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길 위의 그림 한 장...최금옥 작가
최금옥 에세이 작가
최금옥 작가 프로필
2020년 에세이스트 등단
2023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
에세이스트 작가회의 회원
진등제문학회 회원
경남수필가협회 회원
최금옥 작가의 에세이 '길 위의 그림 한 장'[사진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
길 위의 그림 한 장
가을이다. 오늘 밤, 나는 아파트 단지를 따라 난 길을 걷고 있다. 낮 동안 내린 비가 아직 채 마르지 않아, 보도블록 위에는 희미한 물기가 반짝이며 내 시선을 붙잡는다. 가로등 불빛은 젖은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금빛으로 퍼져나간다. 뜨거웠던 여름은 자취를 감추고, 가을바람 속에 빗방울이 남긴 냉기가 스며든다. 길 위에서 나는 단풍잎 하나를 만난다.
붉은 잎은 마치 화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수채화처럼, 초록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다시 빨강으로 번져 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아직 연초록이 남아 있다. 가장자리는 선홍빛이다.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넨다. 순간, 잎은 다시 생명으로 다가온다. 길 위에 떨어뜨리고 간 예술작품의 한 조각처럼 느껴진다.
곱게 펼쳐진 풍경 앞에 내 마음은 조용히 흔들린다. 발아래 떨어진 단풍잎을 외면한 채 떠날 것인지, 손안에 담아 함께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아름다움을 느껴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무심한 발걸음에 밟혀 사라질지도 모르는 운명. 결국, 단풍잎을 가만히 들어 올려 내 손 안에 놓는다. 이제 손안의 작은 잎은 흔한 낙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로 되살아났다.
잎은 내 어린 날의 기억을 불러왔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 습관이 있었다. 국어책이나 공책 속에 꾹 눌러 놓으면 며칠 뒤 납작하게 말라 있었다. 그 위에 시를 적곤 했다. ‘가을은 붉게 노래 부른다’ 같은 글귀를 적었고, 그런 다음 벽에 밥풀로 붙여 두었다. 벽은 갤러리가 되었고 나의 작은 화보가 되었고 시집이 되었다. 혼자만의 예술의 세계로 탄생했다.
최금옥 작가의 에세이 '길 위의 그림 한 장'[사진 제공=최신뉴스 박경아 기자]
책갈피에 꽂아 두었던 단풍잎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색이 바래고, 결국엔 부스러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소멸해가는 낙엽은 내게 조용한 가르침을 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흩어지고 사라지지만, 어느 순간 마음에 새겨둔 무늬는 변하지 않은 채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오늘 길을 걷다 보게 된 단풍잎 하나가, 오래된 추억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낸 것처럼.
걷다 보니 인생이 낙엽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걸음 사이로 낙엽처럼 스쳐 가고, 또 누군가는 책장을 펼칠 때마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는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떤 마음과 어떤 눈으로 만나고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길 한복판에 무심히 떨어진 나뭇잎조차 한 폭의 그림처럼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런 시선 자체가 어쩌면 삶의 의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눈길 자체가 사랑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문득 유년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뒷마당에 있는 단풍나무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바쁜 농사일과 살림살이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선 어머니의 시선은 빛났다. 그땐 알지 못했다. 당신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찰나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인지를. 오늘 밤 내가 무릎 굽혀 단풍잎을 들여다보았듯이 말이다.
단풍잎은 짧은 생을 산다. 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엔 온몸을 불사른 뒤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그 짧은 생애도 계절의 진실이 담겨 있다. 생명의 본질은 길고 짧음이 아닐 것이다.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것이 간직한 의미의 무게에 달려 있을 것이다. 꽃이 필 때 아름다움이 절정에 도달하지만,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나는 단풍잎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다. 잎맥을 따라 넓게 퍼져가는 붉음과 초록의 대비, 빗방울에 젖어 더욱 깊어진 색감, 모든 것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졌다.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나는 장면들은 모두가 그림이다. 다만 그것을 그림으로 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오늘 밤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어린 시절 단풍잎은 내게 글을 쓰게끔 이끌어주었다. 오늘 밤, 단풍잎 하나가 다시 내게 글을 쓰게 한다. 유년의 책갈피 속 단풍잎처럼 내 마음을 꾹꾹 눌러 기록해 두고 싶다. 세월이 지나 붉은색이 바래더라도, 낙엽 위에 새겨둔 내 시선과 감정선은 남을 것이다. 사라져 버릴 순간들을 한 장의 그림으로 붙잡아 두고 싶고, 글로도 마찬가지이다.
탁자 위에 올라 있는 단풍잎 몇 장. 물기가 걷히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언젠가는 부서져 내 곁을 떠나겠지만, 내가 새겨둔 마음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미 내 안에 존재한 그림이며 삶의 기록이니까. 인생이란 결국 이런 조각들을 모아가는 퍼즐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싶다. 이 그림들이 모여 결국 한 권의 삶이라는 책이 완성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