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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문화가정과 희귀성씨
‘외국인120만 명 시대를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거나백의민족(白衣民族)을 긍지로 여겨왔다. 그런데 이 말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어야할 말이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거주자들은 처음부터 단일민족이 아니고 여러 종족이 혼혈로 이루어진 민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씨는 토성(土姓)보다는 중국계통이 훨씬 많았다. 여기에 몽골계는 물론 동남아계와 일본계까지 합하면 단일이란 말은 언어도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가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인종은 완전히 다민족국가로 바뀌고 있다.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한국사회의 다민족․다문화 지향성에 대한 조사 연구에서도 외국인 이주자에 대해 한국인들은 비교적 개방적이며 동료나 이웃, 친구로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관용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외국인 이주자와의 대면 속에서 실천으로 연결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한국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이주자 가운데 관심의 대상은 결혼이주여성이다. 이들은 한국인들과 공적,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 동아시아 개도국 출신 결혼이주여성들은 낯설고 물 설은 타향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그 희귀 성씨의 자녀들은 말로만 그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지 실제로는 그들의 문화와 개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배척당하고 있다.
1. 多民族 形成의 過程
1) 傳說的인 土姓의 始祖들
한반도에 뿌리를 둔 성씨는 1985년 경제기획원 조사 때 285년개 성씨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표적인 토성이라할 김해 김씨는 자신들의 전설상으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과 신라 탈해왕(脫解王) 9년에 금알에서 태어났다는 알지(閼知)의 후손이라 하지만 그건 전설에 불과하다. 그들의 말대로 믿는다고 해도 4000만이 넘은 인구 가운데 2000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21, 6%인 9백92만6천이다. 600개의 본관에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100개 불과하다.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이성계(成桂)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이한(翰)의 21대손이다. 그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은 없다. 안사(安社)는 고려 때 전주에 살았으나 지주(知州)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원수 같은 그 지주가 다시 그곳으로 부임해오자 가족과 함께 간도(間島)로 가서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됐다. 고려의 시각에서는 일종의 반역자의 후손인 셈이다.
삼한(三韓)시대 갑족(甲族)이라는 한씨(韓氏)가 있다. 그 한씨들도 시조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준의 후손이라 한다. 중국 상고시대 은나라가 망한 후 그 자손들이 단군, 기자, 위만조선을 경영했다고 파악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고조선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기씨의 우성(友誠), 선우(鮮于)의 우경(友平), 한씨의 우양(友諒)이란 시조는 전설에 불과하다. 따라서 순수한 토성은 사실상 단 한 개의 성씨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2) 歸化한 姓氏의 始祖들
나씨(羅氏)는 7본이라 한다. 이들 중 나주 나씨의 시조 나부(羅富)는 중국 송나라 때 귀화한 사람이다. 금성 나씨의 시조 나총례(羅聰禮)는 고려 건국 때 삼한공신으로 금성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나 그의 조상은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동래한 후손으로 보여 진다. 노씨(盧氏)의 시조 노덕(盧德)은 당나라 한림학사로 아들 9명을 데리고 신라로 귀화했다. 그의 아들 모두가 신라에서 벼슬하여 각자 본관을 달리 하고 있어 구관(九貫) 노씨라 하나 시조는 같다.
우리 위씨와 비슷한 경우는 반씨(潘氏)이다. 대동부군옥편(大東府群玉編)에 따르면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 째 아들 필공(畢公)의 계손(季孫)이 반에 봉해져 반을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한국의 반씨는 중국 횡성(橫城)사람으로 송나라 도종(道宗) 때 이부상서였던 반부(潘阜)로 원나라 세조가 귀손해서 일하자는 회유를 거부했다. 그때 고려 고종의 세자 섬(譫)이 이를 목격하고 그의 절의에 감동, 세조에게 부탁해서 김방경(金方慶)과 귀국하게 해 고려에 귀화했다.
2. 稀貴 姓氏들의 定着實態
1) 稀貴 姓氏 歸化 原因
1985년의 인구조사(이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씨는 274성이고, 본관은 3349본이다. 10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5개에 불과하다. 10만 명 이상의 본관 성씨는 모두 78개로서 여양 진(陳)씨가 10만232명이다. 3만7872명의 삭녕 최(崔)씨가 150위인데, 인구 천 명에 한 명꼴 정도이니 그 다음부터를 희귀 성씨로 분류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위씨는 1960년 국세조사에서 1만6천648명(75위)였으나 2000년에는 2만8천675명으로 증가했다.
희귀 성씨는 대개 귀화 성씨가 많다. 여기에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처럼 후대에 자의적으로 연결한 경우도 적지 않다. 8학사로 알려진 기(奇)씨도 기자의 후손으로 갔다. 희귀 성씨에는 역사 사건들과 관련 있는 성씨들이 있는데 천녕 견씨(川寧 堅氏)가 그런 예다.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이었던 견권(堅權)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아자개를 시조로 하는 견씨와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6개 본관에 1985명이 있다.
