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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4일 월요일 <십자가의 죽음, 활용의 개념과 실제>
[김용호] [오전 2:26] 한휘석 형제와 통화 끝^^ 이제 취침합니다. 미리 화이팅~!!
[김용호] [오전 7:14] 굿모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로운 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멋지게 사용합시다~!!
그동안 제자들의 수다를 열어보지 않은 사람이 휘석형제님이 맞네요. 폰을 잃어버려서이기도 하고 잠수도 탔답니다. 많이 힘들어 하더군요.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와서 답을 찾아보라고 권했습니다. 우리는 답을 찾았으니 그 답이 형제님 자신에게도 답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다시 가져보라고 권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진호] [오전 8:17] 좋은 아침입니다. 그랬군요. 휘석형제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김용호] [오전 8:18] 감사합니다.^^ 어제 통화하면서도 우리가 할 일은 기도뿐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더군요.
[예레미야] [오전 8:20]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김용호] [오전 8:22] 감사합니다~^^
[정진호] [오전 8:28] 어제 권사님의 외발타기 성공은 앞으로 우리에게 진행될 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꾸준한 연습의 결과가 외발타기 성공으로 열매 맺듯이 우리가 십자가에서 더 죽는 것만이 우리를 온전한 새로운 피조물로 인도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사르크스가 확실하게 죽기를 기도합니다. 외발 자전거 타는 노력은 내가 해야 하지만 십자가에서 우리 사르크스가 죽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해 주시는 게 차이점이겠네요. 다만 우리는 우리 사르크스가 죽게 해 달라고 소망하고 간구해야 하는 노력을 해야겠지만요.
[김용호] [오전 8:38] 예. 소망을 굳게 붙들고 진행하는 회개와 간구는 우리의 몫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날아오는 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슈퍼내추럴한 칼과 내추럴한 칼이 그것입니다.
슈퍼내추럴한 칼은 성령체험입니다. 숨이 넘어가다가 멎지요.
내추럴한 칼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에게서 날아오는 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지체가 일부러 칼을 날리는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떤 지체가 웃는 모습이 나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내 싸르크스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진행은 양육과 권면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는 것이지요. 양육과 권면이 왜 비수가 될까요? ‘지가 뭔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권면이 비수로 변합니다. 선택의 순간이지요. 잠잠히 그 비수를 맞고 권면하는 지체에게 감사를 하면 내 싸르크스가 죽을 것이고 뛰쳐나가면 기회가 지나가 버립니다. 환난이 계속되지요. 환난이 계속된다는 것은 저주가 임한다는 것이 아니고 육에 속한 자의 정상적인 삶이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고해니까요.^^
여기서 의문이 하나 일어나지요? 왜 꼭 공동체의 지체에게서만 비수가 날아오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비수가 날아오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지요. 세상 사람들도 우리에게 비수를 던집니다. 하지만 그 비수는 우리를 괴롭히는 비수일 뿐 십자가에서 우리 싸르크스를 죽이는 비수는 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지체가 던지는 비수만이 나의 싸르크스를 죽이는 기회가 되는 이유는 나에게 비수를 던지는 공동체의 지체만이 내가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비수를 던지는 세상 사람은 나의 활용대상이기 때문에(비수를 맞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전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전도대상자란 아직 없습니다) 나의 싸르크스가 굳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 싸르크스가 그 사람에게 대응할 뿐입니다. 용서를 하든 인내를 하든 심지어 사랑을 하든 모두 내 싸르크스가 하는 것일 뿐이지요.
따라서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수를 맞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예외는 앞에서 말씀드린 성령 체험뿐인데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곤란합니다. 첫째는 부지하세월이어서 그냥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가 지치게 되고 그냥 끝나기 쉽습니다. 둘째는 극한의 환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살 직전까지는 가야 기회가 온다고 봅니다.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수를 맞는 것도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나 그렇다고 자살 충동까지 갈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이 쪽이 그래도 쉬운 길입니다.
[최윤주] [오전 11:48] 그럼 세상에서 비수를 맞고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즉시 회개를 하는 건 싸르크스가 죽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요?
