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 목사의 현대사 증언 2탄 역시 이승만 정권기 ‘암살 커넥션’이다. 이승만과 맞섰던 역대 대통령 후보들인 신익희, 조병옥과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최능진, 이용문 등도 이승만 정권에게 살해당했다는 가공할 주장이 또다시 조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 게다가 이승만 암살미수사건, 장면 저격사건, 서민호 총격사건 등도 이른바 CIC 삼총사가 일으킨 자체조작사건 또는 배후조종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조웅 목사는 본지 2002년 12월호를 통해 이승만 정권이 암살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백범 살해사건에 개입된 신성모, 채병덕, 장은산, 이기붕 일가 등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 후 다시 만난 조웅 목사. 그는 이번에도 이른바 ‘이승만 정권기 암살 커넥션’과 관련해 또 다시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털어 놓았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등도 암살 청부업자들에게 희생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첫 증언 때와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기 방첩대(CIC) 3총사라고 불리던 최0, 조00, 엄00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다.
열차안 판매원 매수, 해공 독살
해공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선거유세차 호남으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한 조 목사의 주장이다.
“경무대(현 청와대) 비서실장 이기붕이 엄00과 최0을 통해 김지웅으로 하여금 해공 선생을 제거토록 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해공이 탄 열차에 같이 있었습니다. 엄과 최가 김지웅을 시켜 열차 안에서 먹을 것을 파는 장사꾼을 매수해서 해공에게 독을 탄 물을 마시게 하는 수법으로 암살했습니다.”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해공이 독살 당했다는 주장이 새로운 건 아니다. 해공 사망 직후 학생들을 비롯한 해공의 지지자들이 경무대 앞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후 이들은‘5·5동지회(회장 유치송)’를 결성해 활동해 왔다. 사건 직후 해공이 독살 당했다는 입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껏 사망원인이 뇌일혈이라는 둥 심장마비라는 둥 분분한 상태다. 계속되는 조 목사의 설명이다.
“해공이 죽은 때가 5월인데 그렇게 더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해공의 부인에 따르면 이틀만에 창자가 완전히 썩었다는 거예요. 독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겁니다.”
조 목사의 주장은 해공의 사인과 관련해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특히‘암살’의 배후인물과 실행자를 명확히 하고 있는 점이 새롭다. 그렇다면 그가 밝힌 실행자라는 ‘김지웅’은 어떤 인물인가.
김지웅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제시기 만주 관동군의 헌병 통역자 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후 귀국하여 왕금산 장군을 자처하면서 고급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던 자로서 실체가 모호한 인물이다. 극우성향의 반공주의자인 그는 이승만 정권기 굵직한 시국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묘사돼 왔다. 다만 백범 암살사건의 각본을 짠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의혹 속에 가려진 정치 브로커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자가 해공 암살의 실행자라는 주장은 처음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이기붕과 CIC 삼총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조 목사가 폭로하는 암살 커넥션의 또 다른 희생자는 조병옥이다. 이승만 시절 내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954년 야당인 민주당을 조직하면서 이승만의 정적으로 급부상한 유석 조병옥.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대결하던 중 신병치료차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그해 2월 15일 월터리드 병원에서 운명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암살청부업자들의 손길이 미쳤다니.
“조병옥이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갈 때 엄00의 진두지휘 하에 김지웅을 비롯해 4∼5명이 갔다고 해요. 여성도 한 명 동행했다고 합디다. 월터리드 병원에서 일하는 흑인여성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서 수술 후 경과가 좋았다고 하는 조병옥을 암살한 거죠. 김지웅은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능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엄00에게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승만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전에 야당후보로 대결한 신익희, 조병옥 등이 모두 이승만 정권의 암살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능진도 우리 손에서 보냈다”
조웅 목사는 이승만의 정적들이 비명횡사한 또 다른 사례로서 최능진을 들었다. 이른바 CIC 삼총사가 “최능진도 우리 손에서 보냈다.”라고 실토했다는 것이다.
