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 아소카 왕의 불교 귀의
참혹한 전쟁 치른 뒤 '무력'서 '법의 정복' 전환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웰즈(H.G. Wells, 1866~1946)는 그의 <역사개설>에서 아소카(Asoka, B.C. 268~232 재위년대)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의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역사의 대열에선 수만 명의 군주 가운데서 아소카의 이름이 빛나고 있으며, 어쩌면 유일하게 큰 별로서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아놀드 토인비(Toynbee, 1889~1975)도 아소카 왕을 인류 역사상 수많은 군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군주이자 성왕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우선 수천 년 동안의 인도 역사를 통하여 가장 넓은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인물이 아소카 대왕이었다. 그는 아쌈 지역과 께랄라·따밀 나두 최남단 일부를 제외한 현재의 인도 전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등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소카 왕이 옛 연인을 추모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경 조성한 산치대탑. 불교신문 자료사진>
세계 최고의 성군(聖君)으로까지 불리게 된 아소카 대왕의 위대함은 가장 넓은 판도를 가진 마우리아 통일제국을 인도에 건설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통치이념과 불교옹호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소카도 처음에는 방탕하고 포악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남방 전승의 <대사(Mahavamsa)>에 의하면, “아소카는 ‘빈두사라(Bindusara)왕의 101명의 왕자 중 가장 뛰어났다. 그는 변방의 웃제이니(Ujjeni)지방의 민중반란 진압 차 파견되어 있었는데 부왕의 중병소식을 듣고 수도인 빠딸리뿌뜨라(pataliputra, 華氏城, 현재 patna)로 돌아와 수도를 자기 것으로 하고, 부왕이 죽은 후 이복형 수마나(sumana) 등 수십 명의 형제들을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그는 왕위쟁탈을 위해 이복형제와 그들을 도운 5백 명의 신하를 죽이고 많은 사람을 괴롭혀 ‘악아육왕(Canda Asoka)’이라 칭해질 만큼 난폭했다고 한다.
아소카는 마우리아 왕조 초대왕 찬드라 굽타 이래 지속되어온 영토 확장정책을 계속 추진해, 즉위 8년에 마가다 동쪽에 위치한 칼링가(Kalinga) 지역을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정벌했다. 칼링가 왕국은 마우리아 제국의 패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칼링가는 마우리아국과 인접에 있으면서 동남 변경에 자주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데칸 이남 지역과 벵갈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육로와 강상무역로(江上貿易路),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해로(海路)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소카는 정치·경제적으로 통일제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지역을 정벌하는 것이 당위였다. 아소카 대왕이 암석(岩石)에 새겨놓은 법칙에 의하면 아주 처절한 전투 끝에 칼링가는 마우리아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전쟁 사상자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 발생한 질병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으며 전쟁 포로까지 합하면 피해자는 수십 만 명에 이르렀다. 영토 확장의 전쟁에서 아소카는 승리는 했지만 이 전쟁에 따른 참상이 극심했었음을 그의 마애법칙 13차 포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이 지나고 이제 신의 사랑하는 자 삐야닷시(Piyadassi)왕이 칼링가를 정복했노라. 15만이 포로로 붙잡히고 10만이 죽었으며, 그 몇 배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이제 칼링가는 합병되었고, 이후로는 신의 사랑하는 자가 충실히 담마를 실행하고, 담마를 갈망하고, 담마를 가르쳤노라. 칼링가를 정복하고 난 후, 신의 사랑하는 자는 슬픔에 잠겼다. 한 독립국이 정복당할 때 살육과 부상과 포로가 그를 극도로 슬프게 하고,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아소카는 칼링가 전쟁을 겪은 후 깊은 고뇌의 참회를 한다. 이리하여 그는 물리적 점령 정책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문화정복 정책으로 전환했다. 즉 베리고샤(bherighosa, 무력 정복)가 담마고샤(dhammaghosa, 法의 정복)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그의 제13마애법칙문에서 불교의 법에 의한 정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법에 의한 정복은 왕에 있어 최상의 정복으로 생각된다. 이에 획득된 정복은 어느 곳에 있어서도 기쁨을 낳은 정복이다. …… 그리고 이 법에 의한 정복만이 참된 정복임을 나의 여러 왕자, 여러 종손이 깨우치도록 명각되었다. 이 법에 의한 정복은 현세와 내세에 관계하는 과보를 낳는다.
이상과 같이 아소카 왕이 독실한 불교도가 되게 한 동기는 외적으론 칼링가 정벌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체험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죽음’의 문제와 관계되는 부처님의 삼법인(無常·無我·苦)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으로 하여 이를 자기 생활 속에서 실천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통일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찬드라 굽타 이래 세력을 확대하여 왕의 통치권을 제약하고 있는 브라흐만 세력을 극복하고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포용해야 하는 아소카 왕으로서는 사회통합의 차원으로 ‘법의 만민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에 귀의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소카의 담마(dhamma, 法)이다.
