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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탄생
1876년 강화도조약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한국에 개항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한국은 개항하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는 한국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일본은 낭인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워 한국을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일본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190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우고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한국에 불법으로 군대를 상륙시키고 독도를 빼앗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열강들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의 보호령으로 삼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强制倂合]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폐위하고 한국의 내정권[內政權] 마저 박탈하는 정미 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리고 결국 1910년 일본은 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고 식민지로 만들고 말았다.
최초의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는 이름으로 개소되어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의병, 계몽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를 수감하였던 대표적인 곳이다.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되는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과거 고통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의 자주 독립정신과 자유·평화수호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는 원래 조선 초기부터 수도 후보로 거론되던 명당이었다.
한양에 수도가 정해진 뒤에는 서대문 밖 교통의 요지로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영은문(迎恩門)이 있었고, 1896년에는 영은문을 허물고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독립문이 세워졌던 곳이다.
일제는 이곳에 일본식 감옥을 신축하였다.
원래 종로에 위치해 있던 경성감옥을 서울 초입의 주요한 길목인 서대문으로 옮겨 감시와 통제, 억압의 상징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또한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 바로 옆에 식민통치의 상징인 형무소를 설치하는 폭거를 감행한 것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침략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1908년 대규모 감옥인 경성감옥을 지었다.
그러나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1912년에 마포 공덕동에 다른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23년 5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키고 처형하였다.
일제강점기 수감 실태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는 경성감옥,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면서 증축을 거듭하였다.
1908년 개소 직후 수감인원 500여 명의 규모로, 일제의 침략에 무력전쟁으로 맞섰던 의병장들이 주로 수감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의열 투쟁, 비밀결사 활동의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1919년 3·1독립 만세운동이후에 급격히 늘어난 독립운동가들로 3,000여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수감되었다.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임지정부요인, 국내외 비밀결사 요원, 각종 의열투쟁, 문화·사상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활동의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한편 1930년대에는 경성구치감이 별도로 설치되어 사상범 예방 구금령에 의한 전대미문의 소위 범죄가능자 사전 수감이 이루어져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의 최 일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 침략의 도구 감옥 1 : 본감·분감제
일제는 한국전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인을 일반인과 분리, 감금하고 탄압할 시설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1907년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을 강탈하고 감옥 운영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의 통제를 위해 1908년 4월 전국 8개 주요 도시에 본감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해 11월 8개의 분감을 추가 설치하여 전국에 16개소의 감옥을 만들게 되었다.
본감 | 경성 | 공주 | 함흥 | 평양 | 해주 | 대구 | 진주 | 광주 |
분감 | 인천 춘천 | 청주 | 경성 원산 | 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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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 전주 |
1-2-3 한국 침략의 도구 감옥 2 : 한국의 감옥화
1-2-4 서대문형무소 주요 설계 도면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
1945년,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이름을 바꿔 계속 형무소로 기능했다.
1961년에 서울교도소로,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바꿨고,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서울구치소가 옮겨가면서 서대문형무소는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멈췄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역사적인 유적으로 보존되었으며, 1992년 8월 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여 민족 수난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광복 이후 수감 실태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뀌면서 한국정부의 감옥으로 1987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기간 이승만 독재와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면서 이에 항거하는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수감되었다.
독재정권에 의해 날조된 진보당사건, 인혁당사건, 동백림사건 등의 피해자들이 이곳 형장에서 사라졌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1987년 서울구치소의 이전에 따라 서대문형무소는 도심 한가운데의 흉물처럼 여겨져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독립운동 후손단체와 역사학자들의 반대로 ‘교훈의 현장’으로 보존하자는 논의로 일부 옥사를 그대로 보존하여 1992년 독립공원으로 단장되었다.
이후 서대문구의 주도로 독립운동가의 선양·발굴과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육성하고자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현재에는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서울시내 유일의 독립운동사 전문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2층 민족저항실
의병 전쟁1
의병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민군(民軍)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많은 외침을 당했고, 그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외적과 맞서 싸워왔다.
특히 외세의 침탈로 국권이 위태로웠던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군에 저항했다.
조선 말기의 의병은 크게 3차에 걸쳐 일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1차 의병(을미의병),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일어난 2차 의병(을사의병),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3차 의병(정미의병)이 그것이다.
이러한 의병들의 투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의병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독립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의병장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이끌고 싸웠던 의병장들 중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던 분들이 많다.
1907년에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했던 의병장 이인영, 허위, 이강년, 이은찬 등이 대표적이다.
