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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內藏山 2
- 위 치 : 전북 정읍시 내장상동, 전남 장성군 북하면 관리사무소
- 높 이 : 763m
1. 일 시 : 2012. 11. 8. 06:00 ~
2. 장 소 : 내장산
3. 참석인원 : 38 명(새내기 6명)
4. 탐방코스 : 일주문 - 서래봉 - 불출봉 - 망해봉 - 연지봉 - 까치봉
5. 다녀온길 : 중앙고속도로춘천IC - 서울,춘천고속도로 춘천JC, 미사IC - 서울외 곽순환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천안. 논산고속도로 - 호남고속 도로 내장사IC - 태인교차로 - 송산교차로 - 내장사 봉룡주차장
6. 오늘활동 상황
○ 06:00 --- KBS앞 출발(가평, 안성, 녹두장군휴게소)
○ 10:30 --- 내장사 봉룡주차장 도착
○ 10:35 --- 단체기념사진촬영 및 일정안내
○ 10:40 --- 들머리진입
○ 11:18 --- 우화정
○ 11:25 --- 내장산 내장사 일주문
○ 11:44 --- 벽련암
○ 12:21 --- 서래봉
○ 13:05 --- 불출봉
○ 13:20 --- 점심식사(선발팀)
○ 14:23 --- 망해봉
○ 14:41 --- 연지봉
○ 15:00 --- 까치봉
○ 15:55 --- 내장사
○ 16:14 --- 우화정 원점회귀
○ 16:40 --- 봉룡주차장 도착(선두)
○ 17:00 --- 하산행사
○ 17:40 --- 후미도착
○ 17:50 --- 봉룡주차장 출발
○ 22:13 --- KBS앞 도착(여산, 죽전휴게소)
7. 내장산살 펴보기
□ 개관
- 정읍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의 능선을 그리고 있다. 내장산 서쪽에 입암산(笠巖山 626m), 남쪽에 백암산(白巖山 741m)이 있다. 내장산은 1971년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이 81.715㎢에 달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은 전북에 속해있는 면적이 47.504㎢, 전남쪽이 34.211㎢로서 정읍시와 순창군, 전남 장성군에 걸쳐있다. 내장산은 기암절벽, 계곡, 폭포와 단풍으로 유명하며 월영봉,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장군봉 등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다. 기기묘묘하게 솟은 기암절벽 깊은 계곡 그리고 특히 단풍이 아름다운 천혜의 가을 산이다. 내장산은 금선계곡, 백암 계곡, 남창계곡, 도덕폭포, 용수폭포, 금강폭포, 금선폭포 등의 계곡 폭포가 있다. 명소로는 불출암 터, 기름 바위, 금선문(용문), 금선대, 용굴, 백련암 터, 딸각 다리(사랑의 다리) 내장산 성터, 백년수 등이다.
- 사찰로는 백양사, 내장사가 유명하며 내장산 원적암 일대의 비자림은 백양사 비자림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내장사 경내에 있는 정혜루기에 의하면 내장산은 구례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능가산(변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봄에는 백양 가을에는 내장"이라 했듯이 백양과 내장의 두 산은 예로부터 [호남의 금강]이자 [조산8경]의 하나이다. 백암산은 내장산 줄기와 연결돼 절경을 이루어 하얀 바위 봉우리가 수목을 둘러 학의 앉음새 같다는 백학봉을 비롯해서 상왕봉 사자봉등이 빙 둘러서 있고, 그 아래 대찰 백양사가 있다. 내장산의 가을을 대표하는 것은 핏빛처럼 붉은 단풍이다. 이곳에는 국내에 자생하는 15종의 단풍나무 중 11종이 서식하고 있다. 이들 나무가 빚어내는 색은 온 산을 비단처럼 수놓는다. 내장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래봉이 있고 서래봉 맞은편에 주봉인 신선봉이 있다. 서래봉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봉 밑으로는 단풍나무가 바다를 이룬다. 서래봉 중턱에는 높이20m, 둘레 4m나 되는 7백 년생 단풍나무가 서식할 정도로 단풍의 역사가 오래 됐다.내장산 단풍은 잎이 7갈래로 작고 섬세하며 다른 산에 비해 유난히 붉다. 내장사 주위에는 당단풍을 심어놨으며 8부 능선 위에는 굴참나무(갈색), 단풍나무(빨간색), 느티나무(노란색)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색깔이 울긋불긋하다. 특히 내장사 앞에 있는 50-2백 년생 나무숲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다. 내장산과 연해있는 백암산을 거쳐 백양사로 하산하는 종주코스는 단풍구경의 필수 산행코스다. 백양사에서 구암사 백학봉을 잇는 일대의 단풍 역시 비경이다.
인기명산 100 중 36위
- 단풍나무가 많아 핏빛처럼 붉은 단풍으로 단풍명산의 대명사인 내장산은 중부 이북의 단풍이 지는 11월 초순이 절정이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집중적으로 많이 찾는다.
