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약속으로 멀리 길을 잡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곳을 찾다보니
신흥사로 가기로 햇는데 여여월님네는
한재 미나리깡에 고기 지글지글 꾸워 묵으로 간다네
약만 잔뜩 올려 놓코 맛나게 드시고 오셧나 몰러융~
울산 북구 함월산 신흥사(新興寺)
신흥사는 635년(신라 선덕여왕 4) 3월에 명랑조사(明朗祖師)가 창건하였으며,
당시의 명칭은 건흥사(建興寺)라 칭했다고 전한다.
신라시대 건흥사의 창건주가 호국불교를 지표로 삼은 명랑조사였다는 사실을 통해,
그 후신인 신흥사가 사천왕사와 같이 호국도량으로 창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신흥사는 울산지역에서 승군을 동원한 유일한 사찰로서,
울산지역 승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근대까지 그 사세를 유지하던 신흥사는 또 한번의 시련기를 겪게 된다.
신흥사가 자리한 함월산은 울산지역의 높은 산으로,
6.25사변 당시 특히 남부군 남도부의 활동지였다.
천관녀 설화 天官女 說話
신라 제일의 각간(角刊) 김유신(金庾信)이 젊어서
가까이한 천관(天官)이라는 여인에 얽힌 전설이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술 파는 계집의 집에 드나든 일이 있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이것을알고 매우 걱정하여 하루는 곁에 불러 앉히고
엄하게 훈계를 하였다.
어머니가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 늙은 나는 오직 네가 장성하여 가문을 빛내주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밤낮으로 천한 어린애들과 어울려 음방(淫房 .. 창녀집)과
주사(酒肆 ..술 파는 집)에 출입하고 있느냐 ?'고
울면서 김유신을 책망하였다.
그때 김유신은 비로소 미몽(迷夢)에서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그런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김유신이 놀이를 갔다가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고 오던 말이 멈추어서서 고함을 지르므로
벌써 집에 도착하였는가 하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집은 자기의 집이 아니라 전날에 드나들었던 천관(天官)의 집이었다.
이것은 말이 전날에 다니던 집이라 길이 익은 까닭에
길가에 잇는 처놘(천관)의 집으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김유신(金庾信)은 노(怒)하여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이고 말안장도 그 마당에 내버린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집 문을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천관(天官)은 뜻밖에 이와같은 변을 만난지라
놀라 까무라쳤다가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린 뒤 말없이 탄식하다가
김유신(金庾信)을 원망하는 노래 ' 원가(怨歌) '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노래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와같은 김유신과 천관녀 사이에 얽힌 사랑 이야기는
민간설화(民間說話)로 전하는 것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김유신(金庾信)에 관한 기록에는 천관녀(天官女)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1, 열전 제1 김유신 상(上)에 의하면,
유신(庾信)이 화랑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장차 삼국(三國)을 병합할 웅지(雄志)를 품고 있었는데,
건복(建福) 29년 (612년)에 이웃나라의 침략이 날로 극심하여
공(公)이 더욱 비장한 마을을 품고 혼자서 보검(寶劍)을 들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中嶽)에서 맹세하듯이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리어 보검(寶劍)에 영기(靈氣)를 주었다 '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천관(天官)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이때의 천관신(天官神)은 도가(道家)의 삼관신(三官神) 즉,
천관(天官), 지관(地官),
수관(水官) 가운데 하나를 말함인데,
두 명칭 사이이 관련성은 알 수 없다.
천관(天官)이 죽자 김유신(金庾信)이 그 영혼(靈魂)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집 자리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하였다고 하며,
또한 자기가 탔던 그 말의 목을 내리쳐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불렀는데,
뒷날 사람들이 이르기를 김유신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큰 업(業)은
그 참마항(斬馬巷)에서 움텄다고도 전하여진다.
천관사(天官寺)의 창건 연유가 이와같이 애절한 연정(戀情)의 역사가 되어
고려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이공승(李公升 . 1099~1183)이 이곳 천관사터를 찾아와서
천관사(天官寺)라는 시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천관사 옛 사연을 들으니 처연하다
정 많은 공자가 꽃 아래 놀았더니
원망을 품은 가인(佳人)이 말 앞에 울었네
하인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을 더하였던고
남은 한 곡조의 가사가 묘하여
섬토(蟾兎 .. 두꺼비와 토끼 )가 함께 산다는 말
만고에 전한다.
서거정(徐巨正)이 김유신(金庾信)의 묘 앞을 지나면서
' 과유신묘 (過庾信墓) '라는 시문을 남겼다.
이 시구(詩句) 속에 김유신과 함께 그 이름이 전하는 천관녀(天官女)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천관사고지하처 天官寺古知何處
만고아미성자수 萬古蛾眉姓字隋
천관사 오래이니 지금 어디멘고
만고에 아름다운 여인 그 이름이 김유신 따라 전하고 있네
첫댓글 미나리밭에는 장화가 없어서 안가고 배추밭으로 가서
놀다가 왔지요. 그림공부도하고 많이 웃고 왔지요.
신흥사와 김유신장군에 얽힌신화가 재미있네요.
동요는 수련님 들으라고 배려하신것 같트네요.
수련님 아가랑 듣고 한숨 자세요. 아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뽀로로~~
저도요 천관사와 김유신장군 일화까지 잘보고.....
아가들 노래도 잘듣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