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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문명개척사 그리고 수원나그네 정조이야기
한민족의 문명개척사
2022년 12월 28일(수)
8:20
문지기가 되어 한손에 창을 잡고 서있는 나我에 대한 깨달음이다.
어떤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이 나라를 유지하려면, 평민들의 지력知力·경제력과 국가의 방위력과 관리들의 공권력이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민족은 단군조선이 무너지면서 그리고 고려 중기 유가가 득세하면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해야할 양반들이 일신양명에만 치중하여 도둑들이 되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수탈을 했으며, 나라의 방위에는 어찌 그렇게 등한시했으며, 나라 내의 치안을 어찌 그렇게 생각지 않았는가!
결국에 남의 나라 손아귀로 통째로 넘기는 양반들이 그렇게 많았는가!
아직도 민족의 역사를 국조를 부정하는 者들이 그렇게 많은가!
내가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들을 간과했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내가 있는 것이다.
2023년 2월 15일(수)
3:10
삼랑진
부은사의 나반·마고대성, 만어사의 동해용왕 아들과 미륵돌, 만어사, 기독교 성지, 까치 전설
3:40 조그마한 동네이지만 신선문화의 성지이다.
4:40 만어사 나찰녀, 여승 성지, 독룡과 사귀다.
5:20 갑자기 떠오른 생각 번데기장사? 밀양잠전과 관련?
2월 17일(금)
오후12:10
대시전은 국가에서 황명으로 지었다.
절은 큰 스님이 그들의 덕으로 그리고 공인되고서는 국가에서도,
유가의 서원은 힘 있는 사대부가 지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결국 대시전은 국가 교화 교육중심지였다.
단군조선 때, 대시전은 지금의 서울대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오후12:40 풍씨의 맥이 고성이씨를 통해 순흥안씨로 이어졌다.
풍씨의 맥이 끊어지고, 배달국의 맥도 헌원의 반란으로 그 맥이 위기에 처하였다.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맥을 이으셨다.
배달국의 맥이 마지막 단웅으로 조선의 신인단군왕검으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신성이 성웅을 겸비하여 정치와 교화를 통제관장 하였으나, 문왕과 무왕에 와서 선천의 도정이 끝났다.
오후12:50 마고대성께서 율려천에서 뽑으신 우주 율려의 원음 ‘옴’이 환국에서 ‘훔’으로, 배달국에서 약주문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가 완성되었다.
소도(성황당)가 세워진 동네동네 ‘훔’의 약이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며 완성한 주문이다.
우리나라는 마을마다 어귀에 당산나무가 있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만해도 마을마다 재실이 있었다. 어느 부잣집에서 그 동네를 거의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황당과 재실이 대시전의 변형된 형태에서 유래된 것이다.
내 어린시절 고향은 무실이다. 내가 시천주 도를 닦으면서 알게 된 것은 무실이 한자로 무실巫室이란 사실이다.
내 고향동네는 오랫동안 무巫가 세를 점유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걸 내 아버지가 다 허물어버렸다.
당산집을 허물고 마을 앞 벌판 당산나무 많은 버드나무를 베어내어 성냥공장에 팔고 전기가 들어오게 하셨다. 그 신벌로 지금까지 내가 죽음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은 배산임수로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어서 마을에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정도에 따라 크기가 정해졌다.
지금의 우리나라 마을(촌락)은 환국·배달·조선 때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유적이다.
3월 13일(월)
2:20
배달의 웅족 문명은 송화강에서 시작한다.
소를 이용한 농경의 시작이라서 ‘소’를 첫머리로 귀하게 여긴 문명이다.
우두牛頭머리가 시작되는 문명이다.
송화강의 ‘소’나무는 여기서 출발한다.
하백 후손이 일으킨 문명이다.
이 문명이 전도佺道 즉 원형불교문명이다.
소호금천少昊金天의 후예들이 전해준 문명이다.
송화강 문명이 중국 서천성을 거쳐 갠지스강의 인도로 들어갔다.
이게 갠지스강으로부터 출발한 허황옥과 쌍어문과 연계되는 것이다.
인도의 소가 호강을 하는 이유이다.
이게 지증왕의 우경과도 연계된다.