[김용호] [오전 11:49] 환난의 누적 정도지요. 성령께서 우리의 싸르크스를 죽이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얻게, 즉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함이거든요. 개인 영성이란 조직신학적으로 종교적 엑스타시일 뿐입니다. 회개의 방향이 모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호] [오전 11:51] 내가 지난번 동흠 형제의 경우에 그 부분이 좀 명쾌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회개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의 관계에서요.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지 확인해 주세요. 뭐냐 하면 지난번 동흠 형제가 환란이 와서 자기 사르크스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서 잠잠히 죽기를 권했었고 동흠 형제가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하고 업무에 복귀했는데 복귀하자마자 자기를 괴롭혔던 대상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김용호] [오전 11:53] 예. 그랬지요. 그때 진정한 비수는 우리의 권면이었던 거지요.
[정진호] [오전 11:54] 이 때 지금 생각해보면 회개에 대한 나의 인식에 오류가 좀 있었던 거 같은데 뭐냐 하면 그래서 동흠 형제가 회개도 했고 그래서 동흠 형제의 사르크스가 그 때 적어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죽었다고 생각한 게 나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한 거예요. 즉 그 당시 동흠 형제가 회개하기로 결심하자마자 회개를 일으키게 했던 그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제 그 대상의 역할이 사라졌다는 것일 뿐 회개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동흠 형제의 사르크스가 죽는 일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동안 진행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 그 당시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 거에요. 즉 그 사건으로 회개는 계속되어야 하고 사르크스가 죽는 일은 무의식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김용호] [오전 11:58] 예. 그렇습니다. 또 중요한 점은 동흠 형제의 싸르크스가 죽는 과정은 목적이 순탄한 일상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구성원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만약 동흠 형제가 우리 공동체든 다른 공동체든 하나님의 나라 소속이 아니라면 성령께서 동흠 형제의 싸르크스를 죽이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실 이유가 없는 것이고 동흠 형제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엔 종교적 엑스타시에 의한 개인적인 평안함과 순탄한 일상생활만이 목적일 뿐입니다. 이것이 개인 구원, 개인 영성을 추구하는 서고 기독교가 빠져있는 함정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집단이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푯대가 아니면 성경의 약속은 성취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성취될 이유도 없구요.
[정진호] [오후 12:06] 내가 당시 헷갈렸던 것은 한마디로 한다면 우리의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동원된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사르크스가 죽었다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지요. 그 대상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발생한 거고 그래서 회개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 대상의 역할은 끝난 것이지만 내가 회개하기로 했다면 그 회개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 사르크스가 그동안 죽어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있게 될 거구요.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이 지체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 전도사님의 말씀이구요.
[김용호] [오후 12:07] 그렇습니다. 집사님은 내면적인 성취를, 저는 상황적인 성취를 말한 것입니다. 회개와 약속의 성취는 그렇게 두 면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두 면에서 그 진행 상황이 입증되어야 하지요.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 깊어져가는 것인데 모든 상황이 순차적으로 비수가 되어 우리 싸르크스를 점점 더 죽이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죽은 척 하는 놈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죽진 않거든요. 싸르크스의 죽음과 새로운 피조물로의 부활은 그래서 단계별로 진행된다고 누차 말씀드린 것입니다. 1단계에서, 2단계에서.....1000단계에서 심화 반복되는 거지요. 전체적으로는 일련의 심화과정이지만 내부에는 각 단계마다 도약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단계까지 진도가 나갔던 간에 공동체가 사라지면 진도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퇴보하게 되겠지요. 중세 수도원의 영성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의 중세 영성가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라는 현실이 없었지요.
그들의 책을 읽어보면 다른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엑스타시와 동일한 모습이 보일 뿐입니다. 그 정도 엑스타시는 요가 수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정도의 종교적 액스타시가 자신의 푯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뭐 어쩔 수 없구요.^^
결국 조직신학의 문제입니다. 성령 체험도 자신의 조직신학에 의해 해석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성령의 인도도 대부분의 경우 자기 조직신학의 푯대를 향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인지 귀신의 장난인지 자기 최면인지 모호해지는 부분이지요.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조직신학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조직신학은 성령의 역사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끝없이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자기 최면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그때에는 자기 야욕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지요.
