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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28. [역경의 열매] 배재철 <1-12> 목소리 잃은 성악가가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갑상샘암 수술로 오페라 못 하게 돼… 노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테너 배재철 집사가 서울 성동구 독서당로 연습실에서 최근 두 번째 성대 수술을 하고 대만 연주회를 마친 일들에 대해 얘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신현가 인턴기자
‘세기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오페라 무대에서 가장 좋아하고 완벽한 소리를 얻기 위해 150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에 못잖게 나 역시 더 높고 힘찬 소리를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한양대 성악과 재학시절뿐 아니라 이탈리아 유학 때도 내 별명은 ‘소문난 연습벌레’였다. 그 결과 199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 테너상을 수상하며 도밍고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렇게 도밍고를 감동시켰던 나는 동양인에겐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던 독일 자르브뤼켄 주립극장과 전속계약을 맺고 테너로서 전성기를 맛봤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을 오가며 오페라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오는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랬던 나, 테너 배재철이다.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주역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아니 오페라 무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13년 전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이후 더 이상 오페라 무대에 서지 못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꿈의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서 제일 소중한 목소리를 거둬가셨을까. 그리고 나는 목소리를 잃은 게 맞을까.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말씀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면 나는 분명 양이다. 그러니 그분의 종의 위치에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하면 자연스레 모든 게 해결된다. 그렇다면 종이 된 내가 해야 할 본분은 무엇일까.
나에게 무대와 음악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게 없이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애당초 모든 걸 포기하고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노래, 무대, 음악을 떠나선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다시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요즘 나는 빡빡한 녹음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올여름 새 앨범 출시를 목표로 노래를 녹음하고 있다. 성량이 약해져 오페라는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해 부를 수 있는 가벼운 곡들로 음반을 준비 중이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노래로 위로해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난 2월 13일 두 번째 성대 수술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번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한 가지다.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다. 그럼 하나님을 향한 나의 노래 1악장을 시작한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배재철 <1> 목소리 잃은 성악가가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 [역경의 열매] 배재철 <2> "하나님이 아이들 잘 키워주실 것" 어머니의 믿음
* [역경의 열매] 배재철 <3> 발성교본 살 돈도 없이 큰형 친구에게 성악 레슨
* [역경의 열매] 배재철 <4> 공군 복무 중 비행장서 엔진 소리 들으며 발성 연습
* [역경의 열매] 배재철 <5> 발세지아 콩쿠르서 특별상 받아 오페라 주역 데뷔
* [역경의 열매] 배재철 <6> 성악가의 길을 열어준 두 은인을 만나다
* [역경의 열매] 배재철 <7> 일본 이어 독일 무대 오른 뒤 목에 '이상 증상'
* [역경의 열매] 배재철 <8> 8시간 대수술 끝에 오른쪽 성대 절단… 목소리 잃어
* [역경의 열매] 배재철 <9> 목소리 회복 안돼 '끝났어' 절망… 성대복원수술에 희망
* [역경의 열매] 배재철 <10> 수술 중 힘찬 찬송 나오자 "기적"… 감격의 눈물
* [역경의 열매] 배재철 <11> 목소리 잃고 모든 게 내 것 아님을 깨달아
* [역경의 열매] 배재철 <12·끝> "노래로 일본 전도" 콘서트 열며 삶의 2막 연주
약력=△1969년 대구 출생 △94년 한양대 성악과 실기, 98년 이탈리아 밀라노 베르디국립음악원 수석졸업 △한국 및 유럽 국제 콩쿠르에서 다수 우승 및 입상 △독일 자르브뤼켄 주립극장 솔리스트, 한양대 성악과 겸임교수 역임 △유지태 주연 영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 실제 주인공 △저서 ‘기적을 만드는 오페라 카수’(비전과리더십) △현 명지대 객원교수, 일본 보이스팩토리 소속 가수 △높은뜻광성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배재철 <2> “하나님이 아이들 잘 키워주실 것” 어머니의 믿음
지금도 자녀와 손주들 위해 새벽기도… TV 동요 프로 출연 계기 성악가 꿈 생겨
배재철 집사가 서울로 이사하기 전 대구에서 살았을 당시 부모와 함께한 모습. 두세 살 무렵으로 기억되는 사진.
삼형제 중 막내인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와 흑석동에서 지냈다. 1970년대 흑석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얼마나 가정살림이 궁색했을까. 부모님은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삼형제는 집에서 가까운 한가람교회를 놀이터 삼아 지냈다. 교회에 가면 같이 놀 친구가 있었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를 수 있었다. 당시 교회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돼 줬다.
우리 집안은 신앙생활을 잘해 오다 할아버지 때 믿음의 대가 끊어지면서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다시 회복된 믿음의 가정이다.
