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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리고 영생 – 윤영한 목사
병원에 주무셨지요 지금 이맘때면 서울병원은 한우분들이 이렇게 병원 있고 처마에 왔다 갔다 해요. 마치 어항을 나와서 어슬렁 어슬렁거리는 거북이처럼 끌 때 이렇게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차분한 시간이고 한우 분들이 생각납니다. 보통 식사를 하고 6시 이후 얼추 7시 좀 넘으면 환자 방문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 돼요. 그때는 인제 가장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영적인지 심적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뭔가 막 이렇게 젖어드는 아주 가라앉는 그래서 평온한 배도 불러오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시간에 환자를 방문하면 결심을 잘 하고 또 목회자들 잘 맞아줍니다.
어떤 암 환우분은 방문을 인제 지속적으로 하는데 너무 아파요 아주 센 그런 진통제도 잘 안 있는 분들이 왕왕 계신데, 한번은 그분께 갔더니, 어서 오라고 휠체어에 앉아서 지금 안 아플 때라고 빨리 성경 읽어주고 기도해 주면 좋겠다고 너무 아프니까 보호자인 아들하고 계속 껴안고 오는 거야. 참 그럴 때 난감하고 힘들죠 기도하면 아멘을 얼마나 달게 받는지 몰라요. 말씀 읽으면 그 말씀이 이렇게 보면 막 나한테 사무치는 것 같애요. 그런 분들이 계세요. 얼마 전에 잠드셨어요. 하나님께서 고통을 그치게 하고 이제는 그런 투병하지 않도록 편안하게 잠들게 하셨어요.
여러분들 계시는 동안 그렇게 말씀이 내게 달게 그리고 모든 것들이 뇌세포에 잘 스며드는 그런 경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도 안 아프기를 바라고 또 심기 그리고 컨디션이 나빠지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계속 전화하면서 그걸 체크하는데 제가 뭐 VITAL 사인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간호사 사람 매일 물어봐요. 혈압은 어떠냐 맥은 어떠냐 숨은 잘 쉬어지냐 소 대변을 잘 받냐 이렇게 움직이면 어떠냐 그렇게 하는데 그렇게 우리를 매일 꼼꼼히 챙기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예 하루종일 주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그런 하루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랑 그리고 영생입니다.
제목 껍데기랑 내용이 좀 다른데 예 제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랑 그리고 영생입니다. 테스트해 봤습니다. 잘 돌아가네요. 저희 집사람도 이따금씩 예쁠 때가 있어요. 언제냐면 그 여자들이 화장하는 뒷모습을 볼 때 그래요. 진짜 여자들은 정말 화장하는 뒷모습을 볼 때 가장 아름답죠 왜 그게 이쁘냐면 그 화장할 때 여자들 알아요. 지가 부족한 걸 아는 거예요. 그렇게 바르지 않고서는 못 나간다는 걸 아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적나라한 인간인지 그걸 알고 계속 뭐 별 거 이렇게 하면서 막 찍어 발릅니다. 가장 겸손해지고, 그때 자신을 가장 자책하는 시간을 그렇게 갖는 거죠. 일종의 뭐냐면 누가 말했어요. 큐티시간 같은 거라구 그리고 화장할 때 가요 또 가장 불쌍하게 보여요. 그렇게 못 나가는 거 알고 자기의 노화를 가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는 거잖아요. 애처로운 거죠. 애처로운 제가 사진 동호회 활동을 과거에 왕성하게 했는데 그때 동호회 회원 중의 한 분이 한 젊은 애기 아빠가 이런 글을 올렸어요.
딸아이 태아 사진 때부터 4살까지 사진을 쭉 올리면서 글을 썼어요. 저는 그 글만 이렇게 뽑아 놓은 겁니다. 읽어드리면, 그래요.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갓 태어난 자식이 커 가는 모습은 어제는 저를 쏙 빼닮았는데 오늘은 아내를 닮았습니다. 하얀 겨울엔 털모자가 좋았습니다. 털모자 이쁜 애 사진을 보면서 올리면서 그랬어요. 시간은 멈추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서 딸은 4살이 되었고 아빠는 40세가 되었습니다. 이 아빠가 아주 뭐라 그러나 영리한 분 같아요. 미래를 막 생각하는 거야. 언젠가는 아빠 곁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겠지만, 그때까지 딸의 곁에 머무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강물이 어떡해요.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대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면 좋겠다고 새들이 천천히 날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빠 신경을 여기 표현했어요. 아빠가 천천히 늙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모든 사람이 바라는 시간이 멈추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영생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는 분이 결혼해서 애를 낳아 보니까 애랑 지내는 게 너무 행복하고 이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막 이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는요 어차피 죽으면 다 끝나는 인생이니까. 어떻게 하냐면 애들 태어나면 아예 동자승으로 보내요.