산림청 선정 100 명산 선정사유
-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 맑은 계류가 어울어진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로 국립공원으로 지정(1971년)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 내장사를 중심으로 서래봉에서 불출봉, 연지봉, 까치봉, 신선봉, 장군봉에 이르기까지 산줄기가 말발굽처럼 둘러쳐져 마치 철옹성 같은 특이지형을 이룸. 내장사(內藏寺) 부속암자인 원적암 일대에 있는 비자림(천연기념물 제153호)이 특히 유명
8. 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내장산국립공원안내도>
- 내장산은 1971,11,17 인근 백양사 지구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이 81.715㎢에 달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은 전북에 속해있는 면적이 47.504㎢, 전남 쪽이 34.211㎢로서 전북 정읍시와 순창군, 전남 장성군에 걸쳐있다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정읍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내장산은 순창군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600∼700m급의 기암괴석이 말발굽의 능선을 그리고 있다.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내장산은 예로부터 조선8경의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남원 지리산·영암 월출산· 장흥 천관산·부안 능가산(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백두대간이니 호남정맥이니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산맥관은 하천의 수계를 나누는 분수계를 기본개념으로 하며 노령산맥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호남정맥에 해당한다. 호남정맥에 있는 내장산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장산은 서쪽의 입암산(笠巖山, 해발 626m), 남쪽의 백암산(白巖山741m), 백학산으로도 불린다. 내장산과 입암산의 북쪽사면은 동진강의 상류가 되고 입암산과 백암산의 남쪽사면은 영산강의 상류인 황룡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내장산과 백암산의 동쪽사면(순창군 복흥면 일대)은 섬진강의 상류가 된다. 노령(蘆嶺)이란 이름이 유래된 갈재의 서쪽에 있는 고창 방장산(해발 710m), 동쪽에 있는 입암산·백양사의 뒷산인 백암산을 연결한 능선은 곧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이기도 하다.
<내장산등산지도>
- 내장산국립공공원 내장사지구는 2008, 11, 6 산행일정표에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내장사 - 연자봉 - 신선봉 - 까치봉 코스로 다녀온바 있다. 그 당시 동행하면서 단풍이 화려 했었다는 점 이외에 코스에 관한 사항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내장산국립공원 내에는 능선일주코스, 자연관찰로코스, 서래봉코스, 신선봉코스, 전망대코스, 장성새재코스, 백양사종주코스, 몽계폭포-백양사코스, 백양사-내장사종주코스, 입암산코스 등이 있다. 오늘은 능선일주코스 중 주봉인 신선봉까지를 기본코스로 운영하되 나머지 연자봉-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당일 현장의 상황과 개별 산행능력을 감안하여 병행코스로 융통성 있게 운영하고, 산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장사 경내에 머물면서 소요하실 분들은 자유 투어 형식으로 운영할 요량이었다. 오늘 능선종주코스를 체험한 후 다음 기회가 온다면 백양사-내장사종주코스를 염두에 두었다.
- 오늘 산행일정은 운영시간을 3~6시간으로 융통성 있게 다양하게 잡았다. 서래봉에서 시작하여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종주코스이기 때문에 본인의 산행능력을 감안하여 자유로운 하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 산행안내
<단체기념사진>
- 우리나라 단풍 1번지로 꼽히는 내장산 단풍을 매개로 많은 분들의 성원과 관심이 지대하였다. 이번 주 월요일에 접어들면서 버스 한 대 정원을 힘 안들이고 자연스럽게 넘기는 바람에 쾌재를 부르면서 조기에 접수 마감해야 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출발 하루를 남겨둔 시점에서 단체로 참가 신청하셨던 분들께서 떼져 나가는 바람에 총무님께서 예나 다음 없이 부산을 떨어야만 하는 우여곡절을 격기도 하였다. 아무튼 지난해 내장산국립공원 내 백양지구 백암산을 다녀오면서 이 지역 단풍축제기간에 맞춰 정기산행일정을 잡았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금년에는 축제기간 일주일 후로 일정을 잡아 놓고 노심초사 오늘을 기다려 왔다.
- 이번 주 주간날씨예보에 따르면 정읍시일원 오늘 날씨는 오전, 오후 구름이 많고 비올확률 10~20%를 보였기 때문에 지난 며칠간 오락가락하던 빗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었다. 또한 당일 기온이 6℃ ~ 15℃ 분포를 보였기 때문에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르면 중앙고속, 서울. 춘천고속, 서울외곽순환고속, 경부고속, 천안. 논산고속, 호남고속도로로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 345,6km/4시간11분으로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에 10:00경 목적지도착을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출발이 지연되는 우발사태가 벌어진데다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서 예상외로 혼잡을 이뤄 상당시간 지체되었다. 또한, 버스 운행도중 휴게소를 2회 경유할 요량이었는데 한 번 더 경유해야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30여분 정도 도착이 지연되었다.
