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최윤정
파란시선 0151
2024년 11월 1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50쪽
ISBN 979-11-91897-90-6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아름다움 중독증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는 최윤정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조약돌」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장작」 등 50편이 실려 있다.
최윤정 시인은 2014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공중 산책] [수박사탕 근처]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를 썼다.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에는 늘 처리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이 남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감정과 욕망은 우리가 마주한 이 시집에서 기묘한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화자는 볼 수 없는 대상을 볼 수 있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은 외려 다른 사물들에 새겨진 겹겹의 시간과 색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바라봄의 과정은 ‘내’가 ‘너’라는 대상을 영원토록 이 자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내’가 그러한 대상이 ‘여기’에 없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그’를 거듭 상기하게 만들며 동시에 ‘그’의 구체성을 실루엣의 형태로 ‘지금’이라는 시공간 속에 현전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집을 읽으며 어떤 직접적인 진술 없이도 ‘그’라는 대상의 그림자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없음’의 형태로 새겨져 있는 셈이다.
불가능한 대상을 두 눈에 담기 위한 화자의 행동은 아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성취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화자의 모습을 누군가는 어리석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불가능성에 대한 투신이야말로 문학이 현실 원리와 구별되는 하나의 특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을 통해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아름다움은 현실 원칙에 가려져 사물의 레이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최윤정의 시를 다음과 같이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최윤정의 시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그 한 겹 한 겹에 새겨진 아름다움을 다시금 발견해 낸다고. 그의 대상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의 시적 화자는 더 많은 사물들에 숨겨진 더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낼 것이라고. 어리석은 반복이 아름다움을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시적 기적의 순간이 아닐까. (이상 임지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최윤정의 시는 세계에 속삭이는 겹겹의 귓속말이다. 이 귓속말은 작고 여리게 들리지만, 이미지로 연결된 시어들이 주변의 사물과 만나며 에코처럼 연쇄적인 목소리를 얻는다. 어둑한 구석의 사물이 어떤 빛 하나에 비틀거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에서 구멍이 생기고, 때로 그 구멍들에 숨이 가빠 오기도 하는 세계. 최윤정은 그 안에서 화려하게 꽃망울을 터트려 현혹시키기보다 주변의 대상들에게서 간극의 이미지를 가져와 작은 맥박들을 그러모은다. 그 미미한 맥박들이 시인의 목소리를 입으면서 오래도록 사계절을 물들이는 메아리로 변화한다. “반투명에서 불투명”으로(「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숨기는 것”이 “숨겨지는 것”이 되기도 하는(「빛의 곡면」), 그 변화를 감지하는 눈과 손길이 시 속에 가득하다. 이렇듯 자신의 감각을 미세한 파동으로 끌어올려 사물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시인. 시인의 문장이 덧씌워짐에 따라 그늘에 놓여 있던 사물들이 햇살과 바람에 출렁이고, “말을 걸면/답을 하는” 사물들이 생긴다(「슬픔의 생략」). 그럼에도 세계는 ‘나’와 대상들의 경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일치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의 슬픔이자 그것을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는 ‘나’와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 시집의 제목처럼 “세 뼘 옆에서 책을 읽”거나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고, 먼 곳에서 이쪽을 건너볼 뿐이다. “시공의 비약이 필요”한 때에도 ‘그’는 ‘나’와 화합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서로는 ‘사이’의 시공간에서 파동으로 서로에게 현존한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서 주파수를 맞출 뿐이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장이 빈방에서 태어남을 의미한다. “사백 년째 백지 앞에서/사백 년째 방이 된 사람”처럼 최윤정에게는 끝의 자리에서 다시금 시작하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아닐까. “신념으로 가득 찬 방”과 “숨소리마저 희미해진 공포”가 자라는 방에서 한 줄의 문장을 다시금 ‘그’에게 건네는 일.(「방이 된 사람」) 또한 대답이 없음에도 상자를 두들기고 흔들어 보는 사람의 나직한 혼잣말은 “죽음을 반복하는 삶의 형식”을 닮았다(「열쇠꽃」). 그러한 의미에서 최윤정은 “금세 사라질지도 모를 날개”로(「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군무를 추는 새처럼 스스로 아름다움에 중독된 자가 된다.