야 이놈아 너 공부하면 뭐 하니 죽는데 니가 결혼하면 뭐 하니 죽는데 니가 직장 댕기면 뭐 하니 죽을 건데 애 낳으면 뭐 하니 그 애도 죽고 너도 죽을 건데 죽으면 다 없어지는 게 인생이고 아무것도 공수네 공수가 되는 건데 무슨 소용이 있냐는 거죠. 그리고 뭘 가지고 뭘 누려봐야 결국은 다 떠나는 마당이니까. 그래서 스님들의 아예 애를 태어나면 그렇게 동사승으로 이렇게 하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정말 혼자 깔끔하게 살려면 불교같이 딱 좋은 것 같아요.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나 혼자 수련 잘 해서 그걸 내 의지로 이기고 편안하게 살다가 나 혼자 깔끔하게 가는 건 불교가 최곤 거 같애 그래서 불교는 사람 붙들고 뭐 정들고 이런 거 말하지 않죠 불교 사성제가 고집멸도 그거잖아요.
사성제에서 나온 게 고집멸도인데 고통은 집착해서 오고 집착을 없앨려고 집착을 그렇게 멸해야 도 도에 이른다고 그렇게 말하잖아요. 근데 우리가 살면서 고통은 다 어디서 오냐고 인연에서 오잖아요. 인연은 또 업에서 오잖아요. 업이라 하면 흔히 직업할 때 그 업이잖아요. 사람 직업 때문에 만나서 그 사람하고 원수 되고 막 그러니까 인연이 없는 곳으로 사람들이 안 아플라고 가는 거예요. 그 인연이 없는 데가 어디예요. 사람이 없는 데가 아픈 산 같은 데 첩첩상중 같은 데 그런 데 아니에요. 남한테 아픔 안 주려고 내 속에 있는 정도 다 내려놓고 사랑도 다 내려놓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철 스님 같은 그분들은 이 몇 개 국어로 하는 똑똑한 분인데 벽면 수행을 몇 년간 하는 아주 지성 있는 분인데 그분이 4월 초파일 날 어머니가 자기 보러 오니까 총무부에서 밑에서 전화하니까 당 끊고 내려가서 엄마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막 하는 거예요. 그 엄마가 애가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부처님께 뭐 좀 할려고 왔는데 위에서 소리치고 난리하니까 나 니 보러 온 거 아니다. 막 실랑이를 벌여요. 그래도 엄마가 안 가니까 이 스님이 어떻게 갔는지 알아요. 돌 던져요 욕하면서 신발 벗었다가 막 던져버리죠 욕을 하면서 쫓아보내는 거예요. 그 스님이 왜 그래요. 정을 뗄라 그래 고통을 없앨려고 연을 끊는 거죠. 사랑이 없으면 마음이 편하거든.
저도 여러분들 나중에 고통을 안 겪을라면 그런 정에 막 들이면 안 돼요. 발을 그리고 정을 끊고 무관심해야지 나중에 안 아플라면 사랑하는 척도 하면 안 돼 그리고 미워해도 안돼요. 미워하다가 나중에 정들고 그러구 그러다가 허전해지면 또 그 사람을 찾기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동네에서 싸우던 할아버지가 있어요. 그렇게 싸우면 정들어요. 한 할아버지가 돌아가니까 이 할아버지도 병드는 거예요. 허전해 가지고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안 아프려면 상처 안 받을라면 로보트처럼 살아야 돼 그렇게 로봇처럼 사랑도 하지 않고 미워도 하지 않으면 여기서 헤어질 때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이따가 아침 드실 때도 여러분 안 아플라면 최대한 무뚝뚝 하시면 돼요. 만나도 안녕하세요. 하지 마세요. 안녕하시든 마시든 그냥 지나갔어요. 인사도 최대한 건성건성 하셔야 돼요. 이 시간 나갈 때도 끝나고 그냥 나가세요. 본체만체하고 가장 성의 없게 가장 안 반갑게 대충대충 그렇게 해야 내가 마지막에 아프지 않아요. 목사님들도 장사꾼처럼 그렇게 설교하는 게 가장 안 아픈 거죠. 그리고 내려와서 인사할 때도 가장 쌀쌀맞게 교인을 대하면 돼요. 제가 뭐 강원도 사람이고 저희 학회는 동종한 합회래요. 그래서 강원도에서 목회를 많이 했는데 저 심심산골인 강원도 태백 있어요.