영성운동과 진보기독교가 양쪽의 좋은 예입니다. 영성 운동은 인간의 육적 탐욕을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고, 진보기독교는 인간의 정신적 탐욕을 추구하는 함정에 빠진 결과지요. 조직신학과 성령의 역사를 크로스체크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양방향의 오류의 사례입니다.
[최윤주] [오후 12:50] 그럼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해주세요.
1. 세상에서 비수를 맞을 때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비참한 형벌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계기로서 사용된다. 즉 환란의 누적 그러나 이때 회개하는 것은 싸르크스가 직접적으로 죽는 건 아니다. 다만 죽게 되기를 소망하며 돌아서는 것뿐.
2. 그와 같은 소망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으나 아직 싸르크스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도 비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권면을 받아들이고 양육되어가는 과정 속에 자신이 사랑할 수 없었던 자를 실제로 사랑해야하는 실존의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내 싸르크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3. 세상과 다른 점은 세상의 비수는 회피가능하지만(자기보호본능)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하는가 아닌가로만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회피불가능하다.
[김용호] [오후 12:51] 오우~ 좋습니다.
[최윤주] [오후 12:52] 1번 세상의 비수와 회개에 관한 이해가 맞는지요.~
[김용호] [오후 12:53] 공동체가 삶의 현실이 되지 않으면 싸르크스의 죽음,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려는 지정의의 작동이 실제로 멈추어질 수 없습니다. 그 즉시 실제로 죽고 끝나게 되니까요. 싸르크스가 죽을 수 있는 상황은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정진호] [오후 12:55] 세상에서의 경우는 비수를 맞는다는 표현보다는 그 사건이, 또는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육에 속한 상태의 반응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 정도가 되겠지요. 그래서 고통스러워하게 되구요.
[김용호] [오후 12:56] 예. 활용의 현장에서의 비수가 유익을 주는 부분은 그것이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내가 육에 속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현장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만약 진행된다면 사회생활도 끝나지요. 활용의 사명이 아예 끝나버립니다. 인생이 끝나버려요.^^ 따라서 버틸 수밖에 없고 또 버티는 것이 옳습니다.
[정진호] [오후 12:58] 상대가 나한테 비수를 날리는 게 아니라 내가 비수로 인식한다는 표현이 좋겠네요.
[김용호] [오후 12:59] 그렇지요. 비수로 인식하는 것은 나 자신이까요.^^ 세상에서 움직일 때는 절대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면 안 되지요. 못 박을 수도 없지만요.
[정진호] [오후 1:02] 그 말씀은 선뜻 이해가 잘 안 되네요. 세상에서 움직일 때는 절대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면 안 된다는 것은 금욕적인 방법을 피하라는 말씀인가요?
[김용호] [오후 1:03]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면 상황에 지혜로운 대처도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좀 자세히 말씀드려야겠네요.
상황에 대처하는 주체는 두 가지가 있지요. 옛사람과 새 사람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후의 모습은 옛사람이 잠잠히 있고 새사람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이 활동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새사람이 아직 탄생하지 않은 과도기에 있는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옛사람이 상황에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면 상황에 대처를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니까요. 다시 말해 어차피 옛사람이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건 과도기의 상황입니다.
동흠 형제의 사례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그때 우리의 권면은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동흠 형제의 옛사람이 한발 뒤로 물러나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옛사람의 대처를 최소화하라는 권면이었고 주도권을 쥐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동흠 형제로서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권면이었음에도 잘 따라주었지요. 우리의 권면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동흠 형제가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이었고 그 후 상황에 대처한 것은 동흠 형제의 절제된 옛사람이었습니다. 현명한 옛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냉철해진 옛사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국 비수는 우리가 날린 것이지 학부모들이 비수를 날린 것은 아닙니다. 학부모들은 육적인 공격을 했을 뿐이지요.
