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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사상(思想)의 유행과 변천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다음에는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다가, 마침내는 처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인간의 존재를 더욱 다양하게 해 주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의복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다. 폭이 좁은 넥타이가 유행하던 때가 기억난다. 그러다가 최신 유행의 넥타이가 되려면 폭이 아주 넓어야 했다. 그 후에는 넥타이 폭이 제각각인 여러 종류의 넥타이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유행에 대비해서 옛날에 사용하던 넥타이를 그대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사고(思考), 사상(思想), 관념(觀念)도 역시 유행을 따른다. 식생활, 에티켓, 예술 감각 등은 시간에 따라서 분명히 변하며, 이것이 한 세대동안 유행하다가도 이내 다른 패턴으로 바뀌게 된다. 철학적 개념도 동일한 패턴을 보여 준다. 서로 다른 여러 견해들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널리 유행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초자연적 실재를 거부하는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한 분의 최고 혹은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유신론, theism), 경험을 초월한 어떤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로 일관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이 있다. 이 외에도 절대주의, absolutism), 애니미즘 (萬有精靈說,animism), 결정론(決定論,determinism),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다원론(多元論, pluralism), 합리주의(合理, rationalism) 등이 있다. 각 학파' 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의 진실성을 믿고 따르는 추종세력을 가졌었거나 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사상을 판단함에 있어서, 지식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여러 사상의 유형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상이 변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 장에서 사조들이 유행을 타고 어떻게 변천하였는지, 3가지 경우를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세월에 따라 인간의 사상이 변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 탐구를 포기하는 구실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자. 진리는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에 대해서는 본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깊이 다루게 될 것이다.
대륙이동설
필자는 물리지질학(physical geology) 시간에 교수로부터 대서양의 양쪽 해안선을 짜맞추는 '조각 맞추기'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20세기 초에 베게너(Wegener)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메리카 대륙이 본래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에 붙어 있었으므로 대서양은 없었고, 그 후에 대륙이 갈라져 점점 멀리 이동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그림 2.1>.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흥미는 가지만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평하였다. 당시에 이렇게 설명하던 그 교수도 그로부터 6년 후에는 이러한 베게너의 주장이 지질학계에서 전폭적으로 수용되리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견해는 지질학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통합시키고 새로운 활력을 주는 요인이 되었으며, 대륙, 산맥, 대양저(大)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을 이끌어 내었다. 과학자들과 교육자들은 지질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만 했다. 이러한 사고(思考)의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면서 지질학계는 관심이 고조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에 못지않게 냉정해지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가져올 많은 새로운 개념과 지질학적 재해석에 대한 기대감으로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재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오던 개념이 갑자기 매우 중요한 사상으로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에 대해 보다 진지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독일의 베게너(Alfred L. Wegener, 1880~1930)가 대륙이동설을 제안할 당시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주도적인 개념은 과거에 지구는 뜨거운 상태로부터 냉각되면서 수축되었고, 마치 사과가 마르면서 오그라들어 껍질이 쪼글쪼글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산맥들은 지표층의 횡압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는 것이었다. 베게너는 지구가 수축했다기보다는 지구 표면이 갈라져서 떨어져 나갔음을 암시해 주는 많은 증거를 수집 정리하였다." 그가 지적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거의 수평으로 20km나 이동된 유럽 알프스의 수명에 가까운 거대한 충상단층衝)과 이에 따른 습곡지층(曲)들의 규모가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수축에 의해서만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이렇게 충상단층이나 횡와습곡(曲)과 같은 작용에 의해 거의 수명에 가까운 면을 따라 적어도 2km 이상 암층이 이동한 것을 납베[nappe]라 한다.). 아울러 밀접한 유연관계를 가진 생물들의 화석과 형태가 유사한 암석과 지층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Upper Carboniferous
Eocene
Lower Quaternary
<그림 2.1> 대륙 이동에 대한 현대 지질학의 설명: 베게너(Wegener)의 상상을 기초로 하여 3개의 지질시대로 나누어 대륙 이동을 나타낸 그림. 맨 아래의 그림은 현재의 대륙의 분포이다. 검은 부분들은 바다를, 작은 점들로 표시된 부분은 대륙 위에 있던 얕은 바다 흰 부분은 건조한 대지를 나타낸다. 대륙이동에 대한 새로운 그림에서는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수정을 가하였지만 그러나 기본개념은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참고문헌 2의 Methuen and Co.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사용하였다.
