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여 성전이 훼파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백성들 일부가 나중에 그 땅으로 돌아와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불안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풍작을 거둔다거나, 상업이 융성한다거나 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침략을 당해서" 혹은 "형편이 좋아질 만한 환경과 조건이 아니어서" 등의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고난이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아서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므로 저주를 받은 결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가난은 단순히 환경과 조건이 좋지 않아서, 혹은 사람이 게을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가난은 죄로 인한 저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주에는 크게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는데, 영적인 저주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영혼이 영원한 사망, 곧 지옥에 이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육적인 저주란 육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임한 모든 저주를 말합니다. 가난은 이 육적인 저주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천지만물을 모두 포함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아담이 저주를 받으니 그에게 속한 이 땅의 만물도 다 같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말씀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저절로 풍성하게 맺힌 과실들을 그냥 따먹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므로 땀 흘려 수고해야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난의 고통도 바로 이때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 저주에서 속량되어야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이런 저주가 끊어지고 축복의 물꼬가 트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물질이 없어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림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로 인한 저주를 속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영원한 사망을 면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육적인 저주, 곧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나시고 일생동안 가난한 길을 가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육간에 저주에서 놓임 받고 하나님의 규례를 열심히 지켜 나가면 저주에서 온전히 놓임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