- 내장사 봉룡제2주차장을 들어서면서부터 주차장 일원은 혼잡을 이뤘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가는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각양각색의 행락객들로 붐비는 바람에 그야말로 주차장은 만원사례였다. 과연 지난 몇 주 동안 공휴일의 모습은 어
떠하였을 지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 현장의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겨를이 없었다. 주차장 한편에서 옹색하게 서둘러 단체기념을 남긴 다음 현장에서 단풍과 함께 소요하실 분들과 오늘 일정대로 등산하실 분들을 파악한 다음 일정안내를 마치고 행락객 대열에 끼어들었다. 오늘 하산은 운영시간을 6시간으로 잡고 16:30까지 봉룡제2주차장 하산을 예고하였다.
- 내장산과 내장사가 소재한 내장상동을 살펴본다. 내장상동은 1998. 10. 30 상동 과 내장동을 통합하여 내장상동이 되었다. 내장상동은 정읍시 관내 8개 동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갖고 있으며 48통 185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남의 5대 명산(남원의 智異山, 영암 月出山, 장흥 天冠山, 부안 稜伽山)의 하나이자 전국 8경의 하나이며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단풍의 명소인 내장산이 위치하고 있는 동이다. 1914년 일제 행정구역 통폐합 자료에 의하면 남일면과 합쳐 내장면이 되었다. 당시 행정구역은 금붕리(琴朋里), 송산리(松山里), 부전리(夫田里), 쌍암리(雙岩里), 내장리(內藏里)(이상 동면), 용산리(龍山里), 교암리(校岩里), 신월리(新月里)(이상 남일면)였는데 1983년 남일면 구역인 신월(新月), 교암(校岩), 용산리(龍山里)를 과교동에 편입시켰다. 시로 편입된 것은 1983년인데 원래는 정읍현의 동면(금북리[琴北里], 붕래동[朋來洞], 부전촌[夫田村], 답곡리[畓谷里], 부무실[富武實], 부여[夫餘], 월영리[月影里], 송학동[松鶴洞], 송산리[松山里])였다고 한다.
<우화정>
- 11:18 우화정 경유
- 주차장에서 우화정 까지 약3km 정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선두팀에서 40여분 상당 소요되었다. 눈길을 유혹하는 진한 단풍물결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서둘러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진행속도를 낼 수 없어 그 만큼 들머리 인근까지 올라오는데 애를 먹었다. 탐방로 양안으로 행락객들이 꽉 차 올라가는 바람에 그 대열에 속도를 맞춰가면서 여유 있게 즐겼어야 함에도 그럴 겨를이 없이 서둘러야 했던 점은 일행 분들이 삼삼오오 제멋대로 흩어진 관계로 통제 불능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 내장산(內藏山) 일주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가 바로 우화정이다. 정자에 날개가 돋아 승천(昇天)하였다 하는 전설이 있어 우화정(羽化亭)이라 부르며 거울 같이 맑은 호수(湖水)에 붉게 물 든 단풍이 반영되는 경관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그 바람에 그 장면을 담으려는 사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호수 주변에는 당단풍, 수양버들, 두릅나무, 산벚, 개나리, 산수유 등이 둘러싸여 장관을 이루는 것으로 열려져 있지만 계절의 한계에 부딪치는 바람에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내장산 내장사 일주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 또한 이곳은 1482년경 내장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승군과 왜적이 싸웠던 곳이고도 하다. 그 당시 우화정 시설은 파괴되고 지금은 흰색기둥에 파란지붕의 콘크리트 건물과 바윗덩이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단풍나무>
- 봉룡주차장을 출발하여 내장산 내장사 일주문 앞까지 올라오는 동안 단풍나무 터널을 여러 곳 경유하였다. 비록 절정기는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 빼어난 자태와 이곳 특유의 고운 색상은 여전하였다. 늦가을 정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도 이 단풍이 금년 마지막 단풍일 듯 싶었다.
- 오늘 일정의 사실상 들머리인 일주문 앞에 도착하여 벽련암 방향 진입로를 확보해 놓고 선두팀을 구성하여 먼저 출발시켰다. 뒤에 따라 올라 오는 일행 분들의 거취를 관망할 수 없는 현장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한정 기다릴 수 없어 현장에다 모두산악회 진행방향 안내 표식지를 깔고 홀로 들머리에 들었다.
