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Toyotomi Hideyoshi 丰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는 전국시대 일본의 대 다이묘(大名)이자 조정의 최고 지위인 관백(關白)이었다. 하층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히데요시는 성을 세 번 바꾸었으며, 많은 전투와 전쟁을 겪은 다음 어렵게 일본을 통일한 정치가다. 일본에서는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되지만, 임진왜란[일본에서는 文禄・慶長の役]을 일으키고 조선과 명을 정벌하려 했던 침략자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 전반은 불확실한 점이 많다. 가장 논란이 많은 것은 히데요시의 출생과 신분이다. 이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사무라이(侍)나 무사(武士)가 아닌 하층 농민 출신으로 본다.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彌右衛門)은 하층 농민 출신 보병[足軽]으로 알려져 있다. 오와리국[尾張国, おわりのくに, 현재 나고야]에서 태어난 히데요시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힘든 소년 시절을 보냈다.
15세 때 아버지의 유산을 팔아 전전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군대의 보병 아시가루(あしがる)가 되어,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 1560)에 참전했다. 24세이던 1561년 12세인 네네(ねね) 고다이인(高台院)과 결혼했다. 히데요시의 처음 기록은 1565년의 문서에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로 기재된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 가문의 가신(vassal, 家臣)이었을 때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로 이름을 바꾸었고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로 성을 바꾸었다. 훗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豐臣)의 성을 받고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되었다. 한편 주군 오나 노부나가는 1573년 무로마치막부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축출하여 일본 통일의 토대를 구축했다. 1575년 히데요시는 교토 주변의 정무를 관장하던 실무 봉행에서 이마하마성(今浜城)의 성주 즉,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다이묘가 된 것은 사무라이 출신은 아니지만, 주군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후 히데요시는 오나 노부나가 밑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실제 전투를 하지 못하면서도 뛰어난 지략과 순간적 판단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최고 가신으로 성장했다. 문맹인 히데요시의 지략이 빛난 사건은 노부나가가 부하의 공격으로 자결한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1582)이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공격으로 할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공략하던 다카마쓰성(高松城)의 다이묘를 할복하도록 한 다음, 황급히 군사를 몰아 교토로 회군했다. 히데요시는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세우고,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그런 다음 엄숙하게 노부나가의 장례를 치르고 사찰에서 21일 동안 제를 올렸다. 이를 통해서 히데요시는 명분을 얻은 오다 가문의 일인자로 떠올랐다.
1582년 음력 6월 27일, 노부나가 후계자 문제로 열린 기요스(清洲)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3세였던 노부나가의 손자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를 옹립했다. 1583년 대립 관계였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제압한 다음, 1584년 자기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하로 간주하는 신종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1585년, 히데요시는 사무라이 출신이 아니어서 오르지 못한 쇼군을 폐지하고 최고 대신 간바쿠(關白)에 올랐다. 1586년 규슈를 평정하고 1590년 고호조씨(後北条氏) 가문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함락했다. 이 무렵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이루어 놓은 토대를 바탕으로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전국시대를 종식했다. 통일 일본의 실질적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는 병농분리의 도수령(刀狩令), 해적금지령을 공표했고, 다이묘 간의 혼인과 연합을 금지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예고한 대로 조선과 명을 침략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대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하였고 강화교섭도 지지부진했다. 이때 내세운 강화의 조건은 명 황제의 딸을 천황의 후궁으로 시집보낼 것과 조선의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이다.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략한 정유재란(丁酉再亂) 이듬해(1598)에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었다.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에 후계자로 지정한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보좌할 5대로 5봉행 제도를 만들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심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히데요시에 충성하는 미쓰나리의 서군과 야심을 실현하려는 이에야스의 동군이 결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1600)와 오사카성 함락(1615)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끝났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막부가 계승했다.★(김승환)
*참고문헌 桑田忠親, 『豊臣秀吉研究』, (角川書店, 1975).
*참조 <다이묘>, <대정봉환>, <대화혼>, <도쿠가와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바쿠후>, <무사도>, <사무라이>, <세키가하라 전투>, <쇼군>, <신토>, <정한론>, <천황[일본]>, <탈아입구 탈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