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 받은 가나안 땅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성지 순례로 이스라엘을 방문한
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여름에 방문한 이라면 이스라엘이 결코 아름답지도 광대하지도
더불어 젖과 꿀은 구경 못할 땅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크기는 겨우 한국의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쳐 놓은 면적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땅의 반은 광야와 사막지대로 뒤덮여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미 많은 목사님들께서 이 말은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이라고 설교하신 바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본 젖과 꿀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들은 젖을 양과 염소를 키우는
목축업으로 꿀을 여러 가지 과일에서 나오는 과즙을 상징하는 것으로 농업이라고 말한다. 본 글은 2회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농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는 이 글들을 통해서 젖과 꿀이 이스라엘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소산들을 말하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농업에 있어 기후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성경시대부터
변한 것이 없다. 이스라엘은 겨울 즉 11월에서 2월 사이에만 비가 오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메말라 있다. 4계절 적당한 비가 골고루 내리는
우리에게 이 기후는 상당히 불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후를 적당히 이용하여 농업과 목축업을 병행한 이 땅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농부는 비가 오는 적당한 시기를 알아 미리 농사를 준비한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렘 5:24). 비가 오는 겨울, 광야에 풀이 자라면
남자들은 가축떼를 데리고 떠난다. 여인들은 집에서 보리 농사를 짓고 풀을 걷어 말려 뜨거운 여름 날 가축의 먹이를 준비한다. 비가 멈추면
가축들은 집안에 머물게 되고 남자들은 이제 집 근처에서 포도와 올리브 같은 과수원에서 일을 한다. 성경에는 다양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명절이
나오는데 명절은 농사 생활과 관련이 있고 항상 축제가 따라온다. 유월절(페삭 pesah)과 무교절은 보리 추수 시기에 지켜졌고 추수의 기쁨은
축제로 이어졌다. 장막절(수콧 sukk?t)은 가을 축제로서 농사가 모두 마친 것을 축하했다. “장막절” 혹은 “초막절” 이라는 명칭은 칠일
동안의 축제기간에 장막에서 기거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렇듯 농사는 적절한 때에 행해져야만 했다. 조선시대에 우리에게 농사직설이나 농요 등을 통해 농부들이 파종의 때나
경작방식 등을 알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도 농경의 시기를 알리는 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1930년대 게셀에서 발견된 이
작은 석회석판은 길이가 겨우 11.1×7.2cm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림 1). 어떤 학자는 이 석판이 학생들의 문자를 쓰기 위한 연습용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석판의 중요성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문서임과 동시에 성경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농경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석판에는 총 7줄의 기원전 10세기경(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히브리어가 쓰여 있다. 내용은
12개월을 계절별로 총 8기간으로 나누어 가을에 거둬들인 올리브 추수부터 네 기간은 두 달씩 나머지 네 기간은 한 달씩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두 달은 (올리브) 추수를
위함이며
그의 두 달은 (곡물을) 심기
위함이며
그의 두 달은 철늦은 곡식을 심기
위함이며
그의 한 달은 아마섬유를 괭이로
파고
그의 한 달은 보리를
추수하고
그의 한 달은 추수와 축제를 열고
그의 두 달은 포도나무를
손질하고
그의 한 달은 여름 과일을 딴다.
10월~11월, 이른 비가 땅을 충분히 적셔 부드럽게 되면 농부는 쟁기로 땅을 부셔 갈았다(그림 2). 쟁기는
이미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용되었는데 단단한 나무로 만든 작대기에 금속으로 만든 보습을 달고 멍에를 달아 소나 나귀 혹은 사람이 끌기도
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러한 쟁기는 단순히 땅을 긁어 부순 후 얕은 밭고랑을 만들 뿐 현대의 농기구들처럼 땅을 뒤엎지는 못했다. 멍에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들이 매어졌다. 엘리사가 처음 엘리야를 만날 때에도 밭을 갈고 있었는데 그는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었다”(왕상 19:19). 지금도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가면 고대에 사용했을 법한 쟁기가 여전히 논밭을 가는 데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추수 때에 농부는 한 손으로 곡물의 줄기를 잡고 다른 손에 쥔 작은 돌칼날이 끼워져 있는 낫을 사용했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신 16:9),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를 바벨론에서 끊어
버리라”(렘 50:16). 추수를 하고 나면 농부는 곡식 단들을 타작마당으로 가져왔다. 타작마당은 넓고 편평한 우리의 마당 같은
곳으로 곡물의 키질을 위해서 바람이 잘 부는 높은 장소가 자주 선택되었다. 이사야는 타작을 비유로 들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적들을 걸러낼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사 41:15). 고대 이스라엘의 타작기계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스라엘의 유적지에서는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현무암 조각이 자주 발견된다. 조각의 마모 상태로 보아 분명 사용의 흔적이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는
해답을 찾지 못했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은 고대 농경 방법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고고학자들은
그림(그림 3)에서처럼 이 지역에서 현무암 조각들의 용도를 찾을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나무로 된 널판에 이 현무암 조각들을 끼워 넣고
황소나 나귀로 키를 끌게 하여 곡식 단에서 곡물을 떨어냈을 것이다. 타작된 곡물은 공중으로 흔들어 바람이 짚과 겨를 떨어내도록 하였다.
