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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우리교회(두날개 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박석훈목사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2)
* 말 씀 : 요19:25-27, 딤전5:8 *찬양: 369장, 305장
* 제 목 : 가족 돌봄, 사랑의 지경을 넓혀가는 일
*요19:25-27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몇 년 전 관객 1,300만을 동원하여 국내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던 영화 [괴물]을 기억하십니까?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염두 해 둔 것은 바로 가족애였습니다. 영화의 출발점은 괴물이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 괴물과 맞서 싸운 박강두 가족들이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그의 가족이야 말로 감독이 오늘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한, 잃어버려가는 가족에 대한 가치였습니다.
딸 현서의 생존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가족이라는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끝까지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그 여파가 고스란히 가정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가 가족 위기로 나타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위기 때 온 가족이 하나가되어 지혜롭게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공생애 3년 이전, 무려 30년 동안 가정에서 평범하게 가족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가족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가족관을 배워 성경적 가족애[가족 돌봄]가 회복되길 원합니다.
1.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
보통 가족 하면 부모 형제자매 친인척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로 가족은 교회 공동체 혹은 한 민족을 포함하여 한 가족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족 사랑이나 민족사랑은 가족이나 민족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설교 중이셨는데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그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달받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12::48-50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니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결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혈연적 가족 범주를 초월하는 가족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제자들 또한 바로 그분의 가족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입니다.
-성경적 가족관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날개인 셀가족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주 안에서 한 가족임을 믿고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셀가족은 하나님의 뜻 안에 묶여진 공동체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기에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함께 묶여져 평생을 사는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가족에 대한책임을 끝가지 지신 예수님
그러나 이런 성경적 가족관이 혈연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들에게 최선의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이전 30년 생애: 고향 나사렛에서 부모형제들과 함께 성실한 가족의 삶을 사셨습니다.
12살 먹은 소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방문 이후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살아간 모습이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나사렛에서 좋은 아들이요 좋은 구성원으로 사신 것입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마리아의 착한 아들로 살아가던 모습, 아버지를 도와 목수 일을 잘 감당하던 성실했던 모습, 육신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유다 그리고 시몬과 어울리며 살아가던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으로 이 성실성은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십자가 최악의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간 후 어머니의 복지 문제를 염려하셨습니다. 마지막 고통의 절정에서 기억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닌 어머니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제자 그리고 가장 섬세한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제자를 생각해 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26: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신 일은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3. 가족 돌봄의 교훈 승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족관을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사도들 중 가장 큰 영향력으로 예수님 이후 세상을 복음화한 바울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가족 돌보기를 포기한 사람들을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이 교훈을 목회 승계자인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예수님의 명을 따른 목회적 교훈의 하나가 바로 가족 돌봄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모범이요, 거룩한 습관의 유산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교회에서 가정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삶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거룩한 습관이 새벽마다 회복되길 원합니다.
&[괴물] 영화에서 주인공 강두의 절규?
“현서야,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네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했는지. 남들한테 바보 소리를 듣는 아빠를 창피하게 여기기는커녕 언제나 어른처럼 입바른 소리를 하며 사랑을 나눠주던 너였다는 걸 아빠는 다 알고 있었단다...맞아, 현서야 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네 이름을 하루에 열두 번은 더 불러야 행복했다. 넌 나의 분신, 넌 우리의 가족이었으니까.”
[사람은 모든 사람들,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이 그가 크리스천임을 알도록 살아야 한다- D.L 무디]
(말씀 적용과 실천)
1. 교회 공동체 가족으로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셀가족 모임을 통해 얻는 유익은?
2. 나는 내 가족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가?(섬김) 구체적으로 적어 봅시다.