옛날엔 차로 막 5시간 간 그 아래 또 정선 있고 제천 있고 원주 거기서 목회했는데요. 목사들이 발령받고 나가면 교인들이 다 목사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또 아다리가 안 되는 부분이 또 있어 그러면 어떡하나 미워하는 분들은 또 미워하고 또 좋아하는 분을 좋아하고 옥신각신하고 뭐 싫네 좋네 해도 또 발령나서 4~5년 했다가 갈 때 되면 눈물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인사이동할 때마다 제일 눈에 밟히는 분이 제일 티격태격 많이 했던 분들이에요. 제일 원수처럼 서로 괴롭힌 분이 차에 짐을 싣고 트럭의 끈을 다 묻고 이제 떠날라고 딱 그러는데 와 가가지구 그 트럭 문을 딱 잡고 이렇게 있으면 진짜 힘든 거죠.
거기 나와서 막 울면 어떡할 건데 나오지나 말지 또 어느 교회에서 어떤 분은 제가 너무 속이 상해서 찾아가서 대판 욕을 해버렸어요. 할머니분인데 욕할 만큼 친했어요. 자식처럼 되면 가능한 건데 그렇게 막 욕을 하고 제가 내려오는데 이 할머니가 나중에 제가 나간 다음에 혼자 울었대요 저 30대 젊은 목사가 내가 이렇게 살면 구원 못 받을까? 봐 나를 위해서 저렇게 제가 이제사 또 말씀드리지만 그 교회를 떠날 때 거의 그분들을 버리고 도망온 거예요. 애착을 갖다가 지쳐서 이젠 다 잠드셨어요.
장례식장 갔는데 저 혼자만 우는 것 같아 주변 분들은 아유 이제 고생하시고 잘 가셨네, 그러는데 전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든 병원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뭘 해도 애착을 가지면 안 돼요. 정을 주면 나중에 여러분만 힘들고 가위 눌러요 그래서 사랑은 고통이고 불행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언제 큰 고통을 받냐면 그 사람을 좋아할 때부터 고통을 받아요. 그 사람을 사랑하면 어마어마한 상처를 우리가 다 받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요, 다 슬퍼요 사랑은 상처를 입는 일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1분도 예외 없이 어마어마한 불행을 겪을 것이 예정되어 있어요. 왜 그래요.
그 사람하고 헤어지기 때문에 그래 여기 자녀가 있는 분들은 생각해 보세요. 내 자식과 헤어질 날이 와요. 부모 계신 분들은 생각해 보세요. 부모님과 헤어질 날이 와요. 그날은 반드시 정말 기필코 그놈은 악착같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요.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고통을 당할 거예요. 사랑하면 할수록 고통을 클 거야. 왜요 사랑은 하는데 이제 사랑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더 사랑하고 싶은데 더 사랑할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더 사랑하면서 또 오래오래 살 수 있는 긴 시간을 주셨는데 그 시간을 성경은 뭐라 그래요. 영생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영생이라는 같이 읽을까요? 시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영생이란 말과 사랑이란 말은 의미적으로 동의어예요. 같은 말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신앙이나 신앙하는 거나 교회에 나오는 건 구원받으려고 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교회는 신앙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기 싫어서 하는 이게 신앙이고 오는 게 교회에요. 그래서 교회는 착할려고 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지 않으려고 오는 곳이 더 오래 살아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 하나님 그렇게 긴 시간을 허락하시는데 그게 바로 뭐라구요. 영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도 매주 주말마다 수백만 명이 물이 막 밀려와도 교회로 와르르 갔다가 아르 나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므로, 구원받으려고 우리가 애쓰는 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은 내 속에 사랑이 없는 것 때문에 발을 굴러야 되는 거예요. 뭐 적절한 예가 없어서 그러는데 시어머니하고 나랑 한 방에서 영원히 살라 그러면 어떨까요?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건 저주예요. 그래서 하나는 그 사람에게 불행을 없애주려고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을 자게 해 주는 거예요.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 상태로 돌려보내는 게 그 사람에겐 구원이라고 어제 말씀을 드렸어요.
