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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강 항복, 승리의 비결
누가 사탄을 책망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사탄을 책망할 능력과 권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있습니다. 사탄을 책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 안에 사탄을 상대할 능력과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그런 능력과 권한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실제로 마귀를 꾸짖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하지만 "사탄아 내가 너를 꾸짖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내가 사탄을 꾸짖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탄을 꾸짖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장에서 언급했던 부모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아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고 느꼈던 그 부모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는 이것이 부모님과 사탄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이고 있습니다. 진짜 투쟁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사탄은 자신이 그 투쟁에서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이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부모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계속 사탄을 대면하여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믿음 안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우리 생애의 죄를 극복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든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나의 인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지금 당하는 시험을 이미 겪으셨습니다. 그 유혹을 이기는 길은 육신을 쓰고 오신 분께서 이미 승리를 다 이루어 놓으셨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입고 그분을 여러분의 삶 속에 영접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마귀에게 끌려 다니지 않으시는 그분을 옷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승리하신 분을 옷 입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있는 강력한 말씀을 봅시다. 이 사실을 보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 4절).
여러분이 가진 성경책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무릇 스스로 투쟁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승리란 믿음의 경험이지 노력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바랍니다. 승리자는 투쟁하기보다 항복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번 장에서 하나님께 충분한 능력과 도움을 받으면 나의 노력으로 당장 마귀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듭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확실한 도전장을 던집니다. 실상, 나는 도전 그 이상으로 이런 사상을 거부합니다. 영적 생애에 있어서 나는 마귀와 싸울 권리를 포기합니다. 나는 그 권리를 그리스도께 드립니다. 나는 힘도 없고 희망도 없음으로 마귀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복하고 마귀와 유혹과 죄와 맞서 싸워 주실 권한을 내어 드립니다. 그것이 내가 믿음 안에 들어오는 순간 하는 일입니다. 나는 실제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신 것,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노력에서 믿음으로
대부분의 전쟁은 싸워 이겨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생애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싸움이 아니라 항복을 통하여 승리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항복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스스로 마귀를 상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탄을 대적하여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대신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마귀를 상대하시고 성공적으로 승리하신 바로 그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을 때, 그분의 성공과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혹이나 죄나 마귀와 마주하게 될 때 예전에 하던 대로 싸우거나 투쟁하다가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말고, 믿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자가 인간의 몸으로 이미 무엇을 이루셨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대다수는 죄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해결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께 부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무척 어려워합니다. 그 문제가 정죄나 사망과 관련된 부분이든지, 삶에서 권세로 나타나는 부분이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나는 유혹을 받을 때 믿음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달리 말하자면 죄와 마귀를 대면해 보겠다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그 일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를 제대로 읽는다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타고난 인간적 육체를 지닌 여러분 자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경험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상태라면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장 16절).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으로 들어오는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내가 보건데, 예수님을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았노라고 간증하는 것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완전하신 생애와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 주셨음을 믿는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이상 유죄 선고 아래 있거나 정죄를 받거나 사망의 그늘 아래 있지 않다고 여기십니다. 나는 하늘에 갈 수 있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진리를 지지하는 성구들을 몇 가지 살펴봅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장 12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한일서 4장 15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함께 사시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끊임없이 매일 아침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죄 짐을 지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이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집을 나설 때에도 살아 계신 그분의 임재 속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을 보면 그렇습니다.
"오, 못된 성질 때문에...""오, 나는 항상 화가나요...""오, 나는 이러 이러한 습관이..."
얼마 전에 목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습관적으로 포르노에 빠지고 말았어요.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화장지가 어디 있지? 목사님을 위해 울어 주어야 겠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심각하거든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나도 심각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나쁜 습관을 가졌다고 해서 울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울고 싶습니다. 매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멋진 여인을 바라볼 때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을 만드시다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인을 욕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신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다니 놀랍군요!"
여러분에게 꼭 알려 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처음 일어났을 때 나는 즉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안에 이 마음을 간직하거라. 그러면 너의 평생에 매일 그리스도와 같은 고상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란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그 목사님은 계속 이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쩌다 매일 포르노를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렇군요. 나라도 그런 것들을 내 마음에 들인다면 나 역시 죽을 지경이 되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컴퓨터에 음란물 차단 프로그램을 깔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하셨지요? 목사님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모시고 이제 집에 가서 차단 프로그램을 주문하실 수는 있겠죠?"
그러자 그 목사님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 보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내가 목사님 대신에 그 일을 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믿음에서 떠나 있습니다.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분명 믿음 바깥에 놓인 것입니다."