어머니는 신앙의 원칙을 갖고 계셨다. 세 자녀는 하나님께서 키우신다는 강한 믿음의 확신이었다. “지금 형편이 어려워 우리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해도,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새끼들을 잘 키우실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로 사셨다. 그 확신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으시다. 요즘도 새벽기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늘 자녀를 위해, 손주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돌이켜보면 내가 목소리를 잃고 힘들어할 때 엇나가지 않은 것도 그동안 어머니께서 쌓아올린 기도 덕분이지 않은가 싶다. 기도는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다.
교회에서 놀던 아이가 동네에서 유명해지는 계기가 있었다. 평소 나대는 편도 아니고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지만 교회에서 중창단을 만들어 노래할 때만큼은 정말 행복해 방방 뛰었다. 제일 자신 있었던 것이 노래였다. 당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TV 노래경연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한번 나가서 노래를 불러봤음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다. 혼자 가는 건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 친구들에게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매주 토요일 예심이 열렸는데 나와 친구들은 시간에 맞춰 여의도 방송국에 갔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로 방송국은 북적였다.
심사위원 5명이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한 소절씩 노래를 시키는 것으로 예심을 치렀다. 바로 당락이 결정됐는데, 친구들은 모두 떨어지고 나 혼자만 붙었다. 2심까지 봤고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들었다. 꿈에 그리던 TV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본선에선 ‘별 보며 달 보며’라는 동요를 불렀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최선을 다해 불렀다. 노래를 다 마치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이런 심사평을 했다. “배재철 어린이는 목소리가 좋아서 나중에 성악가가 되면 좋겠어요.”
그날 장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수상자들이 함께 실력을 겨루는 기말대회에도 출전해 ‘흰 물결이 밀려오는 바닷가에서’를 불렀다. 이 대회를 위해 음악을 전공한 교회 전도사님이 레슨을 해주셨다. 기말대회서도 장려상을 받았다.
성악가가 뭔지도 몰랐던 내게 성악가의 꿈을 심어준 계기였다. 나는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공부보다 노래에 집중했다. 기타를 치면서 온종일 노래만 불러도 배고프지 않았다. 사실 성악을 하려면 제대로 레슨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가정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그렇다고 노래하는 데 주눅이 들거나 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네가 좋아하는 것을 재밌게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내 마음은 풍요로웠고 그런 자신감으로 노래를 불렀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3> 발성교본 살 돈도 없이 큰형 친구에게 성악 레슨
음대 입학하자 교수 아닌 강사 제자로… “1등 졸업하는 모습 보여주겠다” 다짐
배재철 집사(맨 아래 오른쪽)가 고교 시절 교회 친구들과 ‘인간 피라미드’를 쌓으며 재밌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또래 친구들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연스레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과 나처럼 예체능에 관심 있는 친구들로 나뉘었다. 나는 고3 때 음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게 아니면 그룹 사운드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거나 음향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음악 말고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부모님에게 음대에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내 뜻을 존중해 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레슨비였다. 음대에 가려면 적어도 개인레슨을 받아 실기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형편상 레슨을 받는 건 무리였다.
다행히 큰형 친구가 도움을 줬다. 음대에서 공부하는 형 친구가 레슨을 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찌나 감사한지…. 그런데 형 친구는 첫날 레슨에 앞서 발성교본 책을 사오라고 했다. “책을 살 돈이 없다”고 사실대로 털어놨다. 형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쓰던 책을 줬다.
난생처음 레슨을 받고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탈리아·독일 가곡과 발성법인 콩코네를 연습했다. 10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준비했다.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그 시간이 행복해 수험생인 내겐 입시준비가 아니라 즐겁게 노래 부르는 시간이었다. 발성과 호흡하는 방법을 알아가며 비로소 ‘아,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를 좋아하기만 하던 아이가 노래의 원리를 터득해 가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1988년 한양대 음대에 입학했다. ‘콩쿠르’가 뭔지도 모르고 이탈리아·독일 가곡 겨우 두세 곡 연습해 음대에 진학한 나였다. 대학에 입학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꿈에 그리던 음대에 진학했으니 내가 원하는 바를 잘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아닌, 강사 선생님 제자로 배정되자 아쉬움에 속이 상했다. 물론 학생마다 개인 실력 차이는 있겠지만 입학하자마자 차별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교수님 제자들은 교수실에서 편히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나처럼 강사 선생님 제자들은 빈 연습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음대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강사 선생님 제자가 됐다고 탓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빈 연습실을 놀이터 삼아 살았다. 어렸을 때 교회를 놀이터 삼아 지냈던 것처럼…. 그리고 ‘강사 선생님 제자가 1등으로 졸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가끔 제자들이 장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솔직히 조언을 해주는 데 한계가 있다. 어쨌든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꼭 기억했으면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좋은지, 절대 포기가 안 되는지…. 나는 목소리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노래가 포기되지 않았다. 노래를 사랑하고 무대를 좋아했기에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있다면 우리는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고 한 사도 바울처럼 주님이 주신 비전을 갖고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어떤 장애물도,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4> 공군 복무 중 비행장서 엔진 소리 들으며 발성 연습
“군대는 하나님이 내게만 허락하신 연습실” 확 트인 목소리로 대학 복학하자 주목 받아
배재철 집사(왼쪽)가 대학생 때 ‘전국 성가대회’에 출전해 찬양을 부르고 있다.