대륙 양쪽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양쪽 해안이 과거에는 함께 붙어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다룬 책을 네 번이나 출판했지만, 베게너"의 주요 관심사는 대륙이동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그는 기상학자요 북극 탐험가였다. 그래서 그는 탐험 도중에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린란드 빙모帽의 중심 부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이스미트'(얼음의 중앙)라고 부르는 관측소에서 일하는 두 명의 동료에게 월동용품의 보급이 필요하였다. 장비의 파손, 영하 50도 이상의혹한 등 당장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동료들은 여행을 포기했지만, 베게너와 다른 두 사람은 개썰매를 타고 그린란드 서부해안으로부터 400km를 여행하여 마침내 1930년 가을에 아이스미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중간 중간에 충분한 보급품을 남겨 놓았어야 했는데 그럴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팀원 중 아이스미트에 남았던 3명은 그럭저럭 그 겨울을 날 수 있었지만, 해안가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베게너와 동료 한 명은 결국 귀환 도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이스미트에서 하루 휴식을 보낸 후, 그들은 베게너의 50번째 생일인 11월 1일 그곳을 떠났다. 베게너의 시신은 해안가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이듬해 봄에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동료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매장되었고, 무덤의 위치는 베게너의 썰매를 이용해서 잘 드러나도록 하였다. 22살밖에 안 된 다른 동료는 실종되고 없었다. 베게너는 아마도 심장마비로 텐트 속에서 죽었던 것 같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그린란드 빙모 위에 있지만 그 위치를 표시해 둔 6m 높이의 십자가는 오래 전에 눈과 얼음으로 완전히 덮여 버렸다.
베게너의 사망 당시에 대륙이동이라는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반대 하였는데, 특별히 북아메리카에서는 더욱 심하였다.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의 견해에 대해 분노와 경멸로써 응대했었다. 1926년에 이 주제를 토의하기 위해 뉴욕에서 한 국제심포지엄이 개최되었는데, 이곳에 참석한 베게너는 자신의 견해에 대한 전반적인 적대감에 직면하였다. "미국지질학계의 거물들'은 일제히 반대 의견을 내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베게너가 사실을 외면한 채 자기 도취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대륙이동설에 쏟아진 비난은 몹시 가혹하였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과학적 명성에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그 사상에 쏟아졌던 관심이나 저항의 정도는 아마도 그 사상이 가진 가치와 위력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무가치한 강요나 무의미한 억측이라면 아마 이러한 관심조차도 끌지 못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연구자들은 대륙이동설과 일치하는 새로운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몇몇 과학자들은 베게너의 주장을 대담하게 발전시켰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지구 자기장의 자극이 종잡을 수 없이 변동하여 그 위치가 여러 차례 바뀌었음을 암시하는 새로운 자료의 발견이었다. 해저 밑바닥에서 화산 분출물들이 냉각되면서 거대한 해저산맥을 형성할 때, 냉각 당시의 지구 자기장의 극성이 암석 속에 그대로 남게 되는데 이때 암석 내부에 형성된 지구 자기장의 역전 현상을 과학자들이 그대로 추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자료를 받아들이고 이를 잘 조화시키기 위해서 지질학자들은 거대하고 단단한 판(들이 지구를 덮고 있으면서 이것들이 상대적으로 운동하고 있다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 판들은 해저산맥들의 경계를 따라 바다 밑바닥에서 형성되며, 반대편에 있는 해구를 따라 수렴하게 된다. 판들은 각각 하나의 거대한 떠다니는 이동체로서 그 위에 놓여 있는 대륙과 함께 서서히 이동하게 되는데, 지질학자들은 이것을 판구조론이라 부른다." 당시에 판의 이동을 입증해 주는 지질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자료가 풍부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질학계는 수십년 동안 반대하던 판구조론 개념을 이상하리만큼 급속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5년도 못 되어 판구조론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대륙이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학계에서 매장될 위기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반대 의견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어떤 지질학자는 판구조론을 옹호하는 책을 쭉 검토하면서, 이 책을 픽션과 논픽션 중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논평하였고." 한 응답자는 내용이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강조하고 "그 책에 대한 검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회신했다." 그러나 판구조론은 먹혀들었다. 극소수의 완고한 학자들만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뿐, 판구조론은 오늘날 지질학계의 지배적인 학설이 되었다.9) 지구수축설은 더 이상 지질학계에서 용인되지 않고 있다.10) 그러나 지구가 수축이 아니라 실제로 확장되었다는 사상은 제한적으로나마 지지를 얻고 있는 셈이다. 11)
