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닷의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6-31장은 모두 욥이 하는 얘기입니다. 이제 친구들의 얘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의 지혜는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조롱하는 욥
2-4절은 욥이 빌닷을 조롱하는 투로 말을 합니다. 빈정대는 말투, 비꼬는 말투입니다. 2절을 봅시다.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이것은 실제적으로 그렇게 도움을 주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조롱하는 말투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지금 욥 자신이 ‘힘없는 자’이고 ‘기력 없는 팔’인데 이들은 욥을 전혀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실제적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들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고 했습니다. 이 역시 조롱하는 말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 친구들은 욥에게 지혜가 없다고 하고 자신들은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욥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욥에게 조금도 지혜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욥에게 어떤 지혜도, 어떤 지식도 주지 못했습니다. 지금 빌닷이 욥을 돕겠다고 하는 말, 욥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말은 무익한 노력이라고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봅시다.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욥은 빌닷의 주장이 무의미한 주장임을 얘기합니다. 만일 빌닷이나 다른 친구들의 얘기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욥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가지고 여러 가지 얘기들을 했지만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욥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그에게 임한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을 욥은 친구들로부터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참된 도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세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어떤 문제에 대하여 물으면 ‘기도해보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허한, 무책임한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세워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풍성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5-14절은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얘기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사람의 인식을 넘어서는 일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사람의 인식의 한계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5절에 “죽은 자의 영들”을 얘기하고 6절에 죽은 자의 세계인 ‘스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영역까지 다 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이 죽은 자들의 세계를 보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있는 영역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얼마나 세밀하게 다 보고 계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7절에 하나님은 ‘북쪽’을 허공에 펴시고 땅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매다십니다. ‘땅’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으셨고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8절에는 아주 시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구름이 찢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9절에 보름달의 밝은 빛을 구름으로 가리십니다. 10절에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수평선이나 지평선도 하나님께서 그으십니다. 11절에 하늘 기둥(‘산들’일 것)도 하나님께서 흔드십니다. 12-13절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땅에서 보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12절에 ‘라합’을, 13절에 ‘날렵한 뱀’(리워야단)을 얘기합니다. 고대 국가들은 나름대로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도 창조 신화가 있는데 이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이 라합입니다. 이 라합이 바다를 흉용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날렵한 뱀은 바다 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깨뜨리시고 무찌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든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얘기하고 14절 같이 얘기합니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욥은 지금까지 자신이 언급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일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하나님의 행사는 아는 것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소리라는 것은 속삭이는 소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큰 능력을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은 한 권의 큰 하나님의 책입니다. 찬송가 566장은 어거스틴이 쓴 것인데 2절에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다.”고 했습니다.(This world is like a picture book) 이것은 ‘그분의 사랑을 나에게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우리가 다 알 수 있습니까? 이 책을 얼마나 알 수 있습니까? 알면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다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다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배우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동안 이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세계의 학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자세이고 지혜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워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입니다. 목자의음성교회 이남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