‘지독한 연습벌레.’ 음대에 진학하겠다고 목표를 세운 뒤 지금까지 듣는 말이다. 특히 나는 군에 입대해서도 매 순간 노래를 불렀다. 군대에서의 연습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참 탁월했다.
나는 방위로 대구의 한 공군기지에서 18개월 동안 복무했다. 주로 비행기 엔진을 테스트하는 초소 옆에서 근무했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 옆에 서면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멍할 정도였다. 옆 사람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주변에선 못 들을 게 뻔하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비행기 엔진 소리에 뒤질세라 목청껏 발성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연습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흘러 1년쯤 됐다. 내 소리와 비행기 엔진 소리를 비교해 가며 노래를 연습할 정도로 목소리에 힘이 생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호흡도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하늘을 향해 맘껏 소리쳐 부를 수 있는 그 공간은 하나님께서 내게만 허락하신 특별한 연습실이었다.
군대에서 터득한 호흡과 확 트인 목소리를 갖고 복학했다. 그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학내 연주회인 위클리. 선후배가 다 모여 두 달 정도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자리였다. 학내 콩쿠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긴장감 도는 무대였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제1막 ‘이 여자도 저 여자도’에 나오는 아리아를 불렀다. 호흡을 길게 끌다가 단번에 고음으로 치고 올라가는 뒷부분이 클라이맥스였다. 교수가 아닌 강사 선생님의 제자였던 나, 배재철이 누군지도 몰랐던 학교 사람들은 이때부터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처음으로 콩쿠르에도 도전했다. 주로 4학년이 나가는 한국성악경연대회인 ‘이대웅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이듬해 제33회 ‘동아 콩쿠르’에선 1등을 차지했다. 당시 동아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군이 면제되기도 했다. 이미 군대에 갔다온 뒤라 나는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말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있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들의 실력 차이를 분석했는데, 대부분 연주 시간에서 그 차이가 드러났다고 한다. 우수 집단의 연습량은 최소 1만 시간 이상이었다고 심리학자는 주장했다.
하루 세 시간씩 10년을 연습하면 1만 시간이 된다. 학창시절 내 연습량은 기본 3시간. 온종일 연습할 때도 많았다. 초·중·고교 때 교회를 연습실 삼아 노래를 불렀고, 군대에선 비행기 엔진 소리를 들으며 매일 발성 및 노래를 연습했다. 1만 시간의 연습량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분명 나는 주목 받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내 안에는 고된 연습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짜릿한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희열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많은 선생님들을 보내주셨고 연습의 결과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무대도 만들어주셨다. 1만 시간 이상의 땀을 흘린 나를 하나님께선 충분히 아름답게 보상해주셨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이탈리아로의 유학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5> 발세지아 콩쿠르서 특별상 받아 오페라 주역 데뷔
伊 유학 중 음악 동반자 만나 결혼… 궁핍한 삶 속에서 주님 은혜에 눈물
배재철 집사 부부가 이집트 여행 중에 찍은 모습. 아내 이윤희 집사는 결혼 후 성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남편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한 건 오페라 매력에 푹 빠져서다. 오페라 대부분이 이탈리아 작품이었다. 부모님은 유학 기간 매달 70만원을 지원해 주셨다. 빠듯한 형편에서 보내오는 유학비라는 걸 알기에 절대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열심히 언어를 공부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고 목표로 했던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악원에도 합격했다.
베르디 국립음악원에는 한국 유학생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꽤 유명했다. 이미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동아 콩쿠르에서 1위를 했기에 더 그랬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도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성악 전공자인 아내는 나보다 한 달 먼저 밀라노에 도착해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어학원을 다녔고 3개월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인 1994년 여름 처음 만났다. 어학원 동기생들끼리 소풍을 갔다가 카메라를 들고 있던 아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면서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몇 번 더 만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음악을 배우는 것도 그렇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특히 아내에게선 타인을 배려하는 예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2년을 연애하고 96년 10월 29일 결혼했다. 당시 우리는 결혼식 비용을 최대한 아껴 유학비에 보탰다.