희성 중에는 옛 왕족도 있다.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왕씨였다. 그런데 조선 개국 후 탄압을 피해 도망가던 중 임진강 나루터에서 검문군졸이 성씨가 뭐냐고 묻자 ‘네?’라고 반문한 것이 내씨가 됐다고 전해진다. 283명으로 조사됐다.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이다.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사료에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나오는데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했는데 밀양과 대산(김해)의 두 본관에 499명이 있다.
역사적 사건과 관련 있는 귀화 성씨들도 적지 않다. 개성 노씨(開城 路氏)의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로서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했는데, 1307명이 조사되었다.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을 위해 구원병으로 왔다가 귀화해 강음에 정착했는데, 조사에 따르면 720명이니 자손이 매우 귀한 문중이다. 한국에 정착한지 400년으로 보면 1년에 고작 1명을 조금 넘은 후손이 출생한 비율이다.
사성(賜姓) 김해 김씨도 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이던 김충선(金忠善)은 일본 이름이 사야가(沙也可)였다.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晋州 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사성 김해 김씨는 우록 김씨(友鹿 金氏)로 불린 적도 있는데, 조사에서는 김해 12만 5277명, 우록 130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으로 출정해서 조선에 정착한 일인은 김충선 이외에도 상당히 많을 것이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의 시조 인후(印侯)는 ‘후라타이’란 이름의 몽골인이었다. 그의 아들 인승단(印承旦)이 충목왕 때 연안부원군에 봉해진 것이 본관이 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120명이 있다. 화산 이씨(花山 李氏)는 안남(安南:베트남)계 왕족인데, 안남국이 트란왕조에 점령되면서 국왕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고려 고종 13년(1226)에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이주, 정착하자 고종이 화산군에 봉하면서 본관이 됐다. 조사에 따르면 1131명이 있다.
2) 傳統 두 글자 複數姓氏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에도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극심한 변화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인 복성은 남궁(南宮)·독고(獨孤)·사공(司空)·선우(鮮于)·제갈(諸葛)·황보(皇甫)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이다. 그러나 강전(岡田)·장곡(長谷)·서문(西門)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성씨들이 있다. 이 중 서문씨를 예로 들면 안음 서문(安陰 西門)씨는 1985년 조사 때 2328명이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들어온 서문기가 안음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됐다.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는 궉씨가 있다. 조선시대 학자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에는 전북 순창에궉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성이라고 전한다. 실학자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앙엽기(盎葉記)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두 학자의 저서에 기록된 궉씨는 순창의 궉씨 후손으로 보인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 순창, 청주의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3) 100名 이하의 傳統 姓氏
100명 이하인 극희귀 성씨들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으로 1960년에 19명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는 없다가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연풍, 전주, 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인 애(艾)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도 있던 성씨이다. 조사 때 80명이 확인된 파평 옹씨(坡平 雍氏)는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 때 옹(雍)씨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전한다.
탄(彈)씨는 진주, 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다. 이들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등장했다. 구한 말 무관학교 교관 중에 탄원기(彈元基)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희천 편(扁)씨는 전국에 68명이 있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던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
3. 歸化人의 創氏와 多文化家庭
사실 한국의 성씨는 거의 중국에서 들어왔다. 다만 고려와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 성씨는 위에서 본 것처럼 많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 온 이후에는 사정이 확 바뀌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조사 때만 하더라도 신규 본관과 창씨는 강화 증(曾), 대전 여(呂), 태백 김(金), 달성 원(苑) 등 모두 15개 성씨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2000년 통계조사에서는 귀화 성씨가 무려 442개 성씨로 엄청나게 불어났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결혼한 가정을 일컫는 표현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에 초점을 맞춘 ‘혼혈인가족’과 둘째는 국경을 넘나드는 결혼의 형태를 의미하는 ‘국제결혼가족’, 셋째로 한 부모가정·독신자 가정처럼 다양한 가족의 형태 중 하나로 정의하는 ‘다문화가족’이 그것이다. ‘다문화가족’이라는 용어는 내국인 간의 결혼과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구분하는 국적에 따른 차별성 대신 한 가족 내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양한 다문화가정의 증가는 결국 단일인종으로 구성되었다는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도 단일문화 내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라 다민족국가 내지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다문화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는 한 사회내의 복수문화의 존재를 인정하며, 문화 간의 격차와 이질성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차별되는 것을 전략적으로 방지하고 문화에 따른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사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다문화사회를 형성하는 귀화 성씨를 출신국가별로 보면 중국계 83개, 일본계 139개, 필립핀계 145개, 기타 75개 등이다. 이들이 귀화한 사유는 외국인 남자가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경우가 96%에 이르고 있다. 농촌총각들이 외국인 여자와 결혼한 경우와 외국인 남성 근로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의 귀화는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왔으니 특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계가 급작스럽게 늘어난 현상은 무슨 이유인지 좀 이상하다.