찬양 /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3)
* 말 씀 : 마26:17-20, 26-29 *찬양: 305장, 사랑의 종소리(뒷면)
* 제 목 : 가정모임, 천국 안식의 그림자
*마26;17-20,26-29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말씀합니다. 거기에 가정을 세우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부터 가정이 천국의 모델이 되길 소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일을 해도 가정에 돌아와 쉴 수 있다는 그 마음이 새 힘을 얻게 합니다. 가정은 천국의 보금자리입니다. 천국 가정을 이루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자기 집을 가져 보지 못하고 집을 그리워한 분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그분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집이 없었던 그분은 제자들의 집을 사역 센터로 삼으셨습니다.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제자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셨습니다.
본문은 지상 생애 최후의 순간을 앞에 두고 예수께서 마가 다락방을 찾으시고 거기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그분의 사역에서 제자들과의 가정 모임을 중시하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1. 가정은 삶의 안식처입니다.
성경은 가정을 ‘안식할 곳’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외로운 여인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해야 하겠다”(룻3:1) 고 했습니다. 안식(메누하)은 단순히 활동을 정지한 상태가 아니라 고요와 평화, 건강과 충만을 뜻하는 매우 적극적인 단어입니다.
유대인 신학자 아브라함 헤셀은 하나님께서 제7일에 메누하(안식)창조하셨고 그 후에 바로소 그분의 아름다운 창조, 행복한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메누하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의미하며,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의 가정 모임[셀가족 모임]은 어떤 의미에서 천국 모임의 그림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순도순 집에 모여 형성하는 행복한 공동체였습니다. (행2:42-47)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회는 건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부름 받은 제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했습니다.(에클레시아)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집에서 모이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네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
그러하기에 교회당에서 모이는 대그룹 주일예배만 의지하지 않고 집에서 모이는 셀가족 모임(가정교회, 목장교회)을 중시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고 교회의 교회된 참 의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능력 받고, 목적을 이루는 모임]
예수께서 그분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을 때 생애 마지막 시간을 어디서 누구와 보내고 싶어 하셨는지 아십니까? 오늘 분문에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집에서 유월절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진정한 쉼, 천국의 안식을 나누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도들 집에서 모임을 통해 바로 그런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2. 가정은 삶의 치유자리입니다.
만일 가정이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 여행은 얼마나 더 고단하고 힘든 여정이 되었을까요? 여행길에서 병이라도 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집을 그리워하는지요.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여!’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가정이 소중한 보금자리임을 나타내주는 표현입니다.
가정은 인생의 가장 효율적인 치유의 마당입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인데 목회자 가정 역시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5월이 되면 가정 설교를 통해 제 자신과 우리 성도들 가정을 돌아보며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집에 들어가서 사람들의 약함과 죽음을 치유하신일입니다. 그분이 들어가는 집마다 치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 베드로 장모, 삭개오, 야이로의 딸,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
오늘 우리 가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겸손히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초청하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3. 가정은 가장 소중한 헌신의 자리입니다.
최근에 사건 가운데 부모가 자식을 비참하게 죽이는 끔찍한 사건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사실 우리는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의 가정을 파멸시키려는 것이 악한 사탄의 음모이기에 늘 깨어 기도하며 가정을 파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지니는 가장 위대한 도덕적 가치는 희생을 배우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희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뛰어넘는 헌신의 의미를 배웁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희생?
-최후의 만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왜 무엇 대문에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어져야 하고 피를 흘리셔야 하는지를 나누셨습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8절에 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는 이유를 더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함이었습니다.(히9;22)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희생과 헌신의 이류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할 것을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이 진리를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모임, 셀가족 모임을 통해 나누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진리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문제와 실패, 좌절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희생의 의미, 그 헌신의 의미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의 나눔은 한풀이나 넋두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승리가 나누어지는 바로 그 순간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각자의 문을 여십시오. 가정의 문도 여십시오. 그리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그 순간 우리 가정에 영광과 안식의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모여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고,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른다. 모여서 서로 대화하며 삶을 나누어야 사랑의 불이 훈훈하게 일어난다- D.L 무디]
(말씀 적용과 실천)
1. 요즘 나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천국의 안식을 누리십니까?