칼링가 정벌서 수십 만 명 희생…고뇌의 참회
44개 바위-석주에 법칙문 새겨 불교 가르침 전파
성지 순례-승가 후원등 통해 불국정토 실현 꾀해
아소카 왕은 국적·민족·종교 여하를 불문하고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어떤 시대에도 지켜야 하는 영원의 이법(理法)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것을 법(dhamma)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 법으로 대제국의 통일 유지를 위하여 이상사회 즉, 불국토를 건설하려고 했다. 아소카 왕에 의하면 국왕의 정치활동의 목적을 법의 구체적인 실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준거하고 있던 법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 정책을 어떻게 폈는지 일별해 보자.
아소카 왕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으로 생각한 것은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물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관용과 인내를 발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윤리적인 성실성과 자비의 이념이었다. 그가 이런 이상을 보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각지의 절벽바위를 연마해서 법칙문을 새기든가 혹은 석주를 세워 거기에 법칙문을 새기는 것이었다. 왕은 즉위한 지 12년이 지나서부터 왕이 깨달은 법을 선포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돌비석에 새겨 이것을 즉위 27년까지 계속해 44개에 이르는 법칙을 새겼다.
아소카왕은 왕에 부과된 최고의 의무는 “현세·내세에 있어서 일체의 생명의 이익과 안락을 도모하는 것으로서, 이보다 “숭고한 사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는 인민에게 법을 청문시켜 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 최고의 행위이다”라고 했다.
이런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실현하려는 ‘법의 정복’ 동기는 칼링가 전쟁의 비참한 죄악성을 통찰하여 폭력에 의한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법에 의한 승리’가 진정한 승리임을 자각했다. 아소카왕의 이런 자각은 초기불교의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의 이념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아소카 대왕은 세계 역사상 가장 경건한 불교도였을 것이다. 그가 불교도로서 얼마나 신심이 깊었는가는 우빠굽따(Upagupta)에게 안내되어 불적 순례를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장로여! 부처님이 살아계셨던 장소를 공양하고 싶다. 또 후세의 사람들을 이익 되게 하기위해서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표적을 남기고 싶다. 이것이 나의 희망이다.
<파키스탄 샤바즈가리에 있는 아소카 마애법칙. 영토확장 전쟁의 극심함이 기록된 암석이다.>
그는 즉위 관정 후 20년을 경과한 해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를 참배하고, 세존이 여기에서 탄생하였음을 기념하여 마상(馬像)을 새긴 돌을 만들게 하여 석주를 세웠다.
그리고 “룸비니 마을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고, 그리고 추수에 관해서는 통상 적용되는 비율대신에 8분의 1을 징수하도록 했다”라고 하는 것이 룸비니 동산에 남아있는 석주의 법칙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 룸비니 일대는 19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기록상에만 전해오는 성지였고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휘러(Fuhrer)에 의하여 처음으로 까빌라와스뚜가 발굴되면서 곧 이어 아소카 대왕의 석주가 발견되었다. 그 비문을 판독함에 따라 이곳이 성인의 탄생지 룸비니라고 확인하게 되었다.
또 그는 붓다가야의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가서 “10만 금으로 보리수에 공양하고 탑을 세우고 떠났다”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런 것이 그가 말하는 ‘법의 순행’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법의 순행’을 했기 때문에 ‘아육법왕(阿育法王)’이라고 부르게 됐다.
아소카 왕의 불교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과 열의는 그의 오랜 불교성지의 순례와 불교의 가르침을 세계에 전파한데서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소카는 웃제이니(Ujjeni)태수로 재직할 당시 현재의 산치에서 12km 북서쪽에 위치한 베디샤(Vedisa)지방의 데비(Devi)라 불리우는 한 처녀를 사랑했는데 그 사이에 난 아들이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한 마힌다(Mahinda)이다. 마힌다의 어머니인 옛 연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소카 왕이 세운 불탑이 산치대탑이다.
아소카 왕은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불교교단을 후원하여 승가가 인도전역으로 퍼지게 하였지만,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출가자·재가자의 일체의 종파에 보시·공양하였으며, 모든 종파의 본질의 증진과 상호간의 제휴·협동을 뒷받침하고자 노력했다.
내정에 있어서도 그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여행자를 위하여 길가에 과실나무를 심고 휴게소를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약초의 재배와 인간과 동물을 위한 2종의 병원을 건설했다. 그는 이러한 법에 의한 통치를 위하여 ‘법대관’들을 지방에다 파견하여 감독하게까지 했다.
아소카 왕은 그의 평화정책과 비침략 정책 그리고 문화정복 정책 때문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자세는 인류역사가 지속되는 한 모든 지도자들이 귀감삼아야 할 좌표이다.
김선근/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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