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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루이스 게릭(영어: Henry Louis Gehrig, 독일어: Heinrich Ludwig Gehrig 하인리히 루트비히 게리히, 1903년 6월 19일 ~ 1941년 6월 2일)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의 내야수로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미국 뉴욕 주 뉴욕 출신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3년, 당시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였던 폴 크리챌의 눈에 들어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게 된다.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이적해 온 베이브 루스와 함께 팀의 중심 타선을 이루었는데, 훗날 이 타선의 이름은 살인 타선(Murderers' Row)으로 불리게 되었다.
1925년 당시 팀 내 주전 1루수이던 윌리 핍을 대신 해 경기에 출장한 이후 14년 동안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워 ‘철마’(The Iron Horse)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2] 이 기록은 1995년 9월 6일, 칼 립켄 주니어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가 경신할 때까지 56년 동안 이어졌다. 12년 연속(1926년 ~ 1937년) 3할 대 타율과 5번의 40홈런 이상 시즌을 기록할 정도로 정교하고 힘있는 타격을 보여준 강타자이다.
선수 시절 후반기인 1939년에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 세포가 파괴되어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3] 으로 은퇴하였고, 2년 뒤인 1941년에 서른 일곱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훗날 이 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루 게릭 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4]
1939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고 그 해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제목의 유명한 은퇴 연설을 남겼다. 이 날 양키스 구단은 게릭의 등번호 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메이저 리그 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이다.
메이저 리그 야구 시절
루 게릭은 1923년 시즌 중반에 메이저 리그 야구 뉴욕 양키스에 입성을 하게 되는데, 그의 첫 메이저 리그 야구 경기는 1923년 6월 15일 경기였고 대타로 출전했다. 처음 두 시즌 동안 주로 대타로 나서며 많은 출장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규 리그 경기에서는 23경기밖에 나오지 못했고 1923년 월드 시리즈 출장선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25년이 되어서야 437타수 동안 0.295의 타율과 20개의 홈런 그리고 68타점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23살에 불과한 뉴욕 양키스 1루수 루 게릭의 잠재력은 1926년이 되자 드디어 폭발했는데, 시즌 기록은 0.313의 타율, 47개의 2루타, 아메리칸 리그 1위의 기록인 20개의 3루타, 그리고 16홈런과 112개의 타점이었다. 192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한 월드 시리즈에서도 게릭은 0.348의 타율과 4개의 2루타, 4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7차전까지 벌어진 경기에서 카디널스가 4승 3패의 기록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이었다.
1927년 루 게릭은 타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의 하나를 보내게 되었다. 그 해 218개의 안타를 치면서 0.373의 타율, 52개의 2루타, 18개의 3루타, 47개의 홈런과 175 타점을 기록했고, 장타율은 무려 0.765(7할 6푼 5리)에 이르렀다. 117개의 장타(Extra-base Hits: 안타중에서 단타를 제외한 것)[10] 는 베이브 루스가 1921년 기록한 119개에 이은 역대 2번째 기록이고, 447 총루타(Total Bases)[11] 는 1921년 기록한 베이브 루스의 457루타와 1922년 로저스 혼스비가 기록한 450루타에 이은 역대 3번째 기록이다. 1927년 루 게릭의 엄청난 타격 행진에 힘입어 양키스는 110승 44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하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겨룬 1927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4승 무패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에 뽑혔지만, 루 게릭의 1927년 시즌에 대해 베이브 루스의 60홈런과 그 당시 뉴욕 양키스의 타선이 리그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던 (훗날 대부분의 선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로 이루어진) '살인 타선'(Murderer's Row)인 이유를 들어 그 가치를 절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야구 선수로서 활동한 기간의 3분의 2이상 동안 베이브 루스의 그늘 아래에서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루 게릭은 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점생산능력을 가진 타자들 중의 한 명인 것은 틀림없다.