결혼을 했으니 더 큰 책임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결혼 이듬해 한국에선 1998년 외환 위기 사태가 터졌다. 유학생 살림은 더 궁색해져만 갔다. 도심 밀라노에서 사는 게 힘들어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주 3∼4회 기차를 타고 학교로 와 수업을 받았다. 나중엔 교통비도 아껴야 해서 아예 1박2일 동안 수업을 몰아 듣도록 커리큘럼을 조정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양한 국제 콩쿠르에 출전해 실력을 쌓는 거였다.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상금을 줬는데, 한두 달 생활비로 충분한 금액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열중할 수 있어 콩쿠르는 여러모로 중요한 기회였다.
게다가 콩쿠르 우승자에겐 오페라 주역으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나는 97년 발세지아 콩쿠르에서 2위에 해당하는 테너 특별상을 받았다. 솔직히 1등이 아니어서 씁쓸했는데, 극장장이 단독으로 오페라 주역이라는 부상을 내게 줬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아내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들고 “할렐루야”부터 외쳤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궁핍했던 삶 가운데 베풀어주신 풍요로운 은혜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오른 오페라 첫 무대가 98년 헝가리에서의 ‘토스카’였다. 주역인 카바라도시로 데뷔했다. 형편이 어려워 따로 오페라 레슨을 받을 수 없자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오페라 전곡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 불렀다. 그날의 짜릿했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내 나이 불과 스물아홉 살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6> 성악가의 길을 열어준 두 은인을 만나다
알스테, 유럽 무대 진출 매니저 역… 와지마는 인생 후반전 재기 도와줘
1998년 플라시도 도밍고 오페랄리아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 테너상을 수상한 뒤 도밍고와 함께한 배재철 집사.
2000년 에스토니아의 작은 휴양도시에서 노래를 부르고 무대를 내려오던 중이었다. 자신을 에리키 알스테라고 소개한 그는 “핀란드에서 열리는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에 나가볼 생각 있느냐.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신뢰가 갔다. 그 페스티벌은 북유럽에서 열리는 음악축제 중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무대였다.
알스테씨는 “열흘 후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날짜를 잡아보겠다”고 했고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이듬해 핀란드의 오페라 페스티벌에 올려진 ‘리골레토’ 무대에 올랐다.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을 꼽으라면 알스테씨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공연 매니저로 당시 공연에이전시를 막 시작하던 때 나를 만났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테너 배재철’을 유럽의 극장과 협회에 소개했다. 덕분에 동양인이면서도 특급대우를 받으며 유럽 무대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2003년 영국 카디프극장에서 열렸던 ‘라 보엠’을 잊지 못한다. 마에스트로 카를로 리치와 공연했다. 여주인공 미미를 사랑하는 로돌포 역을 맡았다.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영국의 ‘더 타임스’는 “로돌포의 아리아에서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하이C’(2옥타브 도)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한 테너”라며 내 목소리를 극찬했다. 이후로 이 작품을 주최한 프로덕션과 7번이나 호흡을 맞췄다.
한국 무대에도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2000년 9월 예술의전당에서 ‘토스카’로 처음 한국 무대에 섰다. ‘떠오르는 신예’로 평가받으며 매년 한국에 들어와 오페라 팬들과 만났다. ‘리골레토’(2001년) ‘토스카’(2002년) ‘라 보엠’(2003년)을 공연했다. 특히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한 ‘라 보엠’은 제작비만 30억원 넘는 대규모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한국과 유럽의 무대는 많이 달랐다. 고국이라 더 편안한 마음으로 공연할 거라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실수에 냉혹했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공연할 땐 아주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유럽에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한국에서 인정받는 게 더 어려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긴장감 속에서 공연 무대를 이어갈 때쯤 또 다른 나라에서 연락이 왔다. 와지마 도타로였다. 일본에서 전화를 건 그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자신을 소개한 뒤 작품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는 일본에서 보이스팩토리라는 음악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일 트로바토레’ 작품을 하기 위해 주역 테너를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 목소리가 저희 작품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미 메조소프라노로 피오렌차 코소토 선생님이 출연을 허락하셨습니다.”
“코소토 선생님이 나오신다고요?” 성악가들에겐 전설과도 같은 코소토 선생과의 무대라니…. 재고의 여지없이 바로 “오케이”했다. 그리고 이런 분을 무대에 세운 와지마 도타로라는 일본인 기획자가 궁금해졌다.
알스테씨가 나의 전성기를 만들어주고 그 시기를 함께했다면, 와지마는 내 인생 후반전을 책임진 소중한 친구다. 난 어느 자리에서든 와지마를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준 천사”라고. 목소리를 잃고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할 뻔한 나를 일으켜 세워준 고마운 친구, 그는 선물 같은 존재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7> 일본 이어 독일 무대 오른 뒤 목에 ‘이상 증상’
2005년 9월쯤 갑자기 음색 바뀌어… 병원 정밀검사 결과 갑상샘암 진단
배재철 집사(왼쪽)가 독일 자르브뤼켄 시립극장 전속 가수였던 2005년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주인공 돈 카를로를 연기하고 있다.
