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아서
유혜자
사무실에 들어서니 책상 몇 개가 비워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문간의 녹음기 앞에 앉아서 전날 녹음한 테이프를 잘라내는 편집을 하던 Y선배, 시속 몇km로 한강다리를 건너서 25분 만에 출근했다고 당시 많지 않던 마이카족으로서 과속운전을 뽐내던 K선배, 평소 책상에 테이프와 책을 높게 쌓아놓았던 M피디 책상도 말끔했다.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비판언론인들을 강제해직 시킨 일은 충격이어서 잊히지 않는다. 내게 제작의 기초를 알려주고 도움을 주었던 H선배의 빈 책상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려 다른 동료들을 보니 모두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는 인간적인 헤어짐에 대한 섭섭함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은 사람들은 대개 학부형인 그들이 생활과 학자금은 어떻게 할까하는 실제적인 걱정으로 이어졌었다. 미국으로 이민 간 동료도 있고 일단 유학을 떠난 이는 괜찮은 편에 속했다. 학원 영어강사와 과외공부선생님을 하는 이도 있고, 부인이 보험설계사를 하고 내복가게를 열었다고도 했다. 회사에 남아 있던 어떤 동료는 명절마다 과일과 쌀을 보내어 위로하고, 몇몇은 학자금을 모아주는가 하면 내복가게에 가서 많이 구입하고 보험에 들어주는 등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는 한 동료부부를 북한산에 있는 고급음식점에 초대하여 위로랍시고 대접했으니 생활대책이 막연한 이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은 처사였다.
직장에 남아있던 우리도 어두운 세태와 환경에 시달리느라 해직동료들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져 갈 무렵 어느 시인의 작품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극작가,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집이 1980년대에 김광규 시인의 번역으로 알려졌는데 그 안에는 시집 제목이기도 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가 1942년 초에 쓴 시의 원제는 「나, 살아남은 자」인데, 김광규 시인의 번역대로 우리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알려졌다. 브레히트가 50대 중반에 쓴 시로 1, 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이들이 죽은 것을 보고 살아남은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여겨서 쓴 것 같았다. 그는 「사상의 명부」(1941)라는 시에서 실제로 먼저 간 친구들을 밝혔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슈테판,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호 등이었다. 나는 일찍이 6, 25전쟁, 4, 19혁명 등에서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았는가. 1980년대 젊은이들은 민주화의 투쟁에서 많이 목숨을 잃고, 고문당해 정신이상이 되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런 암흑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브레히트처럼 ‘오로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더 강해서’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생존의 이유를 나 자신의 힘으로 돌리는 ‘나’. 그렇다면 ‘살아남지 못한 친구들’은 그들이 ‘덜 강해서' 살아남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민주화 과정에서 살아 있는 자와 해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희생된 사람들보다 더 강해서라거나 약해서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몇 년 후 독일영화 《타인의 삶》(Das Leven der Anderen, 2006 독일)에서 그야말로 운이 좋은 사람을 만났다. 동독의 비밀경찰 비슬러는 극작가 드라이만과 연인 크리스티가 사는 집을 도청하여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일을 했다. 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라는 긴 이름의 각본·감독 작품인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東獨이 무대로, 비슬러(울리히 뮤흐 扮)는 서독과 가깝다고 의심되는 동독 최고의 시인·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 扮)과 인기 여배우 크리스티(마드리나 게덱 扮) 부부를 도청, 감시한다. 사소한 문제까지 타이핑하고 보고해서 체포하기 위한 중대 임무를 수행한다. 감쪽같은 도청장치로 감시하다가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과 예술을 좋아하는 모습에 감동한다. 드라이만이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리스티에게 들려주는 피아노연주 베토벤의 「아름다운 영혼의 소나타」를 들으며 냉혈한의 가슴에도 위로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드라이언의 빈 집에서 책상 위에 있던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갖고 와서 읽는 비슬러의 눈가에 비치던 눈물의 장면도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 이념과 체제에 저당 잡힌 채 ‘타인의 삶’을 살아온 자신에 대한 회한으로 그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 자신의 주체적 삶을 회복한다. 비슬러는 당국에 거슬리는 그들의 행동을 보더라도 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하여 보내기로 마음을 바꾼다. 결국 감시소홀로 자신은 우편배달부로 좌천되었지만, 진정한 자아 찾기를 할 수 있었던 비슬러는 운이 좋은 사람에 속할 것이다.
해직되었던 이들도 10년만엔가 복직의 기회가 주어졌고, 민주화 투쟁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엔 이른바 출세하기도 했으니 그들도 운이 좋아서 인가.
오랫동안 불의와 싸우는데 앞장서지 못하고 비겁한 침묵의 관찰자로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인 나는 운이 좋아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