-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의병장이다.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위해 대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일제의 끈질긴 추적으로 1909년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허위는 13도창의군의 군사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서울진공작전 당시 선봉으로 동대문 근방까지 진출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의병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908년에 피체되어 10월 21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이강년은 충청도 지역의 의병장으로 13도창의군 호서창의대장으로 활약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자 강원도·경상북도 일대를 무대로 의병 활동을 펼치다가 1908년에 피체되어 처형되었다.
-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의 의병장으로 13도창의군 결성을 주도하였다.
서울진공작전 이후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였으나 1909년에 피체되어 6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고익규, 김구학, 김경운, 김덕순, 김동수, 김병일, 김선일, 김수민, 김순옥, 김언세, 김영준, 김영권, 김종근, 김종철, 김태산, 김헌경, 김헌식, 김현국, 김희국, 나봉산, 남상목, 목자상, 박광천, 박문술, 박복인, 박인찬, 박홍석, 박화준, 백수영, 사문성, 서운선, 신대규, 신대룡, 신석규, 신창룡, 신현구, 여중룡, 오상원, 우윤구, 유덕삼, 유명호, 윤국범, 이강년, 이교영, 이근배, 이능권, 이복근, 이성덕, 이성서, 이완보, 이은찬, 이인영, 이완보, 이중백, 이치옥, 임도돌, 임영화, 정경태, 정용대, 정영운, 한정만, 허위
의병전쟁 2
일제의 악랄한 남한 대토벌작전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전국 13도의 의병들이 모여 만든 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을 펼쳐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에 걸쳐 전라남도 일대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악랄한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일제의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양민과 민가까지 살육·방화·약탈되고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의병장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전해산 등 23명은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탄압을 피해 중국이나 러시아로 옮겨간 의병과 의병장들은 그곳을 개척하여 독립운동기지로 만들고 저항을 계속해갔다.
이렇게 의병을 계승한 독립군은 1910년에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에도 계속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이 되어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순간까지 계속 싸웠다.
대한제국 역사 속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애국지사들이 의병 항쟁에 나서고 고종 황제가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으나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방해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야만 했다.
1907년에는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자행하였다.
무력을 앞세워 한국인을 억압한 일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고 민족 문화를 말살하는 등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 항쟁의 역사,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맞서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병과 독립군들은 무장 투쟁을 전개했고, 애국지사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의 요인과 기관을 처단·파괴하는 의열투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항일 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1919년에 이르러 일제에 맞서 전 민족이 저항의 의지를 표출한 3·1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날조된 음모, 투옥, 탄압(105인 사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애국지사들을 탄압할 기회를 노렸다.
1910년 11월, 안명근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밀고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안명근을 고문하여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서북지방의 애국지사 160여 명을 체포하였던 안악사건을 조작했다.
안악사건으로 일부 신민회 회원이 체포되자 일제는 신민회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안명근 사건을 확대·조작하였다.
신민회는 총독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전국적으로 6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부당한 재판 끝에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의열투쟁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무단통치를 시작한 일제에 맞서 애국지사들은 일제에 협력하였던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식민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의열투쟁을 시작했다.
의병이나 독립군의 항일 투쟁은 대규모 조직을 갖추고 일본군과 대결하는 군사적 항쟁이었던 데 비해, 의열투쟁은 개인, 혹은 소규모의 비밀결사가 일제의 요인이나 통치기관을 암살·파괴하는 것이다.
의열투쟁은 일제가 대비할 수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의열투쟁을 가장 두려워했다.
* 이재명 의거
이완용은 을사늑약, 정미7조약 등을 체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대표적인 매국노였다.
이재명 의사와 여러 동지들은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칼로 수차례 이완용을 찔러 큰 부상을 입혔다.
체포된 이재명 의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강우규 의거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강우규 의사는 1919년에 조선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거행하였다.
사이토 총독 처단은 실패하였으나 함께 있던 일제 협력자 수십 명을 사상케 하였으며, 체포된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송학선 의거
송학선 의사는 보통학교도 중퇴하고 고용살이를 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안중근 의사를 동경하던 송학선 의사는 1926년에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차량을 오인하여 총독부 요인 3명을 처단하였다.
체포된 송학선 의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10년대 비밀결사
애국지사들은 독립을 목적으로 여러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교육·산업을 육성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며 친일파나 일제의 요인, 식민 통치기관 등을 암살·파괴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1907년에 결성된 최대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필두로 대동단,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 대한독립의군부 등이 결성· 활동하였다.
1919년에 만주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조직적인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에 많은 타격을 주기도 했다.
* 광복회
광복회는 1915년 7월, 경북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또한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도 전개하였다. 1918년에 조직이 발각되어 채기중, 강순필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 27결사대
27결사대는 1919년,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7인을 주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결사대장 이탁은 그해 3월, 고종의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매국노들을 사살하려 하였으나 순종 황제가 가까이 있어 실행하지 못하고 매국 7적 성토문과 격문을 배포하였다.