인더스강의 인도는 갠지스강과는 달리 아리안족이 들어간 길을 따라 들어왔다.
동해용왕의 아들이 이상향을 찾아 떠난 만어사 전설은
웅족의 직계문명이다.
지금의 세계4대문명의 어머니문명이 송화강 문명이다.
이 송화강 문명이 바로 강가에서 문명을 일으킨 세계4대 문명의 어머니문명인 것이다.
그 종통이
남조선 도수로 세상에 드러난다.
시두와 함께 종통 천자국임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3월 17일(금)
오후5:10
치병은 제왕학의 기본이었다.
태호복희태제의 복희국까지 제사장으로서 치병을 함께 맡았던 마지막 천제天帝였다.
그 맥이 끊어진 이후
신농국의 신농성황께서 나라를 다스리시기 위해 새로운 치병법이 필요했었다.
그게 평생 백초를 맛보아 정립했던 소위 동양의학이다.
이 신농의 동양의학이 해 뜨는 시작의 동방의학으로 동서양의학의 시조이다.
이후 제왕학의 기본으로 치병의 동방의학 한韓의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신교의 맥이 끊어지고 공자의 유가가 패권을 차지하였을 때 소위 그들 사대부들은 의술을 하시하면서도 자신들은 기본적으로 그 원리가 같아 간단한 치병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동방의학은 지역적으로 동양, 서양으로 구분되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인류문명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해뜨는 시작의 의학이라는 개념이다.
그런고로 신농의 동방의학은 동서양 모든 의학의 시조인 것이다.
3월 23일(목)
6:00
순장은 ‘요순우’의 피가 흐르는 곳에서 시행되었다.
즉 한족의 산유물이다.
3월 31일(금)
오후5:20
망상증 환자 한무제가
실체도 없는 한사군을 설치하는 빌미를 제공하면서 인류창세동방역사왜곡이 시작되었다.
아예 실체도 없었던 한사군을 재야사학자들마저도 옛번조선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다. 참으로 애석하다. 지금의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한무제가 번조선을 탈취한 도적 위만정권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번조선은 옛부터 4군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앙을 합해 우리민족 통치 5경제도 실시되고 있었다. 그래서 4군 운운이 나온 것이다. 실제 역사는 한무제가 패하고 돌아갔는데 무슨 한사군인가? 오히려 황하 하류지역에 조선 자주독립파 4군과 친한족파 우거 아들 1군이 설치되고 한무제는 서안 깊숙이 쫓겨 들어갔었는데 말이다.
한무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전쟁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
한무제의 흉노 왜곡 세뇌, 김일제에게 김씨성姓 하사, 경주로 와서 세뇌된 피에서 역사왜곡 DNA 생성하였다.
신라로 온 선비모용족이 김씨로 개명하면서 경주 김씨의 역사왜곡 DNA 분화발전하였다.
김부식에 와서 역사왜곡 DNA 완성되고 현실역사에 발현되었다.
경주 김金씨의 석昔씨를 도륙한 죄업으로 김부식이 나왔다.
김부식은 극악무도한 사대주의자가 되어 우리역사를 노골적으로 도륙하기 시작했다.
또 경주김씨를 이은 안동김씨의 조선의 마지막을 다스리면서 ‘이씨李氏면 어떻고 일본씨日本氏면 어떠랴?’ 그 죄업으로
일제日帝의 우리역사왜곡의 완성품 조선사 35권 24,000쪽의 방대한 실증주의 식민사학의 결정체가 나왔다. 한민족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들고 친히 이 땅에 오셨다.
4월 14일(금)
7:00
고려서경이 북경이라는 유튜브가 있다.
처음에는 너무 나갔다 생각했는데
대한사랑의 고려 국경조작사2에서 요탑이
지금의 요하 서쪽에 몰려 있는 것을 보고
왕건의 고려는 북경까지 대진국의 영토를 수복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나라를 얻었다.
30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한다.
한반도 내라면 그렇게 많은 부인을 둘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나주의 제2의 부인과 혼인정책으로 혼인했다면 최소 전라남도는 더 이상 혼인정책을 펼 이유가 없다.