와지마 도타로를 만난 건 2003년 9월이다. 그는 갈라콘서트 형식의 ‘일트로바토레’를 기획했다. 의상을 입지 않고 각 장면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는 스탠드 오페라였다. 나는 주인공 만리코를 맡아 세계적인 성악가 피오렌차 코소토 선생님과 노래를 불렀다. 와지마는 그렇게 나를 일본무대에 진출시켰다.
공연이 끝나고 이런 말을 했다. “재철, 당신의 목소리는 엄마가 해주신 음식 같아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고향의 맛이에요. 당신의 노래를 들으면 단번에 오페라 팬이 돼요. 소리도 좋고 테크닉도 좋지만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이 느껴져 좋아요.”
와지마는 성악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오페라를 사랑했다. 열 살 때부터 오페라를 들었다는 그는 이탈리아어도 수준급이다. 나와도 이탈리아어로 소통한다.
그에게 음악은 치료제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거나 외로울 때 오페라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 게이오대 법학부를 졸업한 그가 음악기획사 관련 일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음악에서 발견한 치유와 행복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소리에 더 끌렸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서 노래를 부르는 마음의 자세가 바뀌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 목소리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오페라에 관심 없던 이들이 나를 통해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고, 평안이 없던 이들이 평안을 갖게 된다면, 대형 극장의 오페라 무대뿐 아니라 나를 더 자세히 보여주고 소통할 수 있는 무대에서도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이날의 결심이 있었기에 훗날 목소리를 잃고도 내가 조금 덜 방황하고 덜 아팠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렇게 틈이 없도록 나를 굳건히 다지셨다.
한국과 일본, 유럽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던 나는 2004년 독일 자르브뤼켄으로 건너갔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 전속 가수로 초빙 받은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서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 극장은 베르디의 작품 ‘돈 카를로’ 준비로 바빴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돈 카를로를 맡은 테너의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고음에 서정적인 목소리가 돋보이는 내가 주역으로 작품을 이끈 것이다.
10주 동안 연습하고 2005년 시즌 오프닝으로 오페라 ‘돈 카를로’ 초연을 성황리에 끝냈다. 모두 나를 향해 “브라보”를 외쳤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의 전속 가수가 된 지 1년 만에 테너로서 절정을 맛봤다. 그렇게 두 번째 공연까지 무사히 끝냈다.
그리고 9월쯤 세 번째 공연을 준비하는데 목이 이상했다. 감기에 걸린 듯 까끌까끌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목소리가 저음으로 바뀌었다. 테너의 음색이 사라진 것이다. 음정을 흥얼거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내가 목을 너무 많이 사용했나’ 싶어 며칠 쉬면 괜찮겠거니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어깨까지 아팠다. 담당 의사는 내 목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혹이 있다”며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했다. 큰 공연을 앞둔 상황이라 하루빨리 내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큰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를 받았다. 이튿날 검사결과가 나왔다. “갑상샘암입니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8> 8시간 대수술 끝에 오른쪽 성대 절단… 목소리 잃어
처음엔 하나님 원망하며 눈물 흘렸지만 곧 “내 능력 잘못 사용” 무릎 꿇고 고백
배재철 집사가 서울 성동구 독서당로 연습실에서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부르고 있다. 배 집사 뒤쪽 벽면에 유학 시절 콩쿠르에서 받은 상패들이 걸려 있다. 신현가 인턴기자
의사는 갑상샘암 수술을 하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수술은 가능하지만 목소리가 상할 수 있어요. 성대에 이상이 오면 재활치료 프로그램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물론 목소리가 상할 수 있다는 건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독일 마인츠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자르브뤼켄 시립극장에는 병가를 냈다. 세 번째 공연에서 ‘돈 카를로’ 역은 결국 객원가수로 교체됐다.
극장 측과 매니저 에리키 알스테에겐 갑상샘암 수술을 알리지 않았다. ‘돈 카를로’ 외에 ‘노르마’ ‘라 보엠’도 출연계약을 맺은 상황에서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외국인에다 낯선 동양인, 혹여 계약 파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갑상샘암은 암 중에서도 착하다고 하지 않나. 목소리가 상할 수 있다는 건 최악을 염두에 둔 것이니 애써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간단한 수술로 여겼다.
2005년 10월 수술을 받았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혹 크기가 7㎝여서 의료진도 놀랐다고 한다. 림프까지 전이돼 림프를 다 걷어냈고, 그 과정에서 오른쪽 성대와 횡경막의 신경을 절단했다. 3시간이면 끝날 거라던 수술은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아내에게 의사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 남편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목소리가 중요합니까.” 아내의 답은 당연히 내 생명이었다.