타작된 곡물은 사일로와 창고들에 저장하였다. 곡식 저장고는 개인 소유도 있었지만 도시 전체를 위한 공공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도 있었다. 저장고는 2m 가까이 되는 거대한 항아리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지하에 웅덩이를 파 내부를 돌로 쌓은 후 방수를 위해 회칠을 한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곡식 저장고는 므깃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700년경(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 만들어졌으며 346미터톤의 곡식을 저장할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그림 4).
이스라엘의 주식은 밀과 보리였다. 곡물 낟알은 주로 빵이나 죽을 만들어 먹었지만 번철에 구워 먹거나 생으로 먹기도 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레 23:14). 밀은 주로 상류층이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밀보다 거칠고 품종이 떨어지는 보리는 가난한 자들의 주식으로 사용되었다. 곡물을 가공하는 것은 여자들이나 노예들이었다;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사 47:2),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라”(출 11:5). 맷돌은 모두 두 개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현무암으로 많이 만들어졌다(그림 5). 이는 우리가 현무암을 맷돌로 사용하는 이치와 같은 것으로 현무암의 표면에 뚫린 수 많은 구멍들이 서로 마찰에 의해 곡물을 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놓이는 커다란 돌은 약간 안으로 옴폭하게 패여 있어 곡식을 놓도록 되어 있었다. 이 위에 보다 작은 돌을 수평으로 놓고 앞뒤로 움직여 곡물을 갈았다. 고대에는 현대처럼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음식을 가공하여 저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곡물은 그때그때 갈아서 음식을 만들었기 때문에 매일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법이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 24:6)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맷돌을 뺏기고 나면 하루의 음식을 만들 수 없었다. 삿 9:53에서 맷돌의 위짝은 치명적인 무기로 사용되어 아비멜렉의 두개골을 깨기도 하였다. 렘 25:10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갈 때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렘 25:10). 이는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인 빵과 빛이 없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 산지에 정착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보다 많은 땅이 필요했고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경작지를 일구었다. 이 좁은 계단식 농경지에는 포도나 올리브 같은 나무를 심기에 아주 좋았다. 성경은 가나안 땅을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다”(신 8:8-9)고 말하고 있는데 특별히 여기 포도(그림1)와 감람나무(올리브, 그림2)는 아열대성 기후에 가장 적절한 과일나무로서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우리는 보통 질 좋은 포도주를 말하라면 프랑스나 칠레의 포도주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지리적으로 이스라엘과 터키 지방을 포함한 레반트라 부르는 이 지역의 포도주가 상당히 인기가 있다. 이미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에 포도주를 짜는 장소가 있었고 포도재배가 기원된 장소로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도 노아가 아라랏산 즉 현재의 터키 지역에 도착해 처음 포도나무를 재배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고대 이 지역의 포도주는 질 좋은 것으로 앗시리아와 이집트에까지 수출한 포도주 강국이었다.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덥고 건조한 기후는 포도를 재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직 적은 양의 포도주만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포도주는 석회석이 많은 근동지역의 물을 희석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음료 중 하나로 일상적인 식탁에도 항상 오르내리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음료였기에 포도주의 수입은 중요했고 이스라엘은 성경시대 주변 국가들에 많은 양의 포도주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반트 땅의 경제에 포도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는가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사야는 모압 땅의 멸망에 대해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포도는 보통 8-9월에 수확하여 암반을 편평하게 넓게 판 장소에 담고 발로 밟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포도즙은 암반의 다른 끝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흘러 옆에 있는 통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그림 3). 포도를 밟을 때는 가족의 전 구성원이 참석했고 기쁨과 환희의 연회가 베풀어졌기에 이 소리가 그친다는 것은 곧 황폐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유다 왕국이 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때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렘 32:15)”는 상징적인 예언을 하고 있다. 포도원의 회복은 곧 그들의 경제적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레반트 지역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또 다른 나무는 올리브나무다. 한국어 성경은 올리브를 감람나무로 번역한 바 있다. 성경이 처음 번역되던 시기에 한국인에게 올리브는 생소한 열매였고 아마도 올리브와 유사한 열매가 열리는 중국의 감람나무로 번역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올리브와 올리브 기름은 이미 파스타라든가 피자 같은 지중해성 음식으로 인해 익숙하기에 여기서는 감람나무가 아닌 올리브로 소개하고자 한다. 올리브나무 역시 지중해 지역의 덥고 건조한 여름과 춥고 비가 많이 오는 겨울의 기후를 필요로 하는 나무이다. 특히 적은 토양의 바위 산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레반트의 수출 효자 상품이다. 올리브 역시 꽤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재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기원전 6000년경에 야생 올리브를 제조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올리브 기름도 포도주처럼 넓고 편평한 암반에 열매를 깔아 짜서 사용했는데 올리브의 경우는 발로 밟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통형 돌을 굴려 으깼다(그림 4).