어찌됐건 다문화 가정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한국의 성씨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두드러진 현상은 성씨의 수다. 1985년의 조사 때는 희귀 성씨를 포함해 전체 성씨가 285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15년 후인 2000년 조사에서는 150%가 늘어난 442개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민법의 개정으로 2009년부터 법원의 판결을 받아 어머니의 성씨로 바꿀 수 있음에 따라 한국에서는 지금성씨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단일민족이란 말은 쓸 수 없게 됐다.
특이한 현상은 성씨에 한문이 아닌 한글을 사용한 것이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 성씨는 토착 성씨는 물론 귀화한 성씨도 한문으로 기재해왔다. 그러나 2000년 조사에서는 과거의 기준이 없어지고 자신들의 원래 이름의 발음대로한글성씨를 호적에 기재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한문과 동등(同等)한 대우를 받은 결과로 볼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 보이나 기성세대의 머리로는 수긍이 안 될 수 도 있다. 변화란 그렇게 낯설고 부담도 되는 것이다.
1) 漢文式 稀貴 새 姓氏
1985년 이후 등장한 희귀 한문식 성씨를 보자. 최근에 귀화 성씨에는 영도 하씨(影島 河氏)가 있다. 미국 태생의 국제변호사이자 사업가인 로버트 할리가 1997년 귀화하면서 성명을 하일로 정했는데, 한국인 부인에게서 낳은 3명의 자녀가 있다. 이외에 강전(岡田), 개(介), 교(橋), 내(奈), 뇌(雷), 뢰(賴), 루(樓), 단(端), 담(譚), 돈(敦), 강절(綱切), 묘(苗), 비(丕), 삼(森), 소봉(小峯), 수(洙), 순(順), 어금(魚金), 영(影), 영(榮), 운(芸), 장곡(長谷), 빈(彬), 엽(葉), 우(宇), 증(增) 등.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생소한 성씨들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는 ‘우리’와 다른 ‘소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잔존 때문에 어떤 희귀 성씨들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가문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다수인 가문이 소수인 가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소수를 이상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전근대적 의식이다. 우리는 지금도 희귀 성씨이다. 그러니 다양성을 중시하는 21세기를 살면서 희성에게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2) 한글식 稀貴 새 姓氏
필립핀 귀화인 가운데 특이한 성씨는콜라낙 콘치타귈랑로즈글로리아 알퀘아포스가 있다. 베트남계는누그엔티수안이 있으며, 태국계는남캉캉마와 방글라데시계는우비악달등이 있다. 새 성씨들은 자신들의 원래 성과 이름을 한글로 표기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계는蘆武岳등을, 일본계도吉田吉岡吉省등 원래의 성씨에 본관은 거주지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4. 多文化家庭의 問題點
1) 文化差異로 인한 問題點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한국인 남편과 동남아지역 출신 여자와의 결혼한 가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한국인 남편의 아내에 대한 폭력이다.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한국인 남성 우월주의 등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타난 결과라 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인습일 수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성은 결국 교육의 부재 등으로 나타나는 가치관 등에서 비롯된 문화일 수 있다.
다음은 취학 전 아이들의 언어습득의 어려움이다. 가정에서 기초가 이루어지고, 특히 아이들은 부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데,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 한국어에 서툰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시킬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더라도 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한국문화에 적응이 덜 된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서 언어문화를 익히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주여성들은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이 출산을 하거나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다는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기까지는 수년 또는 수 십 년이 걸리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지 않다. 아이들의 언어교육이 어머니들의 언어장벽에 부딪혀 있는 것이다. 언어장벽은 결국 가치관이나 문화적 차이를 해소할 수 없게 한다. 그러니 가정생활 등이 원할 할 수 없어 숱한 사회문제를 일으킬 가능성 많다고 할 것이다.
2) 問題點을 克服할 解決方案
첫째, 우리말이 서툰 아이의 부모에게 한국어를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을 우선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동사무소 구청 등 지자체 등에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 아이의 부모가 한국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어학 및 문화교실 등 다양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경계해할 점은 시혜성이 아니어야 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다.
둘째, 한국어교실 등에서 습득한 한국어, 한국문화 등은 다문화가정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반복교육을 시켜야 한다. 한국어만 일방적으로 가르치면 이질감이 발생될 우려가 있다. 이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그들도 자신의 모국어를 거주지 주민들에게 지도할 수 있는 기회를 병행해 쌍방향으로 소통되는 교육체계를 마련, 내국인에게 나른 나라 언어를 배울 수 있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셋째, 다문화가정은 일반적으로 생활이 저소득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만일 모국어를 동네 주민들에게 가르칠 경우 그들에게 일정한 수당을 지급해서 경제적으로 안정시켜줘야 한다. 우리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다변화가 첩경이다. 유럽인들은 두 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한다.
(月明頌 : 관북종친회보 200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