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é Girard <Le bouc émissaire>(희생양)
정말 듣기 싫은 소리 한마디가 또 들려온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정부는…”
아,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다짐을 듣고 또 들어야 하는가?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도 어김없이 똑같은 정부의 다짐이 나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재발 방지를 위한 어떤 성실한 노력도 뒤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졌다. 그래도 안전의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태원 골목길에서 끔찍한 압사 사고가 발생하자, 아니나 다를까, 낡은 녹음기처럼 울림 없는 담화문이 또 흘러나왔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코로나 사태로 3년이 넘도록 기를 펴지 못한 젊은이들은 거리 제한이 풀리고 할로윈 축제가 다가오자 젊음의 이방지대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국적불명의 이상한 전통이든, 서양의 귀신 놀음이든, 억눌렸던 젊음의 분출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우리 전통문화행사 때 무슨 사고가 났다면, 우리 문화를 탓할 것인가?
청년들을 할로윈 축제의 골목으로 불러들인 것은 수많은 언론매체들이었다. 심지어 할로윈이 우리 청년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성급한 분석까지 등장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비좁고 경사진 골목길에서 올라가는 무리와 내려오는 무리가 서로 부딪치며 비명을 토해내는 아비규환의 현장인데, 불상사가 예상되는 사고신고를 이미 여러 건 접수한 경찰이 아무런 안전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젊은이들이 제 발로 모여든 자발적 행사이기는 해도, 좁디좁은 공간에 인파가 빈틈없이 몰려드는 상황이라면 그 안전관리책임은 개개인에서 행정당국으로 넘어간다. 그 책임을 다하라고 국민이 투표하고 세금을 내는 것이다. 후견국가(後見國家)가 아니라도 부인할 수 없는 이치다.
경찰청장이 사고보고를 대통령보다 늦게 받았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허탈하기까지 하다. 안전관리의 실무담당자는 물론 그 지휘계통에 있는 고위관리직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중하위직에서 희생양을 찾는 꼬리 자르기는 비겁한 짓이다. 지휘권한이 클수록 그에 대한 책임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문명국가의 정당한 윤리의식이다.
그렇지만 꼬리를 자르는 책임회피가 부당한 '희생양 찾기'인 것처럼, 법치와 상식의 한계를 벗어난 덤터기씌우기의 정치공세도 부당한 '희생양 만들기'임이 틀림없다. 그것이 문명에서 야만으로 퇴화하는 길목이다.
나라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정권쟁탈의 기회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 야만의 길목을 노리고 있지 않을까?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하는 정부 시절에 일어난 화성씨랜드 화재참사나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때는 정권 내부에서 희생양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지방정부도 다름이 없었다. 수십 명이 죽고 다친 경기도 이천 물류센터 화재 때 소위 '먹방'을 촬영하고 있던 도지사는 인책(引責)은커녕 그 뒤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섰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가 터지자 무슨 때를 만난 듯 정권 내부에서, 아니 정권 중심에서 희생양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켠다. 세월호의 기억 때문일까, 뜬금없는 ‘대통령 퇴진' 구호가 거리를 떠돈다.
갈등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뒤집어씌우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역사적, 문화적으로 추적한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희생양 제의(祭儀)가 신(神)에게 봉헌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에게 봉헌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사회에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합리적․과학적 분석과정 없이 곧바로 미운 상대를 겨냥해 엉뚱한 칼질을 해대고는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폭력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으로 화형대의 불길에 던져진 힘없는 여성들, 보불(普佛)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인들이 반역자라는 누명을 덮어씌운 드레퓌스, 리스본 대지진 현장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된 수많은 유대인들, 관동 대지진 때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으로 집단살육을 당한 조선인들이 거대한 폭력의 손에 붙들린 희생양이었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는…” 이따위 틀에 박힌 다짐을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가엾이 스러져간 젊은 넋들 앞에 ‘미안하다. 고맙다’라고 건네는 아리송한 고별사도 다시는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미안함과 고마움, 사죄인지 감사인지, 진심을 알 수 없는 저 기이하고 섬뜩한 작별인사를.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이태원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