* 의열단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비밀결사이다.
일제에 대한 의열투쟁을 가장 선명하게 지향한 대표적인 단체로 곽재기 의거, 나석주 의거 등 많은 의거를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주었다.
의열단원 곽재기, 구여순, 이성우 등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3·1독립만세운동
* 민족의 외침, 3·1독립만세운동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한국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항거를 시작했다.
각계각층의 민족대표 33인은 고종 황제의 장례식이 있던 3월 1일을 기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이와 함께 수많은 민중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수백만 명의 민중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섰다.
일제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민족적인 항거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지배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또한 3·1운동은 한국 민중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보여준 쾌거였다.
민중들의 의지를 확인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그리고 전 민족의 항일 의지는 상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되었다.
* 3·1운동과 서대문형무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들은 즉시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가혹한 심문을 받은 뒤 5월 6일, 서대문감옥 독방에 수감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의연하게 수감 생활을 하며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양한묵, 박준승, 손병희는 가혹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인해 순국하였다.
민족대표뿐 아니라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한 수많은 민중들도 서대문형무소로 끌려왔다.
박은식의 기록에 따르면 4만 명 이상이 구속되었다고 하며, 서대문형무소에도 3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3·1독립운동 관계자로 서대문감옥에 수감중인 수효는 26일 현재 2,470인으로 미결 1,791, 확정상고 중 27인이다.” (매일신보 1919. 5. 29)
메모리얼 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애국지사들은 현재 수형기록표가 남아 있는 것만 5천여 명에 이르며, 그밖에도 알려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알려져 있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곳은 수형기록표 속 5천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기억하고, 기억되지 못한 이름 모를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곳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3·1운동을 계기로 애국지사들은 한국을 대표하고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각지에서 설립된 임시정부를 모두 통합하여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 자리를 잡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켜 나갔다.
연통제를 실시하여 국내의 독립운동 연락망을 조직하였으며, 외교·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상하이를 떠나야 했던 임시정부는 중국 각지를 떠돌다가 1940년에 충칭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광복군을 창설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이룰 때까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일제의 끈질긴 추격을 받았다.
그래서 임시정부를 위해 국내외에서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였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다.
* 1920년대 비밀결사활동
철혈광복단 : 간도 15만원 탈취 사건
1919년에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 등이 결성한 철혈광복단은 1920년 북로군정서의 특파원으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간도 일본영사관으로 이송중인 현금 15만원을 탈취하는 의거를 거행하였다.
이후 체포된 단원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공명단 : 우편수송차 습격 사건
1926년에 결성된 공명단은 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를 위해 1929년, 현금을 수송하던 일제의 우편수송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탈취하였다. 공명단원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는 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두 번째 민족저항 6·10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장례일을 계기로 3·1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가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자, 천도교 등이 합세한 연합 운동으로 준비되었다.
장례일 당일, 학생들은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을 살포하고 일제히 독립 만세를 불렀다.
서울에서만 30만의 민중들이 이에 합세해서 만세를 불렀고 지방 곳곳에서도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210여 명을 구속하였고 11명을 주모자로 구속기소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학생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간도공산당 사건
1920년대 간도에서는 간도공산당이 조직되어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27년 10월에 항일 시위를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검거된 이래 1930년 6월까지 모두 4차에 걸쳐 간도공산당의 항일 투쟁이 이어졌는데, 1930년의 제4차 간도공산당 사건은 간도 전역에 걸쳐 1달 동안 격렬한 항일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를 적색 5월이라고 부른다.
5월 30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시위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유죄 판결을 받고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또한 이동선, 박익섭 등 20여 명은 처형되었다.
원산 총파업
원산 총파업은 1928년 9월, 라이징선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에서 발단하여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지속된 국내 최대의 파업이다.
원산 인구의 30% 이상이 참가했던 총파업 기간 동안 국내외의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자들은 격려 전문을 발표하고 동정금을 보내는 등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원산 총파업은 노동자들과 시민이 일본인 자본가를 상대로 벌인 항일운동이었으며 민중 의식의 성장을 보여준 민족운동이었다.
경성트로이카
조선공산당은 1920년대부터 지속되었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은 몇 번이나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어야만 했다.
1930년대에는 이재유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계속되었다.
1933년에 결성된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을 주축으로 하여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4년에 대대적인 검거로 와해되었으며 이후에도 이재유는 경성콤그룹, 경성준비그룹 등을 결성하여 노동운동을 지속하다가 1936년 12월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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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해 하나로! 신간회
신간회는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을 표어로 결성된 민족운동 단체이다.
