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의 노벨상에 대한 원념은 뿌리가 매우 깊다. 과학기술계의 거의 모든 뉴스가, 대중적 층위에서는 노벨상이라는 낱말과 어떻게든 결부되고야 만다. 황우석 사태의 와중에도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반대파들이 공연히 문제 삼지 않았으면 노벨상을 받았을 텐데”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다녔다. 이휘소나 이태규 등 역사적인 과학자들을 소개할 때에도, 그들의 업적을 상세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는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이휘소”라거나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된 이태규”라는 식으로 설명하면 대체로 듣는 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 심지어 매년 한국 주요 대학의 “세계 순위”를 한국 언론에서 받아 적어 보도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노벨상도 하나 못 받은 서울대가 순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그런데 일찍이 일제강점기에도 이미 그와 같은 원념의 싹은 돋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을 “노벨상 후보”로 언급한 신문 기사는 193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일보는 1939년 1월 10일, 도쿄제대를 졸업하고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에서 연구 중이던 화학자 김양하(1901-?)가 비타민 E의 결정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를 “노벨상 후보”라고 소개했다. “일본 학계에서 ‘노벨상’의 후보자로 추천한다면 단연 우리의 김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라는 익명의 논평과 함께.
비타민 E의 존재는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되어 있었고, 김양하는 새로운 결정 분리 기술을 고안한 것이었으므로 동아일보의 기대는 다소 부풀려진 느낌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노벨상에 대한 조바심과, 받을 수 있었던 상을 못 받았다는 아쉬움, 그리고 비타민 연구에 대한 자부심 등은 일본에서 이미 팽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리켄에서 김양하는 스즈키 우메타로(鈴木梅太郎, 1874-1943) 연구실 소속이었다. 스즈키는 바로 비타민 B의 발견자 중 하나로 일본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스즈키 연구실은 일본에서 “비타민 연구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스즈키는 1911년 쌀눈 추출물 중 각기병을 예방 또는 치료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뒷날 이것에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연구 결과를 일본어로 발표하는 바람에 국제 학계의 공인을 늦게 받았고, 비타민 B 발견의 영예는 1912년 비슷한 실험에 성공한 카지미르 풍크(Casimir Funk, 1884-1967)와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 1858-1930) 등에게 돌아갔다. 스즈키는 1929년 에이크만이 홉킨스(Frederick Hopkins, 1861-1947)와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을 때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스즈키가 받아 마땅한 노벨상을 부당하게 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몇 년 뒤에 김양하가 다시 국제적으로 주목 받을 만한 비타민 연구 성과를 내놓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즈키의 “빼앗긴” 노벨상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러한 생각들이 중첩되어 “노벨상 후보”라는 평가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노벨상을 운운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던 과학자가 일본에 스즈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일본에는 국제 과학계의 최전선에서 뛰는 과학자들이 다수 있었다.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郎, 1865-1950)는 러더포드가 1911년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기에 앞서, 1904년에 원자의 양전하가 가운데 몰려 있고 전자가 그 주위를 돈다는 “토성형 원자모형”을 가능성의 차원에서 제시하기도 했다.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 1853-1931)는 베를린대학에서 코흐(Robert Koch, 1843-1910)의 조수로 활약하면서 파상풍과 디프테리아 등의 항체를 혈청에서 배양하는 기법을 개발하여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그의 공동연구자였던 베링이 실제로 상을 받았다). 그리고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郎, 1873-1948)도 에를리히(Paul Erlich, 1854-1915)를 보좌하여 살바르산 606호를 개발하는 데 참여했고, 그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과 생리학상 후보에 올랐다.
이처럼 노벨상 근처까지 간 과학자가 실제로 여럿 있었으니 일본인들이 노벨상에 대해 품은 아쉬움은 나름대로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인 1949년, 드디어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지금까지 22명의 일본인(일본 출생 미국 국적 포함)이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았다.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모자람 없는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인이 공유하는 노벨상에 대한 정서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목표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가깝다. 더욱이 갈망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을 함께 기울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과학기술 정책 하나하나의 장단점에 대해서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다만 지난 글에서 남궁석 박사가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노벨상이 생겨난 20세기 초와 오늘날의 과학 활동의 양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달라져 있다. 오늘날 노벨상의 달라진 의미와, 과학계 안에서 그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의 목소리들에 눈을 감은 채, 막연히 20세기 초의 노벨상의 이미지만을 간직하고 있는 대중에 영합하여 노벨상 수상자 배출 프로젝트 같은 것을 추진한다고 해서, 한국 과학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도 의문이며, 그런 목적지향적 활동을 통해 정말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나는 한국 과학기술계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국가에 지원을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벨상에 연연하는 지금의 과학문화는 오히려 한국 과학 발전에 방해가 됩니다”라고 감연히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벨상에 연연하며 선도 연구자들을 쫒아가는 연구로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과학기술계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구실로 지원의 크기만 늘이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솔직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오히려 대중에게도 “노벨상의 의미가 이미 20세기 초반과는 크게 달라졌으니 거기 연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이해를 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그노벨상에 대한 관심을 더 높이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것이다. 한국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배출하지 못했지만, 이그노벨상은 올해까지 네 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 중 2000년(합동결혼식을 주도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경제학상)과 2011년(세계 종말을 예언한 이장림 목사의 수학상)의 상은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1999년(‘향기 나는 양복’을 개발한 권혁호의 환경보호상)과 올해(커피 쏟는 현상을 분석한 한지원의 유체역학상)의 상은 과학적 의미가 있는 상이다. 특히 올해의 상은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올바른 과학적 방법을 통해 답을 구했다는 점에서, 해외 단신으로 소개된 것보다는 한국에서 더 많은 주목과 찬사를 받았어야 마땅하다.
좋아서 하는 연구, 남의 뒤꽁무니를 따라가지 않는 연구, 연구비를 쫓아가지 않는 연구... 이런 것들이 20세기 초 막 걸음마를 떼던 노벨상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상찬했던 연구들이었다. 뢴트겐, 퀴리, 등등이 파고든 문제들은 사실 기존 과학계의 주류가 달려들던 문제들과 다른 것이었고, 그들은 결국 새로운 분야를 열고 과학의 지평을 넓혔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 보여줄 수 있는 참신함과 즐거움의 사례로는 이제 대중들에게 노벨상보다 이그노벨상을 더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그노벨상은 본질적으로 해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노벨상에 한 맺힌 한국 사회에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벨상을 언제 받는가 한탄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과학을 대할수록 과학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과학의 즐거움과 유쾌함을 되찾을 때 새로운 시선의 연구도 가능해지고, 대중의 과학문화도 다시 가볍고 즐거워질 수 있다. 한 맺힌 노벨상 대신 유쾌한 이그노벨상을 꿈꾸며 연구하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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