그럼 이제 새사람이 대처하는 경우를 비교해서 말씀드리지요. 세 번째 믿음을 갖게 되어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람은 상황이 벌어지는 즉시 자신이 in Christ 상태에 있는지 점검합니다. 점검이 끝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전략을 수립하고 현란하게 상황을 요리합니다. 겉모습은 똑같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경우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1.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입니다.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에 따라 상황이 바람직하게 해결되는 방향에 대한 규정까지도 달라집니다.
2. 내가 즐겁고 평안한가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따라오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희락과 평안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을 합해서 설명해드리자면, 그 당시의 상황을 맞이해서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일이 무엇인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쪽으로 상황을 요리해나가게 됩니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도 하나님의 나라에 실제로 속해 있지 않으면 완전히 불가능한 모습이란 점도 핵심 사항입니다.
자신에게는 길흉화복이란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전도를 위해서 활용할 뿐입니다. 따라서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마주치는 경우란 없고 다만 활용의 기회만 만나는 것이지요. 모든 상황은 값진 활용의 기회일 뿐입니다.
다시 동흠 형제에게 돌아가서 당시의 동흠 형제에게 이런 내용의 권면을 했다면 그 권면이 유효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동흠 형제가 이해했을 것입니다. 동의도 했었을 테구요. 그러나 동흠 형제가 맞닥뜨린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혼란만 가져오게 됩니다. 몸이 안 따라주니까요. 옛사람이 지혜롭게 대처하는 데에 방해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이 가져다줄 수 있었던 최대 열매는 동흠 형제의 옛사람이 힘을 빼고 대처하게 함으로써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더 확신한 소망을 갖게 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섬기는 자들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동흠 형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김용호] [오후 1:44] 윤주 자매님의 2번과 3번은 정확한 판단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공동체에 속해있기 때문에 진행되는 일이고 공동체 안에서만 그 결과와 진보의 정도가 확인될 수 있습니다.
[김용호] [오후 5:28] 구약에서는 가나안 복지로 나타나는 기업, 유업이 그토록 중요한 개념이었고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삶이 핵심 중의 핵심인데 서구 기독교가 개인의 내세의 구원과 현세의 윤리 도덕적 삶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교리 체계를 만들게 된 것은 너무도 황당한 일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초기기독교와 중세 기독교는 국가교회라는 괴악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엉뚱하게 자유주의 신학이 나오고, 그 후 다종교 사회가 되면서 엉뚱하게 진보기독교가 나온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초기 기독교가 로마에 흡수되지 않았더라도 무슨 괴이한 기독교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 모두 괴이하기 때문이지요. 오로지 인간의 소원은 바벨탑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영원한 바벨탑을 세우는 것에 동원될 뿐이지요. 그 이름이 저승이든 극락이든 천당이든 관계없이 말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종교를 만들기 원하는 인간의 그 처절한 욕구가 다양한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기독교를 만들어 온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사와 교리사 연구에 있어서 인간의 시대 상황과 종교적 욕구가 어떻게 결합해 각각의 흐름을 만들어냈는가를 분석하는 노력을 계속함으로써 우리가 치밀한 조직신학을 수립해가는 과정에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또한 참고자료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연동흠] [오후 7:09] 당 짓기 문제가 왜 생길까요!
[김용호] [오후 7:10]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 짓기가 필수지요. 모두들 연약하니까요.
[연동흠] [오후 7:12] 저희 학교 기숙사동이 두개인데 사감선생님들도 처음에는 건물 구분 없이 잘 지냈는데 올 들어 당 짓기가 나타나고 게다가 아이들까지 당 짓기가 나타나면서 팀장 이하 부팀장 4명이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7:20] 편을 갈라서 상대편을 적대시 할 때 내가 속한 집단에 결속력이 생기고 그럴 때 내가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구요. 북한이 남한을 적대시하면 할수록 자신들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보수와 진보가 그렇게 적개심을 갖나 봐요.
[김용호] [오후 7:26] 적개심이 최고의 치료제고 영양제지요. 힘이 불끈 솟습니다.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라는 미래 소설에 보면 적이 쏜 미사일이라고 하면서 외곽에서 내부를 항해 미사일을 쏩니다. 가공된 적이지요. 적이 없으면 사람들이 심심해서 못 삽니다. 적이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도 거의 없지요.