열매를 으깬 후 뜨거운 물을 부어 위에 뜬 기름을 거두었는데 이를 첫 번째 짠 순수한 기름 혹은 처녀 기름(Virgin oil)이라 부른다. 이 첫 번째 짠 기름은 오직 성전의 촛대를 피우는 데만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이었다. 한 번 으깨진 열매들은 짚을 엮어 만든 바구니에 담아 돌을 추로 사용한 기구에 다시 여러 번 짜서 각각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그림 5). 여러 번 짠 것일수록 가치는 떨어졌다. 이러한 시설은 특별히 블레셋의 도시로 잘 알려진 에그론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 구약시대에 올리브 기름 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근동 지역의 석회석을 함유한 물은 포도뿐만 아니라 올리브를 먹어 희석시킬 수 있었고 올리브 기름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는데 앗시리아와 이집트는 올리브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조건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호세아에 의하면 올리브 기름은 이집트로 수출되었으며(호 12:1), 심지어 뵈니게아와 그리스 지역에까지 수출되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를 심고 양질의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시기는 5-6년이 지나서이기에 이 나무들의 재배는 곧 영구적으로 정착한 이들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올리브나무의 경우 열매는 격년으로 맺히기 때문에 이 나무들을 재배한다는 것은 다음 세대의 경제를 위한 재배라고도 볼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농업뿐만 아니라 목축이 함께 발전한 것으로 성경에는 백 가지 이상의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많이 사육된 동물들은 양과 염소였다. 목동들은 겨울과 봄의 비가 오는 시기에는 가축 떼를 데리고 나가 풀을 뜯게 했고 여름과 가을에는 미리 모아 건조한 식물을 먹였다. 이러한 광경은 유다 산지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베두인이라 불리는 유목민들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양을 우유와 고기 때문에 길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양고기도 먹긴 했지만 주로 울 생산이 중요했다. 울 생산은 겨울의 추위를 막아 줄 따뜻한 옷을 만드는 목적과 동시에 무역 상품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압왕 메사는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쳤었다”(왕하 3: 4). 양털은 주로 봄에 깎았으며 포도주를 밟던 날처럼 축제의 날로 온 가족이 모여 연회를 베푼 것으로 보인다. 삼천 마리의 양과 천 마리의 염소를 소유하고 있던 나발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을 때 다윗은 이곳에 나타나 음식을 요구했다(삼상 25:2-10). 고기와 우유를 주로 제공한 것은 염소로, 염소의 우유 산출은 양보다 두 배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히 이스라엘산의 염소 치즈는 유럽에서 인기있는 식품 중에 하나이다. 부드러운 양털과는 달리 거친 염소털과 가죽은 부대자루와 천막용 천을 제조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목동은 야생 짐승들로부터 자신의 가축 떼를 잘 보호할 의무가 있다. 다윗은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다”(삼상 17: 34-35)고 말했다. 그가 가축 떼를 돌보고 있을 때 그의 손에는 분명 골리앗을 물리칠 때 사용한 물매가 들려 있었을 것이다. 물매는 지금도 유대 광야의 베두인 목동 아이들 손에도 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림 6). 물매는 멀리 있는 짐승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맞힐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로서 군무기로도 사용되기도 했다(삿 20:16; 왕하 3:25; 역대상 12:2; 역대하 26:14-15). 물매는 옷감이나 가죽을 꼬아 만든 긴 끈으로 길이는 1-1.2m 정도 되고 끈의 중간 부분에는 넓게 주머니 형태로 된 공간이 있다(그림 7). 이 공간에 평균 250g 정도의 무게에 지름 6-7cm 정도의 둥근 돌을 넣고 끈의 양끝을 모아 잡은 후 공중에 빙빙 돌리다가 한쪽 돌을 놓아 상대방에게 던지는 도구이다(그림 8). 물매의 속력은 160-240km로 측정되며 200-400m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도구였다.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