- 여기서 단풍나무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간다. 단풍나무는 단풍나무과(丹楓―科 Acer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키가 15m까지 자란다. 잎은 마주나고 5~7갈래로 갈라졌으며, 갈라진 조각의 끝은 뾰족하다. 꽃은 5월에 산방(繖房)꽃차례를 이루어 무리져 피는데 한 꽃에 암술 또는 수술만 있거나 2가지 모두 있다. 수꽃에는 수술이 8개, 암꽃에는 암술이 1개 있으며 암술머리는 2갈래로 갈라져 있다. 꽃잎은 암꽃과 수꽃 모두 없고 꽃받침잎 5장이 꽃잎처럼 보인다. 열매는 9~10월에 시과(翅果)로 익는다. 우리나라 남쪽지방에서 자라고 가을에는 잎이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물든다. 많은 원예품종들이 만들어졌으며 이중에서 잎이 1년 내내 붉은 종류를 홍단풍(또는 봄단풍·노무라단풍), 푸른 것을 청단풍,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양단풍 등을 많이 심고 있다. 단풍나무는 반그늘 또는 그늘지고 물기가 많은 땅에서 잘 자라며 추위에도 잘 견디나, 공해가 심한 곳이나 바닷가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다음 백과사전)
<벽련암>
- 11:44 벽렴암 경유
- 일주문에서 0,8km 지점이다. 벽련암까지 올라오는 동안 군락을 이룬 단풍나무 숲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힘든 줄도 모르고 벽련암 경내에 이르렀다. 일주문까지는 행락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탐방로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 졌다. 간간히 오르내리는 산객이 유일하였기 때문이다. 봉룡주차장에서 벽련암 경내까지가 단풍을 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결국 계곡을 중심으로 하류에만 단풍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벽련암 해우소 앞 갈림길에 이르면서 앞서 올라가셨던 일행 분들 중 일부와 합류하였다. 이 갈림길에서 진행방향 왼쪽으로 가면 서래봉을 그냥 지나쳐 원적암을 경유하여 불출봉으로 곧바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리도 1,23km에 불과하다. 오른쪽으로 가면 서래봉을 경유하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해우소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서래봉 진입을 알리는 안내 표주가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살피지 못한 분들께서 왼쪽 길로 올라가는 바람에 발길을 되돌려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건 아니다 싶어 두 번째 진행방향 안내표식지를 깔았다. 아무래도 뒤에 따라 올라오는 일행 분들께서 혼란을 격을 것이 뻔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웬만하면 벽련암 경내를 들려 눈 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벽련암 뒤 담벼락에서 뒷모습만 한 컷 담고 서래봉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이런 엉뚱한 짓거리는 한 적이 없었는데 내 행동에 대하여 본인 스스로도 통제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 여기서 벽련암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간다. 벽련암은 서래봉 중봉 33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내장사란 이름으로 일컬었는데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암(白蓮菴)이라 이름 하였고 나중에 벽련암(碧蓮菴)으로 고쳐 쓰게 되었다. 그후 현 내장사와 구분하기 위해 김창한(金彰漢,정읍군수 역임)이 "고내장(古內藏)"이란 서액을 걸고 이 일대를 고내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주사(主寺)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백제 의자왕 20(660년) 환해선사(幻海禪師)의 창건으로 1925년 백학선사(白鶴禪師)가 본전이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선당(호상소림)을 세 웠는데 6·25병화로 1951년 소실되었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백련암(白蓮菴)"을 벽련암(壁蓮菴)"으로 개칭할 것을 권하고 서액을 써 걸은 사실이 있는데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서편에는 연대 미상의 석종부도 1좌가 있으며 뒤편의 암벽 에는 이 고장 출신의 여류명필 몽련당(夢蓮堂) 김진민의「석란정(石蘭亭)」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다.
- 벽련암 석축대를 쌓을 때 전해져온 전설에 의하면 희묵대사가 서래봉 정상에서 돌을 던지면 수제자 희천(希天)이 이를 받아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이곳은 1986년 당국의 복원계획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이 곳 고내장(古內藏)은 내장산 제일경(第一景)으로 일컫는 명소로 오봉 김제민(鰲峰 金薺旼)이 춘경(春景)을 읊은 천불전(千佛殿)의 위치가 고내장으로 추측된다. 백련사가 언제 백련암으로 격하되었는지 알 수 없다.<내장상동>
<西來峰>
- 12:21서래봉 경유
- 서래봉은 벽련암에서부터 1,1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624m 이다. 1km 남짓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37분 소요되었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는 뜻이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산객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고 버티고 있는 바람에 뒤를 졸졸 쫓아간 탓도 있지만 급사면 암릉구간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벽련암 해우소에서 급사면 S코스로 시작하여 마지막 암릉은 철계단으로 이어졌다. 마치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 지난주 설악산 서북능선에서 늦가을 초겨울 산행환경에 미리 겁을 먹고 두툼한 겨울옷을 챙겨 입은 분들은 의외로 따뜻한 날씨 덕분에 진땀을 여름 못지않게 흘려야 하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어떤 분은 바짓가랑이가 다리에 휘감기는 통에 걸음 걷기가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상의는 하나하나 벗으면 될 터이지만 하의는 벗을 수 없는 터이기에 그 기분에 공감이 같다. 정상에 오르면서 산객들이 의외로 많이 운집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찌감치 들머리에 든 분들과 합류하다 보니 몇 분 안 되는 선두팀 인증 샷을 남기는 데에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 벽련암 정상에는 “내장산의 북쪽을 두른 대표적인 봉우리로 논밭을 일구는데 쓰는 농기구인 써레를 닮았다 하여 서래봉이라 부른다. 남쪽으로는 내장산 7개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오며 웅장한 바위절벽 아래로 오색의 단풍을 이루는 모습이 마치 여인이 치마를 두른 듯 신비한 자태를 자랑한다“ 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내장사 북쪽의 기기묘묘한 바위봉우리 정상을 전후하여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접근하기 비교적 용이하지만 난이도는 설악산 서북능선 저리 가라였다. 한겨울이나 눈. 비오는 날에는 주의를 요한다. 계단의 형태도 특이하다. 혼잡을 피하기 위한 배려인 듯 싶다. 일렬종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로 제작되었다. 지난주 설악산 서북능선에서도 일부 구간 철계단에서 느낀바 있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 느낌은 된장통 큰 사람은 아예 접근이 용이하지 아니할 정도로 폭이 좁아 배낭이 걸릴 정도였다.
