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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리 안말~(접속)~사다리재~백화산(인증)~황학산(인증)~이화령~조령샘~조령산(인증)~신선암봉(인증)~깃대봉삼거리~조령3관문~(접속)~고사리주차장(약25km/13시간)
평전치
평전치 남쪽으로 사면은 벼랑에 가까운 경사를 보인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사철 바람이 강하게 분다.
분지리로 하산하는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내려가며 평평한 산밭이라는 뜻인데 실제의 지형은 전혀 딴판이다.
평전치(平田峙) 마을 사람들이 쓰는 이름은 평밭등이다.
이름의 유래는 알수 없으나 이곳은 연풍 분적골 사람들이 마성면 상내리 쪽으로 내려가던 고개였으나 지금은 폐로가 되어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 상내리의 한신마을은 마원리. 중평리. 여우목마을. 연풍지역과 더불어 천주교 성지로 백화산 일대 대간 능선을 넘나들며 선교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 천해의 은신처였다. 한다.
백화산 [白華山]
높이 : 1063m
위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충북 괴산군 연풍면
백화산은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문경의 백화산은 이화령 황학산 희양산과 함께 준령을 이루며 괴산군 연풍면을 병풍으로 두르듯 하고 있다.
시내에서 보면 남서쪽에 근접해 있으면서 북서쪽에 있는 조령산과는 이화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 등산로는 마성면과 문경읍 마원리 각서리 이화령 등이 있으나 문경시내 쪽에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
점촌에서 문경역 방향으로 가다 문경교 직전에 왼쪽으로 꺾어지면 마원리 오서골 마을 회관까지 들어갈 수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9백49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찾을 수 있다.
계곡길을 벗어나자마자 급경사로 이어진다. 그리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가는 중간중간에 길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안내리본도 흔치않다. 물론 이정표나 안내판도 없다. 봉우리에 도착하기까지는 소나무와 잡목 숲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시야가 트이지도 않는다.
정상까지는 가파른 암봉과 갈대밭이 이어진다. 정상 동쪽에는 넓은 터가 있고, 남쪽면은 절벽으로 되어 있으며, 주흘산과 운달산 희양산 등의 웅장한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황학산
높이 : 912m
위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황학산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는 황학산은 제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 거리에 솟아 있고 바로 옆에 덩치 큰 백화산(1,064m)이 있기에 잘 알려지지 않는 곳이고 이 때문에 호젓한 산길과 산마루에 펼쳐진 큰 억새밭과 참나무 숲길은 어느 산과 비교해 보아도 뛰어나다.
문경방면 마원리에서 산행이 시작되면 밑에서 보이는 밋밋한 산세가 무척 수월해 보이지만 막상 산행에 임해보면 경사가 예상 외로 급하고 또 정상에서 백화산으로 잇는 능선은 수많은 암봉과 가득한 수림으로 덮여 있어 고산다운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조봉
이화령의 옛이름인 (큰) 새재의 뒷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영산과 이웃해 있는 조봉산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각종 기암괴석으로 조각된 듯한 바위 만물상들이 마치 새의 입 부리처럼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산 이름을 조봉산이라고 지었다 한다.
이화령 고개
높이 548m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희양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사지리지》에 이화현(伊火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고 《대동여지도》에도 이 고개 이름은 이화현으로 표기하고 있다. 위치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화현(伊火峴)은 현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라고 하고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현 동쪽 15리에 위치한다"라고 하여 다소 상이하게 되어있다. 《구한말지형도》, 《조선지지자료》, 《조선지형도》와 같은
1910년대 발행된 지도에는 현재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화령의 뜻은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개가 험해 여러명이 어울려서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하여 이유릿재, 이우리재 등으로도 불렸다.
이화령은 소백산맥의 조령산(鳥嶺山, 1,017m)과 갈미봉(葛味峰, 783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한다. 동쪽사면은 조령천(鳥嶺川)의 곡구(谷口)인 진안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통하고, 서쪽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으로 흐르는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도로도 위에 언급된 계곡을 따라 개통되었으나, 동편의 진안리에서 이화령 고개까지는 갈미봉의 산록을 따라 올라가고, 서편은 행촌리까지 ‘잣밭등’의 남쪽을 따라 내려간다. 고개 아래 연풍은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옛날의 국도는 새재[鳥嶺]로 통하였으나, 새재는 몹시 높고 산로(山路)가 험하므로 신국도 3호선은 이화령을 통하게 되어 연풍은 이화령에 교통로가 열린 뒤에 발달한 신흥취락이다.
연풍에서 하곡을 따라 올라가 원풍리를 거쳐 분수령에 이르면 동쪽은 새재마루의 조령 제3관문이고, 서쪽은 소조령(小鳥嶺)이다. 소조령을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이른다. 이와 같이 이화령은 충청북도의 충주권과 경상북도 북부의 점촌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화령의 개통으로 북쪽의 조령은 제1·2·3 관문과 주변의 성곽 등을 사적 제147호로 지정하고 크게 보수, 축조하여 도립공원으로 정비하였다.