1930년부터 32년까지 세 시즌 동안 509 타점을 기록했다. 지미 폭스가 세 시즌 동안 507 타점을 기록하고 행크 그린버그가 503 타점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들의 기록은 연속한 3 시즌 기록은 아니다.(베이브 루스의 3 시즌 최고 타점 기록은 498이다) 풀타임 출장을 한 총 14번의 시즌 동안 게릭은 13 시즌 연속 100 타점 이상을 기록했다.(역대 메이저 리그 타이기록이며 다른 기록의 주인공은 지미 폭스이다). 6 시즌 동안 0.350(3할 5푼)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으며(최고 타율은 1930년에 기록한 3할 7푼 9리의 기록이다.), 7 번째 시즌의 타율은 0.349 이다. 8시즌 150 타점 이상, 11시즌 볼넷 100개 이상, 8시즌 200 안타 이상, 그리고 5시즌 4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12] 아메리칸 리그 기록에서도 득점 1위는 4번, 홈런 1위는 3번, 타점 1위는 5번을 기록했다. 1931년 작성한 184 타점은 2008년 시즌이 종료된 지금까지도 아메리칸 리그 역대 타점 1위의 기록이며, 리그 전체를 통해서도(내셔널 리그의 기록을 합쳐도) 핵 윌슨이 1930년에 기록한 191 타점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점을 기록한 6 개의 시즌 기록 중 3 개의 기록이 루 게릭의 것이다. 또한 야구 역사상 400 총루타(Total Bases)이상을 기록한 시즌 최다 순위에서도 루 게릭은 5개로 역대 최고이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10시즌 동안 루 게릭은 뉴욕 양키스에서 베이브 루스와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함께 했는데, 루스보다 홈런을 더 많이 친 시즌은 1934년 시즌으로 딱 한 번이다.(1934년 시즌으로 루스가 125경기에 출장해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반면 루 게릭은 4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31년에는 둘 다 46 개의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함께 한 10시즌 동안 루스는 424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루 게릭은 34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루 게릭은 7 시즌(1925, 1927, 1930~1934)동안 루스보다 타점을 더 많이 기록했으며, 1928년 시즌에서는 같은 타점을 기록했다.
10시즌 동안 루스가 1,316개의 타점을 기록했고, 게릭은 1,436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루 게릭은 8시즌(1925, 1927~28, 1930~34)동안 루스보다 더 많은 안타를 쳐냈으며, 2시즌(1933~34)동안은 더 높은 장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게릭은 7시즌(1925, 1927~28, 1930, 1932~34)동안 루스보다 더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함께 한 10시즌 동안 게릭은 0.343의 타율을 기록했고, 루스는 0.338의 타율을 기록했다.)
게릭은 20세기 들어서 처음으로 한 경기 4개의 홈런을 친 선수가 되기도 했다.[13] 6월 3일 쉬비 파크(Shibe Park)에서 벌어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14] 와의 경기였는데, 특히나 5번째 홈런이 될 뻔한 타구는 애슬레틱스 외야수인 알 시몬스가 가운데 담장 위로 뛰어 올라 잡지 않았다면 5번째 홈런이 될 법한 타구였다. 경기 후 감독인 조 매카시가 루 게릭에게 "이봐, 루, 아무도 오늘의 네가 보여 준 활약을 잊지 못할거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날 30년 동안 뉴욕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았던 존 맥그로가 은퇴를 선언해서, 다음날 신문의 스포츠 면은 게릭의 1경기 4홈런 소식이 아닌 맥 그로의 은퇴소식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늘 그렇듯 루 게릭은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인 1933년 9월, 루 게릭은 시카고 공원의 행정관 프랭크 트윗첼의 딸인 엘리너 트윗첼과 결혼을 했다.
1936년 루 게릭과 칼 허벨(뉴욕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좌완 투수)를 다룬 월드 시리즈 커버스토리에서, 타임지는 게릭을 ‘최고의 1루수’라고 칭하면서 “엄청난 파워를 가진 타격과 빠른 주루 플레이를 하는 선수”라고 평가하였다.