- 서래봉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장사 경내가 바로 내려다보이고 봉룡주차장과 바로 그 아래에 위치한 내장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연무가 깔려 시원한 조망은 어려웠지만 내장산 종주코스에 연이어 있는 각 봉을 조망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불출봉>
- 13:05 불출봉 경유
- 불출봉은 서래봉에서 1,34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622m이다. 서래봉에서 44분 걸렸다. 서래봉 급사면 철계단을 지나 암릉군을 우회하여 0,4km 직진하면 서래탐방지원센터에서 올라오는 갈림길과 합류한다. 여기서 1,28km 내려가면 봉룡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다. 이 코스는 오늘 일정 중 3시간코스인 셈이다. 갈림길에서 잠시 오르면 샘터가 있었지만 문 닫은 지 오래된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샘터에서 급사면을 잠시 오르면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에서 부터는 암릉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난이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지만 탐방로 자체가 요철이 심한 구간이기 때문에 발목이 부담스러웠다. 충격이 발목에서 완충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무릎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 불출봉 정상에는 “ 서래봉 서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내장저수지와 정읍사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내장산최고봉인 신선봉을 비롯한 7개의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전설에 의하면 불출봉에 안개나 구름이 끼면 그 해 가뭄이 계속된다고 한다.” 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이미 점심시가대가 훨씬 지난 시점이므로 불출봉 정상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해 보았지만 이미 명당은 다른 산객들이 모두 선점하고 빈틈이 없었기 때문에 망해봉 방향으로 15분 남짓 진행하다가 목 좋은 곳에서 서둘러 마쳤다. 여기서 벽련암에서 불출봉으로 곧바로 올라오신 한 분과 합류하였지만 점심식사를 마치고 여기까지 동행하신 한 분과 함께 벽련암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아마도 이코스는 4시간 짜리 코스는 될 듯 싶었다.
<望海峰>
- 14:23 망해봉 경유
- 망해봉은 불출봉에서 1,41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679m이다. 불출봉에서 1시간20여분 상당 소요되었지만 점심식사 시간을 감안하면 40~50여분 상당은 족히 걸린 듯 싶었다. 오늘 일정 중 서래봉에서 망해봉 구간이 백이인 듯 싶었다. 지금까지 내내 거쳐 온 서래봉 방향과 앞으로 거쳐갈 신선봉 방향의 중간쯤 될 듯 싶었다. 안내도 상의 제원을 검토해 보면 금방 판단이 서겠지만 정상에서 좌우로 늘어선 능선의 길이가 대충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 망해봉 정상에는 “불출봉과 연지봉 사이의 봉우리로서 내장산 안쪽의 먹뱀이골 및 바깥쪽의 정읍시가 발밑에 잘 보이며 맑은 날이면 정상에서 서해를 조망할 수 있다” 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봉우리의 이름이 望海峰인 점으로 보아 가히 짐작이 같다. 망해봉에서 연지봉이나 까치봉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하산하면 5시간 코스로 운영하면 될 듯 싶었다.
<연지봉>
- 14:41 연지봉 경유
- 망해봉에서 0,55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670m 이다. 망해봉에서부터 20이내에 도착하였다. 망해봉에서 연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착지도 편하고 육산의 느낌이 들었다. 이미 하산시간을 가늠해봐야 하는 시간대이므로 사방의 조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정상에는 “ 일멸 연오봉이라 부르며 망해봉에서 서남쪽으로 솟아 오른 봉우리이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물은 원적계곡을 타고 흘러 금선계곡과 합류하여 서래봉을 돌아 내장호를 이루며 동진갈 줄기의 근원이 된다. 예로부터 연지봉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까치봉>
- 15:00 까치봉 경유
- 연지봉에서 0,85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717m이다. 이 구간 역시 20 이내에 도착하였다. 까치봉 정상에서 신선봉으 경유할 것인가? 아니면 하산할 것인가?를 놓고 기로에 섰다. 현지 안내도의 제원을 살펴보니 신선봉까지 1,44km/50분 소요되는 것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또한 신선봉에서 하산할 경우 내장사방향 계곡 갈림길까지 1,66km/1시간20분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1,44km/50분이 문제였다. 현재시간 15:00에서 시간을 단축하여 40여 분만에 신선봉에 오른다 하더라도 신선봉에서 1시간 만에 봉룡주차장까지 하산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산예정시간 16:30을 훨씬 넘겨야하는 부담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삼키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신선봉까지 일정을 접고 곧바로 하산을 결정하였다.