여러 세력들이 연합하여 이끌어낸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1927년, 통일 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신간회는 비록 총독부로부터 합법적으로 인정된 사회단체로 탄생했지만, 결성된 이후에는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시간회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민중대회를 계획하자 일제는 조병옥, 홍명희, 허헌 등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고 민중대회를 봉쇄하였다.
이 사건으로 세력이 약화된 신간회는 좌우의 대립으로 끝내 1931년 5월 해산하고 말았다.
* 수양동우회 사건
수양동우회는 1926년에 결성된 사회단체이다.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통합하여 결성된 수양동우회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수양동우회의 활동을 주시하였고, 1937년에 항일 의식이 담긴 문건을 찾아내 수양동우회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안창호는 수양동우회의 중심인물로 지목되어 검거되었으며, 도합 181명이 검거, 42명이 재판을 받았다.
4년에 걸친 재판 끝에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안창호, 이기윤, 최윤호가 사망하고 일부 인물들은 변절하고 말았다.
* 성서조선 사건
『성서조선』은 기독교 사상가 김교신이 1927년에 창간한 동인지이다.
김교신과 여러 동인들의 무교회주의 신앙 고백과 더불어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 민족적 시련에 대한 종교적 극복 등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일제와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였는데, 1942년 3월호에 실린 “조와(弔蛙 : 죽은 개구리를 조문하다)”라는 권두언이 민족의 소생을 부르짖었다는 구실로 폐간 조치되었다.
그리고 김교신·함석현·유달영 등 18명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강화해 나갔다.
1938년부터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한국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민족말살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제정하여 애국지사들을 마음대로 구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일제는 1942년에 민족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조선어학회를 탄압했다. 한글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33명이 체포되었다.
단파방송 청취사건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2년, 경성방송국의 한국인 직원들은 해외에서 단파로 전달되는 방송을 청취하였다.
“미국의 소리”와 “중경방송”이라는 단파방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비밀리에 송출하는 방송이었다.
경성방송국 직원들은 이들 방송을 은밀히 듣고 국내에서 숨죽이고 있는 애국지사들에게 전달했다.
일제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을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단파방송을 청취한 사실을 탐지하였다.
그 결과 30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성기석, 홍익범, 허헌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사형장 모형
이 구조물은 사적 324호 사형장의 지하를 재현한 모형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장소의 바닥에는 개폐식 마루판이 달려 있고 그 아래에 지하실이 위치한다.
애국지사들의 목에 동아줄이 걸리고 마루판이 열리면 지하실로 떨어지고 목이 졸려 사망하게 된다.
지하실에는 발판이 열릴 때 충격을 흡수하는 타이어가 벽에 붙어 있으며, 애국지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반출하는 출입구가 있다.
무너진 담장, 다시 찾은 역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애국지사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광복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는 이후에도 계속 감옥으로 기능하며 독재와 민주화라는 질곡의 역사를 걸어야 했다.
1995년, 서대문형무소는 식민지와 독재라는 폭력과 억압의 도구가 아닌, 민족 수난의 역사를 보존하고 후세에 자주 독립의 정신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중국의 여순감옥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민족의 성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독립운동 -> 제국주의에 대항한 ‘자유’, ‘평화’ 수호를 위한 인류보편의 인도주의 운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 목적 -> 인류의 자유! 평화!를 상기
관련 주요 시설 제주 평화박물관 여순감옥 아우슈비치
지하 고문체험실
서대문형무소의 지하 고문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신음해야 했다.
일제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자행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순국하거나 불구가 된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이러한 고문의 모습을 재현하여 일제의 잔혹한 실상과 애국지사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일제의 통치수단 고문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이후 총칼을 앞세운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인은 일본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그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라고 말하였을 정도였다.
헌병과 경찰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하면 심문할 때부터 잔혹한 고문과 구타를 자행했고 감옥에 갇힌 뒤에도 고문을 끊이지 않았다.
잔혹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상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불구의 몸이 되거나 옥중에서 순국하기도 했다.
물고문
물고문은 물속에 강제로 머리를 밀어 넣거나 코와 입에 물을 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고문이다.
물고문을 받으면 숨을 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와 입에 물을 부었고, 심지어 물에 고춧가루를 섞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취조실
일제는 고문을 통해 애국지사들의 의지력을 약화시킨 뒤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거짓으로 자백하도록 하기도 하고, 다른 애국지사들을 밀고할 것을 강요하였다.
서대문형무소의 고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특별범죄자로 분류되어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감방에 수용되었다.