루 게릭은 홈 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에서 수많은 안타를 쳤는데, 총 1,269개의 안타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2008년 9월 16일 데릭 지터의 양키 스타디움 1,270번째 안타로 경신되었다.[16]
2,130 경기 연속 출장
연속경기출장의 기록은 1925년 6월 1일, 루 게릭이 유격수 폴 ‘피 위’ 웨닝거를 대신해 대타로 경기에 나가면서 시작됐다. 다음날 6월 2일, 당시 양키스 감독이었던 밀러 허긴스는 주전 1루수 월리 핍 대신에 게릭을 선발 출장 명단에 넣었다. 핍은 당시 슬럼프인데다가 두통까지 겹쳐 출장명단에서 빼줄 것을 감독에게 요구했다. 허긴스는 때마침 팀도 슬럼프여서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이전과 다른 출장명단을 작성했다. 이날 윌리 핍 대신 출장한 루 게릭은 2안타를 쳐 내면서 주전 1루수 자리를 따내는 계기가 되었다.[17] 14년이 지나 게릭은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아주 가끔은 대타로 나오는 것으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이어가긴 했더라도, 연속 경기 출장을 위해 다음과 같은 부상도 감내해야 했다.
1933년 4월 23일, 워싱턴 세네터스의 투수가 공을 잘 못 던져서 루 게릭의 머리를 맞춘 적이 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게릭은 일어나서 남은 경기에 임했다
1933년 6월 14일, 게릭은 감독인 조 매카시와 함께 퇴장을 당했는데 이미 타석에 들어선 적이 있어서 그 경기도 출장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1934년 7월 13일, 게릭은 심한 허리 통증을 겪었는데 경기장에서 나올 때는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다음날 원정 경기에서 루 게릭은 유격수 라인업에 들어섰고 타순은 1번이었다. 1회초 선두타자로 나와 안타를 치고는 곧바로 대주자로 교체되고는 아픈 등을 치료하러 갔다. A&E 에서 제작한 루 게릭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등 쪽의 차가운 느낌’이라 묘사된 증상을 조사했는데 아마도 그의 경화질환(근 무력증)의 첫 번째 징후로 여기기도 했다.
루 게릭 생애 끝자락에 찍은 X 레이 사진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은 부상을 참고 경기에 출장하면서 여러번의 골절상도 입었고, 골절상을 입은 채 경기에 출장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게릭의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내야수 칼 립켄 주니어가 1995년 9월 6일 그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꽤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메이요 클리닉
루 게릭의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게 되자, 게릭의 아내 엘리너는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있는 유명한 메이요 클리닉에 전화를 걸었다. 결국 찰스 윌리엄 메이요 박사와 통화를 하게 되는데, 그는 루 게릭의 놀라우리만치 급격한 근력의 감소에 관해 예의주시 해오던 차였다. 메이요 박사는 엘리너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게릭을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
엘리너와 게릭은 그 당시 양키스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던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로체스터로 날아갔는데, 병원에 도착한 것은 1939년 6월 13일이었다. 메이요 클리닉에서 6 일간의 정밀 검사를 받은 후인 6월 19일에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라는 진단을 받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루 게릭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병의 예후는 암담했다. 급격한 전신 마비의 증상이 늘어날 것이고 음식을 삼키거나 대화하는데 지장이 심하고 향후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것이었다.하지만 정신적 손상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엘리너와 게릭은 ALS의 원인은 불명이며, 고통도 없고, 전염되는 병은 아니지만 생명에 위협적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중추신경계가 파손이 된 것이지만 정신만은 끝까지 남게 될 것이라는.