그 다음으로 애지중지한 부인이
한반도남부는 후백제와 대치중에
충주를 얻을 때 혼인동맹으로 얻는다.
견훤의 아버지 상주 아자개와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어 후백제를 압박하게 된다.
그 지역을 점령하고 나서 유지하기 버거울 때 혼인동맹을 맺는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보면
왕건의 혼인동맹은 대진국의 영토수복에 그 의의를 두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지배적으로 내 머리 속을 맴돈다.
왕건 부인 30명,
워낙 왜곡이 심한 강단사학자들의 이야기로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믿을만한 부인들은 반도 안 된다.
한반도 남부에 국한되어 있다.
지금까지 정통민족사학자들의 연구결과 고려의 강역이 요하지역까지 올라간다. 동쪽으로는 연해주지방까지다.
일제식민사학자 강단사학자의 고려강역은 위로는 겨우 대동강까지다. 민족사학자들이 밝힌 강역의 반밖에 안 된다. 강단사학자들의 영역 두 배나 된다.
확률적으로 반은 지금 억지로 꿰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란의 요탑으로 보면
요나라가 득세하면서 지금의 요서 서쪽지역을 잃은 것이 된다.
요탑을 쌓아 자기지역을 표시했다는 것은
상말로 개가 자기영역을 표시한 것과 같다. 그들은 고려로부터 화북지방을 빼앗아 자기 지역이라고 강력하게 표시하기위해 쌓은 것이다.
본디 자기 땅이 아니었던 지역을 차지하고서 100년 200년 세월을 지내면서 자기 땅이라 명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희와의 담판에서도 보면 뜬금없이 고구려의 옛땅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내조상의 땅을 네네 거란이 점령하고 있다!
중국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왕건의 고려가 또한 후신라에서 나왔으므로
대진국을 이었다 하기에는 이치가 조금 맞지 않다.
고려의 옛땅 북경까지 왕건이 수복했다. 대진국의 많은 부분을 왕건이 수복했다고 해도 말이 된다.
사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전투한 게 많다.
그렇다고 본다면
대진국의 옛땅을 혼인정책으로 수복했다고 보아야 한다.
8:20
김부식이 나오면서
골수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영원히 수복할 수 없는 그런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다.
몽고의 부마국에
명의 제후국으로
급기야 일제 식민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25,000년 낭가의 맥이 끊어지게 생겨서 그로인해 인류가 가을개벽기 인류가 전멸하게 생겨서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4월 15일(토)
3:10
서희 담판 외교 강동6주를 얻었다.
지금의 요하를 경계로 국경이 정해졌다.
그 이전에는 요하가 난하? 아니다.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이다.
6:00
서희 담판으로 강동육주를 획득했다?
사실 이치상 영 맞지 않은 역사적사건이다.
쳐들어온 놈이 상대방적장이 말 잘한다고 땅을 떼어준다?
고려의 서북방을 잃고 지금의 요하를 경계로 국경을 삼아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이 신빙성 있다.
거란의 1차 침입 993년
2차는 강조정변을 구실로 1010년 침입했다.
3차는 1018년 다시 침입했다.
강감찬장군이 귀주에서 이를 물리쳤다. 귀주대첩이다.
거란은 986년 서북방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이어 991년 여진족을 몰아내고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입으로 고려 개경함락이 된다.
3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은 더 이상 침입하지 못했다.
강감찬장군의 귀주대첩으로 요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요나라에 이어 여진족 득세한다.
고려로부터 독립? 하여
고려의 국경은 지금의 요하에 머물게 되었다.
북경 좌측으로 흐르는 강이 영정하다
북경을 지나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낙랑홀이 나온다.
조양이다.
지금의 장가구에 거의 일치한다.
이곳이 BCE300년경
연장수 진개에게 빼앗긴 곳이다.
조양에서 만번한에 이르기까지 지역이다.
4월 16일(일)
8:00
두 임금 섬긴 조선의 사대부들
공자의 나라를 자기들 나라라 하여 섬긴 얼빠진 사대부들
우리나라 왕을 바꾸는 일을 역모라 생각하지 않았던 사대부들
김부식 이후
민족은 낭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북경이 고려의 서경이었다는 유튜브의 이야기 전제에서 본다면,
고려(918) 왕건은 북경까지 수복하는 대위업을 달성하였다.
