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참고가 될까하여 글을 올립니다.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1. 예식진(禰寔進)에 대하여
예식진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은 어느 사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이라 하여
의자왕이 항복하던 당시 웅진성의 예식이라는 장군과 함께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식진이라는 인물은 그의 묘지명이 2007년, 중국 길림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서안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는 그의 묘지명 명칭은 「대당좌위위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
예식진묘지명(禰寔進墓誌銘)」입니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는 백제 무왕 16년(615)에 태어나 당고종 함형(咸亨) 3년(672년) 5월 25일 58세로 죽어
그 해 11월 21일 장안(長安, 현 西安)의 고양원(高陽原)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의 백제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나당연합군은 거점성을 먼저 공략하여 주변을 평정하면서 진군하던
고대국가의 보편적 전술을 취하지 않고,
백제 수도인 사비성을 목표로 중간방어선을 무시하고 직접 공격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영토가 아니라 백제 멸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7월 9일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무너지고 사비성 남쪽에서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전면전을 벌였지만 결국 개전 5일째인 7월 13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지휘부를 웅진성으로 옮겼습니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보다는 지형이 험준한 웅진성이 수비에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웅진성은 웅진방령 예식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 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禰植이 의자왕을 데리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던 의자왕은
결국 믿었던 웅진방령 예식에게 사로잡혀 소정방에게 넘겨졌습니다.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이민족 출신들의 공로를 논할 때,
종종 김일제를 언급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예식진이 세운 공이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 라는 표현으로 보아,
결국 예식진이 세운 위대한 공은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당군에게 넘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구당서』의 기록에 "又將義慈來降"이라는 내용에 쓰인 “將”이라는 글자는
“강제로 끌고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큰 공의 정체였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비록 묘지명에 이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의자왕의 갑작스런 항복을 설명하기에는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이나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내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將”이라는 글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습니다. 또,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렇게 보면 “그 대장 禰植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로 해석되므로,
『신당서』에서 “그 장군 禰植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10년 서안에서 예씨(禰氏)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당시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아들 예소사(禰素士)와 손자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함께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 가운데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인 예식진이 의자왕을 잡아 소정방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던 의자왕이 스스로 항복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이 배신한 부하에게 사로잡히자 자결을 시도했다.”라고
서술했습니다만,
사실 그런 기록은 어떤 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2. 예식진에 대한 평가
예식진이 나라를 팔아먹을 당시 당시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의자왕이 웅진성까지 도피하는데 성공했지만,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승리하고
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웅진성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식진의 배신을 그 당시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할 순 없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쳐들어와 악전고투 끝에 더 버티기 어렵게 되어 항복한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왕을 사로잡아 항복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군이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고작 10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적어도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 백제 지방의 지원군들의 호응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고구려와 왜국 또한 백제를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적 압박은
소정방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정방의 당군은 보급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속전속결하지 않는다면 크게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볼 때,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의자왕의 편이었습니다.
예식진의 이런한 배신은, 질 싸움인 줄 알면서도 나갔던 계백의 5천 결사대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식진은 배신의 대가로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대장군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식진의 배신이 합리화될 수 없는 까닭은,
나라가 망국의 상황에 처했다고 나라를 팔아넘긴 행동이 결코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네. 답변 감사드립니다.
진정한 위인은 위기에서 빛이 나는 법인데, 위기에서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식진!
흑치상지,..
설 명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꾸벅~~
장박사의 명쾌한 해석을 들으니 감사합니다. 백제의 멸망에 대하여는 고려도 마찬가지이지만 정확한 내용이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예식에 대한 학계의 자세한 상황설명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예식의 반역행위는 명백합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의 역사적 사실을 한 두 사람의 반역자에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객관적인 이해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박사는 신라의 삼국통일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신채호는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포로로 잡힘을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임자의 소행으로 해석했습니다만 이는 그가 여순 감옥에서 자료도 없이 기억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예식이란 인물
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백제 멸망론에 대한 논의가 더 깊이 있게 논의되기를 희망합니다. 후대의 이완용에 빗대는 것은 올바른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