일석 최능진. 평남 출신인 그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에 참여했다.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곧 월남해 미 군정산하 경무국 수사과장으로 경찰계에 입문한 후 ‘친일경찰청산’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경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경찰책임자인 조병옥, 장택상 등과 친일경찰 청산문제로 대립한 후 옷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승만과 대립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니다. 1948년 5·10 단독선거가 강행되자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권장악을 염려, 그가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우친위대 노릇을 하던 서북청년단 소속의 괴한들에게 입후보 관련서류를 탈취당해 좌절됐다. 결국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되고 말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정부수립 후 한 달 보름만에 그는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에 연루돼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극적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유엔군의 서울점령 후 서서히 정계인사들과 만나던 그는 그 해 11월 다시 구속됐다.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였던 군경검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군사법정에서는 사형을 선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조 목사에 따르면 이렇게 희생된 최능진이 바로 김창룡의 심복들이던 CIC 삼총사의 ‘손에서’나온 결과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6월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한 이용문 장군도 음모에 의한 암살사건이라는 게 조웅 목사의 주장이다. 이용문은 이건개씨의 부친이다. 6·25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직속 작전국장이던 이용문은 1952년 이승만을 몰아내기 위한 미국 주도의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이종찬에게 계엄선포를 위해 병력동원을 요구했으나 전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이 일로 이종찬은 무릎을 꿇은 채 이승만에게 사표를 내야 했어요. 이종찬 밑에 있던 정보국장 김종평 장군은 이 때의 일로 생식기를 못 쓰게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용문도 작전참모부에서 강등당해 남원에 주둔하던 남쪽경비사령부(남경사)로 배치돼 공비토벌 사령관임무를 맡아 사지로 내몰렸죠. 이승만 정권은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회의를 소집해 놓고 삼총사를 동원해서 그가 탈 헬리콥터 기장을 매수해 휘발유를 적게 넣은 채 비행하다가 고의로 추락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 역시 삼총사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장면 암살미수의 배후 최훈 = 삼총사 일원 최0?
이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정권기 크고 작은 암살미수사건에 CIC 삼총사가 관여돼 있다는 주장이다. 1952년 이승만 암살미수사건도 최0 등 삼총사가 관련된 자체조작사건이라는 것이다. 6·25 2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한 이승만은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의열단 출신인 나재하의 권총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 등 뒤 2미터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지만 무슨 일인지 ‘찰칵’하는 소리만 난 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또 한번 방아쇠를 당겼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발이었다.
나재하는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이후 또 한명의 공범이 드러났는데 역시 독립운동가출신인 김시현 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 조사결과 나이 일흔살을 넘긴 김시현옹이 권총을 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 목사에 따르면 최모 등 삼총사가 김시현 옹에게 권총과 총알을 건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총알이 발사됐다면 큰 일나는 것 아닙니까? 최0이 이들과 접촉해서 한 달 동안 물에 담궈 둔 권총알을 제공해 고의로 불발사건을 일으키고 이승만 권력을 한층 강화하는데 이용한 것이죠.”
조 목사는 최0, 엄00이 “그 사건은 쇼였으며, 우리 손에 한 번 들어오면 꼼짝 못한다.”고 했다는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으로 삼총사의 직속상관인 김창룡은 별은 하나 더 달았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논공행상을 하더라는 것이다.
1956년 당시 부통령이던 운석 장면 저격사건의 배후에도 삼총사가 있었다고 한다. 고령의 이승만이 유고시, 승계권을 갖고 있던 장면을 부담스럽게 여긴 이승만 측근들이 삼총사를 움직여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삼총사중 한 명인 엄00에 따르면 운석에게 시공관 행사(민주당 전당대회)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운석이 우리말까지도 안 들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 사건은 중부경찰서 경위가 총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또 자금은 임흥순이 댔다는 거예요.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도 관련이 있답니다. 엄00은 ‘총알이 손에 맞은 게 다행’이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