거란의 강세로 요동지역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
묘청의 서경천도(1135) 주장 때 요를 멸망시킨 금나라 정벌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
서경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몽고의 원(1271)의 쇠퇴기에 공민왕은 철령위 이북 정벌을 위해 노력하나
결국 이성계 등의 반대로 옛고구려 땅 수복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무신정권(1170~1270) 이후
몽고의 부마국으로 떨어졌다.
고려말 명明이 철령 이북이 원에 속했던 것이므로 명에 속한다 하며 철령위 설치한다는 이야기로 보아,
요·금·몽고가 차례로 요서지방을 점유하면서, 요서지방은 결코 수복할 수 없는 그런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땅을 완전히 상실했다.
4월 28일(금)
11:00 tvN STORY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에펠탑이야기를 한다.
피라미드에서 유래된 건축물이다.
에펠탑이 어째서 피라미드에서 유래되었는가? 반문하겠지.
무든 아이디아는 전례가 있다. 전혀 생뚱한 아이디어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신교神敎이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이 시작되면서 나오는 전혀 생뚱한 아이디어들은 신인神人들이 직접 천제天祭 하늘에 고하면서 펼쳐내는 것이다. 문명의 시작은 이런 신인들이 열어내는 선仙문명인 것이다.
하늘과 교감하기 위한 천제天祭를 올리기 위해 높은 곳이 필요했었다. 인류문명이 넓은 평야지에 열려질 때에는 이런 피라미드가 필요했었다.
황룡사지 구층탑과 같은 높은 탑이 이런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요동땅(요하 서쪽 본래 요동땅)에 일시적으로 많이 세워진 요탑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북쪽 유목민들은 모두 삼신일체상제님을 모시는 문화를 섬기고 있다..
마리산의 참성단으로
마리산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되었다. 태백산의 천제단도 같은 의미이다. 말만 남아있는 지리산 노고단도 같은 의미이다.
노고단에서 피라미드의 시작을 알 수 있다. 노고단老姑壇은 마고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었기 때문이다.
5월 6일(토)
5:40
고려 서경이 어딘가?
김부식과 묘청이 싸운 시기
요의 쇠퇴기 요는 금에 의해 망했다.
묘청이 금 정벌로 잃어버린 옛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 했다.
이때의 서경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처음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초창기 당시 서경이 북경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요에게 북경에서 지금의 요서 땅을 빼앗기고, 이어 금에 의해 점령이 되고, 이어 원이 이곳을 차지했다. 그래서 요에 의해 요서땅을 빼앗긴 이후 서경을 요하의 동쪽 고구려의 옛수도 지금의 요양시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초기
요에게 북경땅을 잃으면서 결국에는 북경이 연경이 되어버렸다.
BBCE 300년 경 연 장수 진개가 겨우 한번 밟아본 연나라의 수도가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역사왜곡의 문제는 심각하고 심각하다.
어찌 낙랑홀이 연나라의 수도였던가?
5월 27일(토)
오후1:00
유방이
화하의 시조 하우의 후예 유방이
한漢나라를 세운지 2,000년!
서토로 들어온 민족을 한족으로 만들기 위해 자의타의로 그들의 뿌리를 자르게 했다.
그 과정에서 합당한 논리를 정립하면서 말이다.
기후변화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던 북방 유목민들은
안전한 정착민 한족이 되기 위해 한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과거 자신의 DNA를 뿌리를 잘라버렸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한족 그들의 죄업이 지금의 천도에 반역하는 동북공정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약 13억 가까이 되는 한족은 씨를 보존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도 유전적으로 과학적 조사결과 실제 한족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참으로 안되었다.
뿌리를 부정한 죄업이 이토록 무섭다.
천도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보은!
7월 2일(일)
8:00
천일야史, 괴수이야기
온몸 털북숭이, 힘이 세고, 선량하고, 수명이 무지하게 긴, 발견될 때만 300세정도. 얼마나 좋은 유전인자이었든가! 그걸 수용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이었든가!