더 이상 하나님과 사는 게 힘든 사람에게는 잠을 선물로 주는데 그렇게 잠자는 게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라고 그랬죠 그렇게요 하나님이 나한테 친정엄마나 친정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된 분들이 있어요. 교인들 중에 여러분 명절에 예전엔 명절 때 이렇게 보면 여러분들은 친정 갈 때가 더 좋아요. 시댁 갈 때가 더 좋아요. 그럼 어디 갈 때가 더 긴장돼요. 가기도 전에 스트레스 먼저 받는 데가 어디래요. 그리고 친정엄마한테는 말대꾸 해요.
반말로 막 대들고 어려서부터 막 그러지요 정말 딸대로 못됐어 막 그렇게 막 해서 애딸도 근데 시어머니한테는 정말 그렇게 해요. 정말 깍듯하게 해요. 막 대해요. 실수 1자락도 안 할라 그래요. 정말 푸근하게 안기고 막 그래요. 그럼 생각해 봐요. 여러분의 하나님은 나에게 친정엄마예요. 의붓아버지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나한테 시댁이에요. 친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시어머니 된 시어머니처럼 된 분들은요, 시댁에 하듯이 교회 와서도 자기 딱 할 도리만 하고 뭡니까? 그 시어머니에게 실망 안 시켜주려고 하듯이 실수 안 할려고 조심하고 눈치 보면서 신앙하고 헌금할 그때도 어떻게 해요. 친정에게 한 푼 더 보내려고 그렇게 돈 계산해요. 아니면 시댁에 하나라도 안 보낼라고 그렇게 언금해요.
그런 분들이 교인들 중에 있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불편하고 두려운 분들 그런 분으로 하나님을 아는 분들은 죄송하지만 100프로 멸망이래요. 뭘 잘못하고 죄지어서 멸망이 아니라 그러나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게 벌이기 때문에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런 시어머니와 영원히 사는 게 불행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사 그에게 뭐의 시간을 싹 빼서 잠자게 해주는 거예요.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서 지금껏 산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기특해서 이뻐서 그 사람에게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잠 고통이 없는 잠을 길게 자도록 허락하는 거예요.
말씀드렸죠 그 대신 그 자녀를 영원토록 기억하는 하나님만 저주를 겪으며 혼자 아파하신다고 그랬죠 그러나 사랑이 되는데 그래서 더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아가는 분들 더 사랑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렇게 긴 시간을 주시는데 그게 영생이에요. 그 사랑은 늘 영생 필요로 해요. 필요로 너무 잘 알려진 정말 기가 막힌 성격자를 하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같이 읽어요. 시작 하나님은 사랑 이시라 정말 기가 막히고 반면에 귀가 뻥 뚫리는 정말 어마어마한 얘기예요. 이 말은 굉장한 말이에요. 우린 늘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어떤 인격체 어떤 대상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은 어딘가 계시는 분이잖아요.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존재하는 분으로 우린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어디에 계신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찬양하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분으로 어떤 인격적인 대상으로 생각한 거죠. 그런데 요한이라는 제자가 아주 난데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 하나님은 사랑이래요. 어떤 대상에서 찾지 않아요. 하나님을 이해돼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모든 행동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단 같은 얘기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모든 사건 그게 하나님이래요. 하나님이 사랑 안에 계시다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우리가 사랑으로 하는 모든 말과 사랑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 사랑으로 행해지는 일체의 모든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모든 사건과 행위와 말 일들 그게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납득이 돼요. 사랑이라는 행위가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게 다 하나님 유아는 우리가 여적지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어떤 분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서 다르게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가스 러브가 아니라 갓 이즈 러브라고 말합니다. 온 가족이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밥을 먹는 거 한번 상상해 봐요.