- 까치봉 정상에는 “ 내장산 서쪽 중심부에 2개의 바위봉우리로 바위형상이 까치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까치봉이라 한다. 내장산의 제2봉으로서 백암산을 연결하는 주봉이며 내장 9봉이 까치봉을 중심으로 동쪽을 향해 이어지면서 말굽형을 이루고 있다.” 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신선봉을 접고 나니 후미 팀 현 위치가 궁금하였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후미 팀을 이끌고 계시는 회장님에게 오늘 처음으로 무선 호출을 날렸다. 현 위치 망해봉이라는 응답이 왔다. 선두 팀 현 위치! 까치봉! 여기서 하산 한다 이상!을 날리면서 그 지점에서 하산을 권유하였다. 시간대로 봐서 회장님 일행 분들도 까지봉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망해봉에서 하산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해봉에서 하산길을 찾지 못하고 연지봉과 까치봉을 경유하는 바람에 하산예정시간을 상당시간 지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 시간정도 지체 정도야 양호한 편이지만 워낙 장거리 일정이기 때문에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후미팀이 까치봉을 경유하는 정보를 미리 알았더라면 선두팀에서는 신선봉 경유를 강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련은 없었다. 신선봉에서 연자봉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종주코스가 아직 남아있기에 훗날 과제로 남겼기 때문이다.
<內藏寺 대웅전 전소 전 모습>
<內藏寺 대웅전 전소 후 모습>
- 15:55 내장사 경유
- 까치봉에서 1시간 이내에 도착하였다. 제일 궁금했던 점이 내장사 대웅전이었다. 지난주 화재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지난 10, 31 화재로 전소됐다. 이번 화재를 계기로 파란만장한 내장사 역사를 살펴봤다. 원래 내장사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靈隱寺)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幼海禪師)가 세운 내장사가 있었다. 1539(중종 34)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소각했다. 그 뒤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이 영은사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는데, 이곳이 현재의 내장사 전신이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을 1639년(인조 17) 부용대사(芙蓉大師)가 중수하고 불상을 도금했으며, 1779년(정조 3) 영운대사(映雲大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했다. 1925년 백학명(白鶴鳴) 선사는 옛 내장사 자리인 벽련암(碧蓮庵)으로 옮겨 벽련사라 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77년까지 대규모 중건을 통해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명부전·삼성각·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내장산의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 다음은 내장사 대웅전 화재사고 보도내용 일부를 옮겼다. “전북 정읍시 내장산에 있는 내장사(內藏寺) 대웅전에 31일 불이 났다. 오전 1시45분쯤 발화된 불은 대웅전(89㎡)을 모두 태웠으며, 대웅전 안에 있던 불화(佛畵) 3점과 불상·쇠북 등이 소실됐다. 불은 소방관 등에 의해 한 시간여 만에 진화됐다. 화재는 대웅전 내부의 전기난로에서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내장사는 백제시대(636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 1938년 현 위치에 지어졌다. 대웅전은 58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내장산 정기산행을 일주일여 앞둔 시점이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 내장사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본다. 내장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백제 제30대 무왕(600-640)37년인 서기 636년(백제멸망 660년 24년 전)에 당시 도승이신 영은조사께서 지금의 절 입구 부도전 일대로 추정되는 자리에 대웅전등 50여동에 이르는 대가람으로 백제인의 신앙적 원찰로서 영은사 란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1098(고려조 숙종3년) 행안선사께서 전각당우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자세한 연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57년(조선조제13대 명종12년) 희묵대사가 법당과 요사를,1639년(인조17년) 부용대사가 사우를 중창하고 불상을 개금했으며,1779년(정조3년) 영운대사가 대웅전과 시왕전을 중수하고 요사를 개축하였다. 1923년 백학명 선사가 사세를 중흥시킨 뒤 1938년 매곡선사가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 등을 신. 개축하여 현 위치에 내장사의 면모를 일신시켰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1951년1월12일 소실된 것을 마지막으로 창건이래 5화 7건으로 역사가 있다. 1957년 주지 야은스님께서 요사,1958년에 현 대웅전을 중건하였다.1964년 무량수전을 세우고 1965년 대웅전 불상과 탱화를 조성 봉안 하였다. 그 후 1974년 국립공원 내장사 복원계획에 따라 일주문, 명부전, 정혜루를 복원하고 사천왕문이 신축되었다.조선조 성종때 석학 성임(1421-1484)은 정혜루기에서 영은사는 고려말엽 지엄선사의 개산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한 뒤, 정혜루는 당시 영은사의 문루로 1467년(세조12년)에 시작하여 다음해 준공된 3간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장엄무비하다고 전하고 있다. 최근 내장사는 향적원과 정혜원, 요사등을 신축하고 1994년 10월에는 사리탑을 건립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봉안했다 원래 내장산에는 명찰 영은사가 있었으니 영은사는 지금의 부도전 위치에 있었다.