조령의 통과는 중초리에서 통제되고 관광객이나 등산로 외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이화령은 국도 제3호가 통과하여 주변지역에서 산출되는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옛 조령에 이어 이화령은 새로운 교통요충지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국도 3호선은 도로가 구불구불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투자사업으로는 처음으로 3번 국도가 4차로로 확장되면서 이화령 터널이 뚫렸다. 그 뒤 이화령 터널 옆으로 고속도로의 상하행선 터널이 추가로 관통됨으로써 모두 3개의 터널이 있게 됐고, 옛 이화령 포장도로까지 합쳐 10개의 차로의 도로들이 나란히 있는 실정이다. 이화령 터널을 건설할 당시 예상한 이용률보다 훨씬 적어서 문제가 되었고, 2007년 건설교통부가 ‘이화령 터널’을 인수하여 2007년 8월 1일 터널 통행료가 폐지되었다.
조령산 [백두대간 마루능선을 이루는 웅장한 산]
(1025m)
*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조령산은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을 나누는 백두대간 마루능선을 이루는 산의 하나다. 충북과 경북에 걸쳐 있는 이화령과 조령3관문 사이에 위치하고,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아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도 같이 아름답다. 문경새재를 허리춤에 안고 있는 조령산은 산보다 재가 더 유명하다.
이화령(큰세재)에는 휴게소와 대형 주차장이 있고, 북쪽 구새재는 조령 제 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어 여러사람이 찾아와도 부담이 없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 대소 암봉과 암벽 지대가 많아 산의 웅장한 면모를 느낄 수 있고,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 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등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 여름철 산행으로 그만이다.
조령산은 전체적으로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우로져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성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 되어 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지나가는 조령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개인 문경새재를 품에 안고 있으며, 산세가 우람한 주흘산과 마주 하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접했다.
특히 정상에서 깃대봉까지 이어지는 능선은 설악산 공륭능선의 축소판으로 뛰어난 경관미와 위험을 도사리고 있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흘산의 주봉(1075m)과 영봉(1106m) 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북동쪽으로는 거대한 바위봉인 부봉(935m)이 육체미 선발대회에 출전한 선수의 힘살처럼 불끈불끈한 근육을 과시하고 있으며, 그 뒤로 월악산의 영봉 (1094m) 이 손에 잡힐 듯 조망된다.
정상을 지나 급경사 내리막길을 지나 안부에 도착하니 4거리 갈림길이다. 왼쪽은 상암사 터, 오른쪽은 조령 제1관문(주흘관) 가는 길이다.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기를 수십 번, 드디어 직벽의 로프를 잡고 오르니 신성암봉(937m) 이다. 조령산 종주구간의 중간에 위치한 암봉으로 조망이 좋고 오르내리는 코스도 다양해 단독 등산으로도 좋은 산이다.
계속되는 너럭바위와 노송 숲을 지나 바위지대를 만나고 여기를 통과하면 절골의 중앙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조금 지나면 공기바위에 도착 한다. 여기서 뒤돌아보면 신성암봉의 바위슬랩과 조령산 정상으로 뻗은 백두대간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이구간은 남과 북으로 이화령과 새재라는 고갯길이 없다면 날아다니는 새들과 하얀구름 이외엔 이 분수령을 넘나들지 못했을 것이다. 겨울에는 경험 많은 등산인이라 해도 쉽게 넘어 설수 없는 구간이기도하다.
신선암봉
939m
충국 괴산군, 경북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의 연풍면 원풍리와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이다.
신선암봉 남쪽으로는 조령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깃대봉이 연결되어 소백산맥의 줄기를 형성하는데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속한다.
[한국지명람]에서는 이 산을 신선봉으로 소개하고 있고 고사리봉. 할미봉. 온산으로도 불렸다고 적고 있다.
신선봉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신선이 달밤에 놀았다고 해서 할미봉이라는 지명은 마고 할머니가 이곳에 와 놀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지만 [조선지형도]나 [1:50000지형도] 에는 이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문경세재
명승 제32호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는 잘 알려진 고갯길이다. 새재에서 먼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첫 대목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문화권과 남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중요한길목인 새재는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이어진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컸다.
영남에서 거둬들인 세곡이나 궁궐에 바칠 진상품은 물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나선 영남의 선비들도 대부분 이 고개를 넘었다.
새재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조령(鳥嶺)은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 옛 문헌에 기록된 초점(草岾)에서 '억새꽃이 우거진 고개'라고도 해석한다.
그리고 순 우리말 지명에서 '새'를 '사이'로 풀면 새재는 이우리재(이화령)과 계립령(하늘재) 사이의 고개가 되고, '새로운'으로 이해하면 계립령 대신에 '새(新)로 개척한 고개'로 해석할 수 있다. 새재는 조선 태종 때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발굴조사 때 조령관 터에서 훨씬 이전의 토기류가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한양과 영남을 잇는 길의 중심관문으로서 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활을 감내 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1546-1592)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멸되기도 했던 사연이 있다.
함경도 변방에서 용맹을 떨쳤던 신립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인 기마병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왔다.
작전회의에서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는 의견과 협소한 새재에선 기마병이 힘을 못 쓸것이라는 의견이 갈렸다.
