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6분 ·
<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라 >
사랑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아니, 사랑이란 말이 가슴을 치고 들어와 우주적이고 인격적인 울림을 준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모태신앙인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말은 가장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단어다. 교회에 사랑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사랑이란 ‘말’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상습적이고 상투적인 사랑에 빠진 채 한 세월을 보냈다. 그런 내게 사랑의 껍질을 깨트리고 훅 들어온 한 문장이 있었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SF소설 <콘택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천체물리학자가 바라본 우주의 크기, 그 광대한 공간에 놓인 창백한 푸른 점으로써의 지구 행성, 그리고 그 안에 미생물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인식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그는 알았다. 미생물 같은 인간이 감당하기에 우주는 너무 크고 광대하다. 그 무게를 견딜 힘이 인간에겐 없다는 것을 칼 세이건은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힘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물리학적 지식이나 과학기술을 통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인간의 고유성에 있음을 알았다. 인간의 고유성이 지식을 탐구하고 탐욕과 투쟁을 통해 자기를 확장시켜나가는 데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은 사랑함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발현한다고 본 것이다. 칼 세이건이 말한 ‘사랑’은 사막의 모래 한 알처럼 우주의 어딘가에 던져진 행성에서 외롭고 무섭고 황망함을 견디는 힘이다. 그 사랑은 미생물 같은 인간이 우주의 광대함을 따뜻한 온기로 채우는 인격적 에너지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고. 이 말의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배경을 보면 사랑의 의미가 달라진다.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팔레스타인 식민지 백성들,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 아래 죄의식에 빠져 살던 사람들, 배고프고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고 망막한 인생들이 맞닥뜨린 우주 같이 광대한 삶의 두려움 앞에 예수가 나타난 것이다. 광포한 세상을 견디고 망막한 인생을 살아낼 힘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나누어 갖는 실존자의 사랑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비교는 함께 먹고 마시며 누추한 잠자리에 몸을 누이고 눈물과 한숨과 미소를 공유하는 실존적 삶이다. 영적인 예수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예수가 자기 몸을 내어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위해 실존적 삶을 공유하며 서로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예수의 사랑은 자기 이익을 위한 선택적 사랑이 아니다. 예수의 사랑은 자기 이익을 포기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그래서 일방적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제국의 야만과 사막과 같은 인생의 막막함을 견딜 수 있는 연대의 힘이다.
시대가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제국의 야만이 부활할 때다. 제국의 시대는 끝난 게 아니라 잠재되어 있다가 다시 부활한다. 고대와 근대의 제국들은 힘으로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오늘날엔 가장 합리적이라는 민주주의 안에서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제국의 야만이 부활한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검찰 독재는 그런 제국의 야만이 부활한 것이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 방식이 검찰이라는 조직의 내부에 숨어 명맥을 유지해오다 괴물처럼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그 괴물을 불러낸 것은 제국의 압제 아래 피흘렸던 기독교다. 사랑이 관념과 추상의 언어가 됐기 때문이다. 실존적 예수를 영적 예수로 각색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늘의 야만을 불러낸 원흉이다.
이제 실존적 예수의 말을 상기하며 오늘의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찾아야 한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말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똑바로 선거하라’이다. 선거 한 번 잘못 해서 형제자매의 삶이 가난해지고, 선거 한 번 잘못 해서 내 사업이 망가지고 선거 한 번 잘못 해서 나라가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다.
이 무도하고 흉포한 검찰 독재 시대를 이길 힘은 선거를 통한 실재적 사랑에 있다. 이것은 예수가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와 우리 시대에 주시는 말씀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똑바로 선거하라는 뜻이다. 사랑이란 말로 위선 떨지 말고 선거를 통해 실존적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뜻이다.