게릭은 종종 엘리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진단 결과를 들은 후 곧바로 쓴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쁜 소식이야, 쉽게 이야기해서 영구적 소아마비와 같은 측색 경화증이래. 고칠 방법이 없대... 이 경우는 거의 그렇다고 하네. 아마도 일종의 병원균때문이라지... 그게 주변사람들에게 전염된다고는 듣질 못했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유지될 가능성은 반반이래. 10년이나 15년 목발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야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메이요 클리닉에서의 일정이 끝나자마자 루 게릭은 워싱턴 D.C.에 머물러 있던 양키스 선수단에 곧바로 합류한다. 게릭이 탄 기차가 유니온 역에 들어왔을 때, 손을 흔들면서 루의 행운을 기원하는 보이 스카웃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게릭은 손으로 답례를 했지만 곧 그와 동행이었던 한 기자에게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 저 소년들은 제가 낫길 바라고 있지만 사실 저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어요. ”
— Eig, Jonathan (2005). 《Luckiest Man: The Life and Death of Lou Gehrig》. New York: Simon & Schuster. 074324591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편집
루 게릭의 영구 결번인 4번
1939년 6월 21일 뉴욕 양키스는 루 게릭의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루 게릭 은퇴식'이 거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경기가 있는 미국 독립 기념일인 그 날 더블헤더 사이에 경기장 안에서 은퇴식이 거행됐다. 은퇴식이 있던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보도를 통해 “61,808명의 관중들이 한 선수에게 작별을 고하는 이제껏 가장 화려하고 가슴 찡한 행사”였다고 밝혔다. 고위 인사들이 이 죽어가는 강타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으며, 소위 '살인 타선'이라고 잘 알려진 1927년 월드 시리즈를 제패할 당시의 양키스 선수들도 행사장에 나왔다. 뉴욕 시장인 피오렐로 라가디아는 게릭을 가리켜 “가장 위대한 스포츠 선수 정신과 시민 정신을 가진 표상”이라고 했으며, 우정 장관 제임스 펠리(James Farley)는 “다가올 세대에 야구를 하는 어린 소년들은 게릭의 기록을 자랑스럽게 가리킬 것”이라는 예견으로 연설을 마쳤다.
양키스 감독인 조 매카시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연신 참으면서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것처럼 루 게릭의 곁에 가까이 선 채 말을 시작했다. “이제껏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으며, 스포츠 선수며, 자랑스러운 시민의 모범 사례”라고 말을 마친 뒤 더 이상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울면서 게릭에게 말했다. "루, 오늘이 바로 자네를 아는 모든 이들이 가장 슬퍼할 날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네, 디트로이트에서 원정경기가 있던 그 날 내 방으로 들어와 자기가 팀에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이제 더 이상은 경기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지. 자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지, 오, 이런..."
뉴욕 양키스는 루 게릭의 유니폼 등번호인 4번을 영구 결번 처리하였는데,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이 되는 영예였다. 수많은 선물들과 기념주화, 트로피를 받았다. 선물을 증정한 사람들은 고위인사부터 야구장 관리인,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은퇴식 내내 게릭은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곧바로 땅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들고 있을 팔의 힘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키스 팀은 게릭의 서명이 새겨진 은제 트로피를 증정했다. 트로피 앞 부분에는 뉴욕 타임스의 편집자 존 키어런이 쓴 헌정시가 적혀 있었다. 트로피의 값은 단지 5달러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트로피는 게릭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장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트로피는 지금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다.
베이브 루스가 루 게릭에게 선물을 준 뒤 그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루스의 연설이 끝나자 루 게릭이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가 앓고 있는 질병에 관해서 들으셨겠지요. 하지만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야구장에서 17년이나 뛰었고 팬 여러분들로부터 친절과 격려만을 받았습니다.