- 내장산 도덕폭포에 얽힌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내장산 도덕폭포(道德瀑布)의 전설 / 국립공원 이야기>
- 내장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왼쪽 계곡으로 약 350m쯤 올라가면 깎아지른 듯한 협곡사이로 떨어지는 높이 약 20m의 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원래 도둑들이 모여 살던 소굴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이 폭포를 도둑폭포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도승의 신통력으로 개과천선한 도둑들이 이곳에서 도를 얻어 폭포이름이 “도덕폭포(道德瀑布)”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어 이를 소개 하고자 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이후 나라를 잃은 백제 백성들은 각처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고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도처에서는 도둑 떼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들의 손길은 내장산까지 미치어 도둑들은 현재 도덕폭포가 있는 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날이면 날마다 마을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절 스님들도 이들에게 피해를 당하기 일쑤였다. 스님들은 도둑들이 무서워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들어주었으며 하루빨리 세상이 안정되어 평화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들은 마을에서 빼앗은 물건들로 매일같이 잔치를 벌이며 술과 고기를 즐겼으며, 내장사에 다니던 신도들은 이들이 무서워 절 근처에도 접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도승이 내장사를 찾아와 보니 옛날 절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은 황폐해졌으며 젊은 스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이 많고 노약한 스님들 몇 분만이 내장사 암자를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왜 절이 이토록 황폐해졌단 말인가?”도승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며 스님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모두들 묵묵부답 이였다. 그 간의 사정을 도승에게 이야기해본들 무슨 뾰쪽한 대책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스님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승이 암자에서 며칠을 묵고 나자 주지스님이 갑자기 도승에게 말을 건네며 “스님 오늘은 내장산 산세를 한번 돌아보고 오시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주지스님은 안내할 사람으로 동자승 한 사람을 붙여주었다. 도승은 주지스님이 왜 산 구경을 권하는지 궁금했지만 마침 자신도 바람이나 쐬려고 하던 차에 잘 되였다고 생각하고 동자승과 함께 암자를 나섰다. 그런데 동자승이 암자를 나서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연지봉을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예야 너무 걸음이 빠르구나! 좀 천천히 가자구나.” "아니옵니다. 스님! 주지스님께서 점심때가 되기 전에 연지봉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지봉은 왜 가느냐? “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도승은 주지스님이 갑자기 산 구경을 하라는 것도 그렇고 동자승이 자신을 왜 연지봉으로 안내하는지 궁금했으나 가보면 알겠지 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연지봉에 거의 다다라 언덕바지에서 잠시 쉬게 되였다. 도승이 휴식을 취하며 산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문득 현재 도덕폭포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젊은 패거리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도승이 동자승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데 폭포 밑에서 모여 사느냐?” 그러자 동자승은 말하기를 “저들은 폭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도둑 떼들로 마을과 사찰에서 노략질을 일삼으며 마을과 사찰을 번갈아 가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오늘은 우리암자 차례로 주지스님께서 도둑 떼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스님에게 보여드리기 싫어 잠시 산 구경을 권하신 것이옵니다.“ 그러자 도승은 그제야 암자가 돌아가는 전후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암자가 그토록 폐허가 되었구나!” 도승은 크게 한숨을 쉬며 “도둑 떼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내장사가 온통 도둑 소굴로 변하겠다.” 라고 탄식하시며 동자승에게 자신을 도둑 떼들이 있는 폭포로 안내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자승은 “스님! 그들은 인정사정없는 극악무도한 자들이옵니다. 왜 그 곳을 가시려고 하십니까?” 하며 만류하였다. 그러자 도승은 “걱정하지 말고 앞장 서거라.”하며 길을 재촉했다. 동자승은 도둑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두려웠지만 도승의 말에 강한 힘이 실려 있어 어쩔 수 없이 폭포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폭포에 당도해 보니 오늘은 암자에서 잔치가 있는 날이라 도둑들이 모두 암자로 몰려가고 폭포에는 몇 안 되는 도둑들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도승은 폭포에 도착하자 갑자기 지팡이로 폭포를 가리키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보초를 서고 있던 도둑들이 바람에 휘감겨 폭포 인근에 있는 큰나무가지에 마치 빨래처럼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폭포 안에 있던 많은 금은보화들이 바람에 휘날려 나와 마을과 암자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 떨어지는 것 이였다. 폭포를 지키고 있던 도둑들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였다. 그리고 나서 도승은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암자로 발길을 돌렸다. 