르는 길 바로 그런 길이다.
14:50
가슴을 향한 고별곡
맑고 서늘한 서정주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브장송에서의 고별 연주처럼 디미뉴엔도로 멀어지는 나무들의 음향을 들었다.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 높은 산으로 모인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이라."
지리산을 오르는 나의 심령은 충분히 가난한가. 그렇다! 삶의 디미뉴에이션을 이해했다면 천국 또한 그렇게 멀지않았으리라.
15:17
천왕봉을 쉽사리 오르지 마라 열번을 휴식하는 일이 있어도 또받 또박 올라라.
거칠것 없이 맑은 날. 산을 오르는 내 등 뒤의 배경 또한 그렇게 아름답다.
세상을 통해 자아 실현을 이루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아를 배신하지 않는 노력을 계속하다보면 역설적이게도 자아가 실현된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未生에 나오는 글이다. 자아를 배신하지 않으려는 오늘의 이 노력을 통해 내가 나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한 걸음이 되기를 기원하며 오늘의 승리를 자축한다.
15:39
16:24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절, 법계사.
法界
법계의 무진연기란 세상만물의 인연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연이 곧 조화요 통일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다면 저것도 없다"는 인연경의 말씀처럼 행복이 없다면 불행도 없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행복을 놓아버린 마음의 뒤란이 무척 쓸쓸하고 허전하였지만 욕심을 버린 마음처럼 홀가분했다.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어떻게 살까. 창문 밑에서 울어대는 파랑새를 또 찾게 될까?
Good Luck Poll !!
행복을 찾기보다 행운을 기원하는 편이 더 낫다.
17:34
- 후 기-
내 전부였던 행복이여!
나를 일깨워 준 산길이여!!
나의 근본이 된 세상의 모든 인연이여!!!
오늘의 숙려를
법계의 산에 바친다.
Romanza Andaluza Op.22, No.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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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지어는 산을 닮은 유부초밥도 먹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한참 웃었습니다. 재미있고 즐거운 글들~ 항상 산행후 모든 걸 정리하여 주십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한동안 유부초밥 안먹었답니다 ㅋㅋ
이번 지리종주는 내가 poll 님의 페이서 메이커가 아닌 poll 님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무사히 종주 할수 있었습니다.
항상 힘이 드는 백두대간길 이지만 특히 이번 지리종주는 평생 잊을수 없는 산행 이었습니다.
건강관리는 "필수" 라는 생각을 다시 가지게 만듭니다.
"강철의 후미조" 몸 관리 잘 해서 무사종주 합시다.......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얼른 몸 회복하셔서 주말에 건강한 모습으로 뵙도록 합시다.
여러분이 계셨기에 후회없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oll님!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속 사진처럼 참 정겹습니다.
함께한 대간길이지만 사진으로 만날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늘 즐산 안산으로 힘차게 걸어 가시길 소원 드립니다.
사람 이라면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겠지요
폴 님의 글에서 이렇게 많은 행복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니 덩달아 행복을 느낍니다
완주 하는 그날까지 이번 산행처럼
기분 좋은 산행 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산행이 즐거우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모처럼 날씨도 좋아 어제 처음 종주하신 분들께는 축복이겠지요.
역시 산이 사람을 사랑해야 이런 행운을 만나게 되나봅니다.
감사합니다.
폴님...
지리산종주 수고했습니다..
예술작품이 좋아서..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산행 후에 늘 멋진 작품 기대를 해 보구요...
다음 한계령 점봉산 멋있게 다녀오세요...
즐감했습니다...
아! 지난번 선생닌께서는 다녀오셨으니까 이번에는 안 오시겠네요.
작품은 무슨...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참 아쉽습니다만 어짜피 작품 찍을것도 아니니 여기서 만족해야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