식사하는 걸 맛있게 밥을 바라 밥을 먹는 그 남편이 밥을 먹는데 그걸 바라보는 아내 애정이 있겠죠. 아유 우리 남편 고생 많다 많이 먹고 가서 열심히 가족 생계로 해서 일해야지 하는 그 사랑에 애정의 색깔이 있어요. 그걸 빨간 줄이라고 이렇게 해서 한번 연결해 보세요. 그리고 할머니가 손자를 이뻐하는 마음으로 반찬을 하나 숟가락에서 이렇게 얹어주는 그 애정이 있어요. 할머니가 손주를 보는 애정은 또 다른 색이에요. 달라요. 질감도 다르고 뭐도 다 달라 그 색을 주황색이라고 이렇게 해보세요.
또 아들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애정 또 달라 할아버지가 손주 보는 거하고 그 애정 색깔을 파란색이라고 치고 손녀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또 애정을 노랑줄로 하고 할아버지가 며느리 보는 그 사랑의 줄을 보라색으로 칠하고 할머니가 아들 사랑하는 마음을 연두색이라고 하고 그렇게 다 사랑의 질감 사랑의 농도 사랑의 어떤 뭐 이 면들이 다이아몬드전 반짝반짝 다 달라 그걸 위에서 이렇게 하늘에서 보는 분이 하나님인데 이렇게 선으로 보면 온갖 색깔들이 우리 환자들끼리 다 달라요. 많이 아픈 분이 들 아픈 분을 보는 그 애정의 색깔이 다르고 뭐가 다 달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랑을요 손으로 물컹 만지듯이 그걸 만지고 보는 분이 하나님이라구 그 애정의 색깔이 지금 다 다르게 형형색색 아름답게 서로 연결된 선처럼 되는 건데요.
하나님 눈에는 그게 다 잡히고 보인다는 거예요. 그 밥 먹는 그 현장 서로 좋아하고 아끼면서 보는 그 사랑이 넘치는 그 현장을 요한은 뭐라 그래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서로가 좀 낫기를 그리고 안 아프길 바라는 좋은 마음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서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가슴이 몽글몽글 막 그게 솟아오른다면 이 모든 게 뭐라구요.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런 말도 써요 저희 이름이 생명체가 있노라 그렇게 말하고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도 있도다 얘기해요. 이게 뭔 말이에요. 저 사람은 구원받았다. 그리고 저 사람은 구원 못 받았네 얘기하는 거예요. 이거 섬뜩하지 않아요.
바울은 저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멸망받았는지 하늘을 올라갈 사람인지 어떻게 아는 거예요. 뭐로 알 것 같아요.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랑으로 판단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영생이냐 그리고 죽음이냐는 사랑으로 결정돼요. 저와 여러분이요. 가족 사랑하지 않으면 가족과 같이 영생할 이유가 1개도 없어요. 오래 살수록 너무 힘든데 오래 살 이유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영생에 필요한지 안 한지를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으로 판단하실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 생전에 이 땅에서 해야 될 가장 가치있는 일은 뭐예요? 뭐 하면서 사는 일이에요. 사랑하면서 사는 일이에요.
예배 끝나고 아침 기도할 때 나한테 없는 사랑을 이건 우리가 자아내지 못하는 거니까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돼요. 기도 제목에 여러분의 아끼는 가족들 있지 않아요. 가족들 이름 다 그 답을 넣으면 5분 6분 7분 옆에 있는 환우까지 그 아줌마까지 동네 분까지 1번 길어진 영원히 살아도 불행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그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거죠. 이제 마치면서 한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교회마다 여집사님만 혼자 교회 댕기고 남편이 안 댕기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은 대부분 그 여집사님만 결심시키면 돼요. 남편이 안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요.