기마병을 믿었던 신립은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널찍한 평지에서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다. 게다가 전날 비가 내려 말은커녕 보병도 기동이 힘든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땅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조선의 기마병들은 왜군이 가진 소총에 속수무책이었다.
신립이 새재를 막지 못하고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선조는 결국 피난길에 오를수 밖에 없었고, 호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새재는 그만큼 한반도 방어에 중요한 고개였던 것이다. 이렇듯 영욕의 세월을 보낸 새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추풍령과 이화령 등에 밀리면서 점차 잊힌 길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새재의 유적지를 복원하자 사람들은 조선시대 한반도의 대표고개로 명성을 떨쳤던 문경새재의 실체를 확인하러 찾아들기 시작했다.
복원할 때 도로를 비포장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운치가 한껏 넘친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
그리고 경상 감사가 직인을 주고받았던 교구정 터, 객사가 있던 조령원 터 등을 살펴보며 걷는 역사의 맛은 오르지 문경 새재에서만 누릴 수 있다.
마패봉(927m)정상이다.
마패봉이라하는 유래는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 마패를 걸고 쉬었다"해서 마패봉이며 일명 마역봉이라고도 한다.
대간 길은 마패봉에서 동쪽으로 꺾인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북암문이 나오고 계속해서 성터를 왼쪽에 끼고 작은 봉우리 몇 개 넘으면 능선은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잠시 동암문을 지나 가파른 능선을 오르면 남성의 근육질 같은 부봉(935m)이 반긴다. 부봉 갈림길에서 959봉까지 가는 길에 바위지대가 잇지만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어려움이나 큰 위험은 없다.
959봉에서 대간 길은 좌측으로 90도 방향 전환을 하면서 아래로 급경사를 이룬다. 직진하면 주흘산 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정상까지는 약1시간정도 소요된다.
잠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평천재를 지나고 곧이어 탄항산에(856m)에 도착한다.
탄항산은 월암삼봉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것 같다. 첫 번째 봉우리가 나타나길래 정상인줄 알았으나 앞쪽으로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두개가 더 있고, 그 중에서 마지막 봉우리가 정상이다.
봉우리 세 개가 있다고 해서 월암삼봉이라고 부른다. 탄한산에서 굴바위로 내려가는 우측방향으로 도토매기 고개가 보이고 그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주흘산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어지는 굴바위를 통과하면 마침내 하늘재로 내려서는 길이고 눈앞에 새하얀 바위를 포근히 안고 있는 다음 대간길인 포암산이 빼어난 자태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드디어 등산객들 이외엔 오가는 행인이 거의 없는 옛 고개 하늘재(525m)에 도착한다.
하늘재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으로 문헌상 이름은 계립령(鷄立嶺),대원령,마목현,지름재. 겨릅산, 한훤령 등으로 불려졌다.
하늘재라는 현재의 지명은 한훤령(寒暄嶺)에서 왔을 성싶은데, 어느 때부터인지 계립령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계립령을 처음 연 나라는 신라다. '삼국사기ㆍ에는 이사금3년(156년)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신라는 계립령을 개척함으로서 비로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는 출사표를 던졌고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으며,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개에서 쉬어 갔다고 전한다. 그러나 1414년 태종(14년)이 계립령에서 멀지 않은 남쪽 분수령에 새재 가 개척되면서 계립령은 잊혀진 길이 되었다.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족의 '미륵'과 문경 쪽의 '관음'이라는 지명에서도 말해주듯이 고갯마루 양쪽엔 제법 큰 도량이 있었다.
충주 쪽으로 걸어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미륵리에는 미륵사지(사적 제317호)가 있다.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 '미륵대원지'라고도 한다.
유물로는 미륵대불(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 귀부,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가람은 몽골군 침입 때 대부분 불타버린 탓에 창건에 관해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또한 마을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사기그릇을 굽는 마을이었다.
미륵리의 '점말'과 관음리의 '사점'마을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는 도자기 제작에 꼭 필요한 3대 요건인 흙, 불, 물의 뛰어난 자연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경의 도지기 문화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전후 본격 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도 불이 꺼지지 않던 가마였지만, 한국전쟁 뒤에 생활 용기의 재료가 양은, 플라스틱, 스테인레스 등으로 바뀌면서 문경의 도자기는 큰 타격에 빠졌다.
사기그릇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불을 지피지 않는 가마가 하나 둘 늘어났다.
이런 가마에 불길을 다시 지피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조선 도자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이 문경을 찾아오면서 부터다.
일본인들이 최고품으로 취급하는 이도다완의 기술적, 정신적 뿌리를 문경에서 발견하였다. 임진왜란 때 강탈해간 조선 서민들의 차사발인 이도다완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명품이다.
여하튼,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을 미의 극치로까지 추앙 하는 일본인들은 관음리를 찾아와 이도다완 재현을 부탁했고 도공들은 첫 사발을 빚게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신정희, 천황봉, 서선길, 김정옥 도공 등이 이도다완 재현에 매달릴지 수 십년 ,이곳에서 제작된 찻 사발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출발지점 :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110-3 주변
* 도착지점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새재로 1862 고사리교회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