이 위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당신들 중 누가 그들과 함께 한 일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운이 좋습니다. 누가 제이콥 루퍼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한 위대한 제국의 창시자 애드 버로우는요? 6년 동안 함께한 놀라운 작은 친구 밀러 허긴스는요? 뛰어난 리더이며 심리학의 영리한 학생이자 오늘날 최고의 야구 감독인 조 매카시와 함께한 9년은요? 그렇습니다. 저는 운이 좋습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오른팔을 잘라내어도 아깝지않을 팀, 우리쪽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런 팀인 뉴욕 자이언츠[21] 가 선물을 보내주었다면-그것은 대단한 일이죠. 구장관리인 이하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당신을 트로피와 함께 기억할 때 그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딸이 사위와 말다툼을 할 때도 사위편을 들어주는 멋진 장모가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당신을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힘의 근원이 항상 되어주고 당신이 가능하다고 꿈꿨던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그것은 제가 아는 최고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드리면서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예의 전당
청중들은 거의 2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게릭은 마이크에서 입이 떨어질 정도로 심하게 휘청거렸고,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구장 내 밴드가 〈I Love You Truly〉를 연주하고 청중들이 “루,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노래 가사를 바꿔서 따라 부르는 동안, 베이브 루스는 그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뉴욕 타임스는 다음날 보도에서 “이제껏 야구장에서 보았던 광경들 중 가장 가슴뭉클 했던 장면들 중의 하나”며, 비정한 기자들조차도 슬픔을 삼킬 수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1939년 시즌이 종료된 12월,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결정하는 전미야구기자협회는 게릭을 유예기간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는데,[17] 일반적으로 선수 은퇴 후 몇 년의 유예기간을 가진 뒤 헌액이 되는 기존과 다른 특별한 경우였다. 루 게릭은 이로써 36세라는 역대 최연소로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생애 마지막 1년
루 게릭은 은퇴 직후 "절망하거나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24]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몸상태와 싸워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가능한 한 오랫동안 버텨낼 것이다. 차후에 죽음이 다가와도 묵묵히 받아들일 것이며 더 나은 상황이 올거라는 희망도 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1939년 10월 라가디아 뉴욕 시장으로부터 10년 임기의 뉴욕 시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직책을 임명 받아 1940년 1월 2일 직책을 수여받았다.[23][25] 가석방 위원회는 전직 야구선수인 루 게릭에게 “가석방 제도에 대한 공고한 믿음으로 올바른 교정처분”을 행할 것을 명했다. 게릭은 가석방 관련 업무가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할 좋은 기회이므로, 직무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가석방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받는 연봉 5,700 달러보다 훨씬 수입이 큰 유료강연이나 행사의 초대손님과 같은 제안도 받았지만 게릭은 다 거절했다. 뉴욕의 교정시설을 방문할 때면 가급적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게릭은 늘 그렇듯, 조용히 그리고 충실히 그의 의무를 이행해 나갔다. 게릭은 감독관 업무를 행하면서 종종 아내인 엘리너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는데, 공문에 서명을 할 때면 그녀는 게릭의 손을 잡아주면서 도와줬다. 죽음을 앞둔 한달 전쯤, 게릭은 이제 더 이상 몸이 직무를 수행해 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미치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1941년 6월 2일 밤 10시 10분, 윌리 핍 대신 1루수로 출장한 그 날 이후 13년이 지나 루 게릭은 뉴욕 브롱크스 필드스턴지구 델라필드가 5204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듣자 마자 베이브 루스와 그의 아내 클레어는 게릭의 아내인 엘리너를 위로하기 위해 곧장 게릭의 집으로 갔다. 뉴욕 시장인 라 과디아는 뉴욕의 모든 관청에서 조기를 게양할 것을 명했으며, 전국의 모든 메이저 리그 야구 구장에서도 조기가 게양이 되었다.
켄시코 묘지에 조성된 루 게릭의 묘비
리버데일에 위치한 성공회 교회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6월 4일 게릭의 유해는 화장을 한 뒤 뉴욕 발할라에 있는 켄시코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루 게릭과 에드 배로우[28] 는 켄시코 묘지의 같은 구역에 안치되었는데 켄시코 묘지는 베이브 루스와 빌리 마틴이 안장된 천국의 문 묘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엘리너 게릭은 루 게릭이 죽은 다음, 재혼하지 않은 채 남은 평생을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연구를 지원하는 일에 바쳤다. 엘리너는 자신의 80번째 생일인 1984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게릭 부부 사이에 아쉽게도 자녀는 없었다.
