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소설의 유령』(푸른사상 소설선 53).
사회의 어두운 이면 속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려낸 9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에서 작가는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치밀하게 그려내며 우리가 간과했던 빛의 흔적을 찾아 나간다. 2023년 11월 20일 간행.
■ 작가 소개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어린 시절의 꿈을 쫓아 소설가가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문예창작학), 문학박사(국어국문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목포대와 광주여대에 출강하다 광주여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현재는 소설 쓰기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문학 강의와 문학 연구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소설집으로 『창』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꽁지를 위한 방법서설』 등이, 장편소설로 『하늘꽃 한송이, 너는』 『허균, 불의 향기』가 있고, 학술서로『『토지』의 가족서사 연구』, 대학교재 『글과 삶』 등이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나무의 숨결을 빌려 붙들어놓은 많은 이야기들.
물처럼 흘려보낸들 어땠으리? 바람처럼 날려 보낸들 또 어땠으리?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섭섭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런 물이나 그런 바람에 대해 알게 뭐람? 출발한 적이 없는데 다다를 곳이 있을 게 뭐람? 발신자가 없는데 수신자가 생겨날 까닭이 뭐람?
늘 이렇게 회의하면서도 난 멈추지 못해왔다.
■ 작품 세계
여기에 이진 소설이 말하는 핵심이 있다. 이진 소설은 타자를 제한된 위치에 두지 않고 선험적 질서에 균열을 내며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향한 주체로서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 끝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서사의 종착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진의 서사는 사건의 종착점을 지나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여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쳤던 빛의 흔적을 다시 돌(아)보게 하므로. 그래, 이진의 서사에서 돌봄이란 돌(아)봄의 다른 말이다. 여기에 이진 소설의 힘이 있고, 그의 사랑이 새롭게 움트고 있다. 잊지 말자. 소설과 우주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니, 당신 역시 하나의 우주라는 진실을. ― 방승호(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작품 속으로
아무래도 조금쯤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정산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비웃음을 정색시키려 애를 썼다. 소설이 무슨 생명체도 아니겠고, 소설이 죽었다느니 또 죽은 소설을 염습해야 한다느니, 이게 지금 어느 세상 이야기인가? 게다가 디지털 장례라는 건 고인이 디지털 세상에다 끼쳐놓은 자취를 찾아 영원의 침묵 속에다 묻어주는 일이지,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질로 전화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라면 유물이 아닐 것인가? (「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 70쪽)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에겐 거절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임신일지 모른다는 미묘한 우울감이, 제왕절개 수술을 또 한 번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그보다는 내 자궁이 진짜 내 아기는 한 번도 키워보지 못한 채로 성능 저하의 늪에 빠져버릴지 모른다는 냉철한 직시가 날 체념 상태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여자와 내가 마흔셋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까지 같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감정선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는 내 철칙이 이미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초록 알람」,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