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외지 사람들이 국제 시장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어. 그 당시 국제 시장에는 이북국제 시장
최철씨는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들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6·25 사변으로 많은 철거민과 피난민들이 아미동은 일본인 공동묘지아미동
6·25 전쟁으로 각지에서 많은 화가가 모여들어 1950~1953년에는 광복로와 대청로이중섭
“은박지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씨가 가끔 40계단이중섭씨가 중구에 살려고 온 게 아니고… 일본에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을 갈려고 하면 그 [부산] 부두에 와야 할 꺼 아닙니까? 그런데 돈이 한 푼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동사무소[지금의 동광동 주민자치센터] 옆에 있는데, 그가[거기가] 40계단
자갈치 시장을 가면 생선 장사하는 여성들도, 초량 시장영주동
“처음에 이 몸뻬라는 것을 해괴망측하다는 이유로 기피했답니다. 그런데 활동하는 데 편리한 데다 일본의 정책으로 정착되어 작업복으로 널리 입게 되었지요. 돌아다니기 편한 옷으로 이 몸뻬만 한 게 없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민들이 몰려와 부산은 너나 할 것 없이 식량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많은 사람이 밀면과 꿀꿀이죽 따위를 먹으며 연명했다. 김영희씨의 기억이다.
“6·25 피난 시절 이북
부평동의 이증식[80세] 씨는 1933년 두 살 나이에 할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에서 중구 보수동
“왜정 때 지은 집들은 걸어 다니다 보면 다 확실히 알 수 있지. 정말 오래된 데도 2층집이야.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집과 집 사이를 띄워서 짓지 않고 다닥다닥 붙여서 지었어. 우리하고는 다른 거지. 왜정 때 지은 집은 지붕을 자세히 보면 나무판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들었어. 지금 남아 있는 이층집들은 세멘[시멘트]으로 돼 있는데, 그기 처음에는 세멘이 아이고[아니고] 나무였다고.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모[올라가면] 계단이 삐걱삐걱 소리가 나.”
부산시에서 공공 주택 건립이 시작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1960년대에는 시영 주택 건립이 활발해져 1962~1988년 말까지 총 2만 6,617가구가 건립되었다. 영주동 시민 아파트
“영주 아파트가 부산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아파트입니다. 4층 건물인데, 뼈대만 건립한 후에 분양을 했어요. 내부 장식은 입주자가 부담해서 했고. 시에서 신청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때 5만 7,000원인가 5만 8,000원인가에 12평[39.69㎡]을 분양 받았지요. 부자들은 2칸을 사서 터서 썼고요.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이고. 1970년에 입주를 했는데, 그 당시에 16블록이 현재 금호 아파트고 11블록, 9블록이 동아 아파트죠. 현재 남아 있는 기 2, 3블록입니다…. 이 산복 도로에 처음으로 버스가 올라올 때 얼마나 좋았는지, 86번 소형 버슨데 개통할 때 박카스 사서 기사한테 건네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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