루 게릭 기념비
뉴욕 양키스는 1941년 7월 6일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쪽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웠는데,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야구 선수는 영원히 기록되리. ”
게릭의 기념비는 1932년 세워진 밀러 허긴스[30] 의 기념비와 나란히 하게 되었는데 그 후인 1949년에 조성된 베이브 루스의 기념비도 또한 그렇게 되었다.
루 게릭이 태어난 맨해튼 2번가 1994번지는 유적으로 조성되어 기념판이 세워져 있다. 그가 초기에 살았던 94번가의 E지역도 기념판 세워 루 게릭을 알리고 있다.
허드슨 공원길 동쪽에 위치한 브롱스 리버데일 구역의 델레필드 가 5204번지 루 게릭의 자택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기념판이 조성되어 있다.
루게릭병이란?(근위축성측삭경화증 ALS)
1 루게릭병이란?
루게릭병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일종의 운동 신경원 질환 입니다.
운동 신경원이란 뇌와 척수에 있는 몸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세포를 말하며, 이 세포가 선택적으로 손상되어 없어지는 병을 운동신경원 질환이라고 합니다.
루게릭병은 운동신경원 질환의 대표적인 질병으로 1930년대 이 질병을 앓았던 미국 뉴욕 양키스팀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루 게릭-Lou Gehrig"을 기리기 위해 루게릭병으로
명명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 루게릭병은 왜 생기나요?
루게릭병으로 뇌와 척수에 있는 운동신경세포가 어떤 이유로 손상되고 파괴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90%이상의 환자는 대개 유전과 관계없이 발생하는 경우이나 약 5-10%환자에서는 가족성으로, 유전적 소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게릭병이 잘 걸리는 특정 인종이나 집단, 문화적 차이, 경제 상태 등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루게릭병의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연령대는 평균 50대 초반이고, 남자가 여자보다 1.4~2.5배정도 높은 발병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루게릭병의 국내 통계 자료는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외국의 자료에 따르면 매년 10만 명당 1-2명이 새롭게 발병하고 10만 명 중에서 4-6명이 루게릭병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루게릭병은 어떻게 진단하나요?
아직까지 진단을 확진 할 수 있는 검사가 없습니다.
여러 검사가 동원 되나 다른 질환을의 배제를 하기 위해 시행하게 됩니다.
진단을 위해서 관련 전문의 진료가 반드시 필요하며 세심한 병력 청취와 신경학적 진찰, 신경근전도, 유발전위검사, 영상의학과 검사, 혈액 검사 등과 일정기간 관찰을 통해 고려합니다.
4 루게릭병의 치료는?
현재까지도 루게릭병을 일으키는 명확한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며 뚜렷한 치료법 또한 개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루게릭병의 진행을 지연시키는 약물로 '리루졸-Riluzole'-[상품명-릴루텍]이 있습니다.
'리루졸'은 운동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원인의 하나로 여겨지는 과도한 글루타민산에 대한 길항작용을 함으로써 신경세포의 사멸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리루졸의 효과 역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현재 루게릭병의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하여 많은 연구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5 루게릭병의 증상은?
초기증상으로 대부분의 루게릭병 환자가 경험하는 것은 팔과 다리, 특히 손과 발, 다리의 근력이 약해지고 가늘어집니다.
수저질을 하거나 단추를 잠글 때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없어지게 됩니다.
손과 발을 들어올리기가 힘들어지고 근육이 움찔거리거나 꿈틀대는 증상(fasciculation)이 나타납니다.
