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욕망의 실체
1. 고대사에 관한 연구는 어렵다. 제한된 문헌과 적은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왜곡된 주장이 난무하고 때로는 심각한 대립을 가져오는 영역이다. 고대사에 관한 연구는 단순한 역사적 해석 이상이다. 그것은 때론 국가의 정체성과 현재의 영토와 관련된 근거를 제시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사실 우리의 고대사에 관한 지식은 대단히 편중되어 있다. 고대사와 관련된 논쟁적 주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부족하고 특정한 관점을 지닌 견해에 쉽게 동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대사에 관한 바람직한 이해는 최소한 주제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고 그것에 대한 비평적 태도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모든 역사는 카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과거는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파악했듯이 ‘현재의 과거’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우리의 생각에 담긴 편향성을 인정하며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런 점에서 2018년 젊은 역사학자모임이 발간한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는 고대사 연구의 현재적 상황을 알게 하는 데 매우 도움을 주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핵심적 논쟁과 현재적 상황을 이해하는 정보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룬 주제를 중심으로 고대사에 관한 현재적 인식의 성격을 파악해보자. 우선 중요한 것은 사실적 지식으로 논쟁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고대사와 관련된 가장 큰 논쟁은 일본과의 역사전쟁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일본의 식민지 만행이 있었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책 『일본서기』가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는 왜의 진구황후의 도래 이후 ‘임나일본부’를 통해 4-6세기 한반도의 남부 지역(신라, 가야, 백제)를 지배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추후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해석을 통해 더욱 심각한 논쟁의 장으로 이끌었다.
3. 19세기 만주의 집안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비’의 비문은 일본의 장교에 의해 일본 본국으로 전달되었고 일본의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을 통해 <일본서기>의 기록을 확정짓는 중요한 자료라고 선언했다. 비문에는 왜가 바다를 건너 신라와 백제를 지배했다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의 텐리시 신궁에 보관된 ‘칠지도’ 또한 왜가 백제를 속국으로 둔 증거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주장에 대한 반론이 시작되었다. 우선 비석에 회칠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일제의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한자의 미묘한 성격을 바탕으로 비문을 재해석하여 지배의 실체는 왜가 아니며 오히려 백제라는 점을 밝히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 학계를 긴장시킨 주장은 북한의 김석형이 제기한 ‘분국설’이었다. 일본서기의 내용이 왜가 한반도 지역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 내의 한반도 도래인들이 세운 ‘분국’을 지칭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대에는 과거 살았던 장소와 지명을 옮겨서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관례를 바탕으로 일본서기의 내용을 비판한 것이다.
4. 그렇다면 현재 이 문제는 어떻게 정리되었을까? 광개토왕비의 회칠은 사실이지만 변조의 목적이 아니라 탁본의 편리성을 위해 현지의 중국인들이 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칠지도 또한 백제가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라기 보다는 ‘후왕’에게 하사한 내용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왜곡 주장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면서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비문의 내용에 담긴 고구려인의 욕망이었다. 비문이나 기록은 결국 기록한 주체의 성과나 행적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광개토왕비 또한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본의 힘을 과장하였고 그것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을 상대적으로 높이는 효과를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광개토왕비’ 비문의 변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이며 주변 나라를 압도하는 힘을 가진 국가라는 보여주기 위한 욕망이 담긴 것이었다. ‘칠지도’ 또한 현재의 관점을 과거에 적용시켜서는 안되며 다만 백제와 왜 사이의 외교적 의례라고 이해하며, ‘임나일본부’의 존재는 식민지 기구가 아닌 단지 외교적 활동을 위한 기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왕비’에 고구려인의 욕망이 담겨 있다면, <일본서기> 속 내용도 일본의 힘을 집결시키고 과시하려는 욕망의 산출물이었던 것이다.
5. 결국 우리는 고대사와 관련된 많은 문헌들이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기 보다는 자국의 이해관계와 과시적 욕망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을 개연성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남조’ 역사책에 기록된 백제가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곳을 지배했다는 기록 또한 이러한 사실이 ‘북조’에는 보이지 않는 점과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한다면 백제가 남조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남조 또한 백제의 주장이 북쪽 지역 회복이라는 그들의 이상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대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신라의 김씨 왕족이 ‘흉노계’와 관련되 있다는 논쟁도 결국은 자신의 출신이 신성한 집단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례였다. 현재 밝혀진 김씨의 선조와 관련된 기록에는 다양한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김알지’라는 기록도, 소호 금천씨라는 주장도, 흉노 왕족 출신 김일제라는 내용도 등장하는 데 이러한 서로 다른 주장은 결국 분명한 실체가 있기 보다는 상징적 존재를 통한 자신의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6. 정통 사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이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유사역사학자 또는 사이비 역사학자들을 비판한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황당한 고대사 저술 뿐 아니라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거쳤다고 주장하는 사실 또한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표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서술가 이덕일이다. 이덕일은 우리 역사에 식민지 사학의 잔재가 심각하게 남아있으며 이들에 의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었고 저평가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덕일 주장한 것 중에는 ‘낙랑군’이 한반도에 내에 없었다는 점과 백제의 ‘요서지역 경영’이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이라는 것도 포함된다. 그는 중국의 기록을 통해 낙랑군은 요하 지역 부근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그가 인용한 중국 내의 낙랑군은 4세기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낙랑군의 잔존 세력이 요하 지역에 만든 것으로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요서지역 점령 또한 중국의 남북조의 갈등을 이용한 백제의 일종의 정치적 선전을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활용했을 뿐인데 단지 기록에 남았다고 그대로 믿는 것은 역사적 접근의 편견만을 드러낸다고 비판하고 있고 있다.
7. 고대사의 쟁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결국 실체를 알 수 없는 영역에 다양한 자료와 해석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 자체가 역동적이고 엄청난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적 탐색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이 결국 진실과 객관적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도 각각의 이익과 이해관계에 따라 생산되고 있는 수많은 문서와 기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시도가 더 중요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기록하는 주체는 기록을 통해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였고 세계의 중심임을 선언하였다. 모든 기록이 100퍼센트 거짓은 아닐지라도 사실의 과장, 객관의 변조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변모시켰던 것이다.
8. 이러한 기록의 특징을 인식한 후 기록의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기록의 양이 많아진다면 서로의 상호비교나 고고학적 자료를 활용하여 역사적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록에 담긴 주체의 욕망은 그대로 남는다. 현재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모든 증거가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때론 모순되고 반대되는 증거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것을 기록한 주체의 이기심과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뉴라이트’의 주장에 인용되는 수많은 자료들도 그것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렇게 각각의 상대적 주장의 충돌이라는 허무적 상황에 불과한 것일까? 역사적 진실에 대한 접근은 불가능한 것일까? 비록 완벽하고 반박불가능한 진실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진실은 존재한다. 그것을 결정짓는 보편적 기준의 내용 및 적도 그리고 배제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인 협의와 합의를 통해 만들어나가야 할 진실의 기준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에 담긴 욕망의 실체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최소한의 역사적 개연성도 갖지 못한 주장에 대한 보편적 판단을 수립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꾸준히 더 나은 판단, 더 나은 기준, 더 나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첫댓글 "실체가 있기 보다는 상징적 존재를 통한 자신의 과시라는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 해석해야.... 사실의 과장, 객관의 변조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변모시켰던 것이다."
- 꾸준히 더 나은 판단, 더 나은 기준, 더 나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