수감 생활은 비인간적인 처우로 점철되었고, 수시로 고문이 이어졌다.
특히 애국지사들이 서로 은밀하게 연락을 하거나 만세를 부르는 등의 행동을 하다 발각이 되면 끔찍한 고문이 실시되었다.
고문의 흔적과 고통
고문은 애국지사들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잔혹한 구타로 찢기고 터진 상처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불결한 옥중 환경 때문에 곪고 썩어 들어가기 일쑤였다.
물고문을 받으면 폐 속으로 물이 들어가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고, 무사히 출소하여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고문 육성 증언
이병희(1918~ )
1918년 1월 14일 서울 출생
1933년 5월 종영방적주식회사에서 노동운동 전개
1936년 12월 피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4개월 옥고
1940년 북경으로 망명, 의열단에서 활동
1943년 9월 체포되어 이육사와 함께 북경감옥에 투옥
1944년 1월 11일 석방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국내 유족에게 전달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이규창(1913~2005 )
1913년 3월 28일 중국 퉁화현(通化縣) 출생
1930년 남화한인청년동맹에서 활동
1935년 3월 이용로 사살 의거를 결행, 체포됨
1936년 4월 24일 13년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1939년 8월 옥중투쟁으로 형기가 추가되고 광주형무소로 이감
1945년 8월 광복으로 출옥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 수훈
손톱찌르기
손톱찌르기는 가늘고 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이다.
손톱뿐 아니라 입 속을 찔러 고통을 주기도 했다.
지옥의 형상들(특수영상)
관람자들이 직접 고문을 당하고 있는 애국지사들이 되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독방(특수영상)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특별범죄자로 분류하여 지하의 독방에 감금했다. 그리고 가혹한 신문과 고문을 자행하였다.
먹방
먹방은 빛이 없어 먹물처럼 깜깜한 방이라는 뜻이다.
서대문형무소의 보안과청사 지하에 있던 일명 ‘먹방’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방이었다.
이불이나 돗자리도 없었고 변기도 없어 방 구석의 배수로에 용변을 보아야 했다.
벽관
벽관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관과 같은 형태를 한 고문도구이다.
벽에 세워진 벽관에 사람을 넣고 문을 닫으면 앉을 수도 없이 선채로 계속 있어야 했다.
중앙사
형무소의 운영
일제강점기 한국의 모든 정치권력은 조선총독부로 집중되어 있었다.
삼권분립과 같은 민주적 원칙은 무시되었고 사법기관인 형무소 역시 조선 총독의 관리 하에 있었다.
조선 총독은 감옥의 설치·폐지의 권한을 가졌으며, 실질적인 형무소의 감독은 총독의 명을 받아 각 지역의 공소원 검사장이 대행하였다.
형무소의 간수를 비롯한 관원들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30년부터 하급 관원들에 한해 한국인의 채용을 점차 늘렸으나, 관리직에 해당하는 전옥이나 중간관리직인 간수장은 계속 일본인이 장악하였다.
서대문형무소의 조직
일제강점기의 모든 형무소는 조선총독의 관리 하에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종로·대평동 출장소, 영등포·인천·춘천 분감을 관할에 두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다른 형무소와 달리 구치감이 설치되었는데, 이를 관할하기 위해 구치과가 있었다.
1941년에는 예방구금소가 부설되기도 했다.
형무소의 간수들
간수는 형무소의 실무를 맡은 직원이다.
간수들은 1918년에 설치된 간수교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에 형무소에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전옥보 및 간수장의 명령을 받았다.
간부나 실적이 우수한 간수는 일본의 형무관연습소로 유학·견학을 보내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261명(1937년 기준)의 간수가 재직하고 있었으며, 1941년 기준으로 전국에 걸쳐 2,291명에 이르렀다.
간수와 감시 도구
서대문형무소의 옥사는 간수들의 감시 편의를 위해 파놉티콘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지어진 옥사는 간수소에서 한눈에 감시가 가능했다.
옥사뿐 아니라 형무소의 주변에는 수감자들의 탈주를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벽돌담과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간수들은 엄격한 교육을 받고 총기도 소지하고 있었다.
수감자 전향 교육
일제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교회소를 설치하고 전향 교육을 실시했다.
1938년에 실시한 계급적 누진처우 제도가 실시되어 수감 생활 태도에 따라 누진적으로 처우를 온화하기도 하였는데,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러한 규정도 적용되지 않았다.
생활의 기록
* 김광섭 「나의 옥창일기」
기상 나팔소리에 뛰어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
(중략) 후딱 벗고 문앞에 선다.