루게릭병 환자는 또한 몸의 피로를 쉽게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경세포가 파괴된 신경세포를 대신하여 전력으로 신호를 전달하려고 무리를 하게 되면서,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량을 훨씬 초과하여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침이나 음식물을 삼키기가 힘들어지는 증상이, 초기 증상으로 먼저 시작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증상의 진행 운동장애, 삼킴곤란, 의사소통장애, 호흡장애가 나타나는데, 초기 증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증상이 진행 되면서 이들 네 가지 증상이 결국에는 모두 나타나게 됩니다.
환자에 따라 병의 진행 속도는 다르지만 운동장애가 먼저 나타난 경우, 식사 또는 세면하기에 어려움을 느끼며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합니다.
점차 손발근육이 말라가면서, 걷거나 움직이기가 어려워지고 스스로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근력약화를 보이는 부위 또는 근력약화를 보이는 인접 부위에, 근섬유가 자발적으로 수축을 하여 근육이 튄다고 느껴지는 근섬유속성연축 (fasciculation)이 관찰됩니다.
혀나 인두, 후두, 얼굴 근육의 힘이 약해지면서 음식물을 삼키거나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삼키는 기능이 저하되면서 사레 걸리는 경우가 잦아지고, 환자는 침이 입안에 고인다고 호소하기도 하고, 입 밖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증상이 진행되어 음식물 섭취가 더욱 곤란해지면 튜브를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게 됩니다.
음식물 섭취가 힘들어지면서 신체의 전반적인 영양 상태가 악화되면, 호흡근의 기능까지 약화 시킬 수 도 있습니다.
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머리가 무거워지는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호흡장애의 초기 증상일 수 있습니다.
루게릭병 후반기에는 호흡에 관여하는 운동신경세포까지 손상되면서 호흡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코가 막힌다거나 아래턱의 근육이 지나치게 풀리게 될 경우, 상기도가 막히게 되면서 폐쇄성 무호흡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욱 증세가 심해지면 반듯하게 누워 위를 보고 잠을 잘 수가 없어 옆을 향해 눕게 되거나, 머리와 상체를 높게 하지 않으면 숨이 차서 잠을 잘 이룰 수 없게 됩니다.
호흡곤란이 심해지면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의식과 감각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병이 진행됨에 따라 불안함과 우울함은 점점 증가되어 드물게는 전두측두엽 치매가 발생하면서 성격장애, 기억장애 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루게릭병에서 자체적인 통증은 유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력이 약해지면서 관절에 압박이 가해질 경우 통증이 초래될 수 있으며,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을 경우 지속적으로 압박 받는 부위에 통증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매트리스 안으로 공기가 자동으로 주입, 제거되면서 지속적인 압력을 방지해주는 에어 매트리스를 사용하거나, 눕는 자세를 자주 변경 시켜주어 압력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좋습니다.
드물게는 특별히 웃기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웃는다거나, 슬프지도 않은 상황에서 울어 버리는 등 부적절한 감정표현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강제 웃음, 강제 울음이라고 불리는 증상으로 발병기전은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뇌에서 감정 표현을 담당하는 신경전달경로에 손상을 입은 경우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은 본인의 의지로도 조절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6 루게릭병의 예후는?
루게릭병이 발병하여 근력 약화 증상이 느껴지는 시점이면 이미 운동신경세포가 70%이상 소실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평균 생존 기간은 증상 발생 후 3-5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호흡기 사용과 영양 관리 등의 치료법 향상으로 10년 이상 투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증상이 뇌간기능의 마비로 시작되는 경우는 호흡곤란과 음식을 삼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폐렴의 위험이 따를 수 있고, 좋지 않은 영양 상태로 인해서 예후가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영양 공급과 호흡 상태 유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루게릭병의 예후는 개인마다 달라서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완치를 위한 약물을 없다고 할 지라도 세심한 관리에 따라 삶의 질과 예후의 차이는 상당합니다.
또한 힘든 질환을 경험하며 환자와 가족에게 많은 심적 부담이 되면 상당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적절한 대증치료와 심리요법, 우울증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한 치료 요소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