이런 배타성 때문에 400년 전 임진왜란을 전환점으로 하여 문명의 중심이 서양으로 옮기게 된다. 이 이전에는 동양의 문명이 서양으로 흘러갔었는데 이 이후로 서양의 문명이 동양으로 흘러오게 된 것이다. 진묵대사의 서양으로 가시는 계기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8월 8일(화)
7:50 종이
Cyperus papyrus 방동사니과 계통으로 그 줄기가 화문석을 만드는 왕골과 비슷한 것으로 종이 만들기에 적합하다. 이집트에서 종이를 만들었던 재료이다.
왕골 Cyperus exaltatus 논같은 습지에서 잘 자란다.
이집트문명이 4,400년이전이라면
배달국 시대 종이는 건답직파가 개발되고 그 논 자리에서 나오는 사초과 왕골 종류로 만든 것이다.
종이는 배달국 시대 웅족문화에서 이미 개발되었다.
물론 지금의 모든 생활과학문명은 이시대 개발되었다.
이걸 중국놈들이 지금 전부 지들 거라고 우기고 있다. 참 못된 놈들이다. 도득놈들이다. 공자가 도둑의 나라를 만들었다. 공자를 섬기는 붓쟁이들이 전부 도둑놈들이 되었다.
바늘도둑은 나라를 찬탈하고 큰 도둑은 인류문명의 종통을 찬탈하려고 한다.
중국은 지금 김치도 한복마저도 가져가고 있다.
지금의 서양과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배워 출세한 인재들로서는 막을 재간이 없다.
어쩔수없이 삼랑이 나선다!
종이 만드는 법은 김 만드는 법과 비슷하다.
북방에서 문화가 시작 되었으니, 종이 만드는 법에서 북방의 선비족이 영산강유역으로 오면서 김이 재조되었다.
그들은 찬란한 고인돌 문화를 만들었다.
고인돌문화는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합일한 인류해양문명의 출발지이다.
저 지중해 그리스 문명보다 훨씬 앞서고 10배나 더 훨씬 거대한 해양문명이다.
8:00
서양의 양피지는 이미 환국에세 시작했다.
기록문화는
최소한의 기록을 위해 여와 태황후님께서 거뷱등껍질에 기록하는 갑골문자를 만드셨다.
거북신앙은 단군왕검의 낙서로 이어진다.
이걸 우가 낼름했다.
원시유학의 비조, 단군왕검, 하도는 복희천황, 낙서는 단군왕검
현실역사에서 상극역사를 보신 분이 단군왕검이시라면
실제상극역사 DNA의 출현은 요순우 삼대에 걸쳐 발현된 것이다.
상극의 블랙홀을 만든 것이다.
9:20
인류문명의 시조는 하도의 복희태천황이시라면
소호다!
이분의 법을 이은 소호야말로 서토대륙의 실질적인 황하중심문명의 시조로 한자문명을 체계화시켰다.
이 소호의 자리를 헌원이 가로챈 것이다.
여하튼 소호의 손자대에서 상극유전자가 발현된다.
유웅국이 임금 소전씨의 별파 후예 공손씨의 아들 헌원이다.
헌원의 상극유전자 발현은 치우천황에 의해 저지된다.
수원나그네 정조이야기
2023년 1월 31일(화)
8:10
오래된 드라마 '이산'을 보니 조선시대 당파는 혈연을 앞선다.
지금의 이념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혈연을 앞선다.
2월 10일(금)
오후7:10
15진주가 되길 바랬던 정조(수원나그네 전설의 주인공)가 승하하고,
조선은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돌입했다.
정감록 정鄭씨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화완옹주와 노론을 등에 업은 정순왕후의 노골적인 이씨조선에 대한 역모가 결국에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王이 李씨면 어떻고 日本씨면 어떠냐?
나라를 지키는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고,
결국 자기 당파만 지키면 되는 김씨의 나라가 되었다. 저 옛날 김수로가야가 시작되고 2천년이 지나고서이다.
역사왜곡으로 인해 김씨(한무제에게서 하사받은 김씨: 김해김씨·신라김씨)가 가야의 주인행세를 했던 역사의 잘못으로 한민족의 비극이 태동된 것인가?