2. 그렇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께 맡기고 기도합시다.
찬양 / 사랑의 종소리 / 김석균 작곡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 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춰 주소서
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기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복을 갖게 하소서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동산에 항상 있게 하소서
오 주 우리 맘에 새 빛이 어두움 밝게 하시어 진리의 말씀 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주면서 서로 감싸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4)
* 말 씀 : 마18:1-6,10 *찬양: 56장, 300장
* 제 목 : 어린이 사랑, 보배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마18:1-6, 10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빗나간 자녀 양육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양상이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빗나간 욕구에 부모들이 오히려 끌려 다니면서 자녀들의 무질서마저 귀엽다고 맹목적으로 옹호하며, 자녀들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과잉 보호형 부모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방임해 주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녀들에게 무분별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풀이하는 방임형 혹은 학대형 부모들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를 사랑하자” 혹은 “자녀를 사랑하자”는 구호를 담은 호소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갖지는 않으셨지만 어린이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어린이 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르치는가?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의 의도에는 제자들 마음속에 은근히 명예욕이 사로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다가 이제 천국에 가면 어떤 위치에 오를까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 기회에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는 좋은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4절을 봅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기가 아닌 어린아이의 겸손함, 단순함, 혹은 순종 등의 특성이야말로 천국에서 가장 귀하게 평가되는 가치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녀들에게 올바른 천국의 가치를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자녀교육은 어떻습니까? 출세와 돈, 성공, 일류 학교 등 세상적 가치 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자녀들과 겸손의 가치와 혹은 순종의 가치에 대하여 진지한 이야기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설교하는 제 자신도 참 부끄럽습니다.
예) 전 세계를 흔든 미국 버지니아텍 조승희 학생이 저지른 참사 사건.......공범은 바로 우리들.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입니다.
습관적인 기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를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믿음을 보여 주는가?
본문에 6절-9절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핵심어로 등장하는 단어가 ‘실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강경하게 작은 자로서의 어린이 실족을 경계하십니다.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도대체 이 ‘실족’의 참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를 이해하는 열쇠는 “나를 믿는”이란 말에 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12-14절에서 우리는 믿음을 떠나 잃어버려지지 않도록 주님이 누누이 부탁하는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여기서 실족은 믿음의 실족을 경계하여 나온 말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자녀들이 정말 믿음을 갖고 자라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배우지 않고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는 교육 효과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부모가 성경 보면 자녀도 성경 읽게 됩니다.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할 것입니다. 부모가 큐티하면 자녀도 큐티할 것입니다. 부모가 정직하면 자녀도 정직할 것입니다.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도 이혼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부모가 교회생활에 신실하면 자녀들도 그렇게 살고자 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대화에서 믿음에 대한 대화가 중요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보배로 여기는가?
자녀 사랑, 혹은 어린이 사랑의 출발은 무엇보다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류에게 기여한 가치 중 하나가 어린이 가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이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린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처음 어린이, 즉 ‘어리신 이’라는 말을 썼지만 그전에는 어린이 일반 호칭은
‘이놈아’ 와 ‘아 새끼’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문 5절을 기억합시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어린아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어리아이를 지으신 주님을 영접함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을 읽어봅시다.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 어린이들을 지키고 인도하는 천사(수호천사)들이 있어서 그들이 늘 아버지 하나님을 뵈옵고 어린이들의 미래를 의논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요 하나님 나라의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들을 보배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부모의 책임입니다. -올바른 인생의 방향을 가도록 먼저 부모가 본을 보이라!(시1271-4)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라!(칭찬, 격려, 위로 등)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말씀읽기, 암송, 가정예배 등)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나를 바로 그 순간으로 끌어들이며 삶을 예찬하게 한다. - 헨리 나우웬]
(말씀 적용과 실천)
1. 자녀에 대한 부모로서 바램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관계가 있는가?
