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보다 사랑이죠 (4월 3주)불기2557년 4월 21일 |일요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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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힘보다 사랑이죠 (4월 3주)불기2557년 4월 21일
오늘 주제는 '힘보다 사랑이죠.'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를 숭배해 왔죠. 우리 DNA는 그것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인류의 역사이고, 동시에 우주의 시간이죠. 인간은 하나를 숭배하죠. 그것이 초월해 있을 때 우리는 붓다라고 부르고, 야훼라고 부르고, 알라라고 부르고, 시바, 비쉬니, 바알(轉寫者註:[히브리어] Ba‘al <기독교> 고대 동방 여러 나라의 최고의 신으로 토지의 비옥함과 생물의 번식을 주재하는 신. 이스라엘에 들어와 널리 퍼졌으나 엘리야 선지자가 도덕이 부패함을 책망하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것이 인간 세계에 내려오면 권력이 되고, 돈이 되고, 명예가 되죠. 이쯤 되면 인간이 숭배하는 그 하나가 무엇인가 느낌이 오실 것입니다. 마치 심장이 펌프질해서 피를 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보내는 것처럼, 그 하나가 상징하는 것이 내 느낌 속에 강렬하게 전달해 오지 않습니까? 그 하나는 힘입니다.
인간은 힘을 숭배하죠. 척박한 지구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오랫동안 힘을 숭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힘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이고, 인간에게서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외면할 수 없는, 외면해서도 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존재니까요. 과거에 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출발했던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아직도 그 힘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죠. 인간이 오랫동안 투쟁해 왔던 것은 평화롭게 살기 위한,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믿을 것은 힘밖에 없다고 생각한거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힘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았죠. 인류가 시작된 이래 가장 강력한 국가는 로마도 아니고, 원나라 제국도 아니고, 지금의 아메리카 합중국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미국처럼 강력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징기스칸의 군대라 하더라도 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지배했을 뿐이죠. 지금은 어느 누구도, 어떤 국가도 미국과 등지고는 이 지구촌에서 생존하기가 버겁죠. 아니, 생존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 강력한 힘을 가진 아메리카 합중국도 압력솥 폭탄으로 테러하는 테러리스트를 막지 못하죠.
인간은 힘을 숭상해서 이땅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지만, 모든 국가와 모든 가정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평화기 오지는 않죠. 우리는 힘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거죠. 왜 믿고 싶은 걸까요? 우리의 DNA 속에는 힘을 숭배해왔던 그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직, 또 인간은 그런 면에서 보면 진화 중이죠. 아직도 이 지구촌에서조차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아직 우리는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살던 우리 조상님들로부터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별로 진화된 것이 없죠.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인간은 진화 중이라고 생각하죠.
2600년 전 고타마 싯타르타는 오직 힘만을 숭배하는 크샤트리아 전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 힘을, 그 힘의 행사를 포기하죠. 우리가 붓다를 예배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그가 초월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 힘을 포기했기 때문이죠. 붓다는 완전한 진화를 이룬 겁니다. 인간이 진화가 끝나려면, 아니 이땅에 평화로운 세계가 이룩되려면, 모든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죠. '힘보다 사랑이죠'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을 때 말입니다.
힘은 절대적으로 생명의 평화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지켜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죠. 사랑만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사랑만이 평화를 지켜 주죠.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붓다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싶은 것도 그것이죠. 붓다가 우리를 끌어안고 함께 가고 싶은 곳도 그 길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중국의 첸카이거 감독이 감독한 영화 <현위의 인생>일 수도 있고, 장예모 감독이 감독한 <패왕별희>일 수도 있고(轉寫者註: 패왕별희는 첸카이거 감독 작품인데 착각하신듯), 헐리우드 영화 <사랑과 영혼>식이 될 수도 있죠. 톨스토이의 소설을 각색한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리나> 식일 수도 있고요.
나는 붓다의 사랑을 여기서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붓다의 사랑은 우주와 같아서 붓다의 사랑을 논하는 것은 내가 분수를 모르는 거죠. 붓다의 사랑이 커서, 너무 커서 볼 수가 없죠. 그래서 나는 붓다의 사랑은 논하는 분수 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내가 고통 속에서 잠 못들면 누군가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것, 나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고통 속에서 잠을 못 자요. 그렇지만 내 고통 속에서 누군가는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이죠. 굳이 붓다의 사랑을 이끌고 들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붓다의 사랑은 누구나도 느낄 수 있고, 누구나도 알 수 있고, 누구나도 맛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붓다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주제넘은 짓이죠.