우리역사에서 잊어버린 아니 삭제해버린 原가야(狗耶)의 한이 만들어낸 작품인가?
2월 11일(토)
2:45
정조, 화성건설이라는 거대한 국책사업으로 농공상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한 진정한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그 화성에서 남은 조선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게 수원나그네 전설이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결국 허락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도 국방의 중요성을 깨치지 못한 조선의 사대부 양반들
친금 정책을 편 선조의 아들 광해군을 쫓아내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
친금 정책자들의 승리였다면 조선은 일제의 치욕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명 추종세력의 승리, 이게 결국 김씨 세도정치로 연결 되는 것이다. 일제의 치욕으로 민족이 사라질 위기에 봉착되었다. 아니 한민족이 소멸되었다.
명 추종세력들은 그들의 왕 공자의 나라의 속국이 되어야 그들은 마음을 놓는 그런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뒷배는 그들이 섬기는 공자의 나라의 한족漢族왕인 것이다. 중국 땅을 반도 다스리지 못했던 그런 민족, 혈통으로 엮기지 않은 민족, 그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잠시일 뿐이다.
여하튼 그래서 그들이 저지르는 역모는 역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고, 인조와 영조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여 친명 노론의 하수인이 되어 백성을 생각함에 소홀했다.
인조는 자신의 수치를 스스로 이겨 극복하려하지 않고 힘없는 늙어빠진 대국이 나서 해결해주기를 바랬다. 이런 심법이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것이 외세를 끌어들인 이유요, 백제가 망한 것이 외세를 끌어들인 이유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을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국력은 피폐해졌다. 수원나그네 정조가 아무리 노력해도 복구할 수 없었다.
그 후 100년간은 나라가 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3월 3일(금)
1:00 드라마 이산,
혜경궁홍씨의 후궁 반대 영조의 어머니 신분문제 언급한다. 하지만 영조의 진짜 고민은 어미의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여러 가지로 유추해보면 사도세자의 뒤주사건문제는 노론에 반대하여 신분문제에 그 해답이 있을 것이다.
조선 신분문제해결의 시작이 아들의 집현전이다. 자신의 코미타투스를 뽑아 기른 이유이기도 하다. 삼랑의 부활이었다.
이 신분문제로 모든 백성들의 열망 미륵하생, 남조선 사상이 생겨나고 동학혁명으로 터져 나온다. 정조시대에 이서구의 남조선 뱃노래가 있다.
3월 4일(토)
0:00 드라마 이산,
수원나그네 정조가 자신의 후대를 적당한 때 생산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그가 외친 개혁이 완성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국의 치세로 접어들었다.
또한 사대부 신권臣權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 속 죽음으로 모는데 충분한 권력을 휘둘렀고, 정조마저 왕위를 잇지 못할 수 있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더불어 그때까지 조선은 너무도 심각한 삼정문란의 부정부패로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는 미륵하생을 염원하는 남조선사상이 태동한다.
정조는 어릴 적 친구 마음의 안식처 의빈성씨에게서 희망의 빛이 계속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의 방해로 결국 대를 이은 정조의 꿈은 조선의 마지막 개혁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다른 후궁에게서 태어난 정조의 차남 순조는 너무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세도정치라는 새로운 신권臣權정치를 창출해내었다.
조선을 난세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홍경래의 난이 이 때 일어났다.
삼정三政(田政, 軍政, 還穀)의 부정부패는 도를 더하고, 지방향리들은 ‘큰도적과 굶주린 솔개’로 변해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므로 역사의 진실은 신도가 아니면 알 수 없고 또한 그 주인공이 되어 그 역사 속에 몸을 담아볼 수 있어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역사 속에 실제 들어가 체험해야 알 수 있다.
각설하고
결국 홍씨가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넣은 주역이 되었다.
그 중심에 혜경궁 홍씨가 있다.
그녀의 주변인물들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로 몰아넣었다.
혜경궁 홍씨를 비롯해서 그녀의 친정 숙부 홍인한이 사도세자 저격수역할 하는 것을 못 본체 했다.
정조의 오른팔인 홍국영은 세도정치를 실제 시작했고,
밖에서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게 한 주인공이 되었다.