2. 나는 자녀들과 언제 어느 때 대화를 나누는가?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5)
* 말 씀 : 눅11:1-4,23:34 *찬양: 409장, 405장
* 제 목 : 용서, 명령을 따르는 외로운 결단
*눅11;1-4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글래디에이터]란 명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검투사 막시무스와 황제의 아들 코무투스입니다. 황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황제의 아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아들 코모투스의 절규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언제나 네 가지 덕목을 가르치셨습니다. 지혜, 정의, 용기, 절제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 모든 것을 지키고 싶었고 신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사랑을 그리고 인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안고 말한 마디만 주셨더라도 그 말은 저에게 태양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는...”이렇게 절규하면서 그는 조용히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와 용서하지 못한 아들의 상처가 빚어 낸 비극적 드라마의 한 정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연출되는 비극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요소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한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주님의 중요한 가르침이었고, 그 분의 거룩한 모범적 습관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용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1. 죄인 된 인간의 무지
예수님 인생의 결론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다름 아닌 용서의 실천 마당이었습니다.
그분은 인류의 용서 곧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마지막 남긴 말씀도 바로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이 용서의 말씀에 우리의 이웃들을 용서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 된 인간의 무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고전2:8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당시 예수님을 죽게 한 그들은 에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몰랐다는 무지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의 무지를 용납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는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별 수 없는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의 잘못을 정당화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 때문에 별수 없이 행하는 그 연약함을 이해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을 때 흔히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의 무지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의 출발점임을 잊지 마십시오.
2. 기도, 용서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용서하기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하기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보통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용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상대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순종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 혹은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적 느낌을 넘어서서 용서가 주님의 명령이라면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의지적 반응이 곧 순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가장 보편적인 출발점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눅11장에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그 무엇보다도 용서의 기도를 실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주님은 이것을 교훈으로만, 설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로 실천하심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용서에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용서의 기도에 먼저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용서가 안 되면 “주님, 용서가 안 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예) 코리텐붐 여사의 용서: 언니의 목숨을 빼앗고 자신을 수용소에서 학대한 수용소 간수를 만나 후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라’ ‘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난 네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그녀가 의지적으로 순종을 결단하고 두 팔을 내밀어 그를 아는 순간 하나님은 그녀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부어 주심./ 이제 용서를 결단하고 용서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표현되어야 할 용서의 마음
우리 한국인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지닌 민족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표현력의 빈곤입니다. 한국인들의 가정생활에서 치명적인 빈곤은 표현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잘못 했습니다” 혹은 “사랑 합니다”라는 표현을 어색해하는지요? 그러나 성경을 잘 관찰해 보면 온통 용서와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를 용서(사랑)하노라”
주님은 오늘 두 개의 본문에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가르치고, 공개적으로 용서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분은 용서와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시는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증명하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이 땅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만이라도 좀 더 대담한 사랑의 전달과 표현이 있다면 이 땅의 가정들의 회복이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 정회성[두란노 아버지학교 가정회복 사역팀장] {아버지,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버지에게 온통 얻어맞은 폭력의 기억만을 가지고 자랐다고 함.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버지의 분노는 가정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듦....어느날 친구 집 방문, 친구가 아버지와 씨름하며 아버지 배를 만지고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음. 이후 어버지와의 관계를 회복.. 23살 때, 아버지에게 전화, 낳아주시고 기도해 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말한 후 ‘아버지 오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용기를 내어......“아버지 사랑 합니다”
자신의 고백으로 스스로 울고 감격하던 그날 그 고백과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됨.
그 후 7년의 세월이 흐름....어느 날 기도하다가 아버지를 한번 안아 드리고 싶다는 강한열망이 생겨남.....