무명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떡 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듯 찬바람을 혹 느끼며 창창한 대한천(大寒天)에 뛰어든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하- 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오, 아- 하는 것은 입에 문 것도 없다는 증거다. 감방과 공장 사이로 조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다니다간 벼락이 떨어진다.
*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 한용운 「눈오는 밤」
四山圍獄雪如海 [감옥 주위 사방 산에 눈이 잔뜩 쌓였는데]
衾寒如鐵夢如灰 [쇠처럼 찬 이불 속서 꾸는 꿈은 싸늘하네]
鐵窓猶有鎖不得 [쇠창살도 꽉 닫히지 않은 틈이 있는 탓에]
夜聞鐵聲何處來 [한 밤중에 어디선가 찬 소리가 들려오네]
5-2-2 옥중체험기
* 김구 「백범일지」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쎈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내어민다.
* 여운형
감옥소 덕에 얻은 병이 다섯 가지이다.
맨 처음 상해에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때 고막이 상하여 한쪽 귀는 아주 병신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 개가 그만 부스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잇몸 전체가 상하고 염증을 일으켜 퍽 괴로웠다.
옥에 갇힌 지 며칠 못가서 신경통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통에 머리와 수염이 이렇게 하얗게 세어 버렸다.
코 아래 수염은 흰털이 많기는 하지마는 이전 모양으로 다시 길러 버리려고 생각한다.
신경 관계인지 불면증도 대단하였다.
하루 3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어 퍽이나 애를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안에서는 누구나 다 앓게 되는 치질에 걸리어 퍽 고생하였다.
* 지봉하
저는 얼마 전까지는 아주 건강한 몸으로 지냈으나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몸이 점점 쇠약하기 시작하여 수개월 전부터는 책을 읽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괴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형무소의 의식주형
* 수감자들의 복장
형무소 내 수감자는 미결수와 기결수로 분류된다.
미결수는 형 확정 이전의 대기자로 자기 의복 또는 청색옷을 입었으며, 판결을 받은 기결수에게는 적색의 수인복이 지급되었다.
동절기에는 면으로 두텁게 만든 옷이 지급되었고, 하절기에는 얇은 옷이 지급되었으나 추위와 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수인복은 기직공이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제작되어 전국의 형무소에 보급되었다.
옥중기록
* 수감자들의 식사
수감자들의 식사는 취사를 맡은 수감자들이 취사장에서 직접 만들어 배급하였다.
서대문형무소의 식사는 콩 50%, 좁쌀 30%, 현미 20%로 지은 밥으로 1일 3회 배급되었다.
수감자들의 형량과 노역의 강도에 따라 등급을 나눠 밥의 양에 차등을 두었는데, 통제를 따르지 않거나 전향하지 않은 애국지사들에게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을 배급하였다.
식사 장소는 아침·저녁은 주로 감방에서, 점심은 공장에서 먹었다.
* 옥사 안에서의 생활
옥사의 감방에는 6~7명이 함께 생활하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통풍과 채광이 나쁜 감방 내부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워 생활하기가 매우 열악하였다.
일본인 간수들은 애국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여름에는 문을 닫고, 겨울에는 열어 더욱 고통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겨울에는 난방도 거의 없고 수감자 수에 비에 턱없이 부족한 이불 때문에 수감자들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괴사하기도 했다.
공작사
공작사의 설립과 변천
제13옥사(공작사)는 1923년에 지어진 건물로 수감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을 시키기 위해 지어진 공장 건물이다.
이곳에서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다.
기직공에서는 포목, 연와공에서는 벽돌을 생산하였으며,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에는 군수용품을 생산하여 조달하는데 강제 동원된 곳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철근콘크리트가 사용된 2층 벽돌 건축물이다.
공작사에서의 강제노역
감옥 내 노동의 성격은 고역의 성격이 첨가된 지루한 수공업 노동이 주를 이룬다.
근대 감옥 도입 직후의 그물뜨기, 봉투 붙이기와 같은 단순 작업 이외에도 재봉, 칠기, 지물과 같은 생활용품 제작이나 인쇄, 벽돌, 제재(製材), 석세공 정도의 수공업적 기능을 몸에 익히는 일이 감옥 노동의 주된 내용이었다.
노역에 대한 기록
* 김광섭 - 나의 옥중기
간수가 대(臺)위에서 쏜살같이 23번! 무얼 생각해?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시작한다.
궤짝만한 상(床)에 붙인 유리 위에 도안을 놓고 조개껍질에 그려놓은 선을 따라 톱질해서는 반지(半紙)위에 붙인다. 이것이 초보자인 내가 종일 하는 일이다.
* 김구 - 백범일지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고 축항공사장에 출역을 한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길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다.
