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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 자신을 아는 지식은 동일하다.”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을 알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을 모르면 절대로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 해도, 아무리 돈이 많은 재벌이라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나’에 대해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고2때 교회 연합으로 하는 여름학생수련회 때 교회를 처음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 사람의 시조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지? 부모님으로부터.. 그러면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님으로부터 태어났지.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님은? 그 조상으로부터.. 그 위는? 그 위는? 그러다가 성경을 보게 됐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는 아브라함부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심을 기록해 놓았고, 누가복음 3장23-38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그 위는, 그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나오는데 그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창세기 2장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왜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출세 성공하기 위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다 성공합니까? 다 박사 됩니까? 다 부자 됩니까? 그런 것들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별로 상관없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을 쥔다 해도 하나님 없이는 결코 나를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하면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여전히 제자리입니다. 그러면 ‘뭐하고 온 건가’ 싶어집니다. 당연합니다. 여행 간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심각한 질문에 뛰어들 때는 가장 먼저
“나를 창조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니 나를 찾기 위해서라면 여행을 떠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고 느끼는 만큼 나에 대해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그 인생의 최후는 허무뿐입니다. 옛날부터 동서양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과 종교의 구도자들은 끊임없이 있음(有) 즉 존재(存在)에 대해 연구하고 사색하면서 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인 인생(공수레 공수거)이니 그것은 무한(無限)이라’고 합니다.
유교의 장횡거는 ‘세상은 무무(無無)이니 무는 없는 것이 아니고 무는 무가 있는 것이다.’
노자는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만물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있음은 없음으로 말미암는다.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불교나, 유교나 노자는 있음이 결국 없음(無)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있음(有)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있음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육체를 입고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無)로 소멸하여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유(有)이시고 인간도 유(有)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 수 록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를 주님과 나와의 관계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와 질병을 담당하시고 십자가 사형 형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믿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 보혜사, 진리의 영으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없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다면 아무짝에도 쓸데없습니다. 붙어있는 것을 나무 접붙임으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나무를 접붙임에 있어서 물관, 체관이 있습니다. 물관은 물관끼리, 체관은 체관끼리 접목되어야합니다. 물관은 원줄기 나무에서 공급되는 수분과 양분을 접붙인 가지가 받아들여야 생명이 공급되어, 체관은 햇빛을 받으며 광합성 작용이 되어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물관과 체관이 바로 접목되지 않으면 가지는 죽어버립니다.
우리가 원줄기요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께 완전히 붙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빨아들여야 합니다. 이 성령의 은혜가 “수분”이고, 말씀이 “양분”입니다. 성도는 늘 이 영혼의 수분과 양분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붙어 있으면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따로 따로 하나가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된 일체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나는 누구인가?
주님과 하나 된 나, 새사람, 새 피조물 된 내가 참 나입니다.
주님과 떨어져 살아왔던 나는 거짓된 나입니다.
옛사람, 아담 안에 있던 나는 진짜 내가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녀 된 내가 참 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 된 내가 진짜 나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나와 참 나를 분별해야 합니다.
옛 자아와 새 피조물 된 내가 분별되지 않는다면 포도나무 예수님께 내가 붙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붙어 있다면 참된 평안과 기쁨과 사랑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옵니다.
붙어 있다면 성령의 인도 역사하심에 수분과 양분을 빨아 드립니다.
붙어 있다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붙어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어둠을 물리칩니다.
붙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붙어 있는 기독교인은 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선포합니다.
붙어 있는 자는 ‘내가 죽고 주의 생명이 나를 통해 흐르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엡 4:22-24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행전 20장 24절
† 기도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 된 나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오면서 형성된 내가 참 내가 아님을 알고, 거짓된 나를 버리고, 자아를 부인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이제 제 인생의 목표를 깨닫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걷는 새로운 인생길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길 원하십니까?
당신을 창조하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 집중하며 내 인생의 목표를 세워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