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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속 수혜자에서 구원얻은 수여자로>의 줄거리:
참으로 어처구니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나는 이 세상 것을 소원하면서 받겠다는 일념으로 하나님에게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상 것이 시시하다거나 인격적으로 훨씬 더 고상해져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음의 내용적인 논리가 그렇게 이 세상 것의 수혜자로 머물러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주속 수혜자에서 구원얻은 수여자로
(누가복음 22장 63절~71절)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저주속 수혜자에서 구원얻은 수여자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저주속 수혜자에서 구원얻은 수여자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이후로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저주 속으로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겟세마네의 기도 이후에 예수님이 저주 속에 던져지신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역의 과정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과정 전체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입니다. 이 한 가지를 통해서 은혜와 구원을 위한 모든 요건은 충족됩니다. 그리고 예비 되고 약속된 모든 은혜와 구원을 받을 때 삶이 변하고 나 자신 또한 변하게 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일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는 만큼 은혜와 구원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기도 이후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안에는 겟세마네의 기도 이후로부터 십자가에 도달하기까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겪으신 모든 수난의 과정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 과정의 의미가 분명해질 때에 즉 이 과정의 의미가 내게서 재현되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동일시는 더욱 철저해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것들의 이름이 내 안에 들어와서 세상 것들의 있음의 느낌이 끝나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겨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있음만이 유일한 느낌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 수난과정의 의미를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주기도의 내용 또한 충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일을 바탕으로 해서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이후의 과정은 저주 속에 머물고 있는 내 마음을 저주 바깥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이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하여서 탈출시키려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가시고자 하시는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 권능의 우편입니다. 본문 69절에서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나를 그 자리까지 데려가시기 위하여 저주 속에 들어오셔서 수난의 과정을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밀착되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고, 체포당하심에 이어서 오늘은 내가 동일시해야 되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저주 속에 들어오셔서 믿는 내 마음을 받아서 저주 바깥으로 탈출시키고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으로 데려가시고자 하십니다. 바로 하나님과 내 마음을 밀착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 있음의 느낌이 강해지게 됩니다. 예수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항상 있는 것이고, 쉬지 않고 있는 것이고, 범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밀착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이 더 강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광명의 세계 속에 들어온 증거입니다. 반면에 세상 있음의 느낌 때문에 하나님 있음의 느낌이 없어지면 어둠의 세계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고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때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낄 때는 절대평강과 절대만족과 절대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밀착하게 되면 이 세상 삶의 현장에는 나의 몸과 지정의가 남아 있습니다. 나의 몸과 지정의의 기능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을 대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대로 수혜자의 입장을 떠나서 수여자의 입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내 삶을 위해서 받으려고만 하는 입장에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문제점은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내가 받고 싶어 하거나 소원하는 것이나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제나 끼어있었습니다.
수여자는 상이나 선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상을 베푸는 수여자와 상을 받는 수혜자 사이에는 언제나 상이 끼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여자와 수혜자의 관계가 지닌 한계입니다. 수여자와 수혜자는 밀착이 어렵습니다. 항상 중간에 상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수여자와 수혜자이면 밀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시려는 구원이란 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는 것입니다. 내가 밀착해야 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수여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되는 것이 구원이기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수혜자의 입장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시키기 때문입니다. 수여자와 수혜자의 관계에서는 진정한 밀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어야 할 내 마음 사이에는 설령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어야만 합니다. 수혜자의 입장으로 내가 받아야 될 세상 것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로 수여자이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나도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소유의식을 갖고 아까워할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상태이었습니다.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은 밀착되어 계셨기에 수혜자의 입장을 취하실 수 없었고 그럴 필요조차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이 세상의 어떤 대상보다도 강렬하게 느끼고 계셨기 때문에 광풍노도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평강의 상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든 사건을 만나든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저주 속에 들어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이러한 일이 내게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저주란 하나님과의 밀착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에 하나님과의 밀착이 끊어짐으로써 절대평강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감의 충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열등감 속에서 끊임없이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수혜자의 입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수여자이신 하나님과의 밀착관계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겟세마네의 기도 이후에 그리스도의 두 번째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내 삶조차도 받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신다.”라는 말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꾸만 수혜자의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혜자 입장에 서서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는 저주의 탈피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주란 하나님과 밀착이 끊어진 상태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이 세상에 대해 수혜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끝내 하나님과 밀착하고 싶지 않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밀착을 위해 일어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예수님의 체포당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스스로를 체포당한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손댈 수 없는 입장임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사업을 붙잡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업의 형통과 성공을 바라게 됩니다. 마음으로 손을 대는 일들이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수혜자의 입장을 벗어날 수가 없고 수여자이신 하나님과의 밀착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밀착을 위해서는 첫 번째 단계로 마음에서 붙잡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손을 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체포당하심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나타난 일이 바로 본문의 사건입니다. 63~64절을 보면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들은 산헤드린공회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 중 말단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뺨을 치고 욕하고 눈을 가리고 누가 쳤는지 맞춰 보라고 조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갖은 모욕과 경멸하는 언어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내가 구원받기 위해 동일시해야 하는 두 번째 모습입니다.
