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2. 노래 12절, 베끼는 사이에 기억해
1 한 20세 무렵, 친구 김종철 군이 ‘복남아 우지마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서 피가 나온다’로 시작되는 민요 12절을 다 노트하는 동안에 나는 그걸 다 머릿속에다 기록해버렸다.
2 그때까지는 암송력이 있는 편이어서 예를 들어 일본 명치(明治)의 교육 칙어(敎育勅語), 소화(昭和)의 청소년 학도에게 주는 칙어라든가 그런 걸 외우라고 하면 몇백 명이 있어도 2등 이하는 안 했었는데 그 대신 잘 잊어버리고 그것도 웬일인지 점점 하행선(下行線)을 달려 근래에는 영 타(他)에 미치지 못한다.
3 어려서 고향에 있을 때 웬 중년 여승(女僧) 한 분이 와서 나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하나님이 점지했으니 절대로 개고기를 먹이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이래서 전에도 후에도 개고기라고는 통 입에 안 대고 살아온다.
4 나는 전기 김종철 군의 끈덕진 권유(전도)에도 불구하고 이론 시비를 곧 세워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박영규라는 고학생 친구가 겨울에도 여름 옷을 입고 양말을 안 신고 지내며 저녁을 밤중에 가서 누룽지밥을 먹으면서도 늘 웃고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해서 별로 반론도 제시해 보지 못하고 예수를 믿어 감리교인이 되었었다. 그해 열아홉 살 나던 때, 그러니까 해방 이듬해 봄 나는 강원일보(江原日報) 기자가 되었다.
5 나이 열아홉 살, 미국 제도에 의해 9월 초하룻날 춘천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었고 교회에 들어가면서 곧장 주일학교 반사였고 기독학생회(KSCF) 시연합회 초대 문화부장이 되었다.
6 2년도 채 못가 기독학생회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내가 임원들을 매집 찾아가(임원회도 모여지지 않아서) 서류로써 임원회 합의를 성립시켜 주일학교대항 웅변대회, 기독학생회 웅변대회, 유광렬 문예작품전시회 등 집회를 연속 개최하였다.
7 임원들은 유명무실한 임원회엔 안 나왔었지만 잔치를 벌여놓고 청하는 데는, 그리고 자기가 소속한 단체의 주최 모임에 안 나올 장사는 없었다. 그래서 나오면 그 뒤끝에 꼭 임원회를 열어 회개의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8 그러다가 웅변대회에, 오늘도 감리교의 유명한 지도급 인사인 김우종(金字鐘) 목사(江原日報社長)와 나사행(羅士行) 목사를 심사위원에 추대했다가 그분들이 그 당시 진보파라고 해서 나도 그 일파로 몰려, 극우파(極右派) 회장 등으로부터 앞니가 부러지는 폭행을 당했다.
9 그래서 이런 교회 더 나오면 무엇하겠느냐고 생각되어 예수는 믿되 교회는 그만 두자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유치원 교실에서 기도하다가 ‘사랑은 짐을 지는 것이지 벗는 것이 아니다’라는 묵시를 받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