*수형자 동작시간표
수형자의 일과 시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행동의 반복 훈련 과정이다.
징역이 부과된 일반적인 수형자의 경우 일상생활의 리듬은 다음과 같다.
1) 기상나팔(또는 간수의“기상!”외침/종소리)
2) 뛰어 일어나 이불을 개고 세수 / 3) 점검
4) 아침 식사:공장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
5) 나체로 문 앞에 선다
6) 간수가 문을 열면 인사
7) 무명 수건을 물고 달린다
8) 공장 입구에서 허들을 넘으면서 입을 하-벌리거나 자신의 번호를 큰소리로 외친다 : 몸에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9) 간수에게 인사하고 발바닥을 닦으며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
10) 작업복을 입고 라디오 체조:10분 정도
11) 소회(연설):10분-20분 정도
12) 작업 / 13) 오전 휴식 15분 / 14) 작업 / 15) 점심 식사
16) 작업 / 17) 오후 휴식 15분
18) 저녁 식사
19) 감방으로 이동
20) 간수가 문을 닫으면 무릎을 꿇고 숨을 고른다
21) 점검-문이 열리면 경례를 하고 나서 번호를 부르면 대답한다
22) 취침을 알리는 간수의 구령에 따라 취침
연와제작 노역
연와는 벽돌을 이르는 말이다. 탁지부 건축소 부설 연와제조소는 1907년 8월에 독일식 호프만가마를 도입하고, 9월에 기계식 성형기 및 부대시설을 갖춤으로써 기계식 벽돌생산이 본격화되었다.
경성감옥의 수감자를 교육시켜 벽돌제조에 투입함으로써 지속적인 품질향상이 이루어져 당시 시중 벽돌의 1/3 가격으로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민영 벽돌공장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생산된 벽돌에는 “京“ 자 무늬가 찍혀 있었으며 다수가 형무소의 건물을 짓는데 다시 사용되는 아이러니도 있었다.
기직과 양재봉공
서대문형무소의 기직공과 양재봉공은 포목과 의복을 생산하는 노역을 말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전국의 형무소에서 사용하는 재소자의 의복을 만들어 공급했다.
1921년 나고야 도요타 기직회사에서 구입한 동력방직기 스무 대를 구비하여, 오십 명의 인원으로 하루(열 시간) 평균 다섯 단의 직물을 개조했다.
◎ 야외 안내 사인
1,추모비 {Reverence Monument}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과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하신 선열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제에 의해 많은 애국선열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나 일제가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불태웠기 때문에 일부 고증된 선열들만 새겨져 있다.
앞으로 발굴 작업을 계속하여 추가 기재할 예정이다.
2,통곡의 미루나무 {The Wailing Poplar}
이곳의 미루나무는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된 것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국선열들이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한(恨)을 눈물로 토해낼 때 붙들고 통곡했던 나무로,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이름 지어졌다.
또한 사형장 안에 있는 또 한그루의 미루나무는 같은 시기에 심어졌으나 순국선열들의 한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3,사형장 {Execution Ground}
이 건물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전국에 투옥된 애국지사들이 사형당한 장소이다.
자주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선열들의 넋이 서려있는 사형장은 사전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사형장 주변에는 높이 5m의 벽돌담이 쌓여 있고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판 위에 교수형에 사용한 동아줄이 내려져 있다.
입구 쪽에는 사형집행 때 배석자들이 앉았던 긴 의자가 보존되어 있다.
4,시구문 {Corpse Removal Exit}
사형장의 바로 뒤에는 사형 집행이 끝난 뒤 시신을 형무소 밖의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 놓은 비밀통로가 있다.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폐쇄했으나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입구에서 40m를 복원하였다.
5,옥사 터 {Prison Building Lot}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갈 때 옥사는 15개동이었다.
이중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하여 제9·10·11·12·13옥사·중앙사·나병사를 보존하였다. 그 중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7일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
이 길의 양쪽에 위치한 부분은 미보존 옥사의 터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은 일제가 수감 중에 있던 애국지사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워낸 것이다.
벽돌의 한 면에는 ‘경성감옥’에서 제작된 것임을 표시하는 ‘京’ 자가 새겨져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이것을 영구보존하여 우리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 유관순 지하감옥
일제는 여사(女舍) 지하에 독방을 설치하고 비중 있는 애국지사들을 수용하여 가혹한 신문(訊問)과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그 뒤 1934년경에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감옥을 매립하였으나 학계와 독립운동 단체들의 건의로 1992년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복원하였다.
복원된 지하 감옥의 전체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도 한다.
◎ 통방 안내사인
타벽 통보법은 감옥의 벽을 두드려 수감자들끼리 의사소통하는 방법이다.