우리는 체포당하시는 예수님과 동일시되어야 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체포당해서 세상일에서 손 떼어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 세상으로부터 가장 비천한 자에게 주어지는 경멸과 모욕을 당하고 존재감 제로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동일시해야 될 그리스도의 두 번째 사역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서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 오히려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며 믿지 말라고 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의 죄목과 형벌을 이미 정해놓고 형식상의 재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고 형벌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당시 수백만 명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꼴찌의 사람이 되셨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가장 심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정해놓고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내가 동일시해야 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왜 이러한 가장 비천한 자리로 가셔야 했던 것일까요? 존재감이 없던 비천한 상태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거지 나사로와 모든 재앙이 임했던 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태에 처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역설적입니다.
한 사람이 속한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인간사회에서 정해놓은 소중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돈, 명예, 학벌, 집안의 배경, 외모 같은 것들이 그러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가졌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갖지 못한 자가 가장 비천한 자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몰리게 되셨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멸과 모욕과 욕을 당하셨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백해무익한 존재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그리스도와 동일시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사회에서 백해무익한 존재로 여김 받는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함을 통해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의 자리가 부장이든 상무든 이사든 그 현장에서 백해무익해서 모든 사람의 경멸과 모욕과 욕을 당해야 하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는 존재로 여김 받는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이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살아온 대로 세상의 있음을 느끼며 산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직장생활은 지긋지긋하고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셨을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에 처하셔야 했던 이유가 역설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백해무익하게 여기고 모든 경멸과 모욕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할 때에 삶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수여자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수혜를 받는 입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나의 마음을 밀착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된다는 것은 곧 나도 수여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가 되셔서 세상 것은 단 하나도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에만 수혜자에서 벗어나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고 여기고 받고자 하는 상태에서는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될 수 없고 수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상태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백해무익하고 모욕과 경멸을 받는 가장 비천한 자리로 몰려가셨던 것입니다. 그 비천한 자리의 그리스도가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마음을 동일시하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대형마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형마트에서 사은품 행사를 했는데 얼마 이상 구입을 하면 응모권을 줍니다. 1등은 BMW 차를 주는 등의 큰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행사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응모자격이 없는 직원들이 사은품을 나눠 가졌던 것입니다. 애초에 1등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행사에 응모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모를 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악용해서 직원들이 사은품을 나눠 가졌는데 그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수여자가 수여자의 위치를 이탈하여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수여자가 수혜자가 되면 더는 수여자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혜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수여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즉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수여자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수여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것의 수혜자가 되면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은 불가능합니다. 수여자의 입장에 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경멸과 모욕과 욕을 당하시는 가장 비천한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세상 것은 단 하나도 갖지 않은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경멸과 모욕이 타당한 한심한 자리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리이고 모든 재앙이 임한 욥의 처지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계신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세상 만물을 수여하시는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고 수여자 하나님을 받는 수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경멸받아 마땅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으며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부장일지라도 부장이라는 직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경멸과 모욕을 당하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기 위해서 지금 내게 주어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수혜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백해무익해서 모든 경멸과 모욕을 받아 마땅하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위치에 있는 자다.”라고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가진 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주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세든 자가든 월세든 살아가는 집이 있고, 자동차도 있고, 입을 옷도 있고 삶을 위해 주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서는 알거지 나사로의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고 수혜자의 입장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고자 하신 것은 몸도 아니며 배우자도 아니며 자녀도 아니며 재산도 아닙니다. 나는 수혜자가 아니라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수혜자의 입장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쳤던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이삭을 받은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삭을 받은 수혜자가 아닌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목적입니다.
삶에 주어진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수혜자의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연금이 있고 저축한 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것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될 수는 없습니다. 통장에 돈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은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써나가실 때 내 이름으로 지출될 수 있을 뿐이지 내게 주어진 것이고 내가 받은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멸할 정도로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는 세상 것들입니다. 수혜자로서 많이 받은 자가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경멸을 받으시는 자리에 서셨습니다. 저주 속에 빠져서 수혜자의 입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는 입장이 되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에게 저주받음으로써 저주받은 세상 바깥으로 밀려나시게 되었습니다. 바람직한 역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멸과 모욕이 다 쏟아지고 있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될 때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창조주이시며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는 준비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 속에 던지시고 몸 담고 계시던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경멸과 모욕이 다 쏟아지게 하시고 그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하게 하여 주심으로 수혜자로 사는 저주의 세계를 탈피하여 수여자이신 하나님과 밀착됨이 오늘도 하루 종일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그 밀착됨의 효과를 느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