이제 베게너는 이 문제에 있어서 30~40년이나 앞선 선구자로 인정되어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베게너가 자신의 대부분의 주장이 용납되고 또 자신에 대한 과학계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서 특별한 통찰력을 가진 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과학자들이 처음에는 그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증거가 좀 빈약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질학계에서 나중에 받아들였던 그의 증거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반대에 부딪혀 왔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제안하기를, 주요 지질학적 변화들이 격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상을 결코 용납하지 않던 당시로서는 베게너의 견해는 너무 혁명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격변에 의한 지질학적 변화들에 대해서는 이를 수용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대서양 양쪽 대륙에 대해서 베게너가 진술한 가설을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이 피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성경의 노아홍수와도 연관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 몇몇 사람들은 베게너가 지질학회 회원이 아닌 기상학자였기 때문에 전문가라는 엘리트 의식이 그의 견해를 거절하도록 만들었다고도 제안하였다. 십중팔구 이러한 모든 요소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확립된 어떤 견해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판구조론의 역사에서 본 바와 같이 결국에 어떤 학설이 수용될 때는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14)
연금술
한때는 폭넓게 수용되어 지식의 주축을 이루다가 결국에는 배척된 사상의 일례로는 연금술을 들 수 있다. 15) 연금술은 본래 어떤 성분을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아연, 납과 같은 비철금속을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에는 연금술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때문에 본래의 의도는 상당히 합리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 상태의 붉은 철광석으로부터 순수한 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철이나 납과 같은 비교적 자연상태의 물질로부터 금을 추출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흙, 공기, 물, 불의 4가지 기본 원소들은 서로 변형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왜 납을 금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초기의 연금술사들은 자연으로부터 과거에 금(金)이 생성되고 산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동일한 방법으로 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던 어떻게 보면 순진한 과학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연금술은 신비주의와 결합하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연구는 단지 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심지어는 불사의 몸을 만드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다. 나중에 연금술은 그 성격에 따라서 실천적연금술과 신비적연금술로 나눠지게 되었는데, 신비적 연금술은 종종 철저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연금술사들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물질 혹은 '철학자의 돌' 또는 '불로 장수약' 이라고 부르는 물질을 찾아다녔는데, 그것으로 금을 만들기도 하고 또 생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많은 사람의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 2.2> 연금술사들과 그들의 실험실겸 작업장(David Teniers the Younger의 그림인데, Institut Collectie Nederland의 허락을 얻어 사용함.). 진화론에 대한 노력은 마치 중세의 연금술과 같이 필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연금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서구에서는 AD 1세기경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이보다 수세기 전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후 AD 5세기경에는 인도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때는 혼란스러운 신비적 경향으로 인해 서구세계에서는 일시적으로 쇠퇴하던 시기였다. 뛰어난 많은 연금술사를 배출한 아랍인들은 수 세기 동안 연금술에 종사하였다. 중세와 그 이후에 연금술은 유럽에 퍼졌고 상당히 중요시되었다. 왕과 귀족들은 종종 자신들의 재원을 증가시키려는 희망으로 연금술사들에게 잘 갖추어진 실험실을 지원하였다. 아마도 대다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은 성분을 변화시키는 연금술을 신뢰했던 것 같다.