남편이 번 돈 가지고 교회에다 헌금하는데 교회 갔다 오면 그 부인이 남편을 더 사랑해주고 더 위해주고 그래야 교회 오니까 양복 입은 장로님들이 안겨 교사니 뭐 하면서 번듯하게 말도 잘하고 그러는데 우리 남편은 맨날 김칫국물 여기 묻히고 홍도에 하고 얼굴이 시뻘개져 가지고 술 냄새 풍기면서 오니까 교회 갔다오면 남편이 더 싫은 거야. 꼴도 보기 싫어 왜 우리 남편은 우리 집사님처럼 장로님처럼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근까 교회에 나오면 사랑이 더 많아져서 더 뭔가 해야 되는데 남편이 그러니까 남편이 더 교회 나오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럴 때는 누구를 결심시켜야 되냐면 그 집사님 결심시켜야 돼요. 그 집사님이 막 그래요. 목사님 어떡해요. 우리 남편 교회 댕겨야 되는데 그래서 처방을 고민하다 했어요. 그럼 집사님 새벽 기도합시다. 좋아요. 교회 나오면 돼 아니요. 나오지 말라고 그랬어.
집사님 집에서 하고 나는 교회에서 할게요 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새벽 4시 50분 혹은 5시 기도할 때 집사님 부모님 방이나 먹고 딴 데 하지 말고 남편의 자는 침대 옆에서 이렇게 도왔어요. 그리고 남편이 그날 신고 벗은 구두를 가슴에 안고 기도하라 그랬어요. 거기서 본 거 있었어요. 제가 그렇게 꼭 하라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럼 1주일 후에 봅시다 정말 좋은 거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아무 소식이 없어요. 월요일날 이 부인이 시키는 대로 인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할라고 구두를 집었는데 아우 구두가 깨끗해 지저분해 막 술안주지 뭔지 이게 뭐야? 아주 지저분한 거 그걸 그냥 어떻게 앉지도 못하고 그냥 옆에 두고 기도했대 하나님 우리 남편 둘째, 날 됐어요.
둘째, 날 또 그렇게 해서 셋째, 날 수요일날쯤인가 구두를 잡는데 구두를 보게 됐대요 그 구두 밑창을 봤대요 밑창이 어떻게 됐어요. 다 따랐어 그리고 이게 접히는 데 있잖아요. 그 목 이렇게 하는데 거기가 아주 낡은 거야. 수요일인가 그날은 구두 보면서 가슴이 좀 이상해지더래 남편 누구 구구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예요. 다 딴 구두 다 해질라면은 그 험한 구두를 신고 이렇게 일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주 불쌍해지죠 그날은 구두를 안고 이렇게 하는데 눈물이 나더래요. 울다가 기도를 못 했대 그 다음 목요일날 구두를 딱 안고 왔는데 자기가 너무 못됐더래 이런 남편을 위해서 진짜 기도한 적이 없는 것 같애 아내는 나를 용서해 달라고 그냥 중언부언 자기 마음을 다 내놨어요.
이게 뭐냐고 내가 그날 혼자 훌쩍훌쩍 오는데 그날 남편이 자다가 새벽에 엉켜서 눈을 떴어요. 이렇게 뜨니까 뭔가 엉엉엉 하면서 응응 우는데 근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 여자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더래 근데 울면서 기도하는데 가슴에 자기도 눈물이 나더래요. 이 여자가 정말 나를 사랑하더라고요. 자기가 잘 되길 시도하는데 눈물이 나더래 그래서 이쪽으로 흘리면 부인이 뭘까? 이렇게 해 가지고 이쪽으로 막 흘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기도하는 남편이 그 주말에 금요일 토요일 맞으면서 그 부인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눈빛이 달라집니다. 다음 안식일에 남편이 교회 나가자 그러더래 무슨 마음인지 알아요.
애들이 학예 발표회 하면 아빠가 따라가잖아요. 애가 이쁘니까 부인이 좋으니까 나를 위하니까 교회 댕기고 난 일을 이렇게 해주니까 그냥 교회 방문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만 오면 되는 것 아니세요. 그다음에 목사님 가리키고 친하게 지내면 다 돼 하나님께서 이 남편과 영원히 살아도 좋을 사람으로 기도하는 그 아침의 은혜를 내려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없는 그 사랑 때문에 내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사랑을 달라고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매달리는 이 아침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 마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사랑이 없음은 영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함께하는 게 불행인데 영원한 세월을 어떻게 그렇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 주시옵소서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을 사람들이 되도록 날마다 저희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저희 속에 사랑이 회복되게 해 주시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베풀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영성해도 좋을 백성으로 날마다 새롭게 빚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