[그 다음 이야기는 별지 참조] 오늘 우리 가정에 이 용서와 사랑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
(말씀 적용과 실천)
2.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이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구체적으로)
찬양/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구정 날 부모님 댁에 세배를 하러 가기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아버지를 안아 드리리라 결심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아제 사역자가 되었으니 주 안에서 사역을 잘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하고 곧 한 번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안자 계시는 아버지와 내가 서 있는 거리는 불과 1,5m도 안되는데 그 거리가 마치 요단강같이, 아니 홍해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뻗어져야 할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못하게 되면 나는 진정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강하게 다짐을 하고 용기를 내서 앉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난 울면서 ‘아버지, 사랑하고 감사해요’라고 말하곤 아버지 품에 안겼다. 그때 하염없이 울고 게시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그 때 아버지 역시 당신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의 안김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나를 안아 주고 싶지만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품이 너무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좋았다. 옆에 게신 어머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내도 울고...그곳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기서 천국을 경험했다. 그곳에는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어떤 불필요한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더 이상 없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만이 충만했다.
..........최근에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어디셔요?’
‘여기 월 마트다. 그런데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요?’
‘(한동안 침묵 후에 들려온 말은...) 회성아, 나 너 사랑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6)
* 말 씀 : 마16:18-19, 엡5:25-26 *찬양: 245장, 246장
* 제 목 : 교회 사랑, 기도로 매고 푸는 일
*마16;18-19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엡5;25-26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 있다면 저는 감히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목사안수 받은(98년) 후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목회자가 된 것에 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교회를 섬긴다는 것을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어제 일입니다. 성도 가운데 한 분이 큰일을 당했습니다. 모친께서 주일 밤에 뇌출혈로 쓰러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교회에 한 동안 섬기셨던 집사님이십니다. 그래서 어제 부랴부랴 상계동 백병원까지 가서 수술 전 안수기도 해주고 돌아왔습니다. 사실 오늘 오전8시에 수술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사의 손길을 통해 치료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가 어려움을 당할 때 주의 종과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내 일처럼 관심 갖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교회, 주님으 피로 사신 바 된 교회, 이 영광스런 교회를 지금도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마16:18절에 친히 교회를 가리켜 “내 교회”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사랑은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 교회 사랑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인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께서 이 당에 오신 이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함”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개인 개인들을 구원하시는 데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완수하고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또한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한 개인에 불과했지만 그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하자 그의 고백에서 용기를 얻으신 주님은 이 한 사람의 헌신에서 교회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구원의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뻐할 일이지만, 교회의 존재는 의미 없는 다수가 아닌 진정으로 헌신된 소수에 의존해 왔다는 것이 교회사의 교훈입니다.
예) 어느 개척 교회 목사님의 고백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교회를 세우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고 증거합니다.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여기 ‘자신을 주심’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희생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의 결과로 오늘 우리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동안 교회를 위하여 진지하게 희생하신 분들,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헌신하신 분들입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의 담과 눈물로 지켜지고 존속되고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비결은 단순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희생을 해보십시오.
예) 오늘의 한우리교회가 있기까지?
헌신하는 자가 교회 공동체의 주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교회가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영혼의 신부가 되어야합니다.
3. 주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할 도 하나의 이유는 지금도 주께서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고 성도들을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어떻게 인지하고 경험합니까? 우리의 예배, 우리의 교제, 우리의 봉사, 우리의 기도 응답의 마당이야말로 그분을 만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체험의 공동체인 주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최고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위 말씀은 마18:18-19절을 통해 그 의미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장19절과 정확하게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19절에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예수께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위한 기도를 하면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매고 푸는 위대한 경험을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셀가족 모임으로 모일 대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 어느 성도의 간증(이혼 위기에서)
한국교회가 진정 민족을 치유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도록 계속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사도바울은 엡5:27절에서 그가 사랑하는 교회가 주님의 눈부신 신부가 되어 거룩한 공동체로 주 앞에 서게 될 것을 소망한다고 고백합니다.
[영적으로 혼자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 안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하퍼]
(말씀 적용과 실천)
1.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 나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며 섬기고 있는가?
주님의 평안 내 안에 있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