암자에 도착해 보니 그 곳에서는 도둑들의 두목인 듯한 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술을 먹고 있었고 마을 처녀들과 스님들은 이들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도승이 큰소리로 도둑들을 나무랐다. “ 이놈들 부처님을 모시는 신성한 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정녕 큰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어서 나오너라.” 그러자 두목을 호위하고 있던 몸집이 하마만한 한 도둑이 “어디서 굴러온 중놈이냐? 이 놈이 쇠몽둥이로 한번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나!”하면서 쇠몽둥이를 들어 도승의 어께를 내리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승을 치려는 쇠몽둥이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 반대로 도둑의 어깨를 내치쳐 도둑이 저만치 나뒹굴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둑 하나가 나가떨어지자 도둑들이 집단으로 창과 칼을 들고 도승에게 달려들며 도승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승이 지팡이로 하늘을 가리키며 주문을 외우자 도둑들의 몸이 모두 지붕높이까지 스스로 떠올라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둑들은 하늘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도승에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걸 하였다. 그러자 도승이 “너희들이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웃옷을 벗어 던지라.”라고 말했다. 도둑들이 웃옷을 벋어 던지자 그들은 다시 땅위로 내려올 수 있었다. 땅에 내려온 도둑들은 모두 엎드려 도승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도승은 이들을 그들의 근거지가 있는 폭포 밑으로 데리고 갔다. 도승이 폭포 밑으로 다시오자 얼마 전에 큰 나뭇가지에 휘오리바람에 의해 올라갔던 도둑들이 아직까지 그대로 나무에 걸려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도승은 그들에게도 웃옷을 벋어 던지라고 했다. 그들이 웃옷을 벗어던지자 그들도 땅으로 내려왔다. 도승은 도둑들에게 항복을 받은 후 그들을 모두 폭포의 소(沼)에 들어가 몸을 씻으라고 했다. 도둑들이 소에 들어가 몸을 씻자 소의 물이 갑자기 푸른빛으로 바뀌었고 다시 빨간색으로 바뀐 후 다시 맑은 빛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도승이 말했다. “이제 너희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깨끗해졌다. 앞으로 개과천선하여 착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자 도둑들은 도승에게 합장하며 그동안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를 크게 뉘우쳤다고 하며 그 후부터 두둑들은 도둑질을 청산하고 폭포 밑에서 수행에 수행을 거듭한 결과 모두 득도하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도둑폭포라고 부르던 현재의 폭포를 도둑들이 도를 얻은 폭포라고 하여 도덕폭포로 폭포이름을 바뀌어 부르게 되였다고 전한다.』
<하산행사>
- 하산예정시간 10여분을 넘기면서 봉룡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오전에 단풍터널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는 단풍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서둘러 올라간 관계로 내려오면서 볼 건 보고가자는 마음의 여유가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후미팀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버스에 을라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 오늘 하산행사는 봉룡주차장이 국립공원 내이므로 현지 하산행사를 접고 귀로 버스 내 하산행사로 가름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후미팀이 망해봉에서 곧바로 하산하지 아니하고 까치봉을 경유한 관계로 상당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하산행사로 땜빵 하였다.
- 오늘 하산행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풍성하였다. 회장님께서 연천쌀로 빚은 떡을 협찬해 주신 덕분에 아침에 버스 내에서 먹다 남긴 떡이 허기를 때워줬고, 홍영표, 함미숙 내외 분께서 협찬해 주신 귤과 음료수가 곁들여 졌으며, 노희자님께서 협찬해 주신 캔맥주가 이스이와 어우러져 피로를 풀어 주었는가 하면 성은숙님께서 맛나게 준비해 주신 가자미회가 입맛을 돋웠기 때문이다. 이분들의 협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 하산행사가 파장에 이르면서 후미 팀 일행 분들께서 보무도 당당하게 하산행사장에 입장하였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한 모습들이었다. 선전하신 이 분들에게 이슬이 한 잔 돌릴 겨를도 없이 귀로에 올랐다. 끝까지 안산,즐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산행을 마치고
- 오늘 능선종주코스 11,7km는 제원만을 놓고 볼 때 지난주 설악산 서북능선과 동일하다. 그러나 난이도 면에서 결코 서북능선에 뒤지지 않는 코스로 판단되었다. 오늘 일정 중 예정됐던 신선봉을 밟지 못하고 까치봉에서 그 뜻을 접어야했지만 오늘 일정운영상 한계가 있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초 산행일정을 짜면서 출발시간을 한 시간 앞당겼거나 도착예정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다소 시간을 벌 수 있었다면 신선봉까지 발도장을 찍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오늘 일정 중 가장 부담으로 작용한 점은 봉룡주차장에서 내장사 일주문 들머리까지 왕복 6km에 이르는 구간의 소요시간을 간과할 수 없다. 들머리 접근시간을 감안하면 신선봉 경유여부는 사실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 점은 다음 내장산 산행일정선정 시 감안해야할 사안으로 치부해 둔다.
- 오늘 결코 만만치 않은 내장산 종주코스를 운영하면서 일부구간 난이도가 높고 탐방로 요철이 심하여 착지가 불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없이 안전 산행해 주신 점과 산만하고 다양한 코스 운영에 따른 통제 불능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정운영에 적극 협조해 주신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대로 풍성한 하산행사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품목을 협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면서 신선봉 주봉에 발도장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내장산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접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