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우리 역사학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순종 서북순행 사진, 영친왕비 유품 최초공개! - 하정웅 기증展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0 14.08.07 01: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녕하세요. 문화재청 대학생 기자 김선경입니다.^^

순종 황제의 서북 순행을 기록한 사진첩과 영친왕의 휴대용 수첩, 영친왕비 일기 등이 처음으로 일반에 선보이는 전시회가  2011년 11월 22일(화)부터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실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 영친왕비의 유품

 

이번 전시회에서 소개되는 영친왕가 관련 사진 및 기록물들은 2008년 12월 재일교포 하정웅선생이 주일본한국대사관에 기증한 것으로, 주일본한국대사관으로부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환수받은 것입니다 

 

주요 자료로 전면 공개되는 1909년 순종황제의 서북순행 전체 일정을 기록한 사진첩,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일대기별 주요 사진 및 영친왕의 수첩, 영친왕비의 친필 일기, 그리고 가족 및 지인들에게서 받은 편지, 엽서 등이 있어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1909년 순종 황제의 서북순행 사진첩

 

▲(위/아래 : 서북순행 사진첩 / 순행을 떠나기 전의 창덕궁 전경의 모습)

 

 

순종 황제가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8일 동안 서북 지역을 순행한 일정을 기록한 사진첩입니다. 사진첩에는 순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각부 대신들의 수행을 받으며 궁정열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 등을 순행한 일정이 총 62장의 사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행원 중 무라카미 사진관의 사진사들이 함께 포함되어 전체 일정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입니다.

 

* 서북순행

= 순종의 서북순행 일정은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 추진된 것입니다. 고조왕제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전국적으로 반일 의병 항쟁이 격화되자, 국내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일본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순종 황제의 서북순행은 가는 곳곳에서 일장기 게양 거부 및 훼손 사건이 일어나고,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는 등 도리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친왕과 영친왕비

 

▲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결혼사진

 

기증자 하정웅씨는 재일교포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1974년 봄, 창덕궁 낙선재에서 미술품 바자회를 준비하시던 영친왕비를 알현한 인연을 계기로 1982년 가을, 영친왕비가 도쿄에서 자선 작품전을 열었을 때 통역과 수행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2008년 일본인 지인을 통해 영친왕비가 남기고 가신 사진과 서신 등의 유품을 접하고 이를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영친왕 부부의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찍은 사진도 전시돼 영친왕과 왕비의 일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영친왕(1897-1970)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고, 이름은 은垠입니다.

1907년 11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엇으나 12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1920년 일본에 의해 메이지천황의 조카이자 황족 나시모토의 딸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 영친왕 친필 수첩

 

= 영친왕의 작은 수첩에는 일본의 경제, 교육 현안을 비롯하여 유럽 국가들의 정치 현황에 관한 생각이 적혀 있습니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를 통해 세계의 정세에 관한 영친왕의 관심과 견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손종인이 영친왕에게 보낸 편지

 

▲ 영친왕과 영친왕비 그리고 아들 이구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은 영친왕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친왕은 한일 양국의 국교단절로 인해 일본에서도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여 무국적 생활을 하며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단한 삶을 살다가 1962년 한국 국적을 회복하여,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가게 된지 56년 만인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비와 함께 환국하게 되었습니다.

 

영친왕 부부가 귀국하였을 때 영친왕은 이미 뇌출혈로 혼수상태에 있었으며,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로 1970년 서거하였습니다. 이후 영친왕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며 꾸준히 사회봉사활동 등에 힘을 쏟다가 1989년 서거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황태자로 태어났지만 단 한순간도 태자로 살아보지 못하였던 비운의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번 기증전시회를 관람하는 관람객들의 표정들은 진지하면서도 다소 감정이 복잡해보였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기증자이신 하정웅씨는 한국과 일본간의 역사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었던 영친왕비는 물론 자신과 같은 재일한국인 2세의 운명에도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2011년 11월 22일(화)부터 2012년 1월 31일(화)까지 국립고궁박물관 1층에서 전시됩니다.

 

 

▲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헌례식

 

 

사람들은 나를 비운의 왕비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낙선재 뜰에 서서 회고해 보는

나의 지난날들은 마냥 비운만은 아니었다.

긴 폭풍우 속에서도 가끔 한조각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보이듯이

여인으로서의 사랑과 행복이 있었다.

무지개 같은 꿈과 희망도 있었다.

 

- 영친왕비 <세월이여 왕조여> 중

 

 

 

▲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김선경 기자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