연금술을 신봉한 저명한 인물에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베이컨(Roger Bacon),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뉴턴(Isaac Newton), 유명한 의사인 파라셀수스(Paracelsus), 신성로마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 등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Queen Elizabeth I)은 연금술사 몇 명을 고용하였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e VIII)는 연금술의 후원자였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John XXII)는 그것을 금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비금속이 그 기간 중에 한 번도 금으로 변한 적이 없었음에도 연금술은 지식 사회에서 거의 2000년 동안 수용되어 왔다.
남의 호기심만을 북돋우는 잘못된 단편적인 지식만을 퍼뜨리기 좋아하는 사기꾼들은 연금술의 실행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들은 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후원자들의 진노를 살 위험에 빠지게 되고, 때로는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안전책이기도 했다. 때로는 사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속이 빈 가느다란 파이프 속에 금가루를 채운 후 그 끝을 왁스로 틀어막고는 이것을 젓개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도가니에 들어 있는 뜨거운 액체를 휘저을 때 왁스가 녹아서 파이프 속의 금가루가 흘러나와 마치 귀금속으로 변환되는 것처럼 보이곤 하였다. 이러한 사기꾼들로 인해 연금술은 오명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정직한 연금술사들은 일부러 비밀 작업장에서 일하였다.
결국 17세기에는 여러 가지 유용한 화학 생산품을 얻기 위해 연금술의 실행범위는 넓어졌지만, 반면에 사람에게 불로장수의 힘을 부여한다는 철학자의 돌을 찾는 일은 감소되었다. 더욱 새로운 많은 발견은 근대화학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하여튼 이제는 화학에서 '변화'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사용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입자가속기와 원자로를 사용하여 때로는 원소들을 분리하기도 하고 변환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으로 금을 만들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투자할 가치가 없다. 평범한 화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물질을 변환시키려고 시도했던 연금술의 기본 사상은 거의 2천 년 동안 수용되어 왔지만, 지금은 사라져 없어졌다. 연금술은 잘못된 과학임이 드러난 반면, 연금술로부터 비롯된 화학은 유용한 과학으로 발전되었다.
마녀사냥
한 시대를 주름잡던 사상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사상으로 대치되거나 서서히 변하는 것은 비단 과학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45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밤중에 호젓한 장소를 찾아나섰던 경건한 신도들이 마귀와 밀교한다는 고소를 당했다. 신도들이 마귀에게 충성을 약속하면 마귀는 비밀 장소에 나타나 그들을 가르치고 돈과 음식을 준다는 보고가 나돌았다. 당국에서는 신도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 중에 몇 사람은 정신적으로 연약한 여성들도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시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고문대 위에서 팔다리를 잡아 늘이는 격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혐의를 자백하라고 강요받았다. 한 사람이 고소 내용을 인정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혐의까지도 당연히 인정하게 되는 것을 뜻하였다. 고발당한 사람 중에는 고문관들과 개인적으로 원한관계에 있던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돈을 주고 탈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당국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다. 32년 후에 실시된 한 조사결과에 따라 파리 의회는 그 판결을 무효로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에게는 너무나 억울하고 때늦은 처사였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300년 동안 가장 극악무도한 마녀사냥이 광란적으로 시행되던 초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유럽사회는 악마 같은 마법의 존재, 곧 마법의 집회와 밀교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고, 마귀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응징하였다. 초기에는 종교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하였고 희생자 수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세속 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고 교수형 또는 참수형을 당하거나 혹은 압사당하였다. 흉작이나 갑작스런 돌연사, 흑사병처럼 한때 유행하던 재난들이 마녀들의 탓으로 돌려지기도 하였다.