수술하고 정신을 차린 순간 내가 처음 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여보! 여보!” 아내를 불렀는데, 소리는 안 나고 입만 벙긋거렸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음을 감지했다.
돌이켜보면 어쩜 내 병은 예견된 것일지 모른다. 유학 시절 나는 콩쿠르에서 받은 상금으로 먹고살았다. 2000년까지 그렇게 지냈다. 콩쿠르에서 상을 못 받으면 우리 가족은 집세도 못 내고 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었다. 지금 서울 성동구 독서당로의 내 연습실엔 그때 콩쿠르에서 받은 상장들이 걸려 있다. 가끔은 씁쓸하게 그 상장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때만큼 노래가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한 번의 실수도 허락지 않았다. 강박증 같은 게 있었다. 그 결과 노래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님에도 우격다짐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이러니 피곤한 거야. 내가 강철도 아닌데,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조금씩 병을 키운 거다. 몸을 돌볼 새 없이, 아플 새도 주지 않고 여유 없이 병을 키운 것이다. 분명 내 몸은 신호를 보냈다.
2003년 스웨덴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하기 일주일 전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곤해서 그래’라며 약을 먹고 노래했다. 그때 나를 좀 돌볼 것을…. 목소리를 잃고 침묵의 시간을 보내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난 눈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많이 울었다. 아내는 더 아파하며 울었다.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을 일으키셨느냐”고 따지며 울었다. 우린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런데 울면서 뭔가 해소됨을 느꼈다. 원망과 불평이 아닌 ‘내가 내 능력을 잘못 사용해서 이렇게 된 것을’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머리를 숙여 나직이 고백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9> 목소리 회복 안돼 ‘끝났어’ 절망… 성대복원수술에 희망
부러진 바이올린처럼 몸 상태 ‘최악’… 성대복원 전문 일본인 의사 찾아가
배재철 집사(왼쪽)가 2008년 일본 도쿄 하쿠주홀에서 재기공연을 무사히 마친 뒤 아내와 아들, ‘절친’ 와지마 도타로(왼쪽 두 번째)와 함께했다.
무대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다. 만약 그게 잘 이뤄지지 않으면 나는 힘들어했다. 그게 잘못이냐고 되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할 바를 열심히 하고,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뭐가 나쁜가. 당신은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래를 불렀던 것 아닌가.”
목소리를 잃고 침묵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노래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그렇게 살아온 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이런 달란트, 지혜,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걸 망각했다는 거다. 내가 열심히 해서 그런 환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재능이나 환경을 내 뜻대로만 사용한다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자르브뤼켄 극장에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나를 배려해준 것이다. 극장 측의 무한한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젠 연습을 해야 했다. 무대에 오를 날을 꿈꾸며 조금씩 소리를 내봤다. ‘학교종이 땡땡땡’에 도전했다. 첫 음절을 못 불렀다. 다시 불러봤다. 음계조차 안 나왔다.
한번은 극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솔리스트 스테파니아가 찾아왔다. 집에만 있는 내게 함께 운동을 가자고 제안했다. 몸이 건강해야 소리도 좋아진다는 그의 말에 오랜만에 수영장에 갔다. 수영을 잘하지는 못해도 남들 하는 만큼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에 들어갔다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죽을 뻔했다.
수술 이후 횡경막에 마비가 왔기에 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숨을 참으려고 해도 바람 빠지듯 그대로 ‘훅∼’ 빠져나가 버렸다. 스테파니아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태가 이 정도까진 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걸어 다니는 데는 전혀 문제없었지만 뛰는 것도 안 되는 상태였다. 성대뿐 아니라 횡경막까지 문제가 생긴 거다. 노래할 수 있는 몸, 즉 악기가 엉망이 된 거다. 바이올린으로 치자면 줄이 아니라 몸체가 절반으로 부러진 것과 같았다.
그땐 ‘이제 끝났어’란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내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음성 및 이비인후과 재활치료를 받던 중 무너진 성대를 세울 수 있는 성대복원수술이 있다는 거다. 물론 수술 성공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수술법을 개발한 이가 일본인 이시키 박사였다. 일본에 있는 와지마 도타로가 생각났다. 공연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지만 와지마라면 나를 도와줄 것 같았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아주 천천히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몇 마디 인사를 건넸다. 내 목소리를 들은 와지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재철, 기다려. 내가 지금 갈게”라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독일에서 와지마를 만났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그에게 이시키 박사의 성대복원수술에 대한 얘기를 했다. 와지마는 일본에서 박사를 찾아보겠다고 했고, 만약 이시키 박사에게 수술을 받게 된다면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키 박사를 만났다. 내가 노래하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며 수술을 부탁했다고 한다. 며칠 뒤 와지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수술 날짜를 잡았어. 나는 신앙은 없지만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끝까지 책임지실 거라 믿어. 곧 만나자 친구.”