[정진호] [오후 7:29] 물고기들도 차로 이동 중에 천적을 안에 넣으면 더 오래 생존한다고 하잖아요.
[김용호] [오후 7:30] 오~~~ 그렇군요.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본능이겠습니다. 더구나 일부러 적을 만드는 일까지 하는 것은 슈퍼컴을 가진 인간의 놀라운 잔머리라 하겠습니다.
[정진호] [오후 7:31] 당 짓기가 없는 공동체는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신비의 결정체네요.
[김용호] [오후 7:32]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악을 지적할 때 당 짓기가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사람 셋만 모여도 당이 둘이 된다는~~ 성경 말씀들이 이렇게 인간의 깊은 본능을 건드리는 말씀인데 그것을 윤리도덕 항목들로 보았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들이 성경 말씀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라기서의 이스라엘의 일곱 가지 항변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소통 불가의 현장인데 서구 기독교도 다르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종교적 본능에 근거한 첫 번째 믿음으로 신 앞에 나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연적인 결말이지요.
[임지웅] [오후 10:08] 시험 발표를 앞두고 두려웠던 문제가 '내가 과연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더불어 '과연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였는데요...제가 얼마 전에 봤던 일드(일본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변호사인 주인공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린 신이 아니야. 우리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야.'
흔히 변호사를 '고용된 총잡이'라고 비하해서 부르기도 하고, 변호사와 관련된 각종 규제 등에도 개인의 양심과 수임에 대한 언급들을 하고 있는데요...제가 아직 제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에 하고 있는 고민이라고 생각되지만...과연 내 개인적인 가치관과 배치되는 의뢰인을 만났을 때 - 예를 들어 아동 성폭행범- 그 사람을 변호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양심이나 가치관과 상관없이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할 변호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인지...당 짓기라는 주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시니 그런 고민이 다시금 머리를 울립니다.^^
[정진호] [오후 10:30] 지웅 형제의 고민은 아마 대부분 크리스찬이 고민하는 문제일 겁니다. 식당을 운영하는데 술을 파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도 같은 고민이고 나도 과거에 그런 문제로 여러 번 고민했었습니다. 예를들면 내가 미국에 남자팬티용 원단을 수출했는데 원단이 너무 야해서 이 원단으로 도대체 무슨 팬티를 만드는지 궁금했었는데 혹시 나로 인해 퇴폐문화를 조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영국에서 핫팩을 파는데 에로티카라고 부르는 섹스관련 상품을 파는 전시회에서 파는 문제를 두고 영국에서 일하는 후배와 논쟁 끝에 참가를 포기했던 적도 있고 몇 년 후 다시 참석한 적도 있습니다. 또 우리 큰애가 의공학을 전공하는데 자기는 성형관련 기구를 만드는데 보다는 기왕이면 장애인이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기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이 아빠에게 상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비단 크리스찬 뿐 아니라 비크리스찬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예를 들면 내 친구 아들이 미국에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내 친구가하는 말이 자기 아들이 하는 말이 자기는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서 아주 대견하게 나에게 말을 했었습니다. (내 친구는 기독교 신자였다가 결혼을 하기 위해 지금은 불교 신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뭐라고 말했냐하면 네 아들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아이들이 그런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은 네 아들만 유독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면 그런 생각은 대부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것은 인간의 가치이고 성경에서는 그런 인간의 가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인간의 가치, 의에 작은 미련이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의 행동강령 중에 외부를 향한 두 가지, 즉 전도와 활용 중에 활용의 의미를 특히 우리가 잘 알아야 하고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계속 고민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 카톡을 통해 지웅 형제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앞으로 자주 이야기하자구요.
[임지웅] [오후 10:59] 넵. 감사합니다.^^
[연동흠] [오후 11:01] 지웅 형제님! 교회에도 오세요!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네요. 요즘! 비둘기 같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임지웅] [오후 11:04] 넵. 곧 만나뵙겠습니다.^^
[정진호] [오후 11:04] 참 과거에 영국에서 집사님 장로님 하는 호칭을 쓰시는 분들이 대마초용 파이프를 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내 생각은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이유가 과거와 지금 그 내용이 다릅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