아주 젊은 여자들을 포함한 일단의 여자들이 한밤중에 떡갈나무 아래에서 마녀들의 댄스파티에 참석했다는 고소가 들어왔다고 생각하자. 그것도 분명히 믿을만한 증인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로부터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자. 남편들은 자신의 부인이 그 시각에 분명히 자기와 함께 집에 있었다고 아무리 항의해도 재판관들은 남편들이 마귀에게 속은 것이며 집에 있었던 부인은 단지 그들의 부인들과 비슷한 환영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남편들을 헷갈리게 만들었고 재판관들은 그 부인들을 화형에 처했다. 몇몇 사람들은 마귀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색출해 내는 임무를 떠맡았다. 소문에 의하면 한 고발자는 15년 동안 마녀 900명을 기소해서 화형에 처했다고 떠벌리기도 했다.18) 사람들뿐 아니라 돼지, 개, 고양이 심지어는 수탉까지 교수형 또는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광란적인 열광을 식히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쉽지는 않았다. 고소 내용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백할 때까지 계속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처형이 무서워서 과감하게 저항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광란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에서 현저하게 많이 발생했다. 그것은 또한 잉글랜드와 러시아뿐 아니라 심지어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기록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어림잡아 9백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0) 아마도 최소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러한 극악무도하고 야만적인 사상은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고정관념이나 주관적인 생각 그리고 이것의 유해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실례이다. 우리가 어떤 사상을 용납하는 것과 정당한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결정하기 위해서 단지 대중적인 의견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과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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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성경이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다른 요소들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진리로 여기는 많은 사상을 발전시키고 대중화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심리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패러다임과 진리
과학은 지식의 첨병으로서 진지하고 꾸준하게 인간의 무지를 계속해서 없애 주고 있다는 견해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과학자 자신들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조장된 이러한 견해는 1962년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책의 출판과 더불어 난처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었다.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 이 책은 큰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책의 내용이 과학의 권위를 헐뜯고 비판함으로써 과학의 빈틈없는 완전성'을 훼손시켰기 때문이었다. 22)
쿤 박사에 의하면 과학이란 객관적인 지식의 축적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대표적인 문제와 그 해답을 풀어 주는' 폭넓게 수용되는 관점에 따라 데이터(자료)를 끼워 맞춘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학 이론을 패러다임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패러다임은 진리일 수도 있고 또는 오류일 수도 있는 광범위한 사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패러다임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사람들은 어떤 결론이 이 패러다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관심을 보이며, 이 패러다임을 벗어나서는 그 어떤 가능한 새로운 이론도 제한받게 된다. 이러한 예로는 판구조론(plate tectonics)과 격변론(catastrophism) 등이 속한다. 현재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을 쿤은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경우에 과학자들은 정상 과학의 패러다임 범위 안에서만 데이터를 해석하기 때문에, 판구조론이나 격변론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은 쿤이 말한 정상 과학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된다. 때로는 패러다임이 바뀌기도 하는데, 이것은 쿤이 말한 과학혁명으로 이어진다. 판구조론을 수용한 것은 일종의 과학혁명이다. 쿤은 만일 어떤 과학자의 연구 결과가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패러다임에 맞지 않으면 다른 과학자들은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라거나 또는 불확실하다고 하면서 수용하기를 거절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패러다임의 유지기간을 오래 연장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연구 결과나 결론이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사상과 일치할 때 사람들은 그 패러다임에 대해서 훨씬 더 안정감을 느끼고 지지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항상 다수를 따라가면 발전할 기회가 없다는 격언을 생각해 볼 만하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또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변천을 뜻하는 과학혁명의 성취는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그 사이에서 우리는 극복해야 할 많은 지적 타성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25)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개종 경험' 으로 표현함으로써 과학계로부터 따가운시선을 받았다. 26)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과학이 발전된다는 중요한 사상에 도전하였다. "더 엄밀히 말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 과학자들 혹은 이들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을 진리에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27) 다시 말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를 진리로부터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쿤은 과학 혁명에 의해서 과학에 대한 연구 방향이 바뀐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학자들은 패러다임 이론을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심지어는 신학에까지 적용시킬 정도로 폭넓게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과학계가 신봉하는 지배적인 사상을 뜻하는 패러다임이라는 전문용어는 이제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낯익은 단어가 되었다.
쿤은 과학 연구와 과학 사조의 형성에 있어서 과학 외적인 사회적, 문화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쿤의 사상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특별히 역사학, 철학, 사회과학의 개혁을 일으켰다. 많은 사회학자는 과학으로 인해 야기되는 많은 문제와 해답을 좌우하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학적 요소를 보게 된다. 28) 과학계가 자신들이 수용할 해답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묻는 질문의 종류를 규정하고 통제한다는 개념은 그들의 연구분야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진리를 탐구한다는 과학자적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에서도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사상이 오히려 상당한 수용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패러다임 내에서 혹은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뀔 때, 과학계의 집단적인 행동은 과학자 개인의 편에서 보면 자주적인 사고력(思考)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은 진리를 향해 발전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많은 잘못된 패러다임이 표면화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실에 가까운 데이터들을 발전도상의 개념들과 통합시킴으로 진리에 더 접근해야 한다.
패러다임이 변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리를 얻기 원한다면 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이나 사상 그 이상으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필자는 대중적인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좀 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력을 갖도록 노력한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방식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위협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비생산적인 지식 집단을 감소시켜 줄 것이다. (2) 패러다임을 평가함에 있어서,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근거를 정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데이터에는 아주 훌륭한 데이터도 있고 형편없는 데이터도 있다. 또 확실한 결론도 있고 미심쩍은 결론도 있다. 가정(假)에도 순전히 가정에만 기초된 가정이 있다. 평가작업은 아무래도 힘들지만 꼭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상이 옳은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각각의 쟁점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엄밀하게 평가해야 하며, '여론'이 부당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진리
오늘날 많은 사람의 사고방식을 보면 모든 것을 일단 의심하고 보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문제를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든지 한다. 불행하게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머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아무 결론도 없이 서로 팽팽한 설명과 의견만 대립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때로는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이 어떤 포괄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가능한 여러 견해를 그저 나열식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결국에는 최종적 결론에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 흔하게 우리의 연구가 여러 가능성만을 남긴 채 끝마쳐진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종류의 내용은 주로 전형적인 박사 학위 논문의 결론에서 옛날부터 자주 써오는바, '아마도...' 라고 하는 전통적이고 다소 풍자적인 표현에서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이 일시적인 특성을 갖는다고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꼭 필요되는 평가를 등한히 하게 되고, 거의 모든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극단적이고 나태한 행위이며, 비생산적이고 어리석은 것이다.
유명한 프랑스 문학작가 몰리에르(Moliere)는 '강제결혼(The Forced Marriage)'이라는 희극을 썼다. 2) 루이 14세의 권유로 각본이 쓰여졌고, 또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코미디 발레인, 강제결혼'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왕이 공연에 직접 참석할 정도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약점을 풍자적이면서도 교훈적으로 다루고 있다. 희극의 내용에서 한 부유한 노신사는 자신의 재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 처녀와 결혼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두 명의 철학자와 몇몇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 첫번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속한 사람인데, 자신의 철학과 견해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며 또한 용어에 대한 정의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쌍한 노신사는 자신의 실제적인 문제의 내용을 그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그는 실망한 나머지 다른 회의학파 철학자를 찾아가 자신을 소개하고 조언받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철학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발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우리 철학에서는 실증적인 뚜렷한 명제를 쓰지 않고 사물을 다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좀 유보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판단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왔다.'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온 것 같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만 그가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철학자는 "아마 그럴지도 모르죠.",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와 같은 설명으로 부유한 노신사에게 계속해서 대답한다. 철학자는 노신사의 진정한 문제에 역점을 두고 다루기를 거절한다. 마음의 갈등과 함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노신사'가 마침내 짜증나는 설명으로 일관하는 철학자를 걷어차 버릴 때, 갑자기 흥미를 돋우는 실상이 드러난다. 철학자는 자기를 때리는 것은 오만방자한 짓이라고 노신사에게 말하면서 노신사를 치안 판사에게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노신사는 적절하게 대답한다. "제발 그렇게 말하는 자세 좀 고치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을 품고 바라봐야 하는데, 당신은 내가 당신을 걷어찼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내가 당신을 걷어찬 것같이 보입니다." 노신사는 자신이 대접받은 것과 같은 애매한 진술로 철학자에게 응수한다. 자신이 확실하게 한 대 얻어맞은 그 철학자는 이제"아마 얻어맞았을 수도 있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대답을 듣는다. 이와 같이 노신사는 회의론의 약점에 대해 당당히 그 철학자에게 가르친다.
오늘날 우리의 지적 환경은 몰리에르의 시대와 똑같은 약점을 갖고 있다. 상대주의, 불가지론(不可), 회의주의) 등이 너무나 쉽게 존중받고 있으며, 사실과 진리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이 요즈음의 풍토이다. 때로는 자신들을 위해서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러한 의심은 앞으로 더 많은 의심을 갖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의심하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게 만든다.
누가 보아도 진리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상대주의, 불가지론, 회의주의 등은 옳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상들 대부분은 중요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들 사상에서는 명제 자체가 이러한 모호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연 앞으로도 계속해서 믿을 수 있을까? 파스칼의 격언 중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30)
분명히, 우리는 어떤 사상이나 관념은 거절할 수 있으며 또 거절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개념을 평가하고자 할 때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만한 충분한 자료(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판단이나 결정을 보류할 여지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 혹은 진리라고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주의 깊은 검증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인 사상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또 편파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때로는 의심이 필요하지만 끝까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오류로부터 진리를 가려내는 모든 중대한 과업이 무익한 회의주의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건전한 학문은 언제나 진리가 존재할 여지를 제공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아마도... 라는 회의적인 테두리에 우리 자신을 맡길 필요가 없다. 회의주의 사상 속에 모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불신 게임(doubting game)' 은 때때로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것 같은 매우 냉혹한 현실에 부딪힐 때도 있다. 만일 누가 우리의 돈을 훔쳐 갔다면, 돈의 행방과 소유개념은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또 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비행기를 놓쳤다면 어느 때보다도 시간의 실존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회의학과 철학자에게 일격을 가한 일은 우리에게 무언가 캐물어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희극 몰리에르에서 젊은 여자의 친척들은 노신사에게 그 여자와의 결혼을 강요하였다.). 이혼, 혹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윤리적 가치, 정직, 용서와 같은 것이 실존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거짓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또한 진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도 인정하는 것이다. 때때로 의심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본질(本質)에 직면하게 되고 우리의 주목을 끌게 된다. 실제가 있는 곳이라면 진리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진리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몸소 찾아 구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견고한 자료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진리탐구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이 있는 곳에 진리도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진리가 유지되도록 앞장서야 한다.
결론
인간의 지적 활동의 역사를 보면 각 시대마다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광범위하게 인식되어 온 지배적인 사상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사상이 사람들에게 널리 수용된 예로는 대륙이동설의 주축이 되는 판구조론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뀔 수 있다. 패러다임 자체가 항상 진리인 것은 아니고 오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이거나 그 유효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대중의 견해가 진리의 강력한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진리를 탐구할 때 우리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고와 철저한 연구를 통해서, 잘못된 패러다임의 덫에 스스로 빠지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다. 언제나 우리의 결론은 가장 확실한 자료에 기초되어야 한다. 또한 패러다임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사려 깊은 연구를 통해서만 진리가 쉽게 발견된다.'는 확신을 저해시켜서는 안된다.
참고문헌
1)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이 격언은 William James, Thomas Huxley, Louis Agassiz 등 많은 작가에게서 비롯되었다.
2) Wegener A 1929. The origin of continents and oceans. Biram J, translalor (1967). London: Methuen & Co. Translation of: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 4th rev. edition.
3) 그의 전기를 조사하기 위해서 다음의 문헌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a) Hallam A 1989. Greal geological controversies. 2n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 137-183; (b) Schwarzbach M. 1986. Allred Wegener, the lather of continental drift. Love C, translator. Madison, Wis.: Science Tech, Inc. Translation of: Allred Wegener und die Drilt der Kontinente (1980); (c) Sullivan W. 1991, Continents in motion: the new Earth debate. 2nd ed. New York: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4) Sullivan, p. 14 (참고문헌 3c).
5) Ibid. p.19.
6)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라. Hallam, pp. 164-173 (참고문헌 3a).
7) Meyerholl AA 1972 Review of: Tarling D and M. 1971. Continental drift: a study of the Earth's moving surface. Geotimes 17(4): 34-36.
8) Cowen R. Green HW, II, MacGregor ID. Moores EM, Valentine JW. 1972 Review appraised(Lelters to the editor). Geolimes 17(7):10.
9) 더 자세한 설명은 제12장을 참고하라.
10) 그러나 지구수축설을 지지하는 최근의 책은 다음과 같다. Lyllleton RA. 1982. The Earth and ilsmountains. New York and London: John Wiley & Sons.
11) 제12장을 참고하고, 또 다음의 문헌도 참고하라. LeGrand HE, 1988. Drilling continents and shitting theories. Cambridge 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ly Press, pp. 251, 252
12) Thagard P. 1992. Conceptual revolution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181, 182
13) (a) Giere RN. 1988. Explaining science: a cognitive approach.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229: (b) Rupke NA 1970. Continental drift before 1900. Nalure 227-349, 350. 격변 론적 해석과 관련된 문제들은 제12장을 참고하라.
14) (a) Giere, pp. 238-239 (참고문헌 13a): (b) Hallam, p. 142 (참고문헌 3a): (c) Schwarzbach, p.Xv (참고문
헌 3b).
15) (a) Doberer KK [1948] 1972. The goldmakers 10,000 years of alchemy. Westport, Conn: Greenwood Press: (b) Eliade M. 1962. The forge and the crucible. Corbin S. translator. New York: Harper & Brothers. Translation of: Forgerons et Alchimistes (1956): (c) Partington JR 1957. A short history of chemistry. 3rd ed. rev. London: Macmillan & Co.; (d) Pearsall R. [1976] The alchemists,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e) Salzberg HW. 1991. From caveman to chemist: circumstances and achievements. Washington D.C American Chemical Society: (1) Stillman JM. [1924] 1960. The story of alchemy and early chemistry. Reprint,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6) 0 Mackay C. [1852] 1932. 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 and the madness of crowd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p. 478.
17) (a) Dampier WC. 1948, A history of science and its relations with philosophy and religion, 4th ed. rev.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42-144; (b) Easlea B. 1980. Witch hunting, magic and the new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debates of the scientific revolution 1450-1750, Allantic Highlands, N.J.: Humanities Press: (c) Luck JM. 1985, A history of Switzerland. The first 100,000 years before the beginnings to the days of the present, Palo Alto, Calif.: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and Scholarship, pp. 182, 183; (d) Mackay (116); (e) Monter EW. 1976, Witchcraft in France and Switzerland: the Borderlands during the Reformation,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f) Rosenthal B. 1993. Salem story: reading the witch trials of 1692 Cambridge Studies in American Literature and Culture, No. 73. Cambridge 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g) Russell JB. 1972 Witchcraft in the Middle Ages.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h) Tindall G. 1966. A handbook on witches. New York: Atheneum.
18) MacKay, pp. 482, 483 (16).
19) Ibid. p. 482 (16)
20) Tindall, p. 25 (17h).
21) Kuhn TS, 196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2) Kuhn (a) Cohen IB. 1985. Revolution in science. Cambridge, Mass., and London: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b) Gutting G. editor. 1980. Paradigms and revolutions: appraisals and applications of Thomas Kuhn's philosophy of science, London and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c) Laudan L 1977. Progress and its problems: toward a theory of scientific growth.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d) LeGrand (11); (e) Mauskopf SH, editor. 1979. The reception of unconventional scienc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Selected Symposia, Boulder, Colo.: Westview Press: (1) McMullin E, editor. 1992. The social dimensions of science, Studies in Science and the Humanities from the Reilly Center for Science, Technology, and Values, Vol. 3.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g) Shapin S. 1982 History of science and its sociological reconstructions. History of Science 20:157-211.
23) Kuhn TS. 1970.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 viii.
24) 격변설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제12장을 참고하라.
25) Barber B. 1961, Resistance by scientists to scientific discovery. Science 134:596-60226) (a) Kuhn 1970, p. 151 (23). (b) Cohen, pp. 467-472 (201부여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종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과학으로부터의 개종'과 같은 뜻으로 표현하였다.
27) Kuhn 1970, p. 170 (23).
28) 최근의 몇 가지 견해들을 알아보기 위해 McMullin (참고문헌 221)의 책을 참고하라.
29) Molière JBP. [1664] 1875. The forced marriage, In: van Laun H, translator. The dramatic works of Moliere, Vol. 2, Edinburgh: William Paterson, pp. 325-389.
30) Pascal, 1966, Pensèes, Krailsheimer AJ, translator, London and New York: Penguin Books, p.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