0:20
혜경궁 홍씨는 신분이 급상승한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함이었던가?
자신의 친정집 청지기의 딸이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것을 왜 그토록 반대했을까?
내 대학동기인 홍ㅇㅇ은 내 집에서 처음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지금 대구시장인 홍ㅇㅇ는 창녕의 기운으로 대권을 거머쥐려고 하고 있다.
창녕에는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3볼에서 대역전극을 펼칠 수 있는 기운이 써려 있다. 그 기운을 홍준표가 탐을 내면 대역죄인이 된다.
창녕 성씨의 기운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빛총으로 열심히 쏘아 없앤다.
수원나그네의 주인공 정조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자기편이 되어주어야 할 홍씨에 둘러싸여 결국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정조의 마음의 안식처였던 의빈성씨의 입장에서 서보니 그가 조선의 개혁을 꿈꾼 그 자리의 의미를 알듯하기도 하다.
그리하여 작금에 내가 맡은 일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정조가 되었든 의빈 성씨가 되었든 결국 건강에서 무너졌다.
반드시 의원도수를 열어 상제님의 천하사는 실수가 없게 해야 할 것이다.
3월 11일(토)
5:40 성곽기술
드라마 이산
환국·배달·조선의 본맥은 부유들에 의해 끊어지고
서양으로 건너갔던 그 기술들이 중국으로 일본으로 대륙으로 해양으로 다시 원시반본하여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고
수원이 있었다.
수원 근처 많은 인공호수는 수원 화성과 함께 정조 다 지어진 것이다.
정조의 위대성은 화성이라는 국책사업을 통해 우리민족의 숙원이었던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민생의 기초토대를 쌓았다.
또 코미타투스를 결성하고 부국강병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부유腐儒의 농간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수원나그네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역사 속으로 파 뭍치고 말았다.
정조는 자신의 뒤를 이에 성공시켜줄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천륜으로 우주일가는 이루어지는 법이라.
자신의 뒤를 이어줄 배필자 아니면 아들을 얻지 못했다.
이 자식의 문제를 등한시한 것이다.
4월 14일(금)
1:30
정조시대, 농공상정책 활성화
화성이라는 국책사업으로 민생정책 활성화
김만덕 인물의 탄생이 그 증빙이다.
수원주변의 많은 저수지
2:00 논농사, 철제농기구 양산
군 장비 생산 활성화
신분철폐
아래로부터 혁명 불길이 당겨지기 시작했다.
부유에 눌려있었던 민생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정조시대 수원 유수영으로 시작하여 부유에 의해 무너진 국가군사조직 정비활성화
정조의 사후 민란이 많이 일어났던 원인도 결국 민간 제철산업이 활성화 되고 있었던 원인일 것이다.
5월 12일(금)
4:00
조선시대
왕정통성 시비를 벗어난 왕, 세종·정조·고종
세종은 한글로 단군조선의 맥을 이었고,
정조는 산성 성곽건설로 단군조선의 맥을 이었고,
고종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제정하면서 단군조선의 맥을 이었다.
4:10
고구려 장군총 돌무덤은 피라미드에서 온 것이다.
마리산 천원지방 참성단의 돌 쌓는 기술이 산성 성곽기술로 이어졌다.
9:00
수원 화성
축성기술은 단군조선 참성단의 돌 쌓는 기술을 이은 것으로,
우리전통 성곽축성기술과 세계로 벋어나간 기술이 하나로 합하여 이루어낸 기술이며,
피폐한 민생을 살리려는 국책사업으로 백성을 생각한 임금이었다.
수원나그네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백성을 위한 노력이 200년 뒤 겨우 자급자족하는 먹거리에 걱정이 없는 나라가 되었고,
신분해방을 위해 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들어와 누구나 큰소리치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가을개벽을 앞두고 대전염병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 전염병은 한편으로 인류를 진멸지경으로 이끄는 위협을 가하지만 한편으로 선천 상극지리를 멈추고 후천 상생의 대도세상으로 이끄는 첨병이 되리라!
다만 이들 병마들을 조절할 수 있는 권능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23.8.20. 성기영(010-9534-7766 jsdr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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