***[역경의 열매] 배재철 <10> 수술 중 힘찬 찬송 나오자 “기적”… 감격의 눈물
주치의 “마비된 횡경막 회복 중”… 일본 신문·방송서도 잇따라 취재
배재철 집사(오른쪽)가 2006년 4월 일본 교토병원에서 성대복원 수술을 마친 뒤 이시키 박사와 활짝 웃고 있다.
두 번째 수술을 위해 가장 길고 긴 비행을 했다. 수술 날짜는 2006년 4월 25일. 일본은 아름다웠다. 만개한 벚꽃을 보니 행복했다. 친구 와지마 도타로에게 “이렇게 멋진 꽃도 보고 행복해. 어쩌면 병에 걸린 게 잘된 일인지 몰라. 난 지금이 더 행복해”라고 말했다. 와지마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일본에 오기 전날까지 교인들과 함께 2박3일 기도회에 참석했다. 맨 앞줄에 앉아 얼마나 간절히 부르짖었는지 모른다. 기도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 저한테 다시 목소리를 주시려거든 전보다 더 좋은 목소리를 주세요.” 이런 기도는 양심에 찔려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무조건 이렇게 기도드렸다. “하나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사용할게요.”
사실 일본까지 와 수술을 받는 것도 큰일이었다. 독일에선 의료비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일본에선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체재비도 만만치 않았다. “모든 걸 책임지겠다”던 와지마는 정말 다 알아서 해줬다. 특히 내 존재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며 수술 받기 3일 전 ‘작은 대화형 콘서트’를 열었다. 일본의 여배우들과 함께 낭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와지마는 콘서트의 입장료와 DVD를 판매해 치료비로 지원했다. 우리의 이런 우정은 일본 아사히신문에도 보도됐다. 왜 하나님께서 와지마를 내게 보내주셨는지, 또 일본에 나를 보내신 이유를 알게 되자 더없이 행복했다.
수술 당일 이시키 박사는 “예전의 소리를 되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수술을 한다고 해서 성대가 완전히 복원되는 건 아니다.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술은 4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와지마가 수술실에 같이 들어갔다.
나는 성대복원 수술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내가 어느 정도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가능하면 이전의 목소리에 가깝게 고음을 낼 수 있도록 성형을 하는 것이다. 부분마취를 하고 있던 내게 이시키 박사는 말을 해보라거나 고음을 내보라고 주문했다. 급기야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문득 “하나님께 가장 먼저 드리고 사용하겠다”고 기도했던 게 떠올랐다. 즐겨 부르던 찬송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다. 음정과 소리가 조금은 힘 있게 나왔다. 내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이시키 박사는 내가 호흡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며 “마비된 횡경막이 회복되고 있다. 기적”이라고 격려했다. 이후 내 이야기는 일본의 신문과 방송에서 수차례 다뤘다. 특히 일본 NHK에선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기도 했다.
난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전처럼은 아니다. 강하고 빛깔이 좋던 목소리는 사라졌다. 고음으로 올라갈 땐 ‘삑’ 소리가 날까 항상 조심스럽다. 예전엔 아무것도 아닌 소리들을 지금은 조심스럽게 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하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수술하고 2년을 독일에 있으면서 자르브뤼켄 극장엔 복귀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찬양대로 봉사하고 유학생 등을 가르치며 개인적으론 훈련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2008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분명한 건 이제부터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됐다는 거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11> 목소리 잃고 모든 게 내 것 아님을 깨달아
“내 달란트는 누군가를 위해 주신 것”… 이전엔 서지 않았던 작은 무대 올라
배재철 집사는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작은 무대를 찾아간다.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레브델갤러리 카페에서 지난해 가을 콘서트를 개최했다.
유럽에서 노래하며 보낸 세월이 15년. 그새 나는 결혼해 아들까지 얻었다. 그 아들이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다. 2011년엔 늦둥이 딸도 얻었다. 이름이 ‘하언’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뜻한다. 한국에 들어와 둘째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드렸는데,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2008년 2월 한국에 들어와 처음엔 약간 낯설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내가 학생들에게 꼭 강조하는 게 있다. “노래는 네가 잘났기 때문에 받은 달란트가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거다. 그러니 네가 노래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연습해야 한다.”
나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달란트를 인정받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후 내 목소리를 비롯해 모든 게 내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자 오페라 가수 시절엔 서지 않던 작은 무대에도 올랐다.
2008년 7월 24일,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 리사이틀 홀에서 재기 무대를 가졌다.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240명 정도의 관객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를 쳤다. 특히 수술대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린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내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인 거다. 치유를 받고 행복해했다. 이후로 나는 사람들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얼마 뒤 서울 온누리교회와 일본 현지 교회들이 연합해 올리는 대형 전도집회 ‘러브소나타’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 집회는 CGN TV를 통해 온라인과 위성으로 전 세계에 방송됐다.