김창완씨는 시를 짓고, 그 시에다 곡을 붙였죠. 그 노래를 노고지리가 불렀습니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라고 그랬죠. 앞에꺼만 얘기하고 중간은 생략했습니다. 이거는 많이 알고 있는 노래니까요. 진한 갈색 탁자에 커피잔이 놓여 있죠. 그 커피잔에는 따뜻한 커피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 찻잔을 마주보고 앉아서 그 찻잔을 손으로 만지고 있죠. 그 찻잔에서 따뜻한 열기가 내 손끝에 전달되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찻잔에서 전달되어 오는 따뜻한 열기와 같죠.
왜 그 느낌에 사랑을 비유할까요? 그 찻잔에서 전달되어 오는 따뜻한 느낌은 어떤 수사로서도 표현할 수가 없죠. 아니, 수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순수하니까요. 그 찻잔이 마치 그와같지 않습니까? 내가 잠 못들면 누군가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사랑만이 우리를 평화로운 세계로 인도하죠.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하죠. 단 한 마디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밖에 없어!"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팔만대장경을 굳이 뒤지지 않아도, 팔만대장경을 굳이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는 나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단어는 '자애로운 사랑'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밖에 달리 하셨을 말씀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붓다에 대해서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죠. 뭐를 착각하고 있을까요? 붓다는, 고타마 싯타르타는 본래 크샤트리아 전사였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죠. 크샤트리아 전사는 힘을 구사하고, 오직 힘을 키우는 것이 그의 근본입니다. 그러던 그가 그 힘을 버렸을 때, 칼을 버렸을 때, 압력솥 폭탄을 버렸을 때, 핵무기를 버렸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이야기밖에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보게 친구! 이 땅 위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사랑밖에 없네. 그 외의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지. 자네는 권력을 얻으면, 자네는 명예을 얻으면, 자네는 평화를 얻으면, 돈을 얻으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지. 그러나 그 꿈 깨게. 권력과 명예와 돈이 자네에게 사랑의 꽃을 피우지는 못하게 한다네. 자네가 진정으로 꽃을 피우고 싶으면, 사랑하게나. 사랑하면 꽃은 피게 되어 있다네."
자애로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가 이룩하고자 했던 마지막 하납니다. 인간이 수없는 것을 꿈꾸고, 수없는 것을 이루려고 했지만, 그 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하나는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죠. 우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인류는 수없는 전쟁과 폭력을 행사해 왔죠. 지금도 그것을 반복하고 있고요. 절대적으로 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시켜 주지 못합니다. 왜 힘이 그것을 성취시켜 주지 못할까요? 힘이 가지고 있는 한계죠. 그 힘은 구사하면 구사할수록, 그 힘은 키우면 키울수록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이죠. 힘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애로운 사랑이죠. 우리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절실해 하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아직도 진화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아직 우리는 이동 중이까요. 무슨 이동을 말하는 걸까요? 그런 세계를 찾기 위해서 이동 중이죠. 아마 우리의 미래의 세계들도 그것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 하겠죠. 그것이 이동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이예요.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는 거죠. 사랑은 내 세포를 타고 흐르는 전류와 같고, 사랑은 내 마음 속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마그마와 같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잠 못들면 누군가는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거죠.
오늘의 주제가 '힘보다 사랑이죠'입니다. '힘보다 사랑이죠'라고 모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우리는 아름다운 꽃나무를 내 마음의 밭에 심어야 하겠죠.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다함께 합장하시죠.
우러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힘보다 사랑이죠'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권력의 힘을 얻고 싶습니다.
명예의 힘을 얻고 싶습니다.
돈의 힘을 얻고 싶습니다.
설사 저희들이 그러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자애로운 손길로
저희들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안아주소서!
저희들도 언젠가는
권력의 힘과 돈의 힘과 명예의 힘을 선택하기 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는
그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저희들이 선택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저희를 가호하시고
저희를 두호斗護하소서!
싸두 싸두 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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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초에 종교는 하나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사랑이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온유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