형무소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은 타벽 통보법을 통해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고 3·1절이나 경술국치일 같은 날에는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거나 파업하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었을 때, 독립운동가 김정련 선생은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는 도산에게 은밀히 타벽 통보법을 가르쳐 주다가 발각될 위기에 처했으나 정신이 나간 것처럼 꾸며 도산을 보호하기도 했다.
◎ 옥외 전시
1,옥사의 통풍구조
옥사는 2층으로 지어졌으며 각 감방마다 마루를 깔아 놓았다.
옥사의 통풍을 위해 옥사의 외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어져 있다.
위쪽의 구멍은 감방의 통풍구이며, 아래쪽의 구멍은 마루 밑 공간의 환기를 위한 것으로 마루가 습기에 썩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이다.
2,옥사의 화장실
광복 이후 서울구치소로 바뀐 서대문형무소는 각 감방에 화장실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방의 외벽을 허물고 화장실을 만들어 달아 놓았다.
이 화장실은 1992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하면서 옥사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철거되었으며, 그 흔적은 외벽에 뚜렷하게 구분되는 벽돌 색깔을 통해 알 수 있다.
3,독방의 배출구
독방에 감금된 수감자는 용변을 별도로 해결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독방에는 통풍구와 함께 화장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구멍이 설치되어 있었다. 구멍 밑에는 통을 두어 용변을 받았으며, 모범수들이 정기적으로 통을 비워주었다고 한다.
◎ 중앙사
중앙사는 1915년 제10옥사, 제11옥사, 제12옥사와 연결되어 옥사 전체를 감시하기 위한 기능을 갖는 건축물이다.
중앙사의 2층에는 강당을 두어 수형자들의 교육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축물의 전체적인 형태는 장방형에서 옥사와 연결되는 쪽의 모서리 2개를 잘라낸 형태이며 옥사와 연결되지 않는 쪽은 출입구 부분을 부분적으로 돌출시킨 형태이다.
옥사와 연결되지 않는 출입구 부분 역시 과거에는 제7, 8 옥사를 비롯한 현재에는 철거된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파놉티콘
파놉티콘(Panopticon)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일종의 감옥 건축양식을 말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건축양식으로 중앙에 위치한 감시소에서 모든 구역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중앙사에 위치한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2층의 옥사가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파놉티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감시에는 편리했지만 통풍과 채광에 좋지 않아 형무소 수감자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감옥이 비인간적이라 하여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한국에는 계속 남겨두는 비인간적 통치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 공작사
이 건물은 1923년에 지은 옥사로 투옥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던 작업장이다.
이곳에서는 형무소·군부대·관공서 등에서 필요한 관용물품(官用物品)을 만들어 공급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에는 군수용품을 생산하여 조달하는데 강제 동원한 곳이기도 하다.
한센병사
한센병사는 한센병을 앓고 있는 수형자를 격리 수용하기 위하여 1923년 지은 독립 옥사이다.
건물 내부 전면에 복도가 있고, 그 후면에 작은 옥방 2개와 큰 옥방 1개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 중앙 하단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안과청사
보안과 청사는 1923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대문형무소의 중심 건물이다.
원래 청사의 중앙부만 2층이고 좌우는 단층 건물이었으나 광복 이후 전체가 2층 건물로 증축되었다.
2010년에 백색 타일을 제거하고 적벽돌과 지붕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내부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방
독방은 애국지사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다.
일반 감방의 1/3 크기인 독방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열악한 화장실이 붙어 있다.
독방에 수감된 애국지사들은 다른 애국지사로부터 격리된 채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서대문형무소 간수
석부무일 石部武一
1927~1931 간수장
1933~1934 간수장
1935~1936 전옥보
횡전오일 橫田伍一
1930~1931 촉탁교관
1934~1936 간수장
1937~1940 경성보호관찰소 보호사
광복 이후 주요 사건
1958 | 진보당 사건 | 이승만 정권이 야당 세력인 진보당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탄압한 사건 | 1959. 7. 31 위원장 조봉암 사형 |
1961 | 민족일보 사건 |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 세력이 혁신 성향의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간부들을 구속한 사건 | 12. 21 사장 조용수 사형 |
1964 |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 세력에게 인민혁명당을 조직,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사건 | 1965. 5. 29 도예종, 양춘우 등 6명 징역 |
1967 |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 박정희 정권이 부정선거를 무마하기 위해 동베를린 주재 예술인·학생 등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조작한 사건 | 12. 3 조영수, 정규명 사형 |
1974 |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 박정희 정권이 유신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민혁명당을 지목하여 탄압한 사건 | 4. 8 도예종 등 15명 사형 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