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론(南仁樹論)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이 가사는
일제 강점기인 1938년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 첫 부분이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잃어버린 옛 사랑을 그리워하는 정경이 마음 속에 그려진다.
남인수가 1940년에 발표한 '울며 헤진 부산항'도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그 시절 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 보는 연락선 난간 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식민지 조선의 부산항과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관부 연락선(關釜 連絡船) 뱃머리에 서서
방금 전 연인과 헤어진 부산항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별을 슬퍼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세상사 여러가지 일 중에서도 사랑하는 남녀 간의 이별만을 콕 집어서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다'며 이별의 아픔을 하소연하는 것도 재미있으려니와
연락선 난간 머리에 비치는 달빛을 '흘러왔다'고 표현해서
차갑고 무심한 달빛에 부드러움과 은은함, 따듯함을 입혀준 감성도 돋보인다.
남인수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했던 191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원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이 최창수였으나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개가하면서 강문수로 호적에 올렸으며
가수로서 남인수란 예명을 사용할 때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웠다.
진주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3년간 공장을 전전하며 공원생활을 하다 돌아온 강문수는
가수가 되고 싶은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1935년 어느 날 중학생복 차림의 17세 소년이 서울 '시에론'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린다.
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일하고 있던 박시춘은
가수가 되게 해달라며 사무실에 찾아온 까까머리 학생복 차림의 강문수에게
자신의 기타반주에 맞춰 일본의 유행가를 불러보도록 시켜보았다.
강문수에게서 가수로서의 소질을 발견한 박시춘은
그에게 훗날 '애수의 소야곡'으로 크게 히트할 악보를 주고 노래연습을 시켰다.
강문수는 박시춘과 함께 곧 '오케' 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고
남인수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박시춘.남인수 명콤비는
우리나라 가요사를 빛낼 수 많은 명곡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공전의 대히트를 거듭하였다.
1930년대 후반 혜성과 같이 나타난 남인수는 준수한 외모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미성,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구성진 창법으로
일약 최고 인기가수가 되었다.
그의 인기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과 더불어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며 특히 화류계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유행가는 시대의 거울이라고도 한다.
남인수가 부른 1000여 곡의 유행가를 통해
우리는 근세 100년 한국사의 편린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남인수 가요에 자주 나오는 '옛사랑' '이별' '유랑' 등
슬픈 노랫말들은 단순히 남녀간의 애정사를 떠나 나라 잃은 설움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태평양 전쟁의 병참기지화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강제 징용과 군입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조선인들을 전장으로 내몰며 침략전쟁에 광분하고 있었다.
남인수도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천황을 칭송하고
일본군 입대를 독려하는 '혈서지원' '그대와 나' 같은 군국가요를 불러야 했다.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남인수가 해방 후인 1947년 부른 '가거라 삼팔선'에서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했고
1954년 부른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서는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은 젊은이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피난생활의 고단함을 풀어내고 있다.
천재는 요절한다더니
1962년 남인수는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인 44세 젊은 나이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머리 맡에는 오랜 친구이자 연인인 가수 이난영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켰다.
남인수는 오래 전에 갔어도 달빛 비치는 창가에는 오늘도 '애수의 소야곡'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