덜컥 겁이 났다. 아직은 찬송가 한 곡을 제대로 소화하는 게 힘들었다. 큰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거절했다. 그러나 집회 측에선 “기도해보고 결정해 달라”고 했다.
그 순간 ‘아, 내가 대답을 잘못 했구나’ 싶었다. 물론 상황적으론 못하는 게 뻔하다. 하나님 역시 내가 못 한다는 걸 잘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내게 “할 수 있겠니”라고 물으신 거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셨던 거다.
그해 8월 일본 파시피코 요코하마 국립대홀에서 열린 러브소나타 집회에 친구 와지마 도타로가 참석했다. 걱정하는 나를 격려하며 말했다. “재철, 수술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어쩌면 병에 걸린 게 잘된 일인지 몰라. 난 지금이 더 행복해’라고 말했어. 그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지금 널 보니 알 것 같아. 네 하나님이 널 그렇게 만들고 계시잖아.”
그의 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다. 하나님만 들으시면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다. 와지마는 “리허설 때보다 100배는 잘 불렀다”고 토닥였다. 무대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와지마가 제안했다. “재철, 하나님께 가장 먼저 드린다고 해서 이 무대도 한 거지? 그럼 다시 시작하는 목소리로 성가음반을 내자. 충분히 할 수 있어.”
지금 와지마는 ‘반(半)목사님’이다. 일본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데, 어쩔 때 보면 그의 믿음이 더 크단 생각을 한다. 나보다 더 큰 은혜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 친구를 곁에 두고 있으니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역경의 열매] 배재철 <12·끝> “노래로 일본 전도” 콘서트 열며 삶의 2막 연주
콘서트 중간 관객에 재기의 간증… 많은 이들 삶의 각오 다질 때 뿌듯
배재철 집사(오른쪽)의 가족사진. 오빠와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딸의 재롱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배 집사에게 가족은 ‘하나님 언약의 결실’이다.
전도 집회인 ‘러브소나타’를 성공적으로 끝낸 나는 일본을 마음에 품었다. 이 나라를 위해 뭔가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일본 전역에서 잇따라 열린 러브소나타 집회를 통해 비전을 구체화했다. 복음화율 1%가 채 안 되는 나라, 노래로 일본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게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현재 나는 일본 보이스팩토리 소속 가수다. 절친인 와지마 도타로가 매니저를 맡고 있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에도 세 번이나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전도하는 집회 형식의 콘서트가 아니다. 하지만 노래 중간 중간 내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었는지를 전한다. 이탈리아어로 말하면 와지마가 일본어로 통역한다.
와지마는 같은 이야기도 설득력 있게 전한다. 하나님께서 말 잘하는 은사를 그에게 주신 것 같다. 공연장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완전히 목소리를 잃어 노래를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와지마는 이런 짧은 한 문장에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덧붙여 간증한다.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부터 내 콘서트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뭔가 뜨거움이 있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만지시는 것 같다.
와지마는 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제작에 참여하던 중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한·일 합작인 이 영화는 내 삶을 그렸다. 영화배우 유지태씨가 나를 연기했다. 재정적인 부분을 와지마가 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투자의 어려움을 겪는 등 온갖 시련을 당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와지마는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도 결심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고 하용조 목사님의 일본어 설교집을 읽었다. 책장 한쪽에 처박아둔 설교집을 밤새 읽고 위로와 평안을 얻었다. 그날 밤 와지마가 소생할 수 있어 영화는 다시 촬영에 들어갔고, 4년여 만인 2014년 12월 31일 개봉했다.
그러나 흥행에선 참패했다. 영화는 망했지만 지금도 특별상영회 요청을 받고 있다. 대만이나 이스라엘 이탈리아에선 촬영상 등을 받는 등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한때 나도 그랬지만 우리는 많은 계획을 세운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인간적인 계획은 대부분 욕심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으면 계획들은 열리지 않는다. 영화가 그랬고, 다시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 모든 상황이 그랬다.
요즘도 일본에서 콘서트가 끝나면 설문조사를 한다. 공연을 본 많은 사람이 설문을 통해 후기를 남긴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의 글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그렇게 희망을 얻는다고 하니, 그들을 위해 더 열심히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지난달 두 번째로 성대수술을 받았다. 말을 할 때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 성대에 주사를 놓아 약물을 주입했다. 좀 더 소리를 쉽게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수술도 잘됐고, 앞으로는 더 넓은 세상으로 달려가려고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수로 삶의 어디에서든 위로와 행복을 전하고 싶다. 그렇게 나의 노래 2악장을 연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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