―박은정 시인
•― 시인의 말
비와 비 사이 미농이 있다
내가 나를 쓰러트리지 않고 미농일 수 있을까
어느새 그는 사라지고
뾰족하고 둥근
물 자국만 남았다
•― 저자 소개
최윤정
2014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공중 산책] [수박사탕 근처]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슬픔의 생략
조약돌 – 11
그저 그런 낮 – 14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 16
포럼 – 18
빈 강의실 – 21
열쇠꽃 – 23
방이 된 사람 – 26
빛의 곡면 – 29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 31
무릎을 구부리고 – 33
펀칭기 – 37
슬픔의 생략 – 39
공터는 자꾸 졸립다 – 41
고무공은 자꾸 졸립다 – 43
해변의 책 – 46
무심한 빛 – 48
머그잔 – 51
제2부 작고 가벼운 믿음
소하식당 – 55
개구리 스티커 – 56
공명 – 59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 61
가마삼거리 – 63
민자와 유리병 – 65
아보카도 – 67
청명 – 69
짧고 긴 빛 – 71
사라지지 않는 것 – 74
아크(Ark) – 78
블루베리는 감정 – 80
밤의 고막 – 82
기억은 손전등마다 다른 씨앗으로 – 85
남겨지는 것 – 87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 90
굴절 – 92
제3부 밤의 회복실
지금 이곳은 안개입니다 – 97
트랙을 가진 조약돌 – 100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 103
장작 – 105
무심코 – 107
근친 – 110
북쪽은 지금 눈입니까? – 112
낮에 쓰다 만 시 – 114
봄밤 – 116
미립자 – 118
슬픔의 배열 – 121
해변 바이브 – 123
밤의 회복실 – 125
새장과 고무공 – 127
좋은 징조 – 129
밖에서 밖으로 – 131
해설 임지훈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자리 – 133
•― 시집 속의 시 세 편
조약돌
아름다움 중독증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상자에 질문지를 넣고 뚜껑을 덮습니다
궁금한 채로 남겨 두기로 합니다
아름다움 중독은
잠수하기 직전의 수련 낯빛 스치는 붉은 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조약돌의 줄무늬처럼 한꺼번에 숨을 들이키고 물속으로
사라지는 맥박까지 붙잡습니다
물살로 얼룩진 조약돌을 함께 넣었지요
가짓빛 얼룩은 꽃 피지 않고
자라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펄럭이지 않는 저녁이면
대답이 없을 상자를 두드려 봐요
줄무늬 조약돌에게 해 줄 말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골목길 가등처럼 깜박거리면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끝을 묻기도 전에
막다른 길목에서
미래의 갈피를 뽑아 버린 날
바늘 꿈을 꾸었어요
손가락들 깊숙이 꽂혀 있는 바늘을 뺀다고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작은
핏방울이 손가락마다 남았어요
닦지 않은 핏방울이
검은 나방이 되어 날아가는 순간에도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제 같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소천하신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가자는 말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즈음
혼자 앉아서 상자를 마구 흔들었어요
거센 파도 소리에 맞춰
맘이 제각각 펄럭이는 날
조약돌은 말이 없었고
여전히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습니다
다만 일그러졌다가 팽창하는 상자 쪽으로
혹은 바람 쪽으로
낯선 주파수를 맞춥니다 ■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유리 꽃병에 담긴 물이
잘린 줄기의 단면을 보여 줄 때
줄기는 가끔 안쓰럽습니다
물러진 단면은 지독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읽히지 못한 채 부서져 버리니까요
투명한 공기를 헤치고 은점표범나비가 날아갑니다
반투명 노랑은 치명적이죠
은점이 날개 위에서 반짝거릴 때
멈춰진 자전거의 세계를 훔칠 듯 다가와서
선잠에 빠진 거울 속으로 날아갑니다
반투명에서 불투명으로
가방은 그를 데리고 노랑 지붕 옥탑방으로 날아갔을까요
짝짓기를 위해 하늘 높이
은점까지 투명해지기 전에
그가 거울 밖으로
저녁 물안개 속으로
실마리 없는 물뱀처럼 미끄러집니다
미지근한 바닥으로 노랑은 흘러내립니다 ■
장작
다발성은 한 묶음의 성냥개비에서 오는 걸까
언젠가는 머리카락에서 오기도 했었지
바닷물을 뒤집어쓴 머리카락에 붙은 모래 알갱이와
군산항을 가로지른 새 떼로부터
번식하는 게와 미역으로부터
비밀과 비극이 섞이는 다발성은
골목과 광장을 가로질러 재생하고
셔츠의 뒤엉킴 속에서 번지는 바람의 비명으로
부둣가 그슬린 드럼통 속으로
불이 붙는다 동시다발적으로
마른 장작의 결을 따라 분리와 해체를 꿈꾸며
불은 망각처럼 수직으로 나풀거리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조금 오른 취기로 몸서리치며 다발성을 연장하지
비밀과 비극이 서로 엉킨 채 서서히 오그라붙지
만지면 분진으로 흩어지는 들숨과 날숨
뜻밖의 뒤엉킴 속에서 번지는 바람의 비명으로
새벽 부두에서 불을 쬐는 사람들
곱은 손으로 영수증 뒤적이는 사이
불의 모포를 덮은 채
자기 자신까지 망각한 채
잊음을 넘어서는 잊음으로,
그슬린 표범 반점으로 남아
만지면 분진으로 흩어지는 날숨과 들숨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녹은 금니를 서로 반짝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