내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텔레비전에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과거 이십 년간 나는 오후 다섯 시쯤 집에 와서 소파에 앉아 탁상에 발을 올려놓고 열두 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 시간 내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결혼생활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아내와 나는 한집에 사는 두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아내가 왜 도망가지 않고 아직도 같이 사는 지나 조차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의 아내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 연약합니다. 너무 비참합니다. 목사님께서 나를 위해 조언을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그 남자가 애원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조언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형제님은 믿음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면 문제가 전혀 없을 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텔레비전 방송을 가득 채우는 폭력적이고 성적인 내용에 끌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건전하고 균형 잡힌 생애를 사셨습니다. 아, 물론 그분께서는 여인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신 까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에는 그분께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을 그곳에서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런 상황을 타락한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도님이 그분의 마음을 옷 입기만 한다면...”
"아니, 목사님!" 그 사람이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옷 입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보면, '옳거니, 이 바보상자가 나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가위를 들고 선을 잘라 버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말을 주의 깊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투쟁하지 마십시오."라고 계속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제 항복하십시오. 항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옷을 입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기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것을 해 내셨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 순간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그분께서 성도님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 삶의 한 부분이 되고 이를 통해 성령께서 성도님과 교통하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님의 마음 가운데 계시면 이제 성도님은 텔레비전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주에 그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정말 내가 조언한 대로 했습니다. 다음 주에 집회에 참석한 그가 얼마나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지,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간증을 들으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옷입고 난 후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위를 꺼내 선을 잘랐습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은 그 상태로 있습니다. 내가 텔레비전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텔레비전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다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나는 회생하였습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사물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방법 대신 선을 넘어 예전에 하던 세속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구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나는 사람들을 잘 참아주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일상에서 이러한 일들이 습관화되고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나는 과거에 나의 이목을 끌던 어떤 것에 대하여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을 우러러 외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하나님께서는 "장하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조차 지각하지 못했구나. 이게 다 그리스도를 입는 데 집중한 까닭이란다."
그리스도의 소원이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원이 됩니다. 그때는 정말 기분 좋은 때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가 일어나는 과정
여러분이 성화의 과정에서 동일한 습관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면 아마도 믿음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다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옛 습관에서 벗어나 더욱 새로운 습관을 강화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처음 이해할 무렵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 고백을 했습니다. 유혹이 찾아오거나 예전의 습관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이러한 고백, 곧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죄와 유혹과 육정과 세상을 이미 이기셨다는 사실을 더욱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을 인하여 찬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요컨대, 죄를 저항하는 것은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지, 여러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에 끌리지 않으시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것에 끌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거룩하지 않은 것에 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시면 됩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큰 투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허락함으로 거룩하지 않은 것에 이끌리지 않게 되느냐, 아니면 거룩하지 않은 것에 이끌리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더 강한 자로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느냐의 투쟁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실패로 이끄는 길입니다. 그런 방법을 택한 결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싸움이 아니라 보호를 위한 전신갑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사탄과 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의 불화살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고 사탄의 여러 가지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설 수 있게 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장 10~17절).
어떤 이들은 사탄과 싸우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신갑주는 보호를 위하여 입는 것입니다.
이미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투쟁이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예전에 실패했던 우리 자신의 방법을 '고집할 것이냐'를 놓고 씨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접근 방법은 빛과 어두움처럼 다릅니다. 전자는 승리를 가져오고 후자는 패배를 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승리는 죄와 마귀를 대항해 싸울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졌음을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으로 옮겨 주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죄나 악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거룩하고 순결한 것에 이끌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와 마귀를 대항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애를 쓰고,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다가 넘어지게 되면 용기를 잃고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끝내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니면 너무 연약하여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노력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전에 하던 모든 것이 되돌아오도록 문을 열어버립니다. 그들은 노력마저 포기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달라고 해 보았으나 시험과 마귀를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있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이 일을 하라고 하셨잖아.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고,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도록 하는 것은 나의 특권이로구나. 악을 대항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지’
지금 내가 악을 성공적으로 이기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오시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8장까지 4장에 걸쳐서 믿노라 하면서도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육적인 신자들과 여전히 흥미로운 특성들을 간직하고 있는 참된 영적 신자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면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많이 혼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결코 다시는 유혹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결코 죄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추잡한 것들에 절대로 다시 끌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이런 일을 직접 겪게 되면 이내 자신을 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른 것은 내게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숙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육적'이라고 불리지 않고도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고, 성숙을 향한 과정을 지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충격받을 만한 일들이 벌어지는 날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은혜 아래 있을 때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는 자유, 정죄 받는 느낌 없이 삶의 모든 면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은혜 아래 있다면 여러분은 생애와 품성의 모든 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지나며 정죄 받는 느낌 없이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내용 복습
1. 마귀를 책망할 수 있는 권세와 힘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2. 왜 우리는 죄를 이기는데 있어서 사탄과 투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까?
3. 세속적인 것과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 보십시오.
4. 하나님께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5. 무엇이 진정한 복음입니까?
6. 이번 장에서 왜 십자가 앞에 매일 나가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7. 어떻게 누군가 믿음에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8.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죄를 극복하려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까?